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하기 때문에 악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선을 추구하고 행복을 찾다가 그렇게 될 뿐이다.
매리 월스톤크래프트

-알라딘 eBook <심플 플랜> (스콧 스미스 지음, 조동섭 옮김) 중에서 -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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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들고양이를 피하기 위해 그 여자는 무리하게 차선을 바꾼다. 오늘로 나흘째다. 노르스름한 털, 부드러운 살의 윤곽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던 고양이는 이제 거의 부패했다. 며칠 더 지나면 부피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문드러질 것이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29

내가 안 죽였어,라고 그 여자는 소리 내어 중얼거린다. 자신의 목소리를 흔적 없이 삼킨 것이 끔찍한 소음이 아니라 더디게 저무는 여름 햇빛인 것처럼, 두 손으로 운전대를 붙든 채 미간을 찌푸린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29

액셀을 밟던 오른쪽 종아리에 쥐가 난 적도 있었다. 그 여자는 왼발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바꿔 밟으며 갓길에 차를 세우고, 공포가 가라앉을 때까지 욕설과 기도를 절반씩 섞어 뇌까렸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1

부드럽고 쓸쓸한 곡선의 몸을 옆으로 누인 산을 향해 달리며, 거대한 송곳 구멍 같은 터널로 불쑥 들어서며, 터널 입구에 핀, 상여를 장식한 것 같은 흰 꽃들을 기억하며 그 여자는 생각에 잠긴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1

훈자, 천 년 전에 멸망한 훈자국의 유적. 파키스탄 동북쪽 산간 지방의 오지. 그곳에 가려면 두 개의 육로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첫번째는 중국 신장의 국경도시인 카슈가르에서 꼬박 이틀 동안 버스로 달리는 길, 두번째는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버스로 하루 걸리는 길이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3

그 봄이 지나갈 때까지, 어지러운 햇빛 속을 승용차로 달려 출근할 때마다 서른두 살의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했다. 두 눈을 시큰하게 하는 빛, 생리적인 눈물이 고이게 하는 빛, 어른어른 마성이 피어오르는 빛 속에서 커브를 꺾으며 훈자를 생각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3

어디로 눈을 들어도 해발 육천 미터의 눈 덮인 봉우리들이 보이는,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길. 탄식처럼 갑자기 훈자는 나타날 것이다. 지대가 높아, 늦은 봄이 되어서야 살구꽃이 지천으로 피는 곳. 가을이면 말린 살구가 가게마다 그득한 곳. 한번 들어가면 떠나고 싶지 않아지기 때문에 장기 여행자들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곳.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4

그에게는 고유한 개성이라고 불러야 할 독특한 무심함이 있었는데, 그 체념에 가까운 무심함 덕분에 어떤 좌절이나 분노도 조용히 비껴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열정이나 연민, 깊고 끈끈한 사랑까지 침착하게, 씁쓸히 지나쳐갔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5

그 봄, 그 여자가 자신의 뻣뻣한 어깨를 주무르며, 어둠 속에서 희끄무레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받아들여간 것은 자신이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집에서 영원히 일을 하고 가계를 꾸려가야 할 한 사람. 아이가 성장할 때까지 조건 없는 사랑을 퍼부어줘야 할 단 한 사람.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6

그 후 칠 년 가까이 매달 급여의 삼분지 일씩을 원금과 이자로 자동이체 했지만, 아직 그 여자는 절반의 빚도 갚아내지 못했다. 두 차례의 감원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직위는 달팽이처럼 천천히 위를 향해 기어올라갔지만, 급여는 사정에 따라 오래 동결되거나 오히려 삭감되었다.
그 여자의 남편은 여전히 직장을 얻지 못했다. 또래보다 일찍 앞머리가 세었고 비스듬히 등이 굽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초등학생이 되었고, 아파트 상가의 학원에서 학원으로 건너다니며 긴 오후를 보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6

첫번째 육로의 기점인 카슈가르는 신장 위구르 독립운동의 성소가 되었다. 파키스탄에서는 끈질긴 내전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오지인 훈자는 변함없이 조용할 테지만, 그곳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육로는 안전하다고만 하기 어려웠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7

훈자로부터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는 새벽, 그 여자는 으슥한 골목에 엎어진 자신의 흙투성이 뒷모습을 내려다보는 꿈을 꾸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8

오랜 시간 계속되어온 습관이었으므로, 그 여자는 훈자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생각하고 싶은 것은 훈자가 아닌 훈자였다.
훈자가 아닌 훈자를 생각하는 일은 훈자인 훈자를 생각하는 일보다 힘이 들거나 거의 불가능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39

그 여자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맨발로 걸었고, 동이 터왔고, 시퍼런 그믐달이 어둠 속에 면도날처럼 돋아나는 것을 보았다. 소리 없이 다가온 산짐승에게 목덜미가 찢겼고, 목구멍으로 비명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40

상담사는 그 여자의 고백에 전적으로─직업적으로─공감했고, 더 이상 양쪽 가계의 정신병력을 물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지 않았다. 대신 세 가지의 해결책을 그 여자에게 주었다. 첫째, 아이를 돌봐줄 제삼의 조력자를 찾을 것. 둘째,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만큼은 근심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낼 것. 셋째, 그 여자의 남편을 자신에게 보내 상담 받게 할 것. 덧붙일 것 없이 분명한 그 답들을 받아 들고 그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41

다만 아이와 함께 있는 짧은 시간, 부족한 재능을 오직 열의로 보상하려 하는 희극배우 같은 사람이 되었다. 농담을 던지고 발을 구르고 깔깔 웃는 동안, 불쑥불쑥 살얼음처럼 얇고 날카로운 행복을 느꼈다. 이따금 자신이 은밀히 미쳐가고 있는 것인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오히려 아이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끼쳐온 것은 아닌지 곰곰이 자문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42

대답을 듣기 위해 눈을 감은 순간, 비틀어진 마른 가지들을 통과한 주황색 햇빛이 그 여자의 눈꺼풀을 찔렀다. 눈꺼풀이 홧홧 달아오르기 전에 그 여자는 눈을 부릅떴다.
나무에게서 등을 돌리자, 방금 그 여자가 빠져나온 산길이 아직 어두컴컴했다. 날카로운 주황색 빛은 그 여자의 두 눈꺼풀에, 얼얼한 망막 위에 해독할 수 없는 문자처럼 찍혀 번득였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44

엄마, 난 횡단보도를 건널 때 눈을 감아.
그럼 온 세상이 환해져.
변신할 것 같아.
정말 변신할 것 같아.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46

어제까지 없었던 흰 스프레이 선이 도로 가운데 그려져 있다. 연한 색 샌들 한 짝, 거칠게 깨어진 유리 파편들이 중앙선까지 흩어져 희끄무레한 빛을 뿜는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47

검은 아스팔트가 새로 깔린 구간으로 그 여자의 차가 들어선다. 차선이 지워진 캄캄한 자리에 드문드문 희뜩한 표지들이 꽂혀 있다. 불안하게 큰 커브를 돌며 그 여자는 눈을 부릅뜬다. 앞차가 뱉어 내는 브레이크 등의 불빛이, 끈덕지게 술렁이는 도로의 어둠이 핏물처럼 그 여자의 눈에 비쳐 어른댄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47

인아는 악몽을 꾼다고 했다. 그 악몽 속으로 나는 들어가보지 못했다. 그녀와 함께 살고 있지 않으니, 악몽을 꾸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어제 저녁 인아는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와 밝은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고, 내가 그녀의 안부를 되묻자 ‘악몽을 꾸는 것만 빼곤 다 좋아’라고 대답하고는 불쑥 웃음을 터뜨렸다. 현재까진 그게 내가 그녀의 악몽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49

그렇게 그녀가 누군가를 향해 웃을 때 내가 약간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그녀는 모른다. 그 누군가가 남자건 여자건, 얼마나 가까운 사람이건 상관없다. 고통과 거리를 두려고 나는 잠깐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0

인아는 스물네 살의 겨울부터 약 육 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는데, 이천 일이 넘는 그 기간 동안 거의 매일 요리를 했기 때문에 남은 인생에선 최소한의 음식만으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1

인아가 만든 음식들은 예외 없이 맛있었지만, 요리를 하던 시절의 인아는 어딘지 불행해 보였기 때문에 나로선 그것들을 다시 맛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2

잠깐 집 근처의 카페에 나오면서 굽이 높은 빨간 구두를 신다니, 인아는 갑자기 나를 사랑하게 되었거나 우울한 것 같다. 만난 지 십 년 만에 사랑에 빠진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후자일 게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2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인아는 아직 불을 안 붙인 담배를 깨문 채 카디건을 벗고 원피스에 목을 넣는다. 헐렁한 원피스 속으로 인아의 마른 몸이 쏙 들어간다. 잇자국이 박힌 담배를 재떨이에 걸쳐놓고 인아가 묻는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3

나는 문득 몸을 기울여 인아에게 입맞춘다. 자칫 인아가 싫어할 수 있기 때문에, 입술을 제외하고는 몸이 닿지 않도록 주의한다. 인아는 눈을 감지 않고, 나도 눈을 감지 않는다. 인아의 혀에서 시럽 맛이 난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4

약속 장소에 나타난 인아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숱 많은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 내리고, 긴 체크무늬 치마에 투박한 러닝화를 신고, 왼손 검지에는 커다란 큐빅이 박힌 반지를 낀 날씬한 여자애였다. 무슨 디자인 회사의 수습사원이라고 했는데, 회사의 성격상 그런 차림이 허용되는 모양이었다. 키가 조금 클 뿐 뛰어난 미인이랄 수는 없었는데, 마치 누군가가 암호를 걸어놓은 듯 수수께끼 같은 표정만은 인상적이었다. 해독이 필요해 보이는 그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는 대뜸 반말로 물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4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져볼 수 없을 차가움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5

차가운 유리잔처럼 섬세한 그 목소리의 표면에, 기묘하게 처연한 슬픔 같은 것이 자잘한 물방울들처럼 응결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5

다만 인아의 노래가 갑자기 끝났을 때, 지난 이십여 년 동안 억눌러왔던 생생한 갈망이 단박에 빗장을 끄르고 내 심장 밖으로 걸어 나온 것을, 그 어둡고 남루한 골목 한가운데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는 것을 알아보았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6

(거기 담겨 있던, 회를 뜨고 남은 물고기를 별생각 없이 양푼에 옮겨 담았어. 그런데, 수돗물을 받아서 막 씻으려는데 그 물고기 뼈가 세차게 퍼덕였어. 살은 다 발라졌는데 아직 살아 있었던 거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어. 양푼을 놓치는 바람에 얼굴이며 윗옷에, 부엌 바닥에 물이 마구 튀었어. 다행히 물고기는 개수대 안으로 떨어졌어. 그걸 보고 모두들 웃어댔어. 이걸 어떡해요, 살아 있어요, 내가 말하니까 큰동서가 웃으면서 대답했어. 뭘 어떻게 해, 동서가 알아서 해봐. 난 우는 줄도 모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뼈만 남아서 꿈틀거리는 그 물고기를 씻어서, 냄비에 넣고 뚜껑을 덮었어.)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9

(나, 요즘 프랙탈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깜짝 놀랐어, 우리 몸속 혈관들이 뻗어나가는 선, 하천들이 지류를 만들며 뻗어가는 선, 나무들이 하늘로 가지를 뻗어 올리는 선 들이 모두 닮아 있다니. 지하철 입구에서 빠져나오는 인파의 움직임도 비슷한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그렇다면, 혹시 사람의 인생도 그럴까? 공간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우리 삶이 어떤 수학적인 선…… 기하학적으로 추측 가능한 선들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 걸까?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올 때마다 생각하게 돼. 함께 수학적인 곡선을 그리며 걷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 사람들과 내가 비슷한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곡선으로 뻗어간 핏줄들 속에 거의 같은 온도의 피가 흐르고, 세찬 심장의 압력으로 그게 순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지 않아? 그 사람들은 결코 내 삶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고, 나 역시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함께 그 선들을 그리고 있다니.)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61

그 순간 인아는 폭발했다. 지나치게 뻑뻑하게 감은 오르골처럼 부서졌다. 자잘한 부속들이 사방으로 튀듯 더 빠르게 쏟아져 나오는 취중독백 같은 문장들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인아가 최근에 끔찍한 일을 겪었다는 것을. 논리와 인과가 무의미해지는 지점을 통과해, 내가 모르는 어딘가로 넘어갔다가 우연히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을. 이상한 열기와 집요함을 그 와중에 얻어냈다는 것을. 그것이 어떤 일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걸 겪고도 부서지지 않은 인아의 가냘픈 몸이 어쩐지 두렵게 느껴졌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62

인아는 그동안 입어온 검은색 계열의 옷들을 차례로 버렸다. 머리를 밝게 물들였고, 선명한 노랑색 셔츠나 워싱을 많이 한 청바지 같은 값나가지 않는 것들을 하나둘 사들였다. 하지만 정작 음반에 실린 곡들은 처음 만난 여름밤에 들었던 노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져 있었다. 그 깨끗함이 되돌아올 수는 없었던 것이다. 스크래치와 거친 효과음들을 의도적으로 넣은, 압도적으로 몽환적인 사운드 속에서 인아의 목소리는 무엇인가와 지독하게 싸우는 사람처럼 가냘프고 절실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68

내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존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하는 웃음이다.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여자이고 싶은지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고, 남자의 몸으로 여자를 안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준 사람도 인아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72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73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질 수 없을 차가움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74

(내 안에서는 가볼 수 있는 데까지 다 가봤어.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었어. 그걸 깨달은 순간 장례식이 끝났다는 걸 알았어. 더 이상 장례식을 치르듯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어. 물론 난 여전히 사람을 믿지 않고 이 세계를 믿지 않아. 하지만 나 자신을 믿지 않는 것에 비하면, 그런 환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76

클렌징 오일로 화장을 지우고 샤워기의 뜨거운 물로 오래 몸을 씻은 뒤, 아침에 입고 왔던 옷들을 주섬주섬 걸쳐 입는다. 세면대 위의 거울 속에서 나를 건너다보는, 친숙하고도 낯선 사람의 얼굴을 마주 건너다본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한 번도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사람이 저기 있다. 더 이상 청년이 아닌 얼굴, 서서히 완고한 주름들을 새기며 늙어갈 사내의 얼굴을 나는 본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78

나 역시 사람을 믿지 않는다고, 고통을 주는 데가 있는 인아의 웃음을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그녀가 나를, 내가 그녀를 깊게 상처 입히리란 것을 알고 있다. 우리 산책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것을 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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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좀 넓게 보면 ‘FOMO’fear of missing out, 즉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는 흥미로운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놓칠까 걱정하는 마음과 밀접합니다. FOMO는 특히 소셜미디어에서 빈번히 경험됩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79

바로 인공지능의 리터러시 과업 수행과 인간의 리터러시 행위 속도 간의 비대칭입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86

요약하면 저자는 연구 논문의 생산에서 필수적인 노동에 기여하고, 글의 출판 과정 및 결과에 대한 윤리적인 책무를 다해야 합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90

저자성에 대한 두 가지 기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기여와 노동의 기준입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90

두 번째 ‘윤리적인 책무’ 영역에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봉착합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90

우선 과학 분야의 선도적 학술지 중 하나인 『네이처』는 "챗GPT와 같은 대형 언어 모델은 현재 저자 기준을 충족하지 않습니다. 특히 저자 자격은 해당 작업에 대한 책임을 수반하는데, 이는 거대언어모델에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라며 인공지능 저자 인정 불가 방침을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92

인간이 인공지능에 의해 생산된 텍스트를 명확히 구별할 수 없다는 한계 속에서 학술지의 인공지능 저자 인정 불가 방침과 생성형 인공지능의 사용 증가라는 상반된 현상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93

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표절 검사기의 광범위한 사용에 조심스럽습니다. 생성형 인공지능의 활용이 금지되는 상황에서 표절 검사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모든 학생을 ‘잠재적 표절자’로 규정하는 일입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95

학문적 진실성과 표절을 둘러싼 논쟁 중에 간과되는 두 가지 이슈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의 표절도 문제지만 거대언어모델의 표절도 심각하다는 사실입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96

두 번째는 인공지능 챗봇이 생성한 텍스트를 인용하는 것을 적법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해도, 해당 텍스트가 인용의 윤리를 지켰는지에 대한 검증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97

생성형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새로운 저자성을 상상함과 동시에, 저자의 법적·사회적·윤리적 책무에 대해 뿌리부터 다시 검토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98

재즈 퍼포먼스는 그저 악기들의 조화가 아니라 각기 다른 음악적 인생을 살아 온 몸들이 시공간과 관객을 파악하고, 서로의 연주에 집중하며, 정서와 울림을 실시간으로 조율해 나가는 일입니다. 몸짓 하나·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는 ‘체화된 정성’이 작동하는 장입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202

인간의 언어를 컴퓨터가 이해하고 처리하여 특정한 과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자연어 처리와 관련해서는 ‘컴퓨터 시스템(가령 텍스트–이미지 변환 인공지능)에 텍스트 또는 음성 언어의 형태로 전달되는 명령’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특정한 상황에서 프롬프트를 적절한 원칙에 따라 작성하는 작업을 가리킵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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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형 인공지능이 추동하는 변화 가운데 예측되는 첫 번째 리터러시 관행 변화는 인공지능을 매개로 한 리터러시 행위가 증가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좀 더 나누어 보면 읽기와 인공지능이 결합하는 ‘인공지능 매개 읽기’AI-mediated reading와 쓰기와 인공지능이 결합하는 알고리즘적 쓰기’algorithmic writing로 부를 수 있겠습니다. 이들의 확산은 읽기와 쓰기의 관계가 급격히 변화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63

우선 인공지능을 매개로 한 읽기의 지속적 증가가 예상됩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63

둘째, 쓰기의 전 과정에 인공지능을 개입시키는 알고리즘적 쓰기의 증가입니다. 여기서 알고리즘적 글쓰기란 인공지능과의 협업에 최적화된 ‘파이프라인’을 따라 일련의 작업이 배열되는 글쓰기를 지칭합니다. - <인공지능은나의읽기쓰기를어떻게바꿀까>, 김성우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b619a4c1825e4174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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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직경 일 센티미터 남짓한 구멍들을 보고 있다.
당신의 부어오른 양쪽 복숭아뼈 아래, 정강이에서부터 내려온 인대가 발등으로 막 꺾어지는 자리에 그 구멍들은 뚫려 있다. 왼쪽의 구멍 안으로 보이는 회백색 물질을 가리키며 의사가 말한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

당신은 자꾸 잊어버린다. 방금 전까지 당신이 어디 있었는지,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 지금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건지 잊는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7

당신은 이미 잊었다. 자신이 얼마나 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나름으로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는지 잊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7

살갗이 탈 때까지 불붙은 쑥덩이를 얹어두는 뜸을 직접구라고 부른다는 것을 당신은 그날 처음 알았다. 참으려고 했지만 당신은 비명을 질렀다. 상냥한 형리(刑吏) 같은 간호사는 괜찮아요, 금방 끝나요, 하고 당신을 달랬다. 왼쪽 발목까지 살갗이 타는 동안 당신은 계속 소리를 냈고, 자신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가 당신의 언니의 그것과 똑같이 닮아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무심코 수도꼭지를 덜 잠근 것처럼 소리 없이, 끝없이 흐르는 당신의 눈물에 간호사는 당황했다. 당신이 더듬더듬 양말을 신고, 구두를 꿰어 신고, 카드로 진료비를 계산하고 한의원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갈 때까지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9

몇 번이었더라.
단순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당신은 미간을 찌푸린다. 여기서 몇 번 버스를 타야 집으로 가더라.
막상 버스가 나타나면 그 낯익은 번호를 곧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당신은 믿고 있다. 그러나 제각기 다른 번호의 버스들이 여남은 대 정차했다 떠나가는 것을 당신은 다만 지켜본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모든 번호들이 낯설다. 모든 숫자들이 힘을 합해 당신을 밀어내고 있다. 그제야 당신은 깨닫는다. 지금 부모님의 집으로 가는 게 옳으리라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당신의 원룸으로 데려다 줄 버스 번호를 기억할 수 없는 거라는 사실을.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1

막 눈발이 쏟아질 것 같던 하늘은 아직 한 점의 눈송이도 뱉어 내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3

그때 당신은 그녀를 이해한다고 느꼈다. 여러 겹 얇고 흰 커튼 속의 형상을 짐작하듯 어렴풋하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가 아니었다. 다만 가장 안전한 곳, 거북과 달팽이들의 고요한 껍데기 집, 사과 속의 깊고 단단한 씨방 같은 장소를 원하는 것뿐이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5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혈육을 향해서만 느낄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친숙한 감정을 당신의 내부에서 깨우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당신의 마음을 최대한 차갑게, 더 단단하게 얼리기 위해 애썼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6

당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존다. 옆 사람의 어깨에, 창문에 고개를 꺾어 기댄다. 자세 때문에 목이 끊어질 듯 아프다. 차라리 깨어버리면 좋으련만, 눈을 뜨려 할 때마다 인정사정없이 눈꺼풀이 밀려 내려온다. 마침내 입가에 침까지 흘리며 당신은 존다. 으음, 음, 노파처럼 앓는 소리를 낸다. 수차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창문에 이마를 부딪친다. 당신은 손을 들어 입가를 닦아 낸다. 무디디무딘 눈꺼풀을 치뜬다. 다시 눈꺼풀이 밀려 내려온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7

그녀는 삼십칠 킬로그램까지 몸무게가 줄었고,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고통을 호소했다. 아파, 아파,라고 아이처럼 가느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아빠, 나 좀 살려줘,라고 그녀가 애원하자 무뚝뚝한 아버지의 턱이 덜덜 떨렸다. 덩치 큰 형부는 뒤돌아서서 울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아가, 아가,라고 속삭였다. 당신은 자책을 멈추지 못했다. 당신의 존재가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언니,라고 마침내 떨리는 입술을 열고 말하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7

내릴 곳을 훌쩍 지나친 것을 알고, 졸다 깬 당신은 허겁지겁 가방을 둘러메고 하차 벨을 누른다. 처음 보는 낯선 거리에 내려서자마자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아크릴 벽에 붙은 버스 노선표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는, 세 정거장만 거슬러 걸으면 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8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멍을 찌르리라는 것을 모른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25

당신이 그녀에게서 영원히 돌아서리라 결심했던 순간. 그녀의 표정 없는 눈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결코 읽을 수 없었던 그 순간. 그때 당신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당신 역시 무섭도록 차가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놀라며 발견하는 대신 무엇을, 어떤 다른 방법을 찾아냈어야 했을까. 끈덕지고 뜨거운 그 질문들을 악물고 새벽까지 뒤척이리라는 것을 모른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26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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