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 왜... 잘해주세요?"
"독고 씨 하는 만큼이야. 게다가 나 힘들고 무서워 밤에 편의점못있겠어요. 그쪽이 일해줘야 해요.‘
"나...... 누군지...... 모르잖아요."
"뭘 몰라. 나도와주는 사람이죠."
"나를 나도 모르는데…………… 믿을 수 있어요?"
"내가 고등학교 선생으로 정년 채울 때까지 만난 학생만 수만 명이에요. 사람 보는 눈 있어요. 독고 씨는 술만 끊으면 잘할 수 있을거예요."
"그럼...... 한 병 더요....... 한 병만 먹고 끊는 건 좀...... 억울해*.......".
"그러도록 해요. 밥 먹고 나면 내가 가불해줄 테니 사우나가 씻고 머리도 깎고 옷도 사 입고, 응? 그러고 나서 저녁에 편의점으로와요."
"......고마워요 - P50

"다시 물어봐요. 왜・・・・・・ 그만둔 건지. 뭐... 힘들었는지. 아줌마 아들만이 알잖아요. 아줌마도 아들 일이니까………… 알아야 하고요."
"들어줬다가는 진짜 그만둘까 봐 윽박지른 거예요. 왜 그만두냐고 물어도 말을 흐리길래 어떻게든 버티라고만 했어요. 근데 그러니까 그냥 질러버리더라고. 지 아빠가 갑자기 가출하던 것처럼 그렇게 말이야."
"겁나셨구나. 아들이 아버지처럼 될까 봐."
"내 말이 그거예요. 아들만큼은 다르게 큰 줄 알았는데.... 내가잘못 키웠나 봐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아들은 아무것도 몰라주고・・・・・・ 맨날 방에서 게임만 하고……………. 으흑."
"내가 말이 너무 많았죠? 너무 힘들어서…………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독고 씨가 들어줘서 좀 풀린 거 같아요. 고마워요."
"그거예요."
"뭐가요?"
"들어주면 풀려요."
선숙은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자기 앞에 선 사내의 말을 경청했다.
"아들 말도 들어줘요. 그러면………… 풀릴 거예요. 조금이라도."
그제야 선숙은 자신이 한 번도 아들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아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만 바랐지, 모범생으로 잘 지내던 아들이 어떤 고민과 곤란함으로어머니가 깔아놓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는 듣지 않았다. 언제나아들의 탈선에 대해 따지기 바빴고, 그 이유 따위는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거......."
"아들 갖다줘요."
"아들을요? ……………왜?"
"짜몽이 그러는데………… 게임하면서...... 삼각김밥 먹기 좋대요. 아들 게임할 때・・・・・・ 줘요"
"근데 김밥만 주면...... 안 돼요. 편지……… 같이 줘요."
선숙이 고개를 들어 독고 씨를 바라보았다. 독고 씨가 선숙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그런 그가 정말로 골든 레트리버처럼 보였다.
"아들한테 그동안 못 들어줬다고, 이제 들어줄 테니 말..…………해 달라고………… 편지 써요. 그리고...... 거기에 삼각김밥・・・・・・ 올려놔요."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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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했다.
구로는 시로의 피를 이어받았다.
구로가 기뻐하면, 죽은 시로도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찾아와준, 내 배 속의 생명이 기뻐하면, 네모토도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다.
그저께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다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배 속에 있는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는 것이 네모토를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내가 인생의위기에 맞닥뜨릴 때마다 그가 내 곁을 지켜주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와 엄마를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도 네모토는 함께였고, 그가 떠나서 인생 최대의 난관에 부딪힌 지금도 네모토는 내게 우리의 아기를 남겨주었다. 또다시 네모토가 나를 구했다. 그는 언제나 내게 미래를 선물해준다. - P100

학창 시절에만 해도 이런 사람들을 보면
‘왜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술을 마실까 의아했는데, 이제는 저들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게 됐다. 저 사람들은 홀로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집에 가면 가족들이 듣기 싫은 잔소리를 늘어놓겠지. 애들 교육 문제로 아내와 옥신각신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나 최소한 어두컴컴한 승강장에서 혼자 캔 맥주를 홀짝이는 동안만큼은 그런 문제들을 싹 잊을 수 있다.
대학에 다닐 때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만났다. 싫은사람은 안 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을 골라만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 P111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나는 비틀비틀 걸으며 막차에 올라탔다. 내 옆에는 지쳐 보이는 직장인이 손잡이를잡고 서 있다.
대학 생활을 만끽하던 시절에는 녹초가 된 직장인을보면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직장인은 대단하다. 불합리한 처우를 정신력으로 견뎌내는 그들은, 괴물이다. - P131

내가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도 아버지는 수시로 부재중메시지를 남겼다. ‘마당 손질을 도와달라‘, ‘컴퓨터를 새로 샀으니까 사용법을 알려달라‘, ‘프로야구 일본 시리즈입장권이 생겼으니 같이 보러 가자‘ 등 늘 말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전부 나와 만나서 대화하려고 만들어낸 핑계였다.
"...아버지."
나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나, 여태 아버지한테 효도를 못 했어요."
이 말을 내뱉고 나니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미안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아버지는 나를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효도 못해서 미안해하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
힘주어 말하는 아버지의 양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고개를 떨군 내 시선 끝자락이 아버지의 거친 손에 닿았다. 주름진 굵은 손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손톱 밑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아버지의 양손은 한 기술자가 최선을 다해 일해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 손으로 내게 책가방을 사주었다.
그 손으로 나를 대학에 보내주었다.
거무테데한 그 손으로 나를 지금껏 키워주었다.
"...아버지, 나 말이에요"
눈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쓱 닦고는 아버지 얼굴을 정면에서 빤히 쳐다보았다.
"나, 옛날부터 마음속으로 아버지 직업을 부끄럽게 여겼어요. 맨날 더러운 작업복만 입고 있으니까 하찮아 보였어요. 그런데 실제로 내가 사회생활을 해보니까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겠더라고요.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내가잘못했어요"
목구멍에 걸린 눈물을 삼키며 나는 계속 아버지에게사과했다.
내 생각이 틀렸어요. 죄송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나는 울먹이면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나를 아버지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내게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가슴 앞에서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희미하게 물기가 밴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에요."라고내뱉자마자 "바보 같은 소리 집어치워!"라는 날 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효도 못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왜쓸모가 없어! 다시는 그런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주위에 다른 승객이 있든 없든 아랑곳없이 아버지는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착실히 공부해서 대학까지 들어간 아들인데, 뭐가 못났단 거냐? 효도 못 해서 미안해할 줄 아는 착한 사람이왜 형편없단 거냐?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아버지가 나를 호되게 야단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남이 내게 내뱉은 부정적인 말에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달랐다. 나를 꾸짖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아들인 나를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더욱이 넌 나약하지 않다. 진짜 약해 빠진 사람은 남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법이거든. 넌강한사람이다."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되었다. - P157

초등학생 때 이 작은 공원에서 여름 축제가 열렸다. 부모님 손을 잡고 들떠 있는 아이들을 힐끔거리며 나는 혼자서 축제를 구경했다.
쓸쓸히 그네에 걸터앉아 있는데 길 건너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이치! 유이치!"
아버지였다. 나를 위해 하던 일을 중단하고 허겁지겁달려온 것이었다.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버지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입고 있던 작업복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그 냄새야말로 아버지가 곁에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실은 작업복 입은 아버지를 굉장히 좋아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유이치, 혼자 있어서 심심했지?"
쭈그리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던 아버지의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입술을 악물기도 하며 아버지는 내게 "미안하다, 미안해." 하고 거듭 사과했다.
유령 열차에서 내릴 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지었던표정. 그 표정은 바로 그날 공원에서 본 아버지의 표정과똑 닮았다.
이렇게 민폐를 끼치는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내가 아니라 자신을 탓하는 사람이었다. 아들이 회사를그만둔 건 자기가 제대로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내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의 허물을 감싸는 사람이었다.
"ㅎㅇ윽, ㅎㅇㅇ윽! 으아아, 으아아악!"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아스팔트 위에 털썩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다. - P166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 마음이 편안한 건 다카코 누나에게 남자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서가 아니다. 그 양아치들에게붙잡혔던 누나가 무사해서도 아니다. 누나가 내 얼굴을못 봐서도 아니다.
내가 안도감을 느낀 건 그녀에게 고백하지 않아도 되어서다. 그 사실에 나는 제일 마음이 놓였다.
결국, 상황은 눈곱만큼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그저 도망만 쳤다.
내가 너무 한심했다. 천하에 둘도 없는 겁쟁이라는 사실에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이번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그날 이후 다카코 누나가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발길을 끊었다. 새해가 밝은 다음에도 시간은 변함없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녀에게고백 한 번 못 해보고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 P207

"실례지만,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내뱉은 것인지 자책했지만, 남자는 싫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있지."
"연애하면 좋아요?"
평소와 달리 말이 줄줄 나왔다. 남자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무슨 질문을 하든 다 받아줄 것 같아서였다.
"어려운 질문이네."
"죄송해요. 이상한 걸 물어서"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어려운 질문이지만, 내 대답은 망설임 없이 ‘예스‘야."
목소리에 힘을 실어 대답하는 남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남남이었던 두 사람이 만나고, 손을 잡고 입맞춤을 하는 거야. 극적이라 할 만큼 거리를 좁혀가는 방식이 대단히 멋지거든, 무엇보다 무수히 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선택해줬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러면 혹시 선택을 못 받으면 어떡해요?"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용기 내서 고백했는데, 거절당하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남자는 "나도 예전에는 너처럼 생각할 때가 있었어."라며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나는 이 세상에 운명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어."
"...운명의 사람?"
"그래. 나는 ‘돌고 돌아 만났다‘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만나게 됐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만약 상대방이 운명의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나쁜 결과를 맞이하지는 않을 거야." - P213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나는 손잡이를 놓고 다카코 누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우산을 씌워줬던 날, 나는 죽을 생각이었어요.
난 친구가 한 명도 없어요. 부모님은 이혼했고, 같이 사는아빠는 바빠서 나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어요. 지금 거즈로 가렸지만, 내 오른뺨에는 커다란 반점이 있어요. 키도 작아서 늘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왔고요. 그런데 비가많이 오던 그날, 당신이 그런 내게 우산을 씌워줬어요. 그때 당신이 준 도넛의 맛을 나는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요. 그날의 나에게 계속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 도넛 상자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살렸어요."
나는 누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뒷말을 이었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줄곧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아침마다 열차 옆 칸에서 당신을 흘끔흘끔 쳐다봤어요.
용기가 없어서 말은 못 걸었지만요. 길에서 당신을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가 곧바로 얼굴을 들고 말을 쏟아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당신과...."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마지막 남은 힘을 눈빛에 담아전했다.
"돌고 돌아 만난 것을."
"...."
말을 끝내고 나서도 한동안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위에 있던 승객들이 무슨 일인가 하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가만히 듣고 있던 다카코 누나가 마침내 작게 숨을 토해냈다.
"...고마워. 고마워."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고맙다는 말을 되뇌던 누나의 두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머, 왜 눈물이 나지. 남자에게 처음으로 고백받아서그런가."
울음을 감추려는 듯이 그녀의 말이 연달아 이어졌다.
"아니면으며 말했다.
하고 다시 입을 떼더니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
"네가 너무 멋진 사람이라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워서 눈만 연신 깜빡거렸다.
다카코 누나의 눈가가 아직 젖은 것을 보고, 비스듬히메고 있던 가방에서 노란색 손수건을 꺼냈다.
"이거 그날 당신이 내게 빌려준 손수건이에요."
손수건을 건네자 다카코 누나가 "그건 네가 계속 간직했으면 좋겠어."라며 도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이건 거짓없는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줘."라며 전제를 깔고말했다.
"나는 방금 네가 좋아졌어. 다시 말할게. 나는 가즈유키를 좋아합니다." - P242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안 믿어주면 어떡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피해자와 유족을 떠올리면 미안한마음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 P267

여기 타고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한 시간 후면 사고를당해 죽게 된다. 이 열차를 운전하던 기관사의 아내로서잘못을 빌어야만 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잡이를 거머쥐고 바로옆에 있는 기관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남편은 내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리창 너머에 앉아 원형 속도계를 노려보면서 진지하게 핸들을쥐고 있었다.
애당초 남편에게 말을 걸 마음은 없었다.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일하고 있는 남편을 방해해서는안 된다. 그저 남편 옆에 있는 것으로 족하다. 곁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 P309

"난 살아봤자 별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아. 탈선사고가 나고 나서 유령 열차의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이 열차에 올라탔어.그런데 단 한 명도 니시유이가하마 역을 지나치지 않았어. 정확히 말하면, 지나칠 수 없었어. 그중에는 당신처럼자신이 죽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이역을 통과하려던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들 그 사람을 열차에서 내리게 했어. 마구 패서 억지로 하차시킨 사람도 있고. 외로우니까 사랑하는 이를 저승으로같이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한 명쯤 있을 만도 하잖아? 그런데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다들 사랑하는 사람이계속 살아주기를 바랐거든. 난 그게 참 아름답더라."
유령은 나직이 한숨을 쉬면서 연분홍색 고둥을 꽉 쥐었다.
"인간이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인 걸 알았더라면 나도안 죽었을 텐데. 그만 갈게." - P318

가마쿠라시에 봄 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던 그날, 급행열차 한 대가 선로를 벗어났다. 도힌철도 가마쿠라선 상행 열차였다. 맹렬한 속도로 궤도를 이탈한 열차는 가마쿠라 이키타마(鎌倉生魂) 신사의 도리이를 스친다음 산간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승객 127명 중 68명이사망한 대형 사고였다.
탈선 사고가 일어나고 두 달쯤 지났을까. 심야에 유령열차 한 대가 가마쿠라선 선로 위를 달린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니시유이가하마 역.
이 역의 승강장에 ‘유키호‘라는 유령이 나타나는데, 유키은행호에게 부탁하면 과거로 돌아가 사고 난 가마쿠라선 상행 열차에 탈 수 있다는 것이다. 단, 그 열차에 승차하려면 다음 네 가지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하나, 죽은 피해자가 승차했던 역에서만 열치를 탈 수있다.
둘, 피해자에게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셋, 열차가 니시유이가하마 역을 통과하기 전에 어딘가 다른 역에서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사고를 당해 죽는다.
넷, 죽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현실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만일 열차가 탈선하기 전에 피해자를 하차시키려고 한다면 원래 현실로 돌아올 것이다.

죽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현실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네 가지 규칙을 듣고도 다들 사고로 떠난 사람을 만나러 갔다.

약혼자를 가슴에 묻은 여자.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들.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잃은 한 소년.
그리고 이 사고의 피의자로 지목된 기관사의 아내.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만일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무슨 말을전하겠는가.

*신사 입구에 세운 기둥 문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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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사회주의자 부모가 나를 그렇게 키웠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내부모는 어린 나를 일으켜주지 않았다. 무릎이 까져 피가흘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조금 울다가 별수 없이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렇게 자란 나는 누구 앞에서도 힘들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울어본 적도 없다. 이게 바로빨치산의 딸의 본질인 것이다. - P52

아버지가 평생 당하고만 살지는 않았다. 당하지 않으려고 사회주의에 발을 디뎠고, 선택한 싸움에서 쓸쓸하게패배했을 뿐이다. 아버지는 십대 후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여든둘 된 노동절 새벽,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짊어졌다. 사회가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이렇게까지가혹하게 묻는 게 옳은지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수 있다.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빨갱이 새끼들은 다 때려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렀고, 아직도 휴전 중인 데다 남북의 이데올로기가 다르니 의견의 합치를 보기는 진작에글러먹은 일, 게다가 나는 옳고 그름을 따질 만한 주제도아니다.
다만 당하기로 따지자면 내가 더 당했다.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 선택할 수 있다면 누군들 빨갱이의 딸을 선택하겠는가. 선택할 수만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이부진이나김태희의 삶을 선택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빨갱이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난 황사장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 P76

여공으로 사는 일이 아이 넷 낳고 사는 일이 적잖이 노곤했으리라. 어린 동생 들쳐업고 똥기저귀 빨던 어린 시절처럼 동동거리며 살아왔을 영자의 지난 시간이 눈앞에서 본 듯 환하게 밝아왔다. 그 시간 속에는 우리 아버지손잡고 가슴 졸이며 수술을 기다리던 순간도 존재할 터였다. 그러니 아버지는 갔어도 어떤 순간의 아버지는 누군가의 시간 속에 각인되어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생하게살아날 것이다. 나의 시간 속에 존재할 숱한 순간의 아버지가 문득 그리워졌다. - P110

아버지는 알았을까? 자기보다 한참 어린 막내가 면당위원장인 당신을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했다는 걸, 그 자랑이 당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걸, 그게 평생의 한이 되어 자랑이었던 형을 원수로 삼았다는 걸. 어쩐지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아버지는 수시로 작은아버지의 악다구니를 들으면서도 돌부처처럼 묵묵히 우리 집이나 작은집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만 뻐끔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는 몰랐을 수도 있다. 아무도 보지 않은 그날의 진실을, 그날 작은아버지 홀로 견뎠어야 할 공포와 죄책감을 보지 않은 누군들 안다고 할 수있으랴. 역시 작은아버지에게는 작은아버지만의 사정이있었던 것이다. 독한 소주에 취하지 않고는 한시도 견딜수 없었던 그러한 사정이. - P130

그러고 보면 감옥도 하나의 세상일지 몰랐다. 거기서도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와 사연을 쌓고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할 테니말이다. - P183

시집 안 간 딸자식에게 언니 말이 비수처럼 날아와 꽃혔다. 비수가 꽂힐 때 알았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아버지자식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사회주의에 몸담았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첫걸음은 무거웠겠고,
산이 깊어질수록 걸음이 가벼웠겠구나. 아버지는 진짜 냉정한 합리주의자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217

사무치게,라는 표현은 내게는 과하다. 감옥에 갇힌 아버지야말로 긴긴밤마다 그런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웠으리라. 그 당연한 사실을 나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야 겨우 깨닫는 못난 딸인 것이다. 아빠, 나는 들을 리 없는, 유물론자답게 마음 한줌 남기지 않고 사라져, 그저 빛의 장난에 불과한 영정을 향해 소리 내 불렀다. 당연히 대답도 어떤 파장 따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도하지. 영정 속 아버지가 이틀 내 봤던, 아까도 봤던 영정속 아버지가 전과 달리 그립던 어떤 날들처럼 친밀하게느껴졌다. 죽음으로 비로소 아버지는 빨치산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로, 친밀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로 부활한 듯했다.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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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부모님을 여의어본 경험이 없으니까 네가 얼마나힘든지 다 안다고 위로하지는 못해. 설령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더라도 네 마음을 이해한다고 말해서도 안 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은 너무나 무책임한소리라고 생각해. 각자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네모토는 내게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그래도 난 믿어"
라고 시원스레 내뱉고 나서 다음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버지의 분신인 넌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기뻐하면 아버지도 분명 기뻐하실 거야. 너의 행복이 고스란히 아버지의 행복이 될테니까. 핏줄이란 그런 거잖아. 그러니까 넌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돼. 항상 웃으면서 살면 된다고." - P40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사고에 불행 중 다행같은 건 없습니다. 당신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그들이 정신을 차리도록 열변을 쏟아냈다.
"저는 이번 사고로 사랑하는 약혼자를 잃었습니다. 당신들은 그 사람의 목숨만 앗아간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의미래까지 빼앗아갔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빼앗긴 건 그사람 혼자가 아닙니다. 제 미래에도 이제 더는 그가 없으니까요. 당신들은 피해자 유족의 미래까지 빼앗은 겁니다. 그 사실을 알기나 합니까? 어디, 입이 있으면 뭐라고말 좀 해보세요!" - P67

"도모코, 마음이 병든 건 착실히 살아왔다는 증거란다.
설렁설렁 살아가는 놈은 절대로 마음을 다치지 않거든. 넌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마음에 병이 든거야. 마음의 병을 앓는다는 건, 성실하게 살고 있다는 증표나 다름없으니까 난 네가 병을 자랑스레 여겼으면 싶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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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회사들은 거의 다 3~4년 동안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만족할 만큼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나라 사람들이 ‘한국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다‘ 하는 감탄을 하도록 만들었다.
"꼬리들은 어렵고 힘든 일을 대낮에도 하고, 밤중에도 하고, 휴일에도 한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빨리하고, 잘하는 사람들은 꼬리들뿐이다. 꼬리들은 사람이 아니다."
이러한 신뢰는 처음 얼마 동안 품었던 의심스러움을 일소한 것이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 사람들 사이에는 처음 얼마 동안 한국근로자들을 놓고 불안한 소문이 떠돌았다.
"한국 근로자들은 너무나 이상하다."
"무기만 안 들었을 뿐이지 그들은 다 군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이 언젠가 우리를 해칠지도 모른다."
그들이 그런 의심과 불안을 품게 된 것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안전모에서 작업복, 작업화, 가방까지 똑같이 통일된 데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일사불란하게 도열하며 앉아번호를 외치고, 가까운 작업장에 나갈 때는 질서정연하게 행렬을 짓고 했으니 한국 근로자들이군인처럼 비치고 오해를 받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 P158

"이건 얼마 전에 일본 신문에 난 건데 말야, 남과 북은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그걸 서로 이용하고 있다는 거야."

"무슨 소리긴 척하면 알아들어야지. 남북이 서로 잡아먹을 듯이 치열하게 대치하는 건 딴 속셈이 또 있다 그거지. 겉으로는 이념 대립인데 속으로는 그걸 서로의 체제 유지에 이용해 먹고 있다그거야"

"아니, 그거 꽤 일리 있고 심각한 말 같은데? 그러니까, 양쪽에서 서로 대립을 격화시켜 가면서 위기감을 조성시키고, 그 위기감으로 국민들을 위협해 자기네 독재정권을 유지시켜 나간다는 그런뜻 아닌가?" - P169

"씨부랄 것, 권세 있고 돈있는 놈들만 한통속으로 짜고 돌아감서 잘들 해묵는 시상이다. 그려, 돈 없고 빽 없는 놈들만 피 토허고 죽을 시상이여."
천두만은 가래를 돋우어 내뱉었다.
音您이제 그곳은 가발공장이 아니었다. 가발이 한물가자 사장은 잽싸게 업종을 바꾸어 지금은 텔레비전의 무슨 부속을 조립하는 공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장이 그렇게 몸 빠르게 업종을 바꾸고 큰돈을 벌게 된 것은 8.3조치 덕이라고 했다. 종업원들의 돈을 3년동안이나 갚지 않고 마음대로 쓸 수 있었으니 그건 틀림없는 일이었다. 천두만은 그 건물만 보면 속이 뒤집어졌다. 그리고 대통령을향해 제일 독하고 험한 욕을 목이 터질 때까지 퍼부어대고 싶었다.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 그따위 명령을 내려 가난한 사람들을 더가난하게 만들어버린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니라 소통령 아니, 똥통령이었다. - P201

"난들 왜 갈등이나 회의가 없겠어. 성인이나 군자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일 뿐인데. 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기 진실을 스스로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점이야. 자기 진실을 더럽히는 것은 자기 부정이고, 자기 부정은 인간이기를 포기해 버리는 마지막 행위니까. 우리가 권력의 억압에 고립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존재가 없어진 것은 아니야. 그리고, 우리가 했던 저항도 어디로증발하거나 사라진 게 아니야.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그저항도 이어지고 퍼져나가고 있다 그 말이지. 대학생들의 저항이갈수록 격렬해지고 있는데, 그 힘에는 우리의 성명서 한 장 한 장도 어떤 힘으로 작용하고 있거든. 모든 사회운동은 직접 간접으로상호작용을 일으키고, 서로서로 자극하고 의지하면서 그 힘이 배가되는 거니까. 그리고 생활이 고달프다고 괴로워하거나 의기소침해선 안 돼. 지금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생각해 봐. 그들에 비하면 우린 얼마나 편하고 고통 없이 지내는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망하지 않는 독재는 없으니까." - P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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