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면의 연기가 끝났을 때, 헬렌 쇼는 벽돌 운반공처럼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장어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그녀는 입을 헤벌리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더 이상 상상의 병 속에 있지 않았다. 그녀를 에워싸서 안전하고 깨끗하게 지켜 주던 병은 없었다. 이제 그 병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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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없는 중세 소도시의 광장을 걸어가며 잭스가 말한다. "가끔 더 이상 기다리지 않도록 그냥 정지되고 싶을 때 있어. 리얼 스페이스 들어갈 수 있을 때 다시 가동되면 시간 안 흐른 것처럼 느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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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농담이겠지." 인스턴트라포르는 스마트 경피 패치 중 하나로, 사용자가 특정인 가까이에 있게 되면 일정량의 옥시토신-오피오이드 혼합제제를 자체 투약한다. 불안정한 결혼 생활, 혹은 긴장된 부모 자식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사용되는데, 최근 들어 의사의 처방전 없이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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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알겠어.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이는 수단인 거군." 인지 능력 향상제를 복용하거나 경두개 자기 자극술 따위를 써서 업무 효율 증대를 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측에서 먼저 그것을 필수사항으로 요구한 사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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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봐주세요. 건전한 섹스라는 개념의 폭은 시대 변천에 따라 계속 확장돼왔습니다. 예전에는 동성애, BDSM(결박, 지배, 사디즘, 마조히즘의 머리글자를 합친 약어 — 옮긴이), 비독점적 다자간 연애는 모두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로 간주됐지만, 이것들 중 연애 관계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회가 개인의 욕망에 비정상적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문제였죠. 언젠가는 디지언트와의 섹스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성의 유효한 표현 중 하나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방적이고 정직하게 그 사실을 바라보고, 디지언트를 인간이라고 여기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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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스가 성과 무관하다는 사실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할 기회를 잃고 있다는 뜻일까. 애나는 자문한다. 그녀는 잭스에게 인간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뉴로블래스트 엔진이 리얼 스페이스에 이식되기를 원하는 것도 잭스가 그런 관계를 유지하고, 강화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어느 정도까지 강화될 수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 섹스가 문제로 부상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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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최상의 교사일 뿐 아니라 유일한 교사다.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에서 이십 년 동안 살며 습득한 상식을 가르치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발견적 논리를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합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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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언트와 함께 자라난 새로운 세대의 인간들이 잭스를 포용하고, 애나의 세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새로운 방식을 통해 디지언트들을 잠재적인 연애 상대로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잭스가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논쟁을 벌이고 타협하는 상상을 한다. 잭스가 희생을 감내하는 상상을 한다. 쉽지 않은 희생도 있겠지만, 쉬운 희생도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희생은 기꺼운 법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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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가 얼마나 다양하게 쓰이는지는 수 세기에 걸쳐 확인된다. 이집트 피라미드, 그리고 거기 안치된 미라를 봉인하는 데도 차 르가 쓰였다. 라틴어로 석유를 뜻하는 페트롤레움petroleum 은 ‘돌 기름‘이라는 뜻으로, 16세기에 처음 등장했다. 참으로 적 절한 이름이 아닌가. 19세기까지만 해도 주로 바위에서 스며져
나오는 원유를 걷어내 사용했으니 말이다. 1800년대 등불에는
주로 고래 기름을 썼지만, 1850년경 캐나다 지질학자 에이브러임 게스너Abraham Gesner가 석유에서 새로운 연료인 등유를 증류해내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등유는 고래 기름보다 싸고 깨끗한데다, 생명을 죽이지 않아도 됐다. (131-132p)

산업화는 석유에 대한 엄청난 갈증을 유발했다. 미국 펜실이니아 타이터스빌에서 다량의 원유가 최초로 발견됐다. 최초의 상업용 유전인 스핀들탑Spindletop이 1901년 처음 가동됐는데,
항공기와 자동차를 탄생시킨 내연기관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다. 석유는 현대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동시에, 그 힘은 세계를 장악해갔다. (132p)

오늘날 자동차나 제트기가 제일 선호하는 휘발유는 완벽하게 정제된 경질유다. 다른 제품에서는 희석되었다는 의미일지 몰라도, 석유에 경질light 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더 순수하다는 의미다. 정제가 덜 된 중질유는 플라스틱이나 화학제품을 만드는 데 쓰이거나, 선박이나 발전소 연료, 난방유 등으로 사용된다. 아스팔트에는 정제되지 않은 부산물이 사용된다. 인도 정부가 관심을 두는 석유가 이 제품이다. (132p)

매일 전 세계에서 약 1억 배럴의 중급유가 소비된다. 다른 에너지를 하나도 쓰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모든 인구가 각자 하루2리터 이상 쓰는 셈이다. 용도는 다양하다. 석유 소비량은 미국인들이 가장 많은데, 1인당 하루 평균 10리터를 사용한다. 대개 자동차 연료와 난방에 쓴다. 2위는 공장을 많이 가동하는 중국이다. 인도와 일본이 3위 자리를 다투고, 러시아까지 가세하면 5대에너지 소비국이 완성된다. (133p)

석유의 측정 단위는 중세 영국에서 유래했다. 42갤런 혹은 159 리터에 해당하는 배럴은 옛 영국에서 포도주를 담던 나무통을일컫는 말이었다. (134p)

석유는 여전히 막대한 부를 약속한다. 특히 2조 달러(2,350조원)로 평가(2019년 12월 기업공개)되는 사우디 국영회사 아람코Aramco에게 그렇다. 아람코의 자산 가치는 오늘날 최고의 기업으로 꼽히는 애플과 구글의 시가총액을 합친 것보다 크다.
(143p)

새롭게 자원이 발견되면 그 경제적 불똥이 엉뚱한 곳까지 미치는 경우도 있다.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은 생물학적 전염병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1959년 엄청난 매장량의 천연가스가 발견된 다음,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일을 가리키는 말이다.
1970년대 초 천연가스 수출이 늘자, 네덜란드 통화인 길더 수요가 급증했다. 변동 환율제를 유지하던 터라, 환율이 급등하자 엉뚱하게도 피해는 농업과 제조업 종사자에게로 돌아갔다. 상품 가격이 너무 올라서 해외에서 경쟁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971년부터 1977년 사이, 실업률이 4배 이상 증가했다. 결국 아무 관계없는 이들이 오랫동안 대가를 치러야 했다. (145p)

1980년대 후반, 기업가정신을 장려하는 새로운 정책 하에서 탄생한 것이 러시아식 자본주의의 주역이자 신흥 재벌 올리가르히oligarch들이다. (161p)

루블화든 달러든, 모든 화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자체만 으로는 본질적 가치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화폐는 장부의 차변에 놓이든 대변에 놓이든, 사실상 일종의 약속에 불과하다. 달러는 본래 그걸 가진 사람에게 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달러는 보증서인 셈이다. 실제 1934년까지는 모든 지폐에 쓰인 만큼 소지자에게 지불할 것‘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1971년 브레턴우즈 협정이 종료되고 달러와 금의 가치가 연동되지 않게 되면서, 그런 의미는 사라졌다. (164p)

남미에서는 왜 그렇게 달러의 인기가 높을까?
하나는 무역 때문이다. 에콰도르와 엘살바도르는 사실상 자국통화가 없다. 이들은 2000년 달러화를 공식 선언했는데, 이들이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었음을 고려할 때 달러를 사용하는 편이 더 간편하고 실용적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달러의 안정성에 기대면 자국 경제가 흔들릴 위험이 적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신뢰할 만한 통화를 보유하면,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 될 수 있다. (168p)

도이치은행은 미러 트레이딩mirror trading 시스템을 고안해냈는데, 이를 활용하면 부유한 러시아인들이 루블화를 다른 통 화로 손쉽게 바꿀 수 있었다. 방법은 이렇다. 우선 고객 명의의 루블화로 러시아 주식을 매입한다. 매입 금액은 미화로 수십만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다. 동시에 그 주식을 다른 지역에서 달러나 파운드로 매각한다. 이 주문은 역외 페이퍼컴퍼니 이름으로진행한다. 이렇게 세탁된 돈은 올리가르히들의 자녀 유학자금등의 명목으로 지급되어 현금화된다. (176p)

ECB가 유로존 기준금리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갑작스런 금융 경색에 빠진 국가들이 자국 금리를 인하할 재량이 없었다. 금리를 재빨리 인하했더라면 소비가 늘어 경기부양 효과를 누릴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금융 위기 여파로 어려움에 빠진 국가들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유로존 경제의 1/5분밖에 안 되는 마이너리티들이었다. 이들의 이니셜을 모으면 PIGS라는 조합이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노릇이다. (196p)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 국가의 인구가 진화하는 방식을
‘인구통계학적 전환epidemiological transition’라고 한다. (202p)

"부의 집중 현상이 계속되면서,
국경을 넘어 부동산을 소유하고자 하는 흐름은더욱 확산될 것이다.
돈은 바야흐로 전 세계 곳곳을 이동한다.
모 투자자나 정부가 FDI를 통해 돈을 굴리듯이,
도 더 큰 이익을 찾아서 해외로 눈을 돌린다." (2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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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슨은 그녀의 귀에 끼워져 있는 정신적 핸디캡 장치를 뽑고, 굉장히 세심한 손길로 그녀의 신체적 핸디캡 장치들을 툭 부러뜨렸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녀의 가면을 벗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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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사랑과 순수한 의지로 중력을 무력화시킨 두 사람은 천장에서 살짝 떨어진 공중에 그대로 뜬 채로 아주 오랫동안 길게 서로 입을 맞추었다.
(43/718p)

내가 소속된 아마추어 연극 단체인 ‘노스크로퍼드 극단’에서는 투표를 통해 봄에 무대에 올릴 연극으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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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9년부터 작가로 활동했다. 따로 글쓰기를 배운 것이 아니라 혼자 습작을 통해 작가가 되었다. 그러니 내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쓰기 이론 따위는 없다. 글을 쓸 때면 나는 그저 내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모습이 된다.
(7/745p)

내가 태어날 당시 나의 부친과 친조부는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건축가로 활동했다. 나의 외조부는 그곳에서 양조장을 운영했다. 그는 수제 맥주 ‘리버 라거’로 파리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 맥주의 비밀 재료는 커피였다.
(8/745p)

그리고 지금 나는 "여기에서 나는 거의 모든 것에서 똥을 깨끗이 닦아 내고 있어."란 말과 "고통스럽지 않아."란 말, 나의 형과 누나가 했던 이 두 가지 말이 나의 소설들의 두 가지 주요 주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장편소설들을 쓰기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팔았던 작품들이다. 이 책에는 자유 기업의 산물들이 실려있다.
(9/745p)

<더 뉴요커>에서는 내 책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를 ‘자기도취적인 킥킥거리는 웃음을 연속적으로 유발하는 책’이라고 평한 적이 있다. 이 책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독자들은 나를 잠옷 차림으로 바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작은 물고기를 찾거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흠모하듯 바라보고 있는 흰 바위 위의 소녀라고 상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13/745p)

또 다른 커다란 변화는 참치가 식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60여 년 전에 일어났다. 반스터블의 어부들은 참치를 ‘말 고등어’라고 부르며 참치가 잡힐 때마다 욕설을 퍼붓고는 했었다. 계속 욕설을 퍼부으며 어부들은 참치를 잘게 토막 내서 다른 말 고등어들에게 경고가 되도록 바다에 도로 던져 버리고는 했다. 용감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멍청해서인지 참치는 그래도 달아나지 않았고 그 덕택에 현재 ‘반스터블 참치 낚시 대회’라고 불리는 노동절 뒤에 열리는 축제가 생겨나게 되었다.
(22/718p)

마을 사람들이 해낸 발견 가운데 살면서 앞으로도 배우게 될 또 다른 발견은 홍합을 먹어도 즉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스터블 항구는 곳곳이 홍합으로 그득하다. 하지만 누구도 홍합에는 결코 손대지 않는다.
(22-23/718p)

그는 단어 하나를 찾아냈다. "우리는 드루이드교의 사제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드루이드교는 기원전 고대 켈트족의 종교로 기원 1세기경 쇠퇴하여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서 정확한 정보는 없는 종교이다.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적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점술과 마법을 부리고, 영혼불멸과 윤회, 전생을 설법하며 죽음의 신을 세계의 주재자로 믿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드루이드교의 사제로는 아서 왕의 전설에 나오는 마법사 멀린이 있으며, ‘드루이드교의 사제’라고 하면 고대의 비밀스럽고 마법사처럼 신비로운 사람들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1964년)

(29/718p)

2081년, 모든 사람이 마침내 평등해졌다. 사람들은 신과 법 앞에서만 평등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평등했다.
(30/718p)

그래도 아직 생활면에서는 그다지 잘 돌아가지 않는 부분이 더러 있었다. 예를 들면, 4월은 여전히 봄철답지 않아서 사람들을 미치게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축축한 달에 핸디캡 부여 사령부 요원들이 조지 버저론과 헤이즐 버저론 부부의 열네 살짜리 아들 해리슨 버저론을 잡아갔다.
(30/718p)

"맞아." 조지가 말했다. 조지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표준에서 벗어난 자기 아들 해리슨에 대한 생각이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스물한 발의 예포 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그 생각을 멈추게 됐다.
(34/7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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