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했다. 구로는 시로의 피를 이어받았다. 구로가 기뻐하면, 죽은 시로도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내게 찾아와준, 내 배 속의 생명이 기뻐하면, 네모토도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다. 그저께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다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배 속에 있는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는 것이 네모토를행복하게 하는 길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내가 인생의위기에 맞닥뜨릴 때마다 그가 내 곁을 지켜주었다.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와 엄마를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도 네모토는 함께였고, 그가 떠나서 인생 최대의 난관에 부딪힌 지금도 네모토는 내게 우리의 아기를 남겨주었다. 또다시 네모토가 나를 구했다. 그는 언제나 내게 미래를 선물해준다. - P100
학창 시절에만 해도 이런 사람들을 보면 ‘왜 집에 안 가고 여기서 술을 마실까 의아했는데, 이제는 저들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게 됐다. 저 사람들은 홀로해방감을 만끽하는 것이다. 집에 가면 가족들이 듣기 싫은 잔소리를 늘어놓겠지. 애들 교육 문제로 아내와 옥신각신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나 최소한 어두컴컴한 승강장에서 혼자 캔 맥주를 홀짝이는 동안만큼은 그런 문제들을 싹 잊을 수 있다. 대학에 다닐 때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만났다. 싫은사람은 안 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을 골라만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 P111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나는 비틀비틀 걸으며 막차에 올라탔다. 내 옆에는 지쳐 보이는 직장인이 손잡이를잡고 서 있다. 대학 생활을 만끽하던 시절에는 녹초가 된 직장인을보면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직장인은 대단하다. 불합리한 처우를 정신력으로 견뎌내는 그들은, 괴물이다. - P131
내가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도 아버지는 수시로 부재중메시지를 남겼다. ‘마당 손질을 도와달라‘, ‘컴퓨터를 새로 샀으니까 사용법을 알려달라‘, ‘프로야구 일본 시리즈입장권이 생겼으니 같이 보러 가자‘ 등 늘 말이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전부 나와 만나서 대화하려고 만들어낸 핑계였다. "...아버지." 나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나, 여태 아버지한테 효도를 못 했어요." 이 말을 내뱉고 나니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미안해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데 아버지는 나를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효도 못해서 미안해하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하다." 힘주어 말하는 아버지의 양쪽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고개를 떨군 내 시선 끝자락이 아버지의 거친 손에 닿았다. 주름진 굵은 손마디에는 굳은살이 박였고 손톱 밑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아버지의 양손은 한 기술자가 최선을 다해 일해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 손으로 내게 책가방을 사주었다. 그 손으로 나를 대학에 보내주었다. 거무테데한 그 손으로 나를 지금껏 키워주었다. "...아버지, 나 말이에요" 눈에 맺힌 눈물을 손으로 쓱 닦고는 아버지 얼굴을 정면에서 빤히 쳐다보았다. "나, 옛날부터 마음속으로 아버지 직업을 부끄럽게 여겼어요. 맨날 더러운 작업복만 입고 있으니까 하찮아 보였어요. 그런데 실제로 내가 사회생활을 해보니까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겠더라고요.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내가잘못했어요" 목구멍에 걸린 눈물을 삼키며 나는 계속 아버지에게사과했다. 내 생각이 틀렸어요. 죄송해요. 정말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버지. 정말 죄송해요" 나는 울먹이면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런 나를 아버지는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내게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위로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가슴 앞에서 단단하게 팔짱을 끼고 희미하게 물기가 밴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에요."라고내뱉자마자 "바보 같은 소리 집어치워!"라는 날 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효도 못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이 왜쓸모가 없어! 다시는 그런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주위에 다른 승객이 있든 없든 아랑곳없이 아버지는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착실히 공부해서 대학까지 들어간 아들인데, 뭐가 못났단 거냐? 효도 못 해서 미안해할 줄 아는 착한 사람이왜 형편없단 거냐? 다시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아버지가 나를 호되게 야단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나는 남이 내게 내뱉은 부정적인 말에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달랐다. 나를 꾸짖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아들인 나를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더욱이 넌 나약하지 않다. 진짜 약해 빠진 사람은 남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법이거든. 넌강한사람이다."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되었다. - P157
초등학생 때 이 작은 공원에서 여름 축제가 열렸다. 부모님 손을 잡고 들떠 있는 아이들을 힐끔거리며 나는 혼자서 축제를 구경했다. 쓸쓸히 그네에 걸터앉아 있는데 길 건너에서 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이치! 유이치!" 아버지였다. 나를 위해 하던 일을 중단하고 허겁지겁달려온 것이었다. 나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아버지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가 입고 있던 작업복에서 기름 냄새가 났다. 그 냄새야말로 아버지가 곁에 있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실은 작업복 입은 아버지를 굉장히 좋아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유이치, 혼자 있어서 심심했지?" 쭈그리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던 아버지의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입술을 악물기도 하며 아버지는 내게 "미안하다, 미안해." 하고 거듭 사과했다. 유령 열차에서 내릴 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지었던표정. 그 표정은 바로 그날 공원에서 본 아버지의 표정과똑 닮았다. 이렇게 민폐를 끼치는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내가 아니라 자신을 탓하는 사람이었다. 아들이 회사를그만둔 건 자기가 제대로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내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들의 허물을 감싸는 사람이었다. "ㅎㅇ윽, ㅎㅇㅇ윽! 으아아, 으아아악!"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아스팔트 위에 털썩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다. - P166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 마음이 편안한 건 다카코 누나에게 남자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서가 아니다. 그 양아치들에게붙잡혔던 누나가 무사해서도 아니다. 누나가 내 얼굴을못 봐서도 아니다. 내가 안도감을 느낀 건 그녀에게 고백하지 않아도 되어서다. 그 사실에 나는 제일 마음이 놓였다. 결국, 상황은 눈곱만큼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늘도 나는 그저 도망만 쳤다. 내가 너무 한심했다. 천하에 둘도 없는 겁쟁이라는 사실에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이번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그날 이후 다카코 누나가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발길을 끊었다. 새해가 밝은 다음에도 시간은 변함없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녀에게고백 한 번 못 해보고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 P207
"실례지만, 혹시 여자 친구 있어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내뱉은 것인지 자책했지만, 남자는 싫은 얼굴을 하지 않았다. "있지." "연애하면 좋아요?" 평소와 달리 말이 줄줄 나왔다. 남자의 부드러운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무슨 질문을 하든 다 받아줄 것 같아서였다. "어려운 질문이네." "죄송해요. 이상한 걸 물어서" "괜찮아, 신경 안 써도 돼. 어려운 질문이지만, 내 대답은 망설임 없이 ‘예스‘야." 목소리에 힘을 실어 대답하는 남자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남남이었던 두 사람이 만나고, 손을 잡고 입맞춤을 하는 거야. 극적이라 할 만큼 거리를 좁혀가는 방식이 대단히 멋지거든, 무엇보다 무수히 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선택해줬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러면 혹시 선택을 못 받으면 어떡해요?" "무슨 말이지?" "그러니까, 용기 내서 고백했는데, 거절당하면 어떡하나 싶어서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남자는 "나도 예전에는 너처럼 생각할 때가 있었어."라며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나는 이 세상에 운명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어." "...운명의 사람?" "그래. 나는 ‘돌고 돌아 만났다‘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만나게 됐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만약 상대방이 운명의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나쁜 결과를 맞이하지는 않을 거야." - P213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나는 손잡이를 놓고 다카코 누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우산을 씌워줬던 날, 나는 죽을 생각이었어요. 난 친구가 한 명도 없어요. 부모님은 이혼했고, 같이 사는아빠는 바빠서 나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았어요. 지금 거즈로 가렸지만, 내 오른뺨에는 커다란 반점이 있어요. 키도 작아서 늘 괴롭힘의 대상이 되어왔고요. 그런데 비가많이 오던 그날, 당신이 그런 내게 우산을 씌워줬어요. 그때 당신이 준 도넛의 맛을 나는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어요. 그날의 나에게 계속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그 도넛 상자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갖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살렸어요." 나는 누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뒷말을 이었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줄곧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아침마다 열차 옆 칸에서 당신을 흘끔흘끔 쳐다봤어요. 용기가 없어서 말은 못 걸었지만요. 길에서 당신을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요... 나는…" 잠시 머뭇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가 곧바로 얼굴을 들고 말을 쏟아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합니다." "...." "나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는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당신과...."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마지막 남은 힘을 눈빛에 담아전했다. "돌고 돌아 만난 것을." "...." 말을 끝내고 나서도 한동안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주위에 있던 승객들이 무슨 일인가 하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진지한 얼굴로 가만히 듣고 있던 다카코 누나가 마침내 작게 숨을 토해냈다. "...고마워. 고마워."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고맙다는 말을 되뇌던 누나의 두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어머, 왜 눈물이 나지. 남자에게 처음으로 고백받아서그런가." 울음을 감추려는 듯이 그녀의 말이 연달아 이어졌다. "아니면으며 말했다. 하고 다시 입을 떼더니 손가락으로 눈가를 닦 "네가 너무 멋진 사람이라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끄러워서 눈만 연신 깜빡거렸다. 다카코 누나의 눈가가 아직 젖은 것을 보고, 비스듬히메고 있던 가방에서 노란색 손수건을 꺼냈다. "이거 그날 당신이 내게 빌려준 손수건이에요." 손수건을 건네자 다카코 누나가 "그건 네가 계속 간직했으면 좋겠어."라며 도로 밀어냈다. 그러고는 ‘이건 거짓없는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줘."라며 전제를 깔고말했다. "나는 방금 네가 좋아졌어. 다시 말할게. 나는 가즈유키를 좋아합니다." - P242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안 믿어주면 어떡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피해자와 유족을 떠올리면 미안한마음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 P267
여기 타고 있는 사람들은 앞으로 한 시간 후면 사고를당해 죽게 된다. 이 열차를 운전하던 기관사의 아내로서잘못을 빌어야만 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잡이를 거머쥐고 바로옆에 있는 기관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남편은 내 존재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유리창 너머에 앉아 원형 속도계를 노려보면서 진지하게 핸들을쥐고 있었다. 애당초 남편에게 말을 걸 마음은 없었다. 마지막이라 할지라도 일하고 있는 남편을 방해해서는안 된다. 그저 남편 옆에 있는 것으로 족하다. 곁에서 바라보기만 해도 나는 충분히 행복했다. - P309
"난 살아봤자 별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렸던 것 같아. 탈선사고가 나고 나서 유령 열차의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이 열차에 올라탔어.그런데 단 한 명도 니시유이가하마 역을 지나치지 않았어. 정확히 말하면, 지나칠 수 없었어. 그중에는 당신처럼자신이 죽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이역을 통과하려던 사람도 있었어. 하지만 그럴 때마다 다들 그 사람을 열차에서 내리게 했어. 마구 패서 억지로 하차시킨 사람도 있고. 외로우니까 사랑하는 이를 저승으로같이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한 명쯤 있을 만도 하잖아? 그런데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다들 사랑하는 사람이계속 살아주기를 바랐거든. 난 그게 참 아름답더라." 유령은 나직이 한숨을 쉬면서 연분홍색 고둥을 꽉 쥐었다. "인간이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인 걸 알았더라면 나도안 죽었을 텐데. 그만 갈게." - P318
가마쿠라시에 봄 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던 그날, 급행열차 한 대가 선로를 벗어났다. 도힌철도 가마쿠라선 상행 열차였다. 맹렬한 속도로 궤도를 이탈한 열차는 가마쿠라 이키타마(鎌倉生魂) 신사의 도리이를 스친다음 산간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승객 127명 중 68명이사망한 대형 사고였다. 탈선 사고가 일어나고 두 달쯤 지났을까. 심야에 유령열차 한 대가 가마쿠라선 선로 위를 달린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니시유이가하마 역. 이 역의 승강장에 ‘유키호‘라는 유령이 나타나는데, 유키은행호에게 부탁하면 과거로 돌아가 사고 난 가마쿠라선 상행 열차에 탈 수 있다는 것이다. 단, 그 열차에 승차하려면 다음 네 가지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하나, 죽은 피해자가 승차했던 역에서만 열치를 탈 수있다. 둘, 피해자에게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된다. 셋, 열차가 니시유이가하마 역을 통과하기 전에 어딘가 다른 역에서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사고를 당해 죽는다. 넷, 죽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현실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만일 열차가 탈선하기 전에 피해자를 하차시키려고 한다면 원래 현실로 돌아올 것이다.
죽은 사람을 만나더라도 현실은 무엇 하나 달라지지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네 가지 규칙을 듣고도 다들 사고로 떠난 사람을 만나러 갔다.
약혼자를 가슴에 묻은 여자. 아버지를 떠나보낸 아들. 짝사랑하는 여학생을 잃은 한 소년. 그리고 이 사고의 피의자로 지목된 기관사의 아내.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야 깨닫는다. 자신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만일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무슨 말을전하겠는가.
*신사 입구에 세운 기둥 문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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