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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여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5월
평점 :
천상 이야기꾼이다. 누구는 짧은 토막글 하나 뽑아내려 해도 머리가 안 돌아가는데, 데뷔 후 5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내놓으면서도 소재나 문장이 지겹지 않고 새롭다. 추리물을 워낙 많이 써서 처음엔 추리작가인가 싶었지만, 뮤지컬로도 만들어질 만큼 인기몰이를 한 《나고야 잡화점》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비슷한 치유 계열로 《녹나무의 파수꾼》도 있다. 《녹나무의 여신》의 전작이다. 말하자면, 장르를 막론하고 글을 잘 쓴다. 아인슈타인의 뇌만큼이나 열어보고 싶다. 내 뇌와 아주 다를 것이라는 것만큼은 열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겠다만.
일단 사람부터 죽이고 시작하는 추리물을 많이 내놓긴 했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어딘가 따뜻하다. 사람이 몇이고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끝끝내 놓지 못하는 인간성에 대한 희망이 어느 작품에나 묻어났던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있다. 그런 사람이니 이런 책을 써도 위화감이 없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녹나무의 파수꾼》을 먼저 읽지 않는다면 녹나무의 존재 자체가 낯설고 어색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녹나무의 파수꾼》을 읽기는 했으되 기억이 희미할 정도여서 안 읽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이야기 진행에 필요한 최소한 정보는 《녹나무의 여신》에서도 알려주니까, 그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다. 녹나무의 존재를 받아들일 만큼, 딱 그만큼만 마음을 열면 된다. 이 이야기는 판타지,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그야말로 착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각자 사정이야 있겠다만 기본적으로 선량하다. 범죄가 일어나고 그 일이 주요 인물들과 얽혀들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자가 밝혀질까 봐 조마조마한 그런 정도의 소동이다.
그렇다면 온갖 종류의 자극에 노출돼있고 다 큰 성인의 집중력이 10분이 채 안 된다는 현대인이니만큼 이런 착한 이야기는 좀 지루하고 심심해야 마땅한데, 4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을 앉은 자리에서 쉬지 않고 읽어나갈 만큼 흡입력을 가졌다. 아니, 한 번도 쉬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딱 한 번, 50여 페이지 분량을 남긴 상태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책을 덮었다.
"너는 지금 살아 있지 않으냐."
힘들구나. 답답하구나. 막막하구나. 그래도, 지금, 살아 있잖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랬던가. 살아있으니 하늘도 볼 수 있고, 땅도 밟아보고, 내일이 보이지 않아도 오늘을 살 수 있다. 작중 인물이 어떤 마음으로 이 문장을 만들어냈을까 생각하니 먹먹함이 더욱 커졌다. 남은 50 페이지는 보기에 따라 비극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결말이었지만, 저 한 문장이 내 가슴에 남아 더이상 슬프지 않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쩌면, 천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