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을 덮은 천의 클로로포름을 빨아들이듯 나는 그 여자들을 빨아들였다. 무려 30년이 흐른 후에야 내가 그들을 얼마나 이해했었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8

둘이서 하는 일 중에 가장 좋은 건 옛날이야기 하기다.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콘필드 아줌마 기억나? 그 이야기 해주셔." 엄마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몇 번이나 했던 이야기를 또 시작한다.(엄마가 싫어하는 건 현재다. 엄마는 현재가 과거가 되는 순간, 즉시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엄마가 하는 그때 그 시절 이야기들은 오려 붙인 듯 똑같기도 하고 사뭇 다르기도 한데, 그건 내가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기도 하고 지난번에는 묻지 않았던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4

그들 또한 우리 사이에선 그림자와 같았다. 관리인과 그의 아내도 말수가 적었다. 누구에게도 먼저 말 거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이건 다수 안에서 소수가 살아남는 방식일 것이다. 소수자는 저절로 침묵하게 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9

사회적 자아라는 외피와 남들이 모르는 자기 자신이라는 본질 사이에 넉넉한 공간이 있었던 엄마는, 그 안에서 당신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상냥하면서도 냉소적이었고 예민하면서도 대범했으며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서도 꼬장꼬장했고, 가끔씩 스스로 정이 넘쳐서라고 생각하는 거칠고 심술맞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은 사실 당신이 가장 두려워하던 약해지는 마음, 그것을 다잡았을 때 짐짓 내보이는 모습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0

엄마는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고 같은 사건이라도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듯했다. 엄마는 주변 이웃들과 비교하면 당신이 한층 ‘개화된’―생각과 감정이 더 성숙한―사람이라고 확신했으니 깊이 생각하고 자시고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개화됐다’는 엄마가 가장 애용하는 단어였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0

하지만 나는 엄마의 그 말에 담긴 느낌을 받아들였다. 그 말에 딸려오는 그 모든 표정과 몸짓, 그 안에 담긴 모든 미묘한 욕망과 의도까지도 내 것으로 깊이 흡수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1

엄마의 말과 생각은 얇고 흰 원단을 선명하게 물들이는 염료처럼 내게 스며들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2

앞쪽 집에 산다는 건 보통 가장인 남편이 깊디깊은 구렁텅이 같은 뒤쪽 집 남편보다 돈을 더 번다는 걸 의미했지만, 언제나 더 높은 삶의 질을 고집했던 엄마로선 나랏돈 받아먹고 살 형편이 아닌 이상 해 안 드는 뒤쪽 아파트는 일고할 가치도 없었기 때문에 거기 산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그러니까 엄마와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 엄마와 내가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공간은 ‘뒤쪽’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3

빨랫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옆집 사람을 부르기도 했다. "버사아아, 버사아아, 지금 집에 있어, 버사?" 이 안뜰을 공유하는 건물 전체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은 하루 종일 갖가지 일로 서로를 불러댔다.("하비 언제 병원 데리고 갈 거야?" "집에 설탕 있어? 내가 매릴린 보낼게." "10분 후에 집 앞에서 만나.") 어찌나 인정과 활기가 넘쳤던지! 신선한 공기와 그림자 한 점 없는 쨍한 햇살 속에서 여자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그들의 목소리는 햇볕에서 바짝 마르는 빨래 냄새와 섞이며 이 열린 공간의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만들어냈다. 나는 부엌 창문에 기대 서서 지금까지도 입에서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안뜰을 바라보곤 했다. 그건 연하고 밝은 초록의 맛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4

엄마는 살림을 쉽게 척척 해내는 기술이 있고 기운도 넘쳤지만 그걸 지긋지긋해하며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나에게도 집안일일랑 조금도 가르치지 않았다. 나는 요리, 청소, 다림질을 배운 적이 없다. 엄마는 지루할 정도로 능숙한 요리사였고, 맹렬한 청소부였으며, 악령 들린 세탁부였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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