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사랑은 죽음의 심연을 넘어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한강의 세 번째 작품이다. 존재를 위해 스스로 소멸해 간 <채식주의자>도, 차마 떠나지 못한 영혼의 진혼곡 <소년이 온다>도, 그리고 영원히 죽음과 사랑을 가슴에 묻은 <작별하지 않는다> 까지, 그의 작품을 읽는 과정은 늘 마음으로 힘겹다. 그렇지만 다소곳한 한강작가의 글들은 오히려 힘주어 꾹꾹 눌러 쓴 글자처럼 힘이 느껴진다. 마치 작품 하나하나가 작가의 분신을 보는 것 같다. 동시대를 살며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내겐 큰 기쁨이다.
얼굴을 덮은 천의 클로로포름을 빨아들이듯 나는 그 여자들을 빨아들였다. 무려 30년이 흐른 후에야 내가 그들을 얼마나 이해했었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8
둘이서 하는 일 중에 가장 좋은 건 옛날이야기 하기다.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콘필드 아줌마 기억나? 그 이야기 해주셔." 엄마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몇 번이나 했던 이야기를 또 시작한다.(엄마가 싫어하는 건 현재다. 엄마는 현재가 과거가 되는 순간, 즉시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엄마가 하는 그때 그 시절 이야기들은 오려 붙인 듯 똑같기도 하고 사뭇 다르기도 한데, 그건 내가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난번에는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기도 하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4
그들 또한 우리 사이에선 그림자와 같았다. 관리인과 그의 아내도 말수가 적었다. 누구에게도 먼저 말 거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이건 다수 안에서 소수가 살아남는 방식일 것이다. 소수자는 저절로 침묵하게 된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9
사회적 자아라는 외피와 남들이 모르는 자기 자신이라는 본질 사이에 넉넉한 공간이 있었던 엄마는, 그 안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상냥하면서도 냉소적이었고 예민하면서도 대범했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서도 꼬장꼬장했고, 가끔씩 스스로 정이 넘쳐서라고 생각하는 거칠고 심술맞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은 사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약해지는 마음, 그것을 다잡았을 때 짐짓 내보이는 모습이었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0
엄마는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고 같은 사건이라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듯했다. 엄마는 주변 이웃들과 비교하면 당신이 한층 ‘개화된’―생각과 감정이 더 성숙한―사람이라고 확신했으니 깊이 생각하고 자시고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개화됐다’는 엄마가 가장 애용하는 단어였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0
하지만 나는 엄마의 그 말에 담긴 느낌을 받아들였다. 그 말에 딸려오는 그 모든 표정과 몸짓, 그 안에 담긴 모든 미묘한 욕망과 의도까지도 내 것으로 깊이 흡수했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1
엄마의 말과 생각은 얇고 흰 원단을 선명하게 물들이는 염료처럼 내게 스며들었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2
앞쪽 집에 산다는 건 보통 가장인 남편이 깊디깊은 구렁텅이 같은 뒤쪽 집 남편보다 돈을 더 번다는 걸 의미했지만, 언제나 더 높은 삶의 질을 고집했던 엄마로선 나랏돈 받아먹고 살 형편이 아닌 이상 해 안 드는 뒤쪽 아파트는 일고할 가치도 없었기 때문에 거기 산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그러니까 엄마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 엄마와 내가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공간은 ‘뒤쪽’이었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3
빨랫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옆집 사람을 부르기도 했다. "버사아아, 버사아아, 지금 집에 있어, 버사?" 이 안뜰을 공유하는 건물 전체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은 하루 종일 갖가지 일로 서로를 불러댔다.("하비 언제 병원 데리고 갈 거야?" "집에 설탕 있어? 내가 매릴린 보낼게." "10분 후에 집 앞에서 만나.") 어찌나 인정과 활기가 넘쳤던지! 신선한 공기와 그림자 한 점 없는 쨍한 햇살 속에서 여자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그들의 목소리는 햇볕에서 바짝 마르는 빨래 냄새와 섞이며 이 열린 공간의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만들어냈다. 나는 부엌 창문에 기대 서서 지금까지도 입에서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안뜰을 바라보곤 했다. 그건 연하고 밝은 초록의 맛이었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4
엄마는 살림을 쉽게 척척 해내는 기술이 있고 기운도 넘쳤지만 그걸 지긋지긋해하며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나에게도 집안일일랑 조금도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요리, 청소, 다림질을 배운 적이 없다. 엄마는 지루할 정도로 능숙한 요리사였고, 맹렬한 청소부였으며, 악령 들린 세탁부였다.-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5
다채로운 시도, 참신한 문장력, 거침없는 솔직함. 이 박서련 작가처럼 한국 작가들은 장르, 소재, 나이 또는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무엇이든 쓴다. 그리고 잘 쓴다.-알라딘 eBook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안톤 허 지음) 중에서 - P67
혼이 들어선 안 되는 말, 정말로 혼들이 들어줄지 모를 소원…… 그런 걸 뱉은 다음에, 종이에 쓴 걸 찢어버리듯이.연필을 힘껏 눌러써서 종이에 자국을 남기듯 인선의 음성이 분명해졌다.-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13
바람소리가 거세어질수록 촛불의 움직임이 격렬해진다. 보이지 않는 물체가 불꽃과 천장 사이에 있기라도 한 듯, 기어이 그것에 닿아 사르려는 듯 수직으로 뻗어오른다. 저렇게 긴 불꽃이라면 손가락 하나가 아니라 손 전부로 중심을 통과할 수도 있을 거다.-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23
열려 있는 자신의 캄캄한 방으로 나아가는 인선의 뒷모습을 나는 지켜본다. 마당에서 다시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 방수포가 펄럭이는 소리, 새된 휘파람 같은 바람소리 사이로 그녀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내딛는다. 눈 대신 몸 어딘가의 촉수를 사용하는 듯 느리고 조용한 동작이다.-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30
눈을 든 순간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어둠이다. 책에 얼굴을 파묻고 읽어가는 동안 이곳이 어디인지 잊은 거다. 그사이 바람이 멎은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곧 부서질 것처럼 덜컹댄 게 언제였느냐는 듯 침묵에 싸인 검은 유리창을 나는 멍하게 올려다본다. 꿈속에서 문득 다른 꿈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 같은 정적이다.-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42
눈을 뜨자 여전한 정적과 어둠이 기다리고 있다.보이지 않는 눈송이들이 우리 사이에 떠 있는 것 같다. 결속한 가지들 사이로 우리가 삼킨 말들이 밀봉되고 있는 것 같다.-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52
인선의 눈동자에서 불꽃과 그을음이 함께 타고 있다. 그걸 눌러 끄듯 그녀가 눈을 감는다. 다시 그녀의 눈꺼풀이 열렸을 때는 더이상 그 불이 타고 있지 않다.-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61
소리가 그칠 때까지 우리는 입을 열지 않는다. 물살이 잦아들듯 소리가 희미해진다. 차츰 음량이 낮아져 휘발하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속삭이다 말고 문득 잠든 사람의 얼굴처럼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63
내려가고 있다.수면에서 굴절된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중력이 물의 부력을 이기는 임계 아래로.-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78
정적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본다.더 내려가고 있다.굉음 같은 수압이 짓누르는 구간, 어떤 생명체도 발광하지 않는 어둠을 통과하고 있다.-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92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는 걸까, 나는 생각한다. 이 정적이 내 꿈의 바다 아랜가.무릎까지 차올랐던 그 바다 아래.쓸려간 벌판의 무덤들 아래.-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97
나는 몸을 일으킨다.내가 든 촛불을 통과한 인선의 엷은 그림자가 책장 옆의 흰 벽 위로 드리워져 있다. 벽으로 다가서자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초를 들지 않은 손으로 바랜 벽지를 쓸어나가 인선의 얼굴이 있던 자리에 얹어본다. 그 서늘한 벽의 단단함이 이 이상한 밤의 비밀을 알게 해줄 것처럼. 내가 등지고 있는 고요한 인선이 아니라, 사라진 그림자에게만 물을 수 있는 말이 있는 것처럼.-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298
더 깊게 입을 벌린 해연海淵의 가장자리,어떤 것도 발광하지 않는 해저면인가.-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12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1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집의 어둠 속에서, 그 으스러지는 포옹이 계속될수록 점점 엄마와 나의 몸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어. 얇은 피부, 그 아래 한줌 근육, 미지근한 체온과 혼란이 나의 것들과 뒤섞여서 한덩어리가 되었어.-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2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7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나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거나 실제로 미쳤을 거야. 심장이 쪼개질 것같이 격렬하고 기이한 기쁨 속에서 생각했어. 너와 하기로 한 일을 이제 시작할 수 있겠다고.-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29
아버지가 십오 년 동안 형무소에도 있고 저 건너에도 있었던 것이.책상 밑에서 내가 무릎을 구부리는 동시에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도 있었던 게.네가 꾼 꿈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캄캄한 어항 속 지느러미처럼 어른거리던 그림자가.-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33
아직 사라지지 마.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하지만 네 손이 잡히지 않는다면, 넌 지금 너의 병상에서 눈을 뜬 거야.다시 환부에 바늘이 꽂히는 곳에서. 피와 전류가 함께 흐르는 곳에서.-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35
숨을 들이마시고 나는 성냥을 그었다. 불붙지 않았다. 한번 더 내리치자 성냥개비가 꺾였다.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알라딘 eBook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지음) 중에서 -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