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충격을 받은 듯 내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했다. 나는 두 사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안에서 느꼈다. 네티를 느끼고 신부를 느꼈다. 내가 그 가슴이고 내가 그 손이었다. 나는 네티의 쾌락이고 고통이었다. 나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 약한 떨림은 후들거림이 되고 곧 사시나무 같은 세찬 떨림이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10

자전거를 타면 기분만큼은 더 자유롭고 용감해졌다. 낯선 나라를 여행하는 똑똑한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거리는 내가 익히 아는, 내 것이었다―거리는 인간들의 상호 교환이 이루어지는 곳, 사람들의 지혜가 있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나만의 세계를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원은 무엇이었을까? 프랑스 화가 앙리 루소의 그림이 내가 느끼는 공원의 이미지를 그대로 나타내준다. 나는 원초적 자연이 살아 있는 정글을 모방하여 신중하게 조성한 도시의 풍경에서 야생적이고 원초적인 세계를 엿보았다. 그곳에 있는 나는 그 세계의 반대였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수다 떠는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스스로를 상상할 수 없던 어린 유대인 소녀일 뿐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12

도시 소녀인 우리도 따뜻한 봄날 오후가 되면 평소보다 자전거 속도를 내어 멀리까지 내달리곤 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바람과 자극은 우리 안에서 막 꽃피기 시작한 그 아릿한 감각과도 닮아 있었다. 빛과 속도가 우리를 환희로 채운다. 평소보다 더 세고 거칠게 페달을 밟는다. 달콤하면서 겁도 조금 난다. 깜짝 놀란 몸의 감각들이 일순간에 폭발할 것 같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12

일종의 비애, 슬픔과 무력감. 문득 의자에 묶여서 페이즐리 무늬 침대보 위의 엄마와 신부를 바라보던 다섯 살의 리처드가 떠올랐다. 아이는 그날 밤 이후로 현명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아이는 엄마가 힘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굴욕과 부끄러움을 교환하고 있었다는 걸 알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제 자기가 아는 것을 실험해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2

그림의 의미가 그제야 보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작품에 힘을 주는 건 집중력이구나. 내 안의 공간이 넓어진다. 내 안의 직사각형 공간 속으로 빛과 공기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곳에서 사고가 명징해지고 언어가 풍부해지고 지성이 작동을 개시한다. 외로움, 불안, 자기연민으로 가득했던 내면의 공간이 놀데의 꽃을 보며 점점 확장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3

그 공간이란 뭘까. 내 이마 한복판에서 시작돼 가랑이에서 끝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 공간은 내 몸만큼 넓기도 하고 화살구멍만큼 좁아지기도 한다. 생각이 자유롭게 흐르는 날이면,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할수록 명확해지는 날이면 감사하게도 이 공간은 무한히, 아름다운 날씨처럼 확장된다. 그러나 불안과 자기연민이 치고 들어오는 날이면 쪼그라든다. 얼마나 삽시간에 쪼그라드는지! 이 공간이 넓어져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 나는 그 안의 공기를 맛보고 또 느낀다.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호흡한다. 마음은 평화롭고 기대감에 차서 사는 게 즐겁고 어떤 영향력이나 위협에서도 놓여난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건드릴 수 없을지니. 나는 안전하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생각과의 전쟁에서 지면 경계선은 좁아지고 공기는 오염되고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다. 사방이 수증기와 안개뿐이다. 숨쉬기가 어려워진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4

오늘은 창창한 날, 예감이 좋은 날이다. 어딜 가건, 무엇을 보건, 내 눈이 무엇을 보고 내 귀가 무엇을 듣건 간에 내 안의 공간이 넓게 열리며 빛이 가득 들어온다. 나는 생각하고 싶다. 아니, 그러니까 오늘은정말로 생각을 하고 싶다. 그 욕망이 ‘몰입’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드러낸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5

엄마를 만나러 간다. 거의 날아갈 듯 몸과 마음이 가볍다. 나는 날고 있다! 엄마에게도 내 안에서 터져 나오는 이 긍정의 기운을 나눠주고 싶다. 불타오르는 생의 환희, 살아 있음에서 오는 행복감을 심어주고 싶다. 그래도 엄마는 내 가장 오래된 친구가 아닌가. 이 순간,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 엄마까지 사랑할 수 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5

내 안의 공간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벽이 무너진다. 숨쉬기가 곤란해진다. 천천히 침을 꼴깍거리며 중얼거린다.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는 참 딱 적당할 때 적당한 말을 할 줄 안다니까. 놀라워. 그것도 재능이야. 숨통을 콱 막히게 해."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5

하지만 엄마는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지금 비꼬고 있는 줄도 모른다. 지금 나를 나자빠지게 했다는 것도 전혀 모른다. 내가 엄마의 불안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엄마의 우울함에 완패해버렸다는 사실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어떻게 알겠는가? 엄마는 내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데. 엄마한테 말할까. 그건 죽음과도 같다고, 내가 여기 있는 걸 엄마가 모른다는 게, 절망과 혼란만이 가득한 눈으로 그저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서른일곱 살 먹은 이 여자아일 못 본다는 게 슬퍼서 죽고 싶어진다고 말을 할까? 엄마는 또다시 언성을 높이겠지. "넌 날 이해 못해. 여지껏 한 번도 이해한 적이 없어!"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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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왼쪽 귓속에서 온 세상의 개들이 짖었기 때문에
동생 테오가 물어뜯기며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귀를 잘라버렸다

손에 쥔 칼날 끝에서
빨간 버찌가
텅 빈 유화지 위로 떨어진다

한 개의 귀만 남았을 때
들을 수 있었다
밤하늘에 얼마나 별이 빛나고
사이프러스 나무 위로 색깔들이 얼마나 메아리치는지

왼쪽 귀에서 세계가 지르는 비명을 듣느라
오른쪽 귓속에서 울리는 피의 휘파람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커다란 귀를 잘라
바람 소리 요란한 밀밭에 던져버렸다
살점을 뜯으러 까마귀들이 날아들었다

두 귀를 다 자른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멍청한 표정으로 내 자화상을 바라본다

-알라딘 eBook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지음) 중에서 - P9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
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
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진은영 지음) 중에서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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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사전에 있는 그 단어는 사랑이 아니었다.사랑이었다. 가장 높은 차원에 있는, 영혼의 고귀한 본질, 윤리적 사명 자체였다. 존재하면 오해할 수 없고 부재할 때도 오해할 수 없는 확실한 감정이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32

커너 부부가 있다. 서로 미워하는 듯하지만 닫힌 문 안에서 성적 쾌락에 몸을 떠는 부부. 그리고 우리 부모님이 있다. 서로 지극히 사랑하지만 침대를 문도 없는 방에 놓고 순결하게 사는 부부. 아래층에는 아수라장 같은 집에서 거실로 도피하는 남편과 반쯤 미친 몽상가 아내가 있다. 위층에는 병영 막사처럼 말끔한 집에 가정의 중심인 남편과 야무지고 자기주장이 강한 아내가 있다. 이런 차이들이 내게 특별히 각인되지는 않았다. 여자들 간의 차이는 그다지 놀랍거나 결정적인 무언가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에게 입력된 사실은 커너 아줌마나 우리 엄마나 낭만적인 감정을 유난히 소중히 여겼고 두 사람 모두 결혼한 여자였다는 것뿐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39

4월의 흐린 오후였다. 회색 하늘이지만 기온은 적당히 따뜻하고 공기에는 새봄의 달콤한 향내가 가득하다. 정확히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지만 왠지 들뜨고 설레는 기분이 들게 하는 그런 종류의 날씨다. 이맘때면 찾아오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일〔1943년 4월 19일 폴란드 유대인 강제거주지역의 유대인들이 나치 독일에 대항해 일으킨 대규모 무장투쟁〕이기도 하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1

엄마가 바라는 것들은 단순하지만 절대 타협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엄만 그것들을 물이나 공기처럼 필수 불가결한 무언가로 여긴다. 커피를 마시고 싶으면 지금 당장 마셔야만 한다. 엄마가 ‘해야겠다’고 한 욕구는 반드시 채워져야 하고 지금 당장 입술로 가져갈 수 있는 김 나는 음료가 손에 쥐여지기 전까지는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할 리 없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2

우울하게도 내게는 참으로 익숙한 과정이다. 엄마를 곁눈질로 흘깃 본다. 나만의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엄마도 낙관에서 비관으로 갑작스럽게 우회하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나와 똑같이 겪고 있는 것 같다. 뺨에 잠깐 동안 생기가 돌았다가 눈은 놀란 듯 커지고 입꼬리는 밑으로 처진다. 나는 궁금하다. 엄마가 나를 볼 때도 같은 걸 볼까. 그날의 분위기는 위험할 정도로 꺼림칙해지기 시작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7

이런 순간엔 우리가 모녀라는 게 마치 외계인이 전달한 메모처럼 충격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우리는 엄마와 딸이맞고,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혈연이니 효도니 하는 단어는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반대로 가족이라는 개념,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 가족의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과연 그런 진실이 존재하나 싶어진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 자신을 불운한 운명(엄마는 과부 나는 이혼녀다)을 타고난 무능력한 두 여자, 스스로 행복한 가정이라는 실체를 꾸릴 수 없게 되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다 쇼윈도 앞에 서면 ‘행복한 가정’이란 건 내 안에서도, 엄마 안에서도 실현되지 못한 한 조각 환상처럼 느껴진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58

레이스 뜨기는 그저 미적지근하게 곁에 두는 사람, 불안하거나 편안하거나 희망에 차거나 긴장하거나 기분이 들뜰 때나 가라앉을 때 언제나 손 닿는 곳에 있는 한결같은 친구라 할 수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65

엄마의 비애는 너무도 원초적이어서 생활을 전부 지배해버렸다. 슬픔은 공기 속에서 산소만 빨아들였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 머리와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그저 원치 않는 곳으로 질질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우리 셋, 그러니까 오빠 나 엄마 중 누구도 서로에게서 평온과 안정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같은 유배지에 갇혀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었다. 난생처음 외로움이란 감정이 나의 의식을 장악한 채 놓아주지 않았고 그럴 때면 나는 고개를 바깥세상의 거리로 돌려 구슬프고 몽환적인 내적 망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것만이 언제나 손에 잡힐 듯 감지되던 상실감과 패배감에서 빠져나와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68

내 공상은 대체로 ‘이렇게 가정해보자’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그 뒤에는 이 구차한 현실에서 나를 구원해줄 이야기가 이어지기보다는 ‘대의’를 품은 상상들이 뒤따랐다. 이런 식이었다. 모든 일은 언제나 나쁘게 끝나지만 그 비극 안에도 위엄이란 게 있지 않을까. 내가 쓰는 이야기의 요점은 명확하다. 인생은 비극이라는 것. ‘비극 안에’ 머물면 인생이라는 지루하고 빈곤한 고통에서 구출될 수 있다. 사실 인생이란 게 전부 무의미해 보이기도 했다. 무의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내가 알기론 가장 중요했다. 의미를 찾는 게 곧 구원이었다. 그것이 미숙한 십대 작가가 떠올릴 수 있는 첫 문장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신화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69

만약 샤피로 아줌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어두워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 입에서 이 말들이 나왔을 땐인정 넘치게 지독하고,후덕하게 짜증스럽다. 가끔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는 순간에 우리 인생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74

엄마는 이내 조용해진다. 엄마는 작년인가부터 속을 알 수 없는 오묘한 태도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허공을 바라본다.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한 아득한 표정 속에 홀로 머문다. 그러나 이번의 혼자는 내게 무척 익숙한 그 혼자, 얼굴을 냉소적이고 불행한 가면으로 만들어 그 뒤에 숨거나 당신의 아픔과 실망을 하염없이 헤아리고 있을 때의 혼자와는 다르다. 이 혼자에는 슬픔이 아닌 온화함이 깃들어 있다. 호기심과 흥미는 있어도 자기연민은 없다. 엄마의 눈이 가늘어진다는 건 엄마가 이미 아는 것을 조금 더 명확히 보고 싶어한다는 것, 이제껏 살아온 삶에 집중하고 싶어한다는 의미다. 엄마는 진실을 알려준 꿈에서 깬 것처럼 몸을 흔들면서 말한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지." 엄마는 나직하게 말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76

엄마는 원시적인 상실감에 완전히 소진되어 모든 슬픔을 안으로 흡수했다. 모두의 슬픔이 당신의 슬픔이 되었다. 아내의 슬픔, 엄마의 슬픔, 딸의 슬픔을 완전히 독차지했다. 비탄은 엄마를 가득 채웠고 또 엄마를 비우기도 했다. 엄마는 핏줄이고 도관이고 발현이었다. 그 놀라운 유동성, 감각적이고 까다로운 가변성은 이제 엄마의 것이었다. 엄마는 헝겊 인형이 되어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초점 잃은 눈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고 반쯤 열린 입에선 혀가 나와 있고 팔은 축 늘어져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바짝 긴장하며 경계 태세를 갖춘다. 눈은 날카로워지고 이마는 땀으로 젖고 목에선 불거져 나온 동맥이 펄떡거린다. 2분 후에는 다시 헝겊 인형처럼 쓰러져 소파 위에서 몸부림치다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진다. 피부는 분필처럼 퍼석해진 채 눈은 질끈 감고 입은 꾹 다문다. 그 상태가 몇 시간 동안 이어진다. 며칠이 간다. 몇 주가 지난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78

"하지만 이 책에 배울 것 하나 없다고 말하지는 마. 알맹이라곤 없는 책이라고 말하지도 말고. 엄마한테도, 나한테도, 책에도 그렇게까지 나쁘게 말할 건 없잖아.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우리 모두를 업신여기는 것밖에 안 돼." 내 말을 들어보라. 이렇게 현명하고 지혜롭다니. 이 모든 지혜를 10분 전에 얻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0

남편을 여읜 처지는 엄마를 더 고귀한 인간 존재로 승격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엄마는 아빠의 죽음에서 회복되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부엌일하던 시절에는 가져본 적 없던 당신의 타고난 진지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후 30년을 한결같이 바로 그 진지함에 헌신했다. 지치지도 않았고 지루해하지도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진지함이 가져다준 낙을 유지할 새로운 방법들을 끊임없이 찾아냈고 영락없이 그걸 당신 것으로 만들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3

내가 숨 쉬는 공기는 엄마의 절망 안에 푹 담겨 있다 나오면서 진해지고 의기양양해지며 자못 흥미롭고도 위험한 것이 되었다. 엄마의 고통은 나를 구성하는 요소, 내가 거주하는 국가, 내가 바짝 엎드려 따라야 하는 법과 규칙이 되었다. 나를 지휘하고 통솔하면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하게 했다. 나는 끊임없이 엄마에게서 벗어나기를 갈구했지만 엄마가 방에 있을 때면 한 시도 그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엄마의 퇴근을 두려워하면서도 엄마가 귀가하면 잠시도 집을 떠나지 않았다. 엄마의 존재가 내뿜는 불안은 내 허파를 부풀어 오르게 했다(물리적으로 심장이 조여들었고 가끔은 쇠갈고리가 골을 파고드는 느낌까지 들었다). 욕실 문을 잠그고 혼자 숨어서 엄마를 대신해 하염없는 눈물을 쏟았다. 금요일이면 꼬박 이틀간 이어질 게 뻔한 눈물과 한숨, 불씨가 꺼져도 식식거리며 새어 나오는 연기 같은 엄마의 우울증이 공기 중에 내뿜는 묘한 책망의 기운에 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죄책감 속에서 일어나 죄책감 속에서 잠들었고 주말이면 죄책감이 점점 더 쌓여가다 얕은 열병에 걸린 상태가 되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4

묘지를 찾으면 엄마는 그 위에 쓰러지듯 몸을 던져 드디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를 연출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엄마는 낡아빠진 헝겊 인형 꼴이 되어 있다. 나는 어땠을까? 혼이 나가 입도 뻥긋 못하고 그저 몇 시간 전의 공포에서 살아남았음에 감사한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5

나는 엄마로 뒤덮여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나 있다. 내 위아래에 있고 내 바깥에 있고 나를 뒤집어봐도 있다. 엄마의 영향력은 마치 피부조직의 막처럼 내 콧구멍에, 내 눈꺼풀에, 내 입술에 들러붙어 있다. 숨을 쉴 때마다 엄마를 내 안에 들였다. 나는 엄마라는 마취제를 들이마시고 취했고 풍요로우면서도 밀실처럼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엄마의 존재감, 엄마라는 실체, 숨통을 틀어쥐는 고통받는 여성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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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랫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면서 옆집 사람을 부르기도 했다. "버사아아, 버사아아, 지금 집에 있어, 버사?" 이 안뜰을 공유하는 건물 전체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은 하루 종일 갖가지 일로 서로를 불러댔다.("하비 언제 병원 데리고 갈 거야?" "집에 설탕 있어? 내가 매릴린 보낼게." "10분 후에 집 앞에서 만나.") 어찌나 인정과 활기가 넘쳤던지! 신선한 공기와 그림자 한 점 없는 쨍한 햇살 속에서 여자들은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그들의 목소리는 햇볕에서 바짝 마르는 빨래 냄새와 섞이며 이 열린 공간의 다양한 질감과 색감을 만들어냈다. 나는 부엌 창문에 기대 서서 지금까지도 입에서 맛볼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안뜰을 바라보곤 했다. 그건 연하고 밝은 초록의 맛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1

그 부엌, 그 창문, 그 안뜰. 그것은 엄마가 뿌리를 내린 대기였고 엄마가 서 있던 배경이었다. 이곳에서 엄마는 똑똑하고, 웃기고, 활기 넘쳤고, 권위와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엄마는 당신을 둘러싼 환경을 경멸했다.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2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를 굶주린 사람처럼 붙들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 했다. 어떻게 그처럼 처절하게 분열된 삶에 당신의 모든 감정을 쏟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무슨 수로 엄마의 감정에 감정을 쏟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3

아침에는 수동적이고, 오후에는 반항적이던 엄마는 매일 새로 만들어졌다가 매일 풀어져버리는 사람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재료를 굶주린 사람처럼 붙들고 스스로 창조한 세계에 애정을 보이다가도 일순간 어쩔 수 없이 이 생활로 끌려온 부역자처럼 느끼곤 했다. 어떻게 그처럼 처절하게 분열된 삶에 당신의 모든 감정을 쏟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나라고 무슨 수로 엄마의 감정에 감정을 쏟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알라딘 eBook <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중에서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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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정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생각의 형태, 즉 이야기를 통해 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만약 내가 성이 없거나 또는 양성을 가진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사고 실험을 쓴다면 어떨까?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 <어둠의 왼손 -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01>, 어슐러 K. 르 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6754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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