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자마자 어둠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해는 천천히 빛을 내며 지고 있었고, 보이지 않아도 남은 빛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렇다. 빛과 어둠은 양면이 아닌 한 면으로이어져 있다. 소녀는 찬찬히 어둠이 드리우는 광경을 바라본다. 깊은 어둠이라 해도 빛이 들어오는 부분이 있다. 완전한 어둠 속에 있다고 생각돼도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하게 빛이 비춘다.
그리고 밤이 서서히 내려앉는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해가지듯 천천히 어둠은 밝음으로 이어져 달과 해가 같은 하늘에 공존한다. 낮의 달을 보지 못하는 건 낮의 해를 보려고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소녀는 가만히 무릎을 안고 웅크려 앉아 밤을 꼬박 샌다. 새벽이 오고 아침이 온다. 어둠이영원할 것 같아도 아침은 다시 온다. 살아 있는 한 노력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건, 이 아침을 맞이하는 날들 아닐까.
"살아 있는 한, 영원한 어둠도 빛도 없구나." - P29

"그런데 두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려면, 먼저 슬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능력을 제대로 익혀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주는 일을 하고 나서 꿈을 실현시키는 능력을 사용해야 해요. 아마 어려움을 돕는 보조 능력이 아닐까요? 마을에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몇 명 없는데, 특별하고 소중한 능력이네요. 선택받았어요." - P30

[마음 세탁소]
[모든 얼룩 지워 드립니다. 명품 드라이 크리닝]
글자를 찬찬히 읽는다. 스티커가 벗겨져 글자가 비어 있기도 하다.
"세탁소라, 얼룩을 빼준다... 마음에 있는 얼룩까지 세탁할 수 있나." - P37

"할 수만 있다면 마음을 통째로 꺼내서 박박 빤 다음에다시 집어넣고 싶어."
"마음을 어떻게 꺼내지? 심장을 꺼내면 그게 마음인가?"
마음에 형체가 있었던가. 그렇다면 한번 꺼내서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말야. 만약에 괴로웠던 기억을 다 지워버리면행복해지지 않을까? 마음이 너무 아파서 계속 그 생각만나잖아. 근데 밥도 먹고, 일도 하고, 친구도 만나. 분명 나는 웃고 있는데 마음은 욱신거려. 일을 하는데 마음이 욱신거려. 이거만 없음 살 거 같은데."
"그거 알아? 마음도 물건처럼 많이 쓰면 닳아 없어지는거 같아. 요즘은 닳다 못해 형체가 사라진 기분이야."
"마음이 닳는 것 같은 기분 잘 알지. 이렇게 살아 뭐하나 싶네. 의미 없다."
이번에는 재하가 말했다. 재하는 도통 살아 있음에 의미와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자기 삶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얼마나 빛나는 사람일까? 늘 궁금하다.
"눈 떠지니까 뜨는 거고, 사니까 살아지는 거야. 넌 안그래?" - P44

마음의 얼룩을 지우고,
아픈 기억을 지워드려요.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구겨진 마음의 주름을 다려줄 수도,
얼룩을 빼줄 수도 있어요.
모든 얼룩 지워드립니다.
오세요, 마음 세탁소로.
-주인 백- - P48

"어떤 아픈 기억은 지워져야만 살 수 있기도 하고, 어떤 기억은 아프지만 그 불행을 이겨내는 힘으로 살기도 하지. 슬픔이 때론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해." - P55

"종일 밝게 웃는 사람들 보면 왠지 마음이 짠해. 욱신거려. 종일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딨어. 웃음 뒤에 슬픔을 감추어야만 살 수 있으니까 웃는 거지. 마음에 얼룩으로 남은아픔을 지워야만 숨 쉴 수 있는 사람도 있어."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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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렛소리 희미하고 비가 오지 않아도 나는 여기 머무르오 그대 가지 마라 하시면."
"맞아, 그게 정답이야."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내가 너한테 처음 읊어준 시에 대한 답가."
우렛소리 희미하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면 그대 붙잡으련만. - P240

도어록을 해제하고 철문을 열고 발을 내민 다음, 문을 닫았다. 내 뒤쪽에서 집은 시간이 멈춘 통조림이 되었다. - P261

한숨을 쉬고 눈을 뜨자 내 숨이 천천히 형태를 바꾸며퍼져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벤치 옆에 내려놓은 천 재질가방을 끌어당겼다. 가방에는 튼튼한 판지에 뚜껑이 덮인네모난 상자가 들어 있다. 뚜껑을 열자 안에 들어 있던 하얀 한 쌍의 여성용 하이힐이 겨울의 차가운 바깥 기온을덮어썼다. 이것이 여기서 생겨나서 내 손에 남은 유일한것이었다.
나는 기도하는 것 같은 마음으로 그 구두를 벤치 위의그녀가 늘 앉아 있던 장소에 내려놓았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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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을 손에 들고 바라보는 것은 기묘한 감각이다. 하루도 쓰지 않는 날이 없는 부위인데 차분히 관찰할 기회는별로 없다.
만든 내 발뒤꿈치를 손에 들고서 바라보고 있으면, 진짜발뒤꿈치가 간지러워진다.
손과 발
두 개의 말단이 연결되어 내가 원환(圓環)이 된 것 같은감각이 생겨난다. 그 자기완결감이 굉장히 신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내 발로 걷는 나와, 걷기 위해 내 구두를만드는 내 손. 작게 완결된 아름다운 소우주. 나는 그야말로 그런 것을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 P63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해도 돼."
"괜찮아. 어차피 사람에게는 다들 조금씩 이상한 면이있으니까." - P81

"어때?"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아."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다라......." 엄마는 잠깐 시선을허공에 돌렸다가 문득 뭔가 떠올린 듯이 말했다. "그거 인생 같네."
"네?"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일상 속에서 그래도 맛볼 만한걸 찾아가는 것, 그게 인생이야." 엄마는 얼굴에 ‘쓸 만한말을 했다‘라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이거 굉장하지 않아? 무슨 문호가 말했을 것 같잖아." - P91

"단둘이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면 이든 100이든 되어버리잖아."
"무슨 의미죠?"
"상대가 하는 말을 받아들일지 아닐지. 자기가 한 말이받아들여질지 튕겨날지.
"의견을 맞추면 되잖아요. 의논을 하거나……………"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하지만 늘 그러면 지쳐서 관계가 망가져. 그래서 관계가 망가져버릴 것 같으니까 상대가하는 말을 전부 받아들이거나 전부 물리치거나 하는 식으로 점점 수렴해가는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패 힘들지."
"단둘이 있는 건 그런 거라고 생각해. 던지는 말 하나도상대의 마음에 들지 안 들지, 상대의 말이 자기 마음에 들지안 들지. 결국은 그 둘 중 하나가 되어서 칼날처럼 서로에게 말을 들이대는 형태가 되어버리잖아? 하지만 셋이라는 수는 개인 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라는 틀에 들어가니까, 의견이나 발언을 상대가 받아들이게 하는 게 아니라가볍게 그 자리에 둘 수 있게 되잖아. 셋이 아니라 네 명이상이어도 좋지만." - P112

"당신은 젊고 파워풀하고, 게다가 공감 능력까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남을 도울 생각을 해줬으면 해요."
내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을 것이다.
....? 구두를 만드는 게 아니라요?"
"아뇨, 구두를 만드는 것 또한 그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점점 더 모르겠다.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이야기겠지만, 당신이 주위에 있는 이상한 어른의 이야기를 했을 때 문득 떠오른 게 있습니다. 그건 머리가 좋고 남의 기분을 잘 아는 사람은 종종힘들어진다는 겁니다. 민감하다는 건 약하다는 것이기도하니까요."
"......네."
잘 모르는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아직 자기 일만으로도 벅차겠지만, 만약 그런사람이 보이면 조금이나마 도와주어도 좋지 않을까요."
"그건 어른이 되라는 건가요?"
"아뇨. 당신은 아마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른이 된다는 막연한 목표는 거의 의미가 없어요.
아이인가 어른인가가 아니라, 남의 마음에 민감하면서도강한 내구력을 겸비한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될 수없는 사람이 많으니까, 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게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신지……………."
"강한 힘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이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첫걸음이죠." - P149

사람을 기다리는 건 마음이 술렁이는 일이다.
모든 시간을 상대에게 바치는 느낌이다.
둘이 있을 때에는 시간을 반으로 나눠 서로에게 바치고있다. 그러니까 공정하다. 하지만 남을 기다리는 시간이란그렇지 않은 것 같다.
책을 읽거나 낙서를 하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째서인지오늘만은 그저 시간을 바치고 싶었다.
기도란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 P168

생각하던 것을 말하려면 강한 힘이 필요하고, 그 힘은자기 자신을 크게 바꾸어버린다.
맑은 날이 며칠째 이어지는 동안, 나는 계속 그런 생각을 했다. 말로 해버리면 말한 방향으로 향할 수밖에 없어진다. 막연히 품고 있던 망설임이나 두려움 같은 것이 뒤로 물러나 작아졌다. 그 대신 내 안에는 나 자신의 영지地)라고 할 만한 것이 펼쳐졌다. 거기에 발을 디디면 발밑에서 힘이 들끓어 나오는 것 같았다. 지금 악령이여, 물러가라‘라고 외치면 퇴마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 P175

"나 말이야......."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었어. 언제부터인가." - P204

구두를 만드는 것을 통해 나는 걷는다.
내 걸음에 따라 구두가 생겨나고 그 구두로 누군가가 걸었으면 좋겠다.
그런 순환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그런 매일이 이어지고 8월이 왔지만,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은 하루도 없었다. 그리고 9월이 왔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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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말은 근질거려서 해본 적 없지만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뿐더러 그럴 용기도 없지만
분명 굉장한 말인 것 같다. - P8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은 머지않아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
하루하루 기억을 쌓으면서 과거를 덮어나가는 거야.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 P80

"귀신이 된 할머니는 날 데려갈지도 모르잖아."
"사후세계로?"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어. 결국 죽음 때문이야. 죽음이 무서웠던 거야. 귀신이 무서운 이유는 거기에 있을지도몰라. - P106

"응, 6층에 사셔. 부모님은 이제 날 떠올려도 슬퍼하지않아. 아련하고 따스했던 추억이 된 거겠지. 그걸로 충분해. 슬픈 일이나 괴로운 일은 머지않아 희미해지기 마련이니까. 하루하루 기억을 쌓으면서 과거를 덮어나가는 거야.
산다는 건 그런 거니까."
하지만 잊진 못할 거야.
"살아있는 사람한테는 잊어버리는 편이 좋을지도 몰라.
아프고 괴롭기만 한 기억을 품고 살아가는 건 자기 자신을괴롭히는 일일 뿐이니까. 추억은 옅어지다가 결국 너그러워지지. 그렇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어."
난 널 잊지 않을 거야. 네 부모님과는 달라, 희미한 기억이 될 필요는 없어. 슬프지 않았으니까. 기뻤으니까.
"기무라, 정말 고마워."
그건 내가 할 말이야 - P140

해답은 전부 ‘어제‘의 행동에 담겨 있었어.
‘어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오늘이라면, 그걸로 끝인 거야. - P146

사이토 
그렇다면 중노년층이 얼마나 마음잡기 힘든 나이인지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네. 나이는 먹었지, 주름이랑 기미랑 흰머리는 늘어나지, 뱃살은 처지고 등에는 군살이 붙었지, 엉덩이 살은 빠지고 볼과 턱은 늘어지지…………

사이토
신체는 점점 고물에 걸맞은 몸으로 변해 가도 마음은 쉽사리 성숙해지지 않는다고. - P162

사이토 여자든 남자든 똑같아.
히사요 젊든 중년이든 노년이든 다를 바가 없지.
사이토 인간 대부분은 소극적이고 소심하니까요.
히사요 머뭇대는 사이에 기회를 놓쳐버리지.
사이토 상대방이 다가와 줄 거라 기대하면서 정작 자기 진심은전하지 못하죠.
히사요 어설프게 나섰다가 창피를 당하긴 싫으니까. 상처 입고싶지도 않을뿐더러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의식이 더 강해서 그래요.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좋아하는 애는 어느새 행동이 재빠른 이상한 녀석에게 빼앗긴 뒤죠. - P192

당신이 무사히 돌아와 웃어주는 것.
제게는 그게 가장 큰 선물이에요. - P228

"젊었던 시절에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쉬웠는데 나이를 먹으니 꽤 어렵네요."
내 말에 기쓰 씨는 놀란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어.
"그렇죠. 어렵죠‘
"좋아하는 감정은 좋은 면만 있는 게 아니에요. 부정적인 감정을 잔뜩 끌고 오죠. 그걸 아니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게 무섭기도 해요."
"그렇죠,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기쓰 씨는 고개를 휙휙 끄덕였어. 내가 그렇게까지 묘한 발언을 한 걸까. 왜 저렇게 경직된 거지.
"기사님 말씀이 맞아요. 좋아하게 되면 부정적인 감정도 따라오죠. 모든 악의 시작이에요."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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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괴......."
여자가 중얼거렸어요.
"네?"
"자동차는 요괴와 닮았어요. 눈을 번쩍이며 캄캄한 밤을 거칠게 달려와 인간을 죽이죠."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눈이 번쩍이는 건 여자도 마찬가지였지만요.
"인간뿐만이 아니에요. 고양이도 죽이죠. 참혹해요."
"종종 발견한답니다. 이 근처 도로에서 차에 치인 오리도본적 있어요."
"거만한 인간들이야말로 요괴예요."
여자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어요.
"난 옳아. 절대 틀리는 법이 없지. 실패는 다 네 탓이야.
난 아니라고. 네가 나빠. 난 옳으니까. 틀릴 리가 없어. 철부지 어린애처럼 우기는 꼴이라니. 이 바퀴벌레 같은 늙은이도 그런 인간 중 하나예요." - P39

"좋은 게 좋은 거라지만 부모로서는 걱정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고민하고 있었더니 주변에 아이 가진 동료가이러니저러니 충고를 해준 거예요. 어릴 적 교육은 이렇게해야 한다는 식으로요. 친구들과 교제하는 법을 좀 더 잘가르쳐야 한다고 그랬대요. 부모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아이에게 악영향을 끼친 게 아니냐고 하면서요. 하지만 어릴 적에 착실히 교육 시키고 친구와의 교제에도 마음을 쓰며 아무리 모범적인 모습을 부모가 보인다 해도,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는 있는 법이잖아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자기 아이가 등교거부아가 아니니까 자신의 방식이 옳았다고 믿어버리죠. 자기 아이는 이런데 저 집 아이는 다르니까 이상하다는 식으로 단정 짓는 사람도 많나 봐요. 상대편에 서서 생각해보면 좋을 텐데 말이죠. 저 집은 이런데 우리 집은 이래. 그러니까 절대적 해답은 없는 거라고말이에요."
"어쩌다 일이 잘 풀렸다고 해서 그걸 성공한 경험으로여기는 건 착각일 뿐이에요."
"경험이 중요하긴 하죠."
"착각이에요.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경험 때문에 오히려견문이 좁아져요."
ㅇ역을 지나치자 내리막길이 나왔어요. 이 길을 다 내려가면 S바시 다리 사거리예요. 슬슬 목적지를 자세하게물어봐야 하죠.
"일이 잘 풀리게 하는 방법론 같은 건 없잖아요. 예감이 좋아서 선택했다가 잘 안 풀릴 때도 있고, 위험천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참고 견뎌낸 끝에 좋은 결과를 얻을 때도있죠."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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