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대조적으로, 시온주의 운동은 세계 정치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활용했다. 이 운동은 테오도어 헤르츨이나 하임 바이츠만처럼 고등 교육을 받은 동화된 유대인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시작된 것으로, 또한 미국에 깊은 뿌리를 두고 폭넓은 연계에 의지했다. 내 아버지가 압둘라 국왕과 만나기 몇십 년 전부터 확립된 뿌리와 연계였다. 다비드 벤구리온과 훗날의 이스라엘 2대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는 제1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 미국에서 몇 년간 생활하면서 시온주의 대의를 위해 활동했다. 골다 메이어는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살았다. 한편 팔레스타인 지도부 가운데는 어느 누구도 미국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내 아버지가 우리 집안에서 처음 미국을 방문한 사람이다.) 시온주의 지도부가 대부분 유럽을 비롯한 서구 사회 태생이거나 그 나라 시민으로서 그 사회들을 정교하게 파악한 것과 비교하면, 아랍 지도자들은 이제 막 부상하는 두 초강대국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유럽 각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에 대해 기껏해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었다. - P109
1947년 클레먼트 애틀리Clement Attlee 정부는 팔레스타인 문제를새로 만들어진 유엔에 맡겼고, 유엔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기 위해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ssion on Palestine, UNSCOP를 만들었다. 유엔을 지배하는 강대국은 미국과 소련이었는데, 시온주의 운동은 양국을 향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면서 재빠르게 이런 변화에 대비한 반면, 팔레스타인인과 아랍인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전후 국제적 힘의 재조정은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의 활동과, 소수인 유대인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팔레스타인의 분할을 제안한 다수 의견 보고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보고서의 제안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의 56퍼센트가 유대인의 몫이었는데, 1937년 필위원회 분할안에서 제안한 유대 국가의 규모가 훨씬 작은 17퍼센트였던 것과 대비되었다. 유엔팔레스타인특별위원회 다수 의견 보고서의 결과물인 유엔 총회 결의안 제181호를 작성하는 데 압박이 가해진 사실에서도 이런 힘의 재조정이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 P111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결의안 제181호가 통과된 것은 새로운 국제적 세력 균형이 반영된 결과였다. 결의안은 팔레스타인을 넓은 유대 국가와 좁은 아랍 국가로 분할하고 예루살렘을 포함하는 국제적인 분할체corpus separatum를 만들 것을 요구했다.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미국과 소련은 이제 팔레스타인인을 희생시키면서 유대국가가 그들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만드는데 분명히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의안은 또 다른 선전포고로서, 여전히 아랍인이 다수인 땅 대부분에서 유대 국가에 국제적인 출생증명서를 안겨 주었다. 유엔헌장에 소중히 새겨진 자결권의 원리를 노골적으로 위반한 행동이었다. - P112
유엔이 분할을 결정하면서 시온주의 운동의 군사·민간 구조는 전후 시대에 등장한 두 초강대국의 지지를 받았고, 최대한 넓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닥친 재앙은 그들 자신과 아랍이 약하고 시온주의가 강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런던, 워싱턴 D.C., 모스크바, 뉴욕, 암만 등 여러 머나먼 곳에서 벌어진 사건의 결과이기도 하다. - P112
나크바는 마치 열차 사고가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계속되는 것처럼, 몇 달에 걸쳐서 펼쳐졌다. 1947년 11월 30일부터 영국군이 최종적으로 철수하고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수립될 때까지의 첫번째 단계에서… - P1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와 이후에 이렇게 바뀐 여론은 미국의 많은 정치인들이 계산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개인적 친분과 측근 보좌관들의 영향 때문에 시온주의로 기울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시온주의가 추구하는 목표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이 국내 정치에서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루스벨트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븐 사우드 국왕을 만나서 지지를 약속한 지 불과 9개월 뒤인 1945년 11월, 트루먼은 이런 대대적인 변화의 배후에 놓인 동기를 퉁명스럽게 드러냈다. 한 무리의 미국 외교관들이 공공연하게 친시온주의 정책을 추구하면 아랍세계에서 미국의 이해관계가 해를 입을 것이라고 선견지명 있게 경고하자, 대통령은 이렇게 대꾸했다. 「신사 여러분, 죄송하지만 저는시온주의의 성공을 열망하는 수십만 명에게 응답해야 합니다. 제 유권자들 가운데는 수십만 아랍인이 없어요. - P122
그리하여 이사 알이사는 나크바 이후 베이루트의 망명지에서 쓴 글에서 아랍 통치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아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아랍의 꼬맹이 왕들이여 너무도 허약하고 내분까지 벌이니 옛날 옛적에 우리는 당신들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우리의 모든 희망은 꺾이고 말았다. - P124
나크바는 갑작스럽게 닥친 집단적 혼란이자, 팔레스타인인이라면 누구나 직접 경험하거나 부모나 조부모를 통해서 어떤 식으로든 공유하는 트라우마다. 나크바는 그들의 집단적 정체성에 새로운 초점을 제공한 동시에 가족과 공동체를 깨트리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여러 나라에 흩뜨려 놓았다. 여전히 팔레스타인 안에 남은 이들도 난민이든 아니든 간에 이스라엘, 이집트(가자 지구에 사는 사람들), 요르단(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등 세가지 각기 다른 정치 체제에 종속되었다. 그 후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이런 분산(아랍어로 쉬타트shitat) 상태로 고통받고 있다. - P126
시간이 흐르면서 페르시아만 나라들과 리비아, 알제리 등에서 석유산업이 발전하여 석유와 가스 수출로 인한 소득 비중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현지 주민이 되어 그 나라의 경제와 정부 서비스, 교육 체계를 구축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작가 가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가 쓴 단편 소설 『불볕속의 사람들 Men in the Sun』의 등장인물들처럼, 팔레스타인인들이 항상 이런 경로를 쉽게 찾은 것은 아니었다. 종종 소외와 고립, 그리고 팔레스타인인들이 난민 서류를 들고 국경을 넘으려 할 때면 심지어 비극까지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만 나라들에서 산다고 해도시민권이나 영주권을 받지는 못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나라들에서 거의 평생 동안 살았다고 하더라도 계속 거주하기 위해서는 직장이 있어야 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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