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 카이스가 축축한 땅 위에 몸을 눕히자, 대지의 지쳐빠진 심장 박동이 모래 알갱이를 지나 그의 몸 구석구석에 전달되었다. 몸을 눕혀 가슴을 땅에 댈 때마다 그는 대지의 박동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대지의 심장이, 그가 그곳에 몸을 눕힌 첫 순간부터, 지옥의 심연으로부터 빛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것만 같았다. - P9

아부 카이스, 나무는 단지 네 머릿속에, 너의 지치고 나이 든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거야. 매년 봄마다 올리브와 돈을 가져오는 밑동이 뒤틀린 열 그루의 나무는 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거야. 쿠웨이트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아. - P17

δύσβατος γέ τις ὁ τόπος
φαίνεται καὶ ἐπίσκιος.
ἔστι γοῦν σκοτεινὸς καὶ
δυσδιερεύνητος.
이곳은 어느 쪽으로도
발을 내디디기 힘든 장소야.
사방이 어두침침해서,
무엇을 찾기도 힘든 곳일세.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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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u Qais rested on the damp ground, and the earth began to throb under him with tired heartbeats, which trembled through the grains of mud and penetrated the cells of his body.
Every time he threw himself down with his chest to the ground he sensed that throbbing, as though the heart of the earth had been pushing its difficult way towards the light from the utmost depths of hell, ever since the first time he had lain there.
Once when he said that to his neighbor, with whom he shared the field in the land he left ten years ago, the man answered mockingly:
"Its the sound of your own heart. You can hear it when you lay your chest close to the ground."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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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예감은 결국 현실로 닥쳐왔다.

진평강 하류에 떠내려온 두 사람의 시신을 처음 발견하고 신고한 건 여름 보충수업에 등교 중이던 진평고 학생들이었다. 두 남녀의 시신은 엉켜 있어 끌어안고 있는 듯 보였고 사체를 뜯어먹는 다슬기가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8월 초 무더운 여름날 높은 수온으로 부패가 빠르게 진행된 상태였다. 남자는 진평 소방서 구조대 반장 최창석이었고 여자는 작년에 진평으로 이사 와 미용실을 운영하던 전미영이었다. - <급류>, 정대건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eb9e7aa6e3e04ec4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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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대조적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세계 정치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활용했다. 이 운동은 테오도어 헤르츨이나 하임 바이츠만처럼 고등 교육을 받은 동화된 유대인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시작된 것으로, 또한 미국에 깊은 뿌리를 두고 폭넓은 연계에 의지했다. 내 아버지가 압둘라 국왕과 만나기 몇십 년 전부터 확립된 뿌리와 연계였다.
다비드 벤구리온과 훗날의 이스라엘 2대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는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미국에서 몇 년간 생활하면서 시온주의 대의를 위해 활동했다. 골다 메이어는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살았다.
한편 팔레스타인 지도부 가운데는 어느 누구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내 아버지가 우리 집안에서 처음 미국을 방문한 사람이다.) 시온주의 지도부가 대부분 유럽을 비롯한 서구 사회 태생이거나 그 나라 시민으로서 그 사회들을 정교하게 파악한 것과 비교하면,
아랍 지도자들은 이제 막 부상하는 두 초강대국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 각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에 대해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 P109

1947년 클레먼트 애틀리Clement Attlee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새로 만들어진 유엔에 맡겼고, 유엔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ssion on Palestine, UNSCOP를 만들었다. 유엔을 지배하는 강대국은 미국과 소련이었는데, 시온주의 운동은 양국을 향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면서 재빠르게 이런 변화에 대비한 반면,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후 국제적 힘의 재조정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의 활동과, 소수인 유대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제안한 다수 의견 보고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고서의 제안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이었는데, 1937년 필위원회 분할안에서 제안한 유대 국가의 규모가 훨씬 작은 17퍼센트였던 것과 대비되었다.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 다수 의견 보고서의 결과물인 유엔 총회 결의안 제181호를 작성하는 데 압박이 가해진 사실에서도 이런 힘의 재조정이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 P111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 제181호가 통과된 것은 새로운 국제적 세력 균형이 반영된 결과였다.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넓은 유대 국가와 좁은 아랍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국제적인 분할체corpus separatum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미국과 소련은 이제 팔레스타인인을 희생시키면서 유대국가가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만드는데 분명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의안은 또 다른 선전포고로서, 여전히 아랍인이 다수인 땅 대부분에서 유대 국가에 국제적인 출생증명서를 안겨 주었다. 유엔헌장에 소중히 새겨진 자결권의 원리를 노골적으로 위반한 행동이었다. - P112

유엔이 분할을 결정하면서 시온주의 운동의 군사·민간 구조는 전후 시대에 등장한 두 초강대국의 지지를 받았고, 최대한 넓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닥친 재앙은 그들 자신과 아랍이 약하고 시온주의가 강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런던, 워싱턴 D.C., 모스크바, 뉴욕, 암만 등 여러 머나먼 곳에서 벌어진 사건의 결과이기도 하다. - P112

나크바는 마치 열차 사고가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몇 달에 걸쳐서 펼쳐졌다.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수립될 때까지의 첫번째 단계에서… - P1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와 이후에 이렇게 바뀐 여론은 미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계산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개인적 친분과 측근 보좌관들의 영향 때문에 시온주의로 기울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시온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이 국내 정치에서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루스벨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 국왕을 만나서 지지를 약속한 지 불과 9개월 뒤인 1945년 11월, 트루먼은 이런 대대적인 변화의 배후에 놓인 동기를 퉁명스럽게 드러냈다. 한 무리의 미국 외교관들이 공공연하게 친시온주의 정책을 추구하면 아랍세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가 해를 입을 것이라고 선견지명 있게 경고하자, 대통령은 이렇게 대꾸했다. 「신사 여러분, 죄송하지만 저는시온주의의 성공을 열망하는 수십만 명에게 응답해야 합니다. 제 유권자들 가운데는 수십만 아랍인이 없어요. - P122

그리하여 이사 알이사는 나크바 이후 베이루트의 망명지에서 쓴 글에서 아랍 통치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아랍의 꼬맹이 왕들이여
너무도 허약하고 내분까지 벌이니
옛날 옛적에 우리는 당신들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우리의 모든 희망은 꺾이고 말았다. - P124

나크바는 갑작스럽게 닥친 집단적 혼란이자, 팔레스타인인이라면 누구나 직접 경험하거나 부모나 조부모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 공유하는 트라우마다.
나크바는 그들의 집단적 정체성에 새로운 초점을 제공한 동시에 가족과 공동체를 깨트리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여러 나라에 흩뜨려 놓았다. 여전히 팔레스타인 안에 남은 이들도 난민이든 아니든 간에 이스라엘, 이집트(가자 지구에 사는 사람들), 요르단(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등 세가지 각기 다른 정치 체제에 종속되었다. 그 후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이런 분산(아랍어로 쉬타트shitat) 상태로 고통받고 있다. - P126

시간이 흐르면서 페르시아만 나라들과 리비아, 알제리 등에서 석유산업이 발전하여 석유와 가스 수출로 인한 소득 비중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현지 주민이 되어 그 나라의 경제와 정부 서비스, 교육 체계를 구축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작가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가 쓴 단편 소설 『불볕속의 사람들 Men in the Sun』의 등장인물들처럼, 팔레스타인인들이 항상 이런 경로를 쉽게 찾은 것은 아니었다. 종종 소외와 고립,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 서류를 들고 국경을 넘으려 할 때면 심지어 비극까지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만 나라들에서 산다고 해도시민권이나 영주권을 받지는 못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나라들에서 거의 평생 동안 살았다고 하더라도 계속 거주하기 위해서는 직장이 있어야 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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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첫 번째 10년간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인과 무척 비슷했고 서로 꽤 편안하게 공존했다. 유대인은 대부분 초정통파이자 비시온주의자였고, 미즈라히mizrahi (동방 출신 유대인)나 세파르디Sephardi(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였으며, 중동이나 지중해 출신의 도시인으로 대개 제2언어나 제3언어라 할지라도 아랍어와 터키어를 구사했다. 유대인과 이웃들은 종교로 뚜렷이 구분되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었고 유럽인이나 외부에서 온 정착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원주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유대인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보았다. 게다가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나 이츠하크 벤츠비Yitzhak Ben-Zvi(한명은 이스라엘 총리가 되고 다른 한 명은 대통령이 된다) 같은 열렬한 시온주의자를 포함해서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일부 젊은 유럽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처음에 현지 사회에 어느 정도 통합되려고 했다. 벤구리온과 벤츠비는 심지어 오스만 제국 국적을 취득하고 이스탄불에서 공부했으며, 아랍어와 터키어를 배웠다. - P40

불과 한 세기 전인 1917년 11월 2일, 영국 내각을 대표해서 외무 장관 아서 제임스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가 작성한 이 중대한 선언-후에 밸푸어 선언이라고 불린다-은 딱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러한 목적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으며, 그로 인해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나 정치적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 P46

의미심장하게도 밸푸어는 압도적 다수의 아랍 주민들(당시 약 94퍼센트)에 대해서는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라고 애매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존재로 서술되었고, 확실히 한 민족이나 집단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67개 단어로 이루어진 선언문에는 <팔레스타인인>이나 <아랍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압도적 다수의 주민들은 정치적·민족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종교적 권리>만을 약속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밸푸어는 당시 이 땅에 거주하는 주민의 극소수-6퍼센트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지칭하면서 민족적 권리를 부여했다. - P47

당시 영국 정부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는 지난 100여 년간 충분히 분석되었다." 여러 동기 가운데는 히브리인에게 성서의 땅을 <돌려준다>는 낭만적이고 종교적인 친유대주의 philo-Semitism적 열망과 영국으로 유입되는 유대인 이민을 줄이려는 반유대주의적 기대가 섞여 있었다. 이런 기대는 <전 세계 유대인>이 새롭게 등장한 혁명 러시아가 계속 전쟁을 벌이게 만들고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일 힘이 있다는 확신과 연결되었다. 이런 여러 충동 외에도 영국은 무엇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염두에 두었으며 전시의 여러 사건을 통해 더욱 강화된 지정학적인 전략적 이유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다른 동기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것이 핵심 동기였다. 영제국을 움직인 것은 절대 이타주의가 <아니었다>. 영국이 전시에 이 지역에 대해 내놓은 여러 약속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 기획을 후원한 것도 영국의 전략적 이해에 완벽하게 기여했다. 그 가운데는 1915년과 1916년에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이 이끄는 아랍인들에게 독립을 약속한 것(후세인-맥마흔 서한에 기술됨)과 1916년 프랑스와 비밀리에 체결한 약속-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협정에서 두 강대국은 아랍 동부 지방을 각자 식민지로 분할하는 데 합의했다. - P48

밸푸어 선언으로 결국 운명이 결정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밸푸어가 신중하게 다듬은 문구가 사실상 그들의 머리를 겨누는 총구였다. 영제국이 원주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수 주민들은 이제 인구나 문화가 거의 아랍 일색인 땅에 유대인이 무제한으로 이민을 와서 숫자로 압도당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런 식으로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밸푸어 선언은 전면적인 식민지 충돌의 신호탄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희생시켜 배타적인 <민족적 본거지>의 건설을 목표로 한, 한 세기 동안 이어지는 공격의 시작이었다. - P49

1922년, 새롭게 구성된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반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했다. 위임통치령은 시온주의 운동에 이례적인 선물이라도 주듯이 밸푸어 선언을 원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 문서는 <일부공동체>에 대해서는 <독립국가로서의 존재를 임시적으로 인정할 수있다>는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계속해서 문서에는 밸푸어 선언의 조항들을 지지한다는 국제적 약속이 제시되어있다. 이 후속 문구에 분명하게 담긴 함의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민족 한 집단에게만 민족적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중동의 다른 모든 위임통치령에서는 규약 22조가 전체 인구에 적용되어 결국 이 나라들에 일정한 형태의 독립이 허용된 것과 대비를 이룬다.
위임통치령 전문의 세 번째 문단에는 유대인, 오직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과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초안 작성자들이 보기에 오스만, 맘루크, 아이유브, 십자군, 아바스, 우마이야, 비잔티움, 그리고 이전 시기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마을, 성지, 성, 사원, 교회, 기념물 등 2,000년에 걸쳐 축조된 이 땅의 환경은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여러 무정형의 종교 집단의 소유물이었다. 물론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역사나 집단적 존재가 전혀없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사회학자 바루크 키멀링Baruch Kimmerling이 말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정치적 살해 politicide>의 뿌리가 위임통치령 전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 민족의 땅에 대한 권리를 뿌리째 뽑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땅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 P60

그는 T. E. 로런스(영화 「아라비아의 로런스)를 영국의 배신을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는 사례로 보았다(다만 로런스가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에서 자신이 아랍인을 기만하고 배신한 행위를 솔직하게 서술한 것을 전쟁 전 예루살렘에서 알았던 영국인 교사와 선교사들의 정직하고 꼿꼿한 자세와 조심스럽게 대조하기는 했다). - P82

밸푸어는 <시온주의가 아랍인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보지 않았고>, 처음에는 시온주의자들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같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릇된 믿음은 머잖아 단단한 현실에 부딪힌다. 보통 전장에서>. 대반란의 전장에서 바로이런 일이 벌어졌고, 영원히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해를 끼쳤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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