"너 때문에 다 망했잖아!"

"내가 쓰라고 적어둔 방법 있잖아. 어떻게 된 게 매뉴얼대로하라는 것도 못하냐? 너흰 이현성보다 멍청해! 알았어?"
"감독자 내가 써둔 세 가지 방법 훑어봐."
"첫 번째 방법, ‘퓨전 판타지‘ 루트"
이계의 신격의 힘을 빌려서 시나리오를 클리어.…… 야, 애초에 이건 말도 안 되는 방법이잖아."
"그래서 두 번째는?"
나는 알 수 없는 억울함을 느끼며 교과서를 읽듯 한수영의책을 읽었다.
"두 번째 방법, ‘판타지."
"내용은?"
"역성혁명을 일으켜 왕을 살해한다. 아니, 왜 내가 이걸 읽어야 하는.......‘
한수영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내 뒤통수를 갈겼다.
제기랄, 이 자식이.
"세 번째 방법, ‘로맨스‘."
"내용은?"
"유리 디 아리스텔과 결혼한다."
"그래서 네가 택한 건 뭐지?"
"네 번째 방법."
"내가 방법이 세 개라고 써놨지?" - P130

"당신 장르는 ‘로맨스‘가 아니야."
"‘판타지‘나 ‘퓨전 판타지‘도 아니고."
설화가 없는 존재는 없다. 단지, 그것이 너무 작다는 이유로설화라 부르지 않을 뿐이다.
"당신의 장르는 ‘마르텔 디 루트비어‘야."
귀족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한수영은 그 옆의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케인 폰 발로드. 에리메인 반 에크리드 슈트리안 엑셀"
오래전에 사라진 이야기의 이름을 되찾아주듯, 한수영은 모두의 이름을 차례차례 불러주었다. 기억력이 좋은 한수영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귀족도, 혁명단원도, 근위기사도 그 순간만큼은 얌전히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수영은 이름을 다 부른 후 이렇게 말했다.
"그 이름이 당신들의 장르야." - P145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이 정의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갈 선택지는 우리 스스로 정할 겁니다."
세상의 성좌들을 향해 나는 선언했다.
"누구도 그 선택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 P185

[<스타 스트림>은 꺾이지 않는 이야기를 싫어하지. 그대들처럼 순수한 이야기는 더욱]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입가가 움직였다.
세상이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는 게 놀라웠다.
왜냐하면 그 말은 지금껏 우리가 걸어온 모든 길을 부정하는 말이니까.
"우린 이미 수십 번도 더 꺾였습니다."
<김독자 컴퍼니>는 처음부터 두 발로 서 있지 않았다.
한반도 시나리오가 시작되고, 성좌들의 농락과 근본 모를증오를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고,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는겁니다."
그런 우리에게 ‘순수하다‘라는 말은 차라리 모욕이었다.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침착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거친 울음을 삼킵니다.]
내 말에 동조하듯 두 개의 거대 설화가 반응했다.
"앞으로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날 겁니다."
[발아 중인 세 번째 ‘거대 설화‘가 태동합니다.]
거기다 곧 깨어날 세 번째 거대 설화까지. - P190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자들에게 예비되어 있다.」 - P194

[그리고 어떤 설화는, 애써 소비하지 않으면 사라지게 된다다.]
죽어가는 설화들이 포크 끝에서 부스러졌다.
오랫동안 누구도 찾지 않던 설화들은 먹히는 그 순간까지도 메르세포네의 혀끝에서 황홀한 문장을 토해냈다.
복잡한 심정으로 그 모습을 보는 나를 향해 페르세포네가 웃었다.
[네가 성좌들의 식성에 불만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단다. 화신들의 희로애락을 너무나 쉽게 소비하는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겠지.]
[하지만 우주의 모든 사건은 설화로 남을 수밖에 없어 너도 나도 그리고 다른 모든 화신과 성좌도 결국 무언가에 의해 소비되기는 모두 마찬가지란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삶은 <스타 스트립>에서 이야기가 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최대한 다양한 설화의스펙트럼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성좌들이 할수 있는 최선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다양한 설화를 남기고, 다양한 이야기를 보존한다. - P260

[아주 오래전, 우리 부부는 ‘운명의 세 여신‘에게 계시를 받은 적이 있단다.]
"계시요?"
[오래된 신화를 끝낼 가장 어두운 밤의 후예가 나타날 것이다.]
문득, 언젠가 디오니소스가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 나와 몇몇 성좌는 네가 ■■에 도달할 수 있는 존재라 믿는다.
어쩌면 그 ‘몇몇 성좌‘는 페르세포네와 하데스를 지칭하는것일지도 모른다. 페르세포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 그 신탁을 받았을 때, 나는 화가 났단다.]
[왜냐하면,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설화‘를 가지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어쩌면 이번에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리 이야기를 기억해줄, 어여쁜아이가 생기지 않을까. 비록 이곳에는 어둠과 지옥과 감옥뿐이지만 그런 우리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올림포스> 12신중 누구보다도 더 아이를 잘 키워낼 자신이 있었다. 아이에게다른 존재의 어둠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치고, 타자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지옥을 알려주고, 정의를 짓밟는 악을 엄벌할 감옥을 보여주겠노라고.][수백 년 동안 그런 착각 속에 살았다.]
[하데스와 나는 오랫동안 둘이서 모든 것을 헤쳐왔단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걸 알아도 불행하지 않았어. <명계〉가 설령 우리 세대에서 끝나고 우리가 살아왔던 설화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다른 12신과는 다르다고, 자신의 설화를 자식에게 억지로 떠넘기는 그런 부모와는 다르다고. 우리는 그저 우리로서 오롯하다고.]
[그런데 어느 날, 네가 나타나고 말았구나.]
[사실 너를 먼저 발견한 것은 그이였단다.]
[지하철에서 네가 살아남던 순간부터 그이는 줄곧 네 역사를 지켜봐왔단다. 처음에는 너 같은 아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않았다. 이제 이 세계에 그런 설화는 끝났다고 생각했으니까.내게 신나서 떠들던 그이 목소리가 지금도 잊히지 않아.]
[외로이 자란 작은 설화가 세상과 싸우는 모습을 우리는 줄곧 지켜보았단다. 쟁쟁한 성좌들과 겨루고, 이계의 신격과 맞서고, 도깨비의 시나리오에 저항하며 ■■■■■… 기어코 다섯 개의설화를 쌓아 하나의 별자리로 태어난 작은 성좌를]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네 부모가 되어주고 싶다고, 진짜 부모가 아니라도 좋으니, 그런 지지자가 되고 싶다고.]
[하데스와 나는 네가 명왕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네가 우리에게 구속되길 바라지도 않고, 우리가 살아온 삶이 우리가살아온 역사가 너의 삶을 규정짓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너는지금까지 네가 살아온 대로 모든 시나리오의 마지막을 향해나아가면 된다.]
[너는 우리의 아들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제가 이 모든 시나리오의 ■■에 도달했을 때……… 반드시,
당신들의 이야기도 함께할 겁니다."
[테라스로 가보거라. 네 아비가 너를 기다린다.] - P264

[보고 있느냐?]
[저것이 명계다.]
"아버지"
[군대를 데려가라.]
[<명계>를 위하여!]
첫 번째 심판관이 외쳤고.
[<명계>의 왕자를 위하여!]
두 번째 심판관이 부복하며 날 바라보았다. 세 번째 심판관의 창이 하늘을 찌름과 동시에, 모든 영혼이 함께 부르짖었다.
[모든 시나리오의 영원과 종장을 위하여!]
그 함성 속에서 명왕이 말했다.
[가거라.]하데스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나를 보고 있었다.
[<명계>는 지금부터 너의 편이다.] - P269

내가 살아온 시간으로는 무리인가.
[<김독자 컴퍼니>의 가호가 강화됩니다!]
무언가가 그런 정희원에게 힘을 보탰다.
[거대 설화, ‘카이제닉스 제도‘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살아온 역사들이었다.
[성좌, ‘강철의 주인‘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을 함께 사랑한 이들.
까가가가각!
정희원은 양손으로 검을 쥔 채 바르바토스의 총검술을 받아냈다.
총검술. 그녀가 아는 사내도 총검술에 능숙했다.
"군대에서는 힘들수록 더 큰 소리를 지릅니다. 매일 아침 한껏 소리를 지르고 나면, 어떻게든 그날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들었습니다."」
"하아아아아악!"
정희원은 이현성처럼 기합을 터뜨렸다.

"저도 일단 지르고 볼 때가 있습니다. 항상 모든 걸 계산하고 있는건 아니에요."」김독자처럼 용기를 냈고
그렇게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유중혁처럼 검을 휘둘렀다.
언뜻 한수영의 웃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알지? 어차피 마지막에 웃는 놈이 승자야."」

그런 한수영처럼 정희원이 말했다.
"뼈를 원한다면 뼈를 주고 심장을 원한다면 심장을 주겠어."
자신이 무슨 공격을 받든 상관없다는 태도,
오직 상대방을 함께 파멸시키기 위한 전투법
"하지만 너도 네 설화의 절반은 걸어야 할 거야"

정희원은 바닥에 늘어진 이현성의 몸을 끌어안았다.
현성 씨. 나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이제는 정말 한 줌의 여한도 없었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여기서 내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더라도.
나는 제대로 이 순간을 살아냈다. - P373

"우리엘・・・・・…."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상처투성이의 우리엘이 정희원을 보고 있었다. 희미한 탁기가 서린 날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정희원은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는 느낌이었다.
우리엘은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시선의 교환만으로도 알수 있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괜찮아요, 우리엘."
우리엘은 입을 다물었다.
정희원은 잠시 우리엘을 바라본 뒤, 말없이 바닥을 보았다.
그들은 성좌와 화신. 말하지 않아도 서로 어떤 마음인지를안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고통스럽게 눈을 감습니다.] - P3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최종본).txt

어쩌면 이 파일의 끝에는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이야기의 ‘에필로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운이 좋다면 이번 3회차에 대한 정보가 더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방식으로 시나리오를 수행해야 안전한 결말에 도달할지 알려주는 지침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야기의 마지 막이 비극이 라면?」

만약에, ‘최종분‘의 의미가 ‘더 이상 바뀌지 않는다‘라는 뜻이라면?

「네가 그걸 바꿀수 있을까?」 - P9

"왕자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미안합니다. 빌스턴 경."
"예? 갑자기 무슨……."
"그간 너무 고생만 시킨 것 같습니다. 절 지키느라 힘드셨다는 것 잘 압니다."
빌스턴 프레이머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챙겨드리지 못했지요. 몇 번이나 제목숨을 구해주셨는데 말입니다."
이번 시나리오까지 오는 내내 이현성에게는 줄곧 도움을받았다.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순번이 늘 밀려났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었다. 함께 싸운 설화들이 우리를 대신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 P39

나는 근위대장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정말 이럴 겁니까?"
근위대장이 피식 웃었다.
"이제 와 죽기가 두려워진 모양이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제 검이 되어주기로 하셨잖습니까."
근위대장의 표정에 희미한 당혹감이 어렸다.
"무슨 헛소리지?"
"벌써 맹세를 잊으신 겁니까? 저와 함께 이 모든 시나리오의 끝을 보겠다는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습니까?" - P45

나는 잠깐이지만 그런 기대를 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 녀석이라면 나를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김독자가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 이미 오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라는 사실을.」시나리오에 진입하기 직전 눈앞에 떠올랐던 최종본의 글귀.
그것은 이런 의미였다.
"있습니다."
"죄인은 말하라."
"내가..….…."
나는 억지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 수영아." - P48

<폭망한 시나리오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 한수영 著 ≫. - P65

기억은 조금씩 사라져갔다.
그렇게 육 년이 지났고
- 독자 씨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요?
- 제 생각엔 올해 안에 오실 것 같습니다.
칠 년이 지났다.
- 칠 년이나 임금을 체불하다니, 완전 악덕 기업 아니에요?
- 나중에 꼭 노조를 설립합시다.
- 꼭 그렇게 해요. 잊지 말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던 약속은한 달에 한 번이 되었고, 이내 두 달에 한 번이 되었다.
만나서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 날도 많아졌다.
팔 년이 되던 어느 날, 정희원이 멍한 목소리로 물었다.
- 우리 뭔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나요?
이현성은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 있잖아요, 현성 씨. 만약 내가 현성 씨를 잊게 되면.
- 제가 기억하겠습니다.
- 날 죽여줘요.
그것이 정희원과 이현성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희원 씨.
허공에서 몇 번이고 둘의 검이 부딪쳤다.
-희원 씨.
반복된 [전음]에도 정희원은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곧 대답이었다.
까마득해지는 시야. 이현성은 비틀거리면서도 그가 기억하는 정희원을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마침내 가까워진 정희원의 두 눈을 보며, 이현성은 오랫동안 자신이 하지 못한 말을, 그리고 앞으로도 할 수 없을 말을처음으로 건넸다.
-좋아합니다, 희원 씨. - P98

"방법이 세 가지나 있다는 건, 그 방법을 ‘방법‘이 되게끔 만든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뜻이겠지."
"뭐?"

- 네가 설화를 제대로 읽지 않으면, 오히려 설화가 너를 읽게 될 거다.

저 거대 설화는 오랫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실현하기 위해이 세계의 배역들을 조종해왔다. 이곳의 환생자는 모두 저거대 설화의 실현 도구로서 수백 수천 번 배역을 반복해왔겠지. - P117

"오해하지 마. 너한테 왕위를 주려는 게 아니니까. 왕이 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내 동료."
커지는 왕의 눈을 보며, 나는 말을 맺었다.
"<김독자 컴퍼니>의 한수영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눈앞에서 시나리오 메시지가 폭발했다.

[시나리오 선택지에 오류가 발생했습니다!][장르 선택지 ‘판타지‘가 붕괴합니다!][장르 선택지 ‘퓨전 판타지‘가 붕괴합니다!][장르 선택지 ‘로맨스‘가 붕괴합니다!][당신은 어떤 장르 선택지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게 말했다.

「용케도 알아냈네, 김독자.」 - P1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리석은 질문이군요. ‘종말‘과 누구보다 가까운 당신이라면 당연히 답을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침묵하며 아스모데우스의 고요한 눈을 마주 보았다.
[곧 ‘선악의 이중주‘가 시작됩니다. 이제 당신도 ‘편‘을 택할때가 왔다는 이야기지요.]
나를 보는 그 시선이 묻고 있었다.
너는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아스모데우스만이 아니었다.
나를 중심으로 밤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갈라지고 있었다.
한쪽은 밝은 빛으로, 한쪽은 우중충한 빛으로.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선악의 이중주.
이 시나리오가 시작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간단했다.
「이 세계선의 멸망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무너진 선악의 균형 속에, 밤하늘의 별들은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할 것이다.
거대 성운조차 피해갈 수 없는 치명적인 멸망.
내 기억이 맞는다면이 멸망의 첫 희생양은.
[성좌, ‘하늘의 서기관‘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대천사들의 성운, <에덴>이 될 것이다. - P66

[성좌, ‘은밀한 모략가‘가 화신 ‘유중혁‘을 바라봅니다.]
어둠이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가장 오래된 꿈의 꼭두각시여.】 - P187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는다. 
세상에서 가장 먼 것들이 만나고 멀어지는 그 순간을 설화는 기억한다. 그것이 이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 P287

나도 잘 알고 있다. 설화가 커질수록 내가 짊어질 부담도 늘어난다. 그렇기에 나는 동료를 만들었다. 함께 역사를 쌓았고,
설화를 만들었다. 원작의 유중혁과는 다른 결말에 도달하기위해,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계속 읽어나가야 할까.
[거대 설화, ‘마계의 봄‘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모두가 함께 도달할 마지막을 상상해왔다.
그런 이야기가 분명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거대 설화, ‘신화를 삼킨 성화‘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면.
지금껏 내가 쌓은 시간이 완전히 무용한 것이었다면.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내가 꿈꾸는 결말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너를 죽이겠다, 유중혁.] - P385

「혼자인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독자는 항상 혼자였다. 그렇기에 독자였고, 김독자는 존재하지 않았다.」서럽게도 타당한 문장이었다.
「그런 김독자가 유일하게 존재하는 순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독자가 독자가 되는 순간이었다.」한 권의 책에 대한 긴 독후감 같은 인생. 그것이 나의 삶이었다.
나는 멸살법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냈고, 멸살법이 만들어준벽 뒤에 숨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피했다.
「그는 멸살법을 읽을 때 비로소 살아 있었다.」 - P4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 복남아, 내가 유식하게 한 말씀 해보랴? 있잖냐, 인생이란 좆이나 탱고다 그런 말씀이야.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배운 놈이나 못 배운 놈이나 한평생 살다 꺼져가기는 다 마찬가지다 그거야.
그러니까 너도 너무 속 썩이고 고민하고 그러지 마. 되는 일 없이괜히 골치만 아퍼. 알아들어?" - P75

"내가 죽을 때 자식들한테 남길 유언이 꼭 한마디 있네. 그게 뭔고 하니, 나라를 또다시 뺏기게 되더라도 절대로 독립운동하지 말아라. 눈치껏 요령껏 사는 게 최상수다, 하고 말할 작정이야."  - P82

"이거 한참 잘 나가는데 김 빼고 그러지 말어. 그러니까 말야, 그런 사실을 날마다 지구본 빙빙 돌리면서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히알고 있는 케네디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게 뭐겠어. 공산주의의 마수로부터 남한을 철통같이 지켜내는 일이라 그거야. 그럼 그 위대한 소임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가 누구냐! 그건 바로 별넷에 빛나는 4성장군 박정희다 그런 말씀이야 아까 누가 케네디한테 실망했다고 하던데, 제발 그런 순진한 소리 하지 마 그건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 대통령 케네디한테 무슨 기대를 했었다는뜻인데,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국내에서만 민주정치를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을 뿐이지 국외인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민주정치를하든 독재정치를 하든 아무 관심도 없어. 그런데, 미국은 자기네와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국가의 지배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불변의 조건이 한 가지 있어. 그게 뭐냐! 바로 투철한 반공주의야. 혁명공약 제1항에 반공주의를 내세운 박정희를 결국 케네디가 미국으로 초청해 백악관에서 손 어루만진 건 당연한 결과야 우린 이 현실을 직시해야 해. 거기서 우리의 앞길에 대한 해답도 나오는 거니까." - P101

"그래, 이제 와서 친일파고 뭐고 따져서 어쩌겠다는 거야?"
"그러게 말야. 따져봤자 말짱 헛것 아냐 다 그 사람들이 잡고 있으니 몰아낼 수가 있나, 처벌할 수가 있나."
"그래 글쎄. 떠드는 놈들 입만 아프다니까.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촌놈들이 하는 짓이야."
"맞아, 세상 물정 모르는 촌놈들이 괜히 촌스럽게 구는 거야. 다지나가버린 것 따져서 뭘 해."
"그럼, 그럼, 제놈들이 그 시절에 살았으면 별수 있었을 것 같애?
막말로 그 시절에 친일은 아무나 할 수 있었는 줄 알아? 무식하고못나면 친일도 못했다구. 더 왈가왈부할 것 없어."
친일 문제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다. 십중팔구 이런 사람들 앞에서 친일파를 비판한 사람은 꼼짝없이 ‘촌놈‘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경우를 당할 때면 남재구는 가슴 한구석에 숨어 있던 생각이 음험하게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는 걸 느끼곤했다. - P2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서 네 방 책상이랑 침대랑 어디에 놓는 게 좋을지 봐."
미르는 여기 오기까지 모든 걸 마음대로 했던 엄마가 침대량 책상 놓을 자리를 보라고 하는 게 어이없었다. 자기 인생인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고작 그런 것뿐이라는 사실도억울했다.  - P12

‘나는 미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소희는 비밀일기장에 적었다.

소희는 미르의 가면을 자신의 검사용 일기장 같은 거라고생각했다. 비밀 일기장을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은 것처럼그 아이도 남한테 혼자만의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 P12

나는 미르를 이해하기로 했다. 그 애가 보여 준 게 아니었다고 해도 혼자만의 얼굴을 본 사람이 가져야 하는아주 작은 예의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남의 일기장을 봐 놓고 남들에게 그 내용을 떠들고 다니는 짓이나마찬가지다. - P75

소장님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미르에게 좀 더 잘했어야 했다. 그 애가 오길 기다리지만 말고 내가 먼저다가갔어야 했다. 아이들이 뭐라고 뒷소리를 하든 내가먼저 마음을 열었어야 했다. 아무래도 내가 미르보다더 마음 부자인 것 같다. 내가 자기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자기가 가진 게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것인지 깨닫기 전에는 내가 그 애보다 훨씬 더 부자다. - P94

바우는 미르가 날카롭게 구는 이유를 이해했다. 자신이말하지 않는 것으로 엄마 잃은 슬픔을 나타냈듯이 미르는가시를 세운 모습으로 아빠와 헤어진 슬픔을 표현하는 거라고 바우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보면 엉겅퀴꽃이 생각났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가시 같지만 만져 보면 부드러운 엉겅퀴꽃.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 여린 마음을 들키기 싫어 가시 돋친 모습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 P137

엄마, 이 꽃 이름이 뭔 줄 아세요? 하늘말나리예요. 진홍빛 하늘말나리는 꽃도 예쁘지만 잎도 예쁘게 났어요.
빙 둘러 난 게 바퀴 모양 같아요. 백합이나 원추리 같은다른 백합과 꽃들은 꽃이 땅을 내려다보고 피는데 하늘말나리는 하늘을 향해서 핀대요. 그 모습이 뭔가 소원을비는 것 같아요. - P146

"이제 오해 풀렸지? 엄마가 지금까지 내 자식이고 아직어리니까 너를 내 맘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앞으론 조심할게. 그리고 네가 엄마를 엄마이기 전에 한 여성으로, 한 인간으로 이해해 줄 때가 오길 기다릴게."
엄마 말은 미르의 가슴에 출렁, 하고 떨어져 물무늬를 만들었다. 엄마이기 전에 한 여성, 한 인간? 우리 엄마이기 전에 한 여성, 한 인간이라고?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의 끈을가위로 싹둑 자르는 느낌이 들어 서운했지만, 엄마가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지 않는 건 마음에 들었다. - P184

"다른 나리꽃들은 땅을 보면서 피는데 하늘말나리는 하늘을 보면서 피어."

"하늘말나리, 소희를 닮은 꽃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꽃...…."

"너희들도 하늘말나리야!" - P2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