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첫 번째 10년간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의 대다수는 여전히 문화적으로 도시에 거주하는 무슬림이나 기독교인과 무척 비슷했고 서로 꽤 편안하게 공존했다. 유대인은 대부분 초정통파이자 비시온주의자였고, 미즈라히mizrahi (동방 출신 유대인)나 세파르디Sephardi(에스파냐에서 쫓겨난 유대인의 후예)였으며, 중동이나 지중해 출신의 도시인으로 대개 제2언어나 제3언어라 할지라도 아랍어와 터키어를 구사했다. 유대인과 이웃들은 종교로 뚜렷이 구분되었지만, 그들은 외국인이 아니었고 유럽인이나 외부에서 온 정착민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슬림이 다수인 원주민 사회의 일부를 이루는 유대인이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으며, 남들도 그렇게 보았다. 게다가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나 이츠하크 벤츠비Yitzhak Ben-Zvi(한명은 이스라엘 총리가 되고 다른 한 명은 대통령이 된다) 같은 열렬한 시온주의자를 포함해서 당시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일부 젊은 유럽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처음에 현지 사회에 어느 정도 통합되려고 했다. 벤구리온과 벤츠비는 심지어 오스만 제국 국적을 취득하고 이스탄불에서 공부했으며, 아랍어와 터키어를 배웠다. - P40
불과 한 세기 전인 1917년 11월 2일, 영국 내각을 대표해서 외무 장관 아서 제임스 밸푸어Arthur James Balfour가 작성한 이 중대한 선언-후에 밸푸어 선언이라고 불린다-은 딱 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폐하의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본거지를 수립하는 것을 찬성하고, 이러한 목적을 신속하게 실현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으며, 그로 인해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나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는 권리나 정치적 지위가 침해되는 일이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히는 바이다. - P46
의미심장하게도 밸푸어는 압도적 다수의 아랍 주민들(당시 약 94퍼센트)에 대해서는 <현재 팔레스타인에 사는 비유대인 공동체>라고 애매한 방식으로 언급하고 지나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무관한> 존재로 서술되었고, 확실히 한 민족이나 집단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67개 단어로 이루어진 선언문에는 <팔레스타인인>이나 <아랍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이 압도적 다수의 주민들은 정치적·민족적 권리가 아니라 <시민적·종교적 권리>만을 약속받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밸푸어는 당시 이 땅에 거주하는 주민의 극소수-6퍼센트에 불과했던 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지칭하면서 민족적 권리를 부여했다. - P47
당시 영국 정부가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는 지난 100여 년간 충분히 분석되었다." 여러 동기 가운데는 히브리인에게 성서의 땅을 <돌려준다>는 낭만적이고 종교적인 친유대주의 philo-Semitism적 열망과 영국으로 유입되는 유대인 이민을 줄이려는 반유대주의적 기대가 섞여 있었다. 이런 기대는 <전 세계 유대인>이 새롭게 등장한 혁명 러시아가 계속 전쟁을 벌이게 만들고 미국을 전쟁으로 끌어들일 힘이 있다는 확신과 연결되었다. 이런 여러 충동 외에도 영국은 무엇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염두에 두었으며 전시의 여러 사건을 통해 더욱 강화된 지정학적인 전략적 이유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지배하기를 원했다. 다른 동기들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것이 핵심 동기였다. 영제국을 움직인 것은 절대 이타주의가 <아니었다>. 영국이 전시에 이 지역에 대해 내놓은 여러 약속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 기획을 후원한 것도 영국의 전략적 이해에 완벽하게 기여했다. 그 가운데는 1915년과 1916년에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이 이끄는 아랍인들에게 독립을 약속한 것(후세인-맥마흔 서한에 기술됨)과 1916년 프랑스와 비밀리에 체결한 약속-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협정에서 두 강대국은 아랍 동부 지방을 각자 식민지로 분할하는 데 합의했다. - P48
밸푸어 선언으로 결국 운명이 결정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는, 밸푸어가 신중하게 다듬은 문구가 사실상 그들의 머리를 겨누는 총구였다. 영제국이 원주민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수 주민들은 이제 인구나 문화가 거의 아랍 일색인 땅에 유대인이 무제한으로 이민을 와서 숫자로 압도당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했다. 이런 식으로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밸푸어 선언은 전면적인 식민지 충돌의 신호탄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을 희생시켜 배타적인 <민족적 본거지>의 건설을 목표로 한, 한 세기 동안 이어지는 공격의 시작이었다. - P49
1922년, 새롭게 구성된 국제연맹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반포하여 영국의 통치를 공식화했다. 위임통치령은 시온주의 운동에 이례적인 선물이라도 주듯이 밸푸어 선언을 원문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선언의 약속을 크게 확대했다. 위임통치령 문서는 <일부공동체>에 대해서는 <독립국가로서의 존재를 임시적으로 인정할 수있다>는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계속해서 문서에는 밸푸어 선언의 조항들을 지지한다는 국제적 약속이 제시되어있다. 이 후속 문구에 분명하게 담긴 함의는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민족 한 집단에게만 민족적 권리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중동의 다른 모든 위임통치령에서는 규약 22조가 전체 인구에 적용되어 결국 이 나라들에 일정한 형태의 독립이 허용된 것과 대비를 이룬다. 위임통치령 전문의 세 번째 문단에는 유대인, 오직 유대인만이 팔레스타인과 역사적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초안 작성자들이 보기에 오스만, 맘루크, 아이유브, 십자군, 아바스, 우마이야, 비잔티움, 그리고 이전 시기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마을, 성지, 성, 사원, 교회, 기념물 등 2,000년에 걸쳐 축조된 이 땅의 환경은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여러 무정형의 종교 집단의 소유물이었다. 물론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역사나 집단적 존재가 전혀없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사회학자 바루크 키멀링Baruch Kimmerling이 말한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정치적 살해 politicide>의 뿌리가 위임통치령 전문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 민족의 땅에 대한 권리를 뿌리째 뽑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땅과의 역사적 연관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 P60
그는 T. E. 로런스(영화 「아라비아의 로런스)를 영국의 배신을 보여주는 더할 나위 없는 사례로 보았다(다만 로런스가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에서 자신이 아랍인을 기만하고 배신한 행위를 솔직하게 서술한 것을 전쟁 전 예루살렘에서 알았던 영국인 교사와 선교사들의 정직하고 꼿꼿한 자세와 조심스럽게 대조하기는 했다). - P82
밸푸어는 <시온주의가 아랍인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보지 않았고>, 처음에는 시온주의자들이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에 대해 반발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같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언어를 빌리자면, <그릇된 믿음은 머잖아 단단한 현실에 부딪힌다. 보통 전장에서>. 대반란의 전장에서 바로이런 일이 벌어졌고, 영원히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해를 끼쳤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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