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오만방자한 왕이 되려고 결심한 데다 곁에서 부추기는 앙리에타 마리아 왕비까지 있었으니 찰스 1세가 의도적으로 의회를 깔아뭉개고 자신을 높이 세우려고 노력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리고 찰스가 정도를 걷지 않고 부정직한 방법을 사용하며 그 자체로 어떤 왕이든 망칠만한 그릇된 생각을 실행에 옮긴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56
찰스 1세는 톤세tonnage와 파운드세poundage라는 세금을 부과했는데, 의회에서 승인을 받은 적도 없고 그 어떤 권력도 합법적으로 부과할 수 없는 세금이었다. 찰스는 항구 도시들이 전투함대의 보급을 책임지고 석 달간 필요한 비용을 모두 내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거액을 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상환 여부는 아주 의심스러웠다. 이 요구에 따르지 않을 경우, 가난한 사람은 군인이나 선원으로 강제 징집했고 지주 계층은 감옥에 가두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58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의회 소집이 필요했다. 국민은 자유가 위협받고 있음을 감지해 찰스 1세와 단호히 맞선다고 알려진 사람들을 의원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찰스는 거침없이 나가겠다는 투지에 여전히 눈이 멀어 의회가 모인 날 오만한 태도로 연설했다. 그의 연설은 단지 자기가 돈이 필요해서 의회를 소집했다는 말뿐이었다. 의회는 강력하고 단호한 의지로 찰스의 기를 꺾어놓기로 결의했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서를 그에게 제출했다.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이 바로 그것인데,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잉글랜드의 자유민은 왕에게 돈을 빌려주라는 요구를 더는 받지 않을 것이며, 이를 거부한다고 강제 징집되거나 투옥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또한 잉글랜드 자유민은 왕의 특별권한이나 영장에 의해 더 이상 체포되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국민의 권리와 자유에 반하는 일이고 잉글랜드 헌법에도 위배되기 때문이다.’ 처음에 찰스 1세는 이 청원을 모두 거부하는 답신을 보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60
찰스 1세는 선박세Ship Money라는 세금도 추가하기로 결정했다. 한때 잉글랜드의 모든 자치구가 선박세를 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해군 함대를 유지하는 비용을 항구뿐만 아니라 모든 잉글랜드 자치구에서 걷기로 한 것이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68
당시 나라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자, 수많은 잉글랜드인이 조국을 버리고 바다를 건너가 미국 매사추세츠 만에 식민지를 세웠다. 들리는 말로는 친척인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1599~1658)과 함께 존 햄던도 미국으로 향하는 여행객에 섞여 배에 올랐지만, 선장이 찰스 1세의 허락 없이는 배에 태울 수 없다고 거부해 할 수 없이 배에서 내렸다고 한다. 아뿔싸! 찰스 1세가 그때 그들을 보냈다면 좋았을 것을!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69
스코틀랜드인들은 ‘언약The Covenant’이란 이름의 엄숙동맹Solemn League을 맺어 고유의 종교 형식을 지키기로 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70
육군과의 음모를 누설한 사람은 조지 고링George Goring(1585~1663)이라는 자였다. 귀족의 아들로 아버지와 이름이 같고 원래 음모에 가담한 몹쓸 친구였는데 배반한 것이었다. 찰스 1세가 진입명령서를 발급한 상태였으니 밸푸어Balfour라는 스코틀랜드인 소장이 단호하게 막지 않았으면 200명의 군인이 런던탑에 진입했을 것이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75
햄던 판결은 완전히 뒤집혔다. 존 햄던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던 판사들은 의회가 그들에게 어떤 결론을 내리든 감수하겠다는 서약을 했고, 고등법원의 판사 한 명은 체포되어 감옥으로 보내졌다. 윌리엄 로드 대주교는 탄핵당했으며, 귀가 잘리고 코가 베인 불행한 희생자들은 감옥에서 석방되어 승리를 만끽했다. 그리고 3년마다 의회를 소집하고, 왕이나 관료가 소집하지 않으면 국민이 스스로 모여 국민의 권리이자 권한으로 의회를 소집한다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78
하지만 의회의 강력한 반대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빨리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존 핌과 존 햄던, 그리고 다른 의원들은 그 유명한 ‘대간의서Grand Remonstrance’를 제출했다. 대간의서는 찰스 1세가 지금까지 행한 불법행위를 낱낱이 밝히는 한편, 그의 부도덕한 조언자들을 점잖게 질책하는 문서였다. 대간의서가 통과되어 본인에게 제출되었을 때도 찰스는 자기 명령이면 런던탑의 밸푸어 소장을 해임하고 평판 나쁜 인물을 그 자리에 앉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82
찰스 1세는 누구의 조언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법무장관을 상원에 보내 몇몇 의원을 반역죄로 기소했다. 국민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들로 찰스 1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맨체스터 백작Edward Montagu, 2nd Earl of Manchester(1602~1671)과 아서 하셀릭 경Sir Arthur Haselrig, 2nd Baronet(1601~1661), 덴질 홀리스Denzil Hollis(1599~1680), 영향력이 막강하고 커 보여서 ‘킹 핌’이라 불리던 존 핌, 존 햄던, 윌리엄 스트로드William Strode(1598~1645) 등이었다. 찰스 1세는 이 의원들의 집을 수색하고 서류를 봉인하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하원에 전령을 보내 하원의원 다섯 명을 즉시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하원은 그 의원들이 합법적인 고발이 있으면 출두할 것이라는 답변을 보내고 바로 휴회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84
당시 모든 자치주에는 민병대나 의용군이 사용할 무기와 화약을 보관하는 무기고가 있었고, 주지사가 민병대를 통솔했다. 그래서 의회는 그때까지 찰스 1세가 행사한 주지사 임명권을 의회로 넘기는 법안을 도입했다. 법안에는 왕국 내 모든 요새, 성채, 보루를 의회가 신뢰하는 주지사에게 맡기는 방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주교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법률도 통과되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88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상당수가 대의명분보다 단지 돈 때문에 싸움에 참여한 찰스 1세의 군사보다 의회의 군사가 훨씬 더 훌륭했다. 찰스를 편들었던 귀족이나 지주 계층 군사들도 용감했고, 그에게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 또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가톨릭교도가 왕실 편에 서서 찰스의 군대에 가담한 이유는 앙리에타 마리아 왕비가 독실한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이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91
당시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세력은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을 라운드헤드Roundhead(도제들의 머리가 짧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_옮긴이), 즉 ‘원두당’이라고 불렀고, 그들은 찰스를 지지하는 세력을 ‘기사당Cavalier’이라고 불렀다. 마치 군인이라도 되는 듯 거들먹거린다는 의미였다. 이제 이 두 단어가 내전의 양편을 구분하는 말이 되었다. 왕당파(기사당)는 의회파(원두당)를 ‘반란자’나 ‘불한당’이라고 불렀고, 의회파는 왕당파를 ‘악성 세력’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경건한 자’, ‘정직한 자’ 등으로 불렀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93
전쟁은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다시 찰스 1세의 편으로 넘어간 이중 스파이 고링이 의회파 군대에 포위되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93
찰그레이브에서는 존 햄던 의원이 부대를 지휘하며 앞장서 싸우다 심한 부상을 당한 뒤 일주일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뉴버리 전투에서는 왕당파의 핵심 귀족이었던 포클랜드 경Lucius Cary, 2nd Viscount Falkland(1610~1643)이 전사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94
의회파를 이끈 지도자들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존 햄던, 토머스 페어팩스 경Thomas Fairfax, 3rd Lord Fairfax of Cameron(1612~1671)(1612~1671), 누구보다 훌륭한 올리버 크롬웰, 그리고 그의 사위 헨리 아이어튼Henry Ireton(1611~1651)이었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94
마침내 1646년 4월 27일, 옥스퍼드에 고립된 찰스 1세는 의회파 군대가 사방에서 조여오자 더 늦기 전에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머리와 수염 모양을 바꾸고 하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찰스는 망토까지 둘러쓰고 말에 올랐다. 그리고 도로 사정을 잘 아는 그 지역 성직자를 길잡이 삼아 충복 한 명을 앞세우고 도시를 빠져나갔다. - <찰스 디킨스의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06fa86ae004117 - P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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