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혼술이다 - 혼자여도 괜찮은 세계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문학수첩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이 싫다. 지구 전체에 금주령을 내려도 좋지 않을까 자주 생각해 볼 정도이다. 술이 야기하는 온갖 사회 문제들을 떠올려 보면 내가 술을 미워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제목을 읽는 순간부터 마음을 꽁꽁 닫아걸었건만, 몇 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무장해제 당했다. 기자 출신이라더니 문장의 힘이 예사롭지 않다. 허허실실 전법으로 방심하게 만든다. 엉뚱 발랄한 말투로 웃기더니 느닷없이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찔러 들어온다. 항복, 항복입니다!


작가의 의도는 혼술 정복기를 쓰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술이면 어떻고 밥이면 또 어떤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고찰, 거기에서 얻어지는 교훈과 반성- 이런 것이 없다면 설사 일평생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성경을 백 번 넘게 통독한들 참 잘 살았다 하긴 어려울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가끔 이 문장은 좀 기억해야겠다 싶을 때가 종종 있긴 하지만, 채 몇 페이지 넘기기도 전에 새로운 감동이 올라온다. 


"그것은 맨몸으로 혼자 세계와 마주하는 경험이다.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쓸쓸함 때문에 도망치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경험 말이다."

(p. 23)


고독을 두려워하거나 도망치지 말고 당당하게 세계와 마주하라니, 요샛말로 '웅장하다'. 그렇다고 혼자가 되는 것을 권장하는 글이라 오해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혼자가 됨으로써 보다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알려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열심히 주위를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 나를 지웠더니 주변이 보인다."

(p. 87)


손에서 스마트폰이 떨어지지 않는 요즘 세대에게 오히려 세상은 너무 좁다.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지만 당장 아침 출근길에 마주한 가장 인상적인 경험을 묻는다면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


"비록 아무 말 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걸어와도, 마음은 늘 열려 있다. 혼자라는 것은 전방위로 열려있다는 뜻이다."

(p. 97)


마음은 늘 열려 있다. 닫힌 것은 내 눈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설 자리를 만든다는 것, 그건 다른 누군가의 설 자리를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p. 155)


술 하나로 이만한 책이라니, 존경합니다---! (하지만 역시 술은 마시지 않겠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루세는 천하를 잡으러 간다
미야지마 미나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루세 아카리, 유치원 생일 때부터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 그림도 노래도 잘하고 글자마저 모두 익혀버린 영재와 천재의 어디쯤인 소녀. 덕분에 나이 들면서는 또래의 질시와 따돌림을 받지만, 그 사실을 안다 해도 흔들림은 없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한다!


일생의 목표는 200살까지 사는 것. 아무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 가능성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설사 그만큼 못 살더라도 나보다 오래 산 사람이 없을 테니 그 또한 상관없다. 그보다 당장의 목표는 올여름을 세이부에 바치는 것이다. 그러기로 했으니, 한다!


일본 소설이나 만화에 이런 캐릭터가 전혀 없었다고는 못 하겠지만, (사실 이보다 더한 괴짜도 많다) 그럼에도 나루세는 어쩔 수 없이 매력적이다.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는 깨끗이 승복한다. 계속해야 할지 중단해야 할지 결단의 기로에 섰을 때에도 망설이는 법은 없다. 이렇게 깔끔할 수가.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아니, 알아주면 그건 그것대로 기쁠 테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이다. 누구의 의지도 아닌, 온전한 내 의지. 내가, 그러기로 했기에. 그래서 나루세의 행동에는 주저함이 없다. 옆에서 아무리 불가능을 외쳐도 요지부동, 우선은 해보는 거다.


유쾌하다. 즐겁다. 책을 읽는 자리가 어디건 큭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이 즐거움을 나눌 사람이 주변에 없음이 통탄스럽다. 천하를 잡은 나루세의 세계 평정기도 빨리 나와주면 좋겠다. 될 수 있다면 200세 생일을 눈앞에 둔 나루세 할머니도 만나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문에 관한 질문들 -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지식의 창조자가 되는 법
백희정 지음 / 노르웨이숲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성형 인공 지능, AI - 세계 각국의 내노라 하는 기업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어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앞으로 세계를 어떻게 바꿔놓을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 세계의 중심에 자신의 시스템이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직 인공 지능들의 데이터는 완벽하지 않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낼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인공 지능은 인류가 지금껏 쌓아왔고 또한 현재도 계속해서 쌓아가고 있는 데이터를 활용해 결과를 도출한다. 오염된 데이터가 주류를 차지한다면 인공 지능이 내놓을 답은 당연히, 오염된 값이어야 한다. 이런 현상을 내버려둔다면 아마, 어쩌면, 세계의 미래는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끔찍해질 것이다.

자, 미래를 구하기 위해 우리들 개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에 기반하여 정답을 말해주자면, 바로 “정확한 질문을 위한 질문“이다.

저자는 <질문에 관한 질문들>을 통해 정확한 질문의 필요성과, AI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질문의 범위를 바꿔가는 법, 그리고 AI가 내어놓은 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고 판단해야할 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인간’을 내세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겉보기와 달리(?) 쉽고 재미있다. AI와 당장 대면할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꼭 추천하고 싶다. 제대로 된 질문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된다면 보다 깊은 사유가 가능해질 것이고, 그로 인해 인생이 풍성해질 것이란 기대가 생겼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좀더 자긍심을 가져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됐다.

저자는 AI가 하는 일에서 최대한 배제되어야 할 것만 같은 인간을 자꾸 끌어들인다. 제대로 질문하는 것도 인간, 주어진 답을 평가해서 옳고 그름을 판별해야 하는 것도 인간의 몫이란다. 앞서 말했듯, AI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따지고보면 AI를 만든 것도 어차피 인간이다. 나는 AI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제대로 이용할 줄만 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조력자인 것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 제대로 된 질문을 하는 법을 알 필요는 있겠다. 어떻게? 그건, 책을 읽어보면 알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
소강석 지음 / 샘터사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저 읽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어 쓰고, 또 쓰고
그렇게 펜이 누르고 지나간 자리마다 시인의 마음과 내 마음을 채워 다지는 일- 이것 역시 시라면 시, 아닐까.

소강석 시인의 언어는 어렵지 않다. 오히려 시집 뒤편의 해설집이 더 어려웠다. 생소한 한자어로 가득한 그 해설집은, 차라리 없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도 했다. (참 죄송스럽게도)

쉬운 단어로만 쓰여진 시는 자칫 그 속마저 쉬워 보인다. 더운 여름에 냉수 들이켜듯 후루룩,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써보려 하면 좀처럼 되지 않는다. 내게는 사계절이, 내리는 비가, 비가 그친 뒤의 하늘이 그렇게 가슴에 사무치지 않는다. 내가 가졌던 아픔과 상실, 고뇌, 깨달음, 그런 것들은 차마 말이 되지 못 하고 속에서만 머물다 어느덧 잊히는데, 시인의 언어는 용케 그런 것들을 끄집어내어 시가 된다.

📝
시간이 아닌
그리움에 쫓겨 길을 걸어가 본 사람은 안다
봄길을 꽃들이 먼저 달려간다는 것을.
<봄5 중에서>

내딛는 걸음 하나에 시 한 줄 덧입힐 줄 아는 시인의 감성이 참으로 복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전환담
윤채근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과 입에 착 달라붙는 필력은 순식간에 사람을 매료시킨다. 이야기는 짧으나 뒷맛이 오래간다.

그가 모는 배에 올라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한산도 앞 바다로 나아가고, 피 냄새 올라오도록 평원을 내달리는 말의 등에도 실려보자.

온갖 나라의 흥망이 눈앞에 펼쳐지고, 거대한 흐름에 속절없이 휘말려 고작 이름 몇 자 남기고 떠나간 옛사람의 행보가 눈에 보일 듯 그려진다.

어느 틈에 내가 읽는 것이 소설인지 역사인지 가늠할 수 없게 된다. 분명히 허구일 것이라 생각하는 한편으로 아무렴, 사실이 아닐 건 또 무언가- 하는 헛된 마음도 품어진다.

긴 호흡의 이야기를 읽을 여유가 없더라도 이 책이라면 괜찮다. 하루 한 편씩 읽는다면 5~10분 남짓, 다 해야 고작 한 달이 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할 따름이다.

당신, 춥고 긴 겨울밤, 기묘한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 준비가 되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