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직경 일 센티미터 남짓한 구멍들을 보고 있다. 당신의 부어오른 양쪽 복숭아뼈 아래, 정강이에서부터 내려온 인대가 발등으로 막 꺾어지는 자리에 그 구멍들은 뚫려 있다. 왼쪽의 구멍 안으로 보이는 회백색 물질을 가리키며 의사가 말한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5
당신은 자꾸 잊어버린다. 방금 전까지 당신이 어디 있었는지, 무슨 치료를 받았는지, 지금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건지 잊는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7
당신은 이미 잊었다. 자신이 얼마나 재치 있는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나름으로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는지 잊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7
살갗이 탈 때까지 불붙은 쑥덩이를 얹어두는 뜸을 직접구라고 부른다는 것을 당신은 그날 처음 알았다. 참으려고 했지만 당신은 비명을 질렀다. 상냥한 형리(刑吏) 같은 간호사는 괜찮아요, 금방 끝나요, 하고 당신을 달랬다. 왼쪽 발목까지 살갗이 타는 동안 당신은 계속 소리를 냈고, 자신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가 당신의 언니의 그것과 똑같이 닮아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무심코 수도꼭지를 덜 잠근 것처럼 소리 없이, 끝없이 흐르는 당신의 눈물에 간호사는 당황했다. 당신이 더듬더듬 양말을 신고, 구두를 꿰어 신고, 카드로 진료비를 계산하고 한의원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갈 때까지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9
몇 번이었더라. 단순한 기억을 되살리려고 당신은 미간을 찌푸린다. 여기서 몇 번 버스를 타야 집으로 가더라. 막상 버스가 나타나면 그 낯익은 번호를 곧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당신은 믿고 있다. 그러나 제각기 다른 번호의 버스들이 여남은 대 정차했다 떠나가는 것을 당신은 다만 지켜본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모든 번호들이 낯설다. 모든 숫자들이 힘을 합해 당신을 밀어내고 있다. 그제야 당신은 깨닫는다. 지금 부모님의 집으로 가는 게 옳으리라는 마음의 부담 때문에, 당신의 원룸으로 데려다 줄 버스 번호를 기억할 수 없는 거라는 사실을.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1
막 눈발이 쏟아질 것 같던 하늘은 아직 한 점의 눈송이도 뱉어 내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3
그때 당신은 그녀를 이해한다고 느꼈다. 여러 겹 얇고 흰 커튼 속의 형상을 짐작하듯 어렴풋하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가 아니었다. 다만 가장 안전한 곳, 거북과 달팽이들의 고요한 껍데기 집, 사과 속의 깊고 단단한 씨방 같은 장소를 원하는 것뿐이었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5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혈육을 향해서만 느낄 수 있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친숙한 감정을 당신의 내부에서 깨우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당신의 마음을 최대한 차갑게, 더 단단하게 얼리기 위해 애썼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6
당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존다. 옆 사람의 어깨에, 창문에 고개를 꺾어 기댄다. 자세 때문에 목이 끊어질 듯 아프다. 차라리 깨어버리면 좋으련만, 눈을 뜨려 할 때마다 인정사정없이 눈꺼풀이 밀려 내려온다. 마침내 입가에 침까지 흘리며 당신은 존다. 으음, 음, 노파처럼 앓는 소리를 낸다. 수차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창문에 이마를 부딪친다. 당신은 손을 들어 입가를 닦아 낸다. 무디디무딘 눈꺼풀을 치뜬다. 다시 눈꺼풀이 밀려 내려온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7
그녀는 삼십칠 킬로그램까지 몸무게가 줄었고,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고통을 호소했다. 아파, 아파,라고 아이처럼 가느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아빠, 나 좀 살려줘,라고 그녀가 애원하자 무뚝뚝한 아버지의 턱이 덜덜 떨렸다. 덩치 큰 형부는 뒤돌아서서 울었다.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아가, 아가,라고 속삭였다. 당신은 자책을 멈추지 못했다. 당신의 존재가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언니,라고 마침내 떨리는 입술을 열고 말하려 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7
내릴 곳을 훌쩍 지나친 것을 알고, 졸다 깬 당신은 허겁지겁 가방을 둘러메고 하차 벨을 누른다. 처음 보는 낯선 거리에 내려서자마자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아크릴 벽에 붙은 버스 노선표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는, 세 정거장만 거슬러 걸으면 된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18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어보지 않은 말들이 뜨거운 꼬챙이처럼 목구멍을 찌르리라는 것을 모른다. 나도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앞이 보이지 않았어. 버텼을 뿐이야. 잠시라도 애쓰고 있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그저 애써서 버텼을 뿐이야.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25
당신이 그녀에게서 영원히 돌아서리라 결심했던 순간. 그녀의 표정 없는 눈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결코 읽을 수 없었던 그 순간. 그때 당신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당신 역시 무섭도록 차가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놀라며 발견하는 대신 무엇을, 어떤 다른 방법을 찾아냈어야 했을까. 끈덕지고 뜨거운 그 질문들을 악물고 새벽까지 뒤척이리라는 것을 모른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26
지금 당신이 겪는 어떤 것으로부터도 회복되지 않게 해달라고, 차가운 흙이 더 차가워져 얼굴과 온몸이 딱딱하게 얼어붙게 해달라고,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당신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닌 기도를 입속으로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린다.
-알라딘 eBook <노랑무늬 영원> (한강 지음) 중에서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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