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의 안과 밖이 시간적으로 따로 노는 거 같아. 시간이 흐르 는 방식이 서로 다른 거야. 집 안에서는 시간이 계속 흘러가는데바깥에 나와 보면 그게 그냥 한순간이야."
"뭐?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쇼타는 다시 편지를 지그시 들여다본 뒤에 아쓰야에게로 얼굴 을 들었다.
"이 집에 아무도 접근한 적이 없는데 고헤이의 편지는 사라졌고 달 토끼한테서는 그 편지에 대한 답장이 왔어. 원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잖아. 자, 그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누군가 고헤이의 편지를 가져갔고 그것을 읽은 뒤에 답장을 던져두고 갔다. 그런데 그 누군가의 모습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48p)

삼분 삼십 초쯤을 들여 그 곡을 연주했다. 체육관 안은 고요히가라앉았다. 하모니카 연주를 마치기 직전, 가쓰로는 눈을 떴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소녀가 골똘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기때문이다. 그 눈빛은 진지함 그 자체였다. 나잇값도 못하고 가쓰로는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다.
(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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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건 지금까지도 항상 그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철이 들었을 때는 아버지가 안 계셨고 어머니도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살아왔어요.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했습니다. 오늘까지 그랬으니까 분명 내일부터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잃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두렵지도 않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을 소중하게, 앞에서 돌이 날아오면 잽싸게 피하고 강이 있으면 뛰어넘고, 뛰어넘지 못할 때는 뛰어들어 헤엄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흐름에 몸을 맡길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을 때 뭔가 하나라도 내 것이 있으면 되니까요. <녹나무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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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금기에도 차례차례 도전해서 야나기사와 그룹의 사카모토 료마8라고도 하지요. <녹나무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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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고 살펴보니 케이스 안에 명함이 들어 있었다. 인쇄되어 있는 내용을 보고 레이토는 흠칫 놀랐다. ‘월향신사 종무소 관리주임 나오키 레이토’라고 찍혀 있었다. <녹나무의 파수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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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만난 레이토는 한창 개구쟁이 초등학생으로 커 있었다. 투병생활을 지켜보았기 때문인지 엄마의 죽음에 당황한 기색은 없었다. 후미는 치후네를 "옛날에 엄마와 할머니가 신세를 졌던 사람이야"라고 소개했다. 레이토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눈꼬리가 살짝 처진 게 미치에를 꼭 닮은 모습이었다.
이 아이를 만날 일은 아마 더 이상 없겠구나―.
그때 치후네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받아들고 살펴보니 케이스 안에 명함이 들어 있었다. 인쇄되어 있는 내용을 보고 레이토는 흠칫 놀랐다. ‘월향신사 종무소 관리주임 나오키 레이토’라고 찍혀 있었다.

기존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금기에도 차례차례 도전해서 야나기사와 그룹의 *사카모토 료마라고도 하지요.
* 坂本龍馬. 1835~1867. 일본 에도시대 말기의 정객. 막부 시대를 종식시키고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건 지금까지도 항상 그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철이 들었을 때는 아버지가 안 계셨고 어머니도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살아왔어요. 내 몸은 내가 지켜야 했습니다. 오늘까지 그랬으니까 분명 내일부터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잃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두렵지도 않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을 소중하게, 앞에서 돌이 날아오면 잽싸게 피하고 강이 있으면 뛰어넘고, 뛰어넘지 못할 때는 뛰어들어 헤엄치고, 경우에 따라서는 흐름에 몸을 맡길 겁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죽을 때 뭔가 하나라도 내 것이 있으면 되니까요.

유미가 오디오 스위치를 켰다. 곧바로 흘러나온 것은 J-POP도 K-POP도 서양 노래도 아니었다. 곡명은 전혀 모르지만 클래식이라는 건 레이토도 알 수 있었다.

고민하던 참에 만난 것이 연극이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주인공 역할을 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평생 조연밖에 못할 것 같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든 저마다 자기 자리가 있었다. 그것이 연극의 세계였다.

그런 기쿠오를 다카코는 내내 지켜봐주었다. 음악의 길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보다 그녀가 가슴 아팠던 것은 자신이 아들의 인생을 일그러뜨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념(疑念)이었다. 피아노나 음악은 단순한 취미로 하라고 했더라면 좀 더 즐겁고 풍성한 청춘을 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부터라도 아들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해주자, 그게 어떤 것이든 남에게 해 끼치는 일만 아니라면 끝까지 응원해주자, 라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모범생 환자였어요." 요양원 여직원이 도시아키에게 알려주었다. "항상 카드를 몇 장씩 갖고 다니셨어요.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손수 써넣은 카드예요. 우리와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매번 그중 한 장을 꺼내 보여주시는 거예요."
귀가 안 들리는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커뮤니케이션을 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그렇게까지 회복되었던 건가, 하고 놀랐다.

명백히 인지증이었다. 기쿠오를 돌봐야 한다는 의무감을 놓쳐버리자 다카코를 버텨주고 있던 뭔가가 뚝 끊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언어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 모두를 언어만으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녹나무에게 맡기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믐날 밤에 녹나무 안에 들어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염원합니다. 그것을 저희는 예념(預念)이라고 합니다. 염원을 맡긴다는 뜻이지요. 예념을 하는 사람은 예념자라고 합니다. 녹나무는 예념자의 그 모든 생각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보름날이 다가오면 그것을 뿜어냅니다. 그때 녹나무 안에 들어가면 그 염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가능한 사람은 혈연관계인 사람뿐이지요. 이런 편지를 남기신 것을 보면 형님께서는 어머님이 받아주시기를 원했던 것 같군요."
야나기사와 치후네는 편지를 도시아키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도 기쿠오는 다시 음악에의 길을 찾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연주 같은 건 할 수 없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라면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다. 기억에 남은 피아노 소리를 되살려 하나하나 짜맞추면서 이 곡을 만든 것이다.
다카코를 위해서. 지금까지 자신을 뒷받침해준 어머니에게 바치기 위해서.
이 소리를 들어주었으면 하고 기쿠오는 그 편지를 남겼던 것이다. 녹나무에 맡겼던 것은 후회와 감사의 마음뿐만이 아니었다. 기쿠오가 가장 전하고 싶었던 것은 이 선율이었다.

"아버님은 믿으셨던 거예요. 설령 염원이 전해지지 않더라도 내 아들이라면 자신의 모든 생각을 이어가줄 것이라고."

"네,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곳이 과연 어떤 세계인지, 치후네 씨도 아직은 알지 못하잖아요. 잊어버렸다는 자각도 없다면 그곳은 절망의 세계 같은 게 아니죠.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세계예요. 데이터가 차례차례 삭제된다면 새로운 데이터를 자꾸자꾸 입력하면 되잖아요. 내일의 치후네 씨는 오늘의 치후네 씨가 아닐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뭐, 그래도 좋잖아요? 나는 받아들입니다. 내일의 치후네 씨를 받아들일 거예요. 왜요, 그러면 안 됩니까?"

"지금의 내 기분을 예념하고 싶네요. 언어 같은 걸로는 안 돼요. 녹나무를 통해 치후네 씨에게 전하고 싶다고요."
"고마워요. 하지만 녹나무의 힘은 필요 없어요. 방금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져오는 게 있다는 걸."
치후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여윈 손을 레이토는 두 손으로 감쌌다.
치후네의 마음이, 염원이, 전해져오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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