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막길 - 문재인, 히말라야를 걷다
탁재형 지음 / 넥서스BOOKS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르막길이 있음 내리막길이 있다.
그래서 산이고 또한 삶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나는 소화한다’, ‘나는 혈액을 순환시킨다’는 말과 마찬가지로 틀린 문장이다.
에크하르트 톨레,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내 몸이 내 의지와 관계없이 알아서 소화를 시키고 혈액을 순환시키듯, 생각도 마찬가지다. 생각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불쑥 떠오른다. 특히 어떤 감정에 붙잡혀 있으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생각이나 감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생겼다가 다시 사라진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는지에 따라서도 휙휙 변한다. 그래서 이제는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나 감정을 단번에 믿지 않으려고 한다.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떠올린’ 생각만 믿으려고 한다. 좋지 않은 생각이나 감정에 빠질라 치면, 내가 있는 곳과 보는 것, 하고 있는 것을 바꿔보기도 한다. 해변으로 나가 느긋하게 걷거나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기도 하면서.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03

돋보이고 싶어서 포장지를 둘렀던 경험들, 두려움과 불안감에 붙잡혀 있던 경험들은 내게 ‘길 없음’ 표지판과 같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말해주지 않고 다만 멈추어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해준 표지판들. 앞으로도 수많은 표지판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게 되겠지만, 최소한 마음이 가야 할 길은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집착하지 말라고, 이 포장지는 네가 아니라고. 불안한 생각과 두려운 마음도 네가 아니고, 너를 돋보이게 하는 포장지가 언젠가 사라지듯 불안과 두려움도 결국 사라질 거라고. 그러니 마음에 너무 꽉 붙잡혀 있지 말라고.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04

시간이 흘러도 희미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생생해지는 기억이 있다. 그런 기억은 늘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며 나를 과거로 데려간다.
고등학교 3학년, 한창 대학 입시 상담을 할 때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무더운 여름이었다. 교실 앞에 다다랐을 때 엄마의 얼굴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찬 와중에도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순서를 기다렸다가 함께 상담실로 들어갔다. 선생님은 엄마한테 인사한 뒤, 책상에 놓인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 종이에는 3년간의 내신 성적, 모의고사 성적, 대외 활동과 공인 영어 점수가 적혀 있었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06

선생님과 상담을 했던 그날,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눈물을 한 바가지 쏟은 탓에 몸이 축 늘어져 있었다. 엄마는 지하철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꼭 껴안아주었다.
"만두랑 우동 먹을래?"
우리는 포장마차에서 만두 한 접시와 우동 한 그릇을 먹으며 평소처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눈치를 슬쩍 보았지만, 엄마는 상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상담을 받는 내내 눈물을 꾹 참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가 떠난 뒤 혼자서 많이 울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엄마는 몇 마디 말로 섣불리 나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 배 속에 만두와 우동을 채워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밤공기를 마시며 함께 걸어주었다. 그날 밤, 나는 엄마와 동네 한 바퀴를 크게 돌면서 웃었다. 그리 나쁘지만은 않던 하루였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09

같은 일을 겪었지만, 엄마의 기억과 과거의 내 기억, 그리고 지금의 기억은 모두 다르다. 기억은 어떤 사건으로만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의 기억은 과거의 내가 선택한 것이고, 지금 내 마음이 달라졌다면 기억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원망의 기억이 사랑의 기억으로 바뀐 것처럼.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11

고등학교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원망이었다. 사랑의 따뜻함보다 원망의 충격이 훨씬 더 컸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그 선택을 다시 꺼내 다른 이름표를 붙여줄 수 있었던 건 지금의 내가 사랑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원망에 잠겨 있기보다 사랑에 감사하고, 폭탄에 슬퍼하기보다 롤케이크에 기뻐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 기억 상자에 원망이 아닌 사랑을, 폭탄이 아닌 롤케이크를 담을 수 있었다. 과거 기억이든, 현재 기억이든, 모든 기억의 책임은 지금의 나에게 있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15

원망을 내려놓고 보니 사랑이 그곳에 있었다.
나는 이 기억을 ‘원망하는 이야기’가 아닌
‘사랑받은 이야기’로 바꾸기로 했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16

내가 마른 몸만큼이나 부끄러이 여겼던 건 ‘부족한 끈기’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누구보다 잘했지만, 어떤 일이든 잘 마무리 짓지 못하고 흐지부지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반복되고 지루한 걸 나는 잘 견디지 못했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19

그는 답했다.
"명문대를 다닌 사람들은 고등학교 때 많은 노력을 했어요. 환경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본인이 노력했던 건 인정해야 하잖아요. 사회에 나와서 그들과 동일한 출발점에서 시작한다는 건 반대로 역차별이에요.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어요. 그들이 노력했던 시간보다 두 배로 더 많이 하면 돼요. 세상이 부조리하고 차별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걸 넘어설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 해요."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21

매일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삶은 무척이나 단조롭다.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 단조로워졌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내일도 오늘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침을 먹고, 글을 쓰고, 산책을 나가고, 점심을 먹고, 다시 글을 쓰고, 또다시 산책을 나가고, 저녁을 먹고, 또다시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잠에 든다. 늘 같은 시간에. ‘매일이 놀랍도록 새롭다’는 말과 정반대로, 지금 우리의 삶은 매일이 놀랍도록 똑같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23

"나 이제 알겠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가 아니고, 내가 대학에 다니고 있는 이유는 졸업하지 않으면 직장에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이고, PD를 꿈꾼 이유는 남들이 보기에 그럴싸해 보였기 때문이었어. 나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시선에만 맞춰서 살아왔지, 내가 뭘 원하는지 스스로 물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그렇게 쌓아온 탑이 지금은 다 무너진 것 같아……."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29

평소 하윤은 말을 하는 것보다 노트에 기록하는 걸 더 좋아했다. 어딜 가든 항상 노트를 들고 다녔고, 어디서든 그 노트를 펼쳐 글을 썼다. 또 하윤은 종이의 색감과 질감을 살펴보며 마음에 드는 종이를 찰떡같이 골라내는 ‘종이덕후’였고,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 그런 하윤이 북바인딩에 빠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31

그날 이후로, 말하는 방식을 조금 바꾸었다. 꼭 전하고 싶은 제안이 있으면 "이렇게 해보자!"가 아니라 "이건 내 생각인데……" 하고 조심스럽게 운을 뗐고, "물론 꼭 해야 한다는 건 아니야"라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건 내 생각인데"라는 말에는 ‘이건 내 생각일 뿐 네 생각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고, "꼭 해야 한다는 건 아니야"라는 말에는 ‘얼마든지 거절해도 좋아. 선택권은 언제나 너에게 있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하윤이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말하면 "그래도 한 번 더 해보자!"라고 밀어붙이는 대신 "그래, 이건 너한테 너무 힘드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라고 말했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35

하윤에게 필요한 건 자신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을 걷어내는 일이었다.
나는 그 일을 함께하고 싶었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37

나는 오랫동안 숨어 사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데 유튜브라는 세계에 나를 툭 던져놓으니 사람들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그들이 낯설고 두려웠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사람들은 품이 넓고 마음이 고왔다. 그들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고, 내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했다. 먼저 손을 내밀고 친구가 되지 않겠냐고 물었다. 비록 온라인에서 댓글로 마음을 주고받았을 뿐이지만, 그들 덕분에 나는 점점 덜 외로워졌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42

‘나의 세계’를 내려놓고 ‘너의 세계’를 들이면서 나는 편안했던 내 자리를 벗어나 불편하고 어색한 현우의 자리로 건너갔다. 따로따로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도 있었지만, 둘이서 하면 무슨 일이든 재미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함께 하고 싶었다. 한 배를 탄 이상 각자가 젓고 싶은 대로 노를 저으면 똑바로 나아갈 수 없으니, 우리는 서로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디인지 물으며 같은 곳을 향해 노를 저었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43

사랑은 기꺼이 나를 내려놓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안전하지만 외로운 ‘내 삶’이 아닌, 번거롭지만 재미있는 ‘우리의 삶’으로 나아갔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43

사랑할수록 더 많이 불안해지고 더 많이 슬퍼질 것이다. 그러나 사랑한 사람에게 끝내 남는 건 슬픔이 아닌 기쁨이라는 걸, 나는 믿어보려고 한다. 사랑은 모호하게 경계를 흐린다. 내 삶과 네 삶의 경계를 흐리고, 슬픔과 기쁨의 경계를 흐리고, 불행과 행복의 경계를 흐린다. 결국 나는 ‘사랑’이란 두 글자 앞에서 슬픈 눈으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46

수많은 물음에 답하며 내가 내린 결론은,
모든 질문에 곧이곧대로 답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55

거짓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나의 거짓이 진실처럼 보이려면 또 다른 거짓이 필요했다. 그렇게 부풀려진 거짓 뭉텅이를 이고 지고 사는 삶은 늘 불안했고, 체한 것처럼 마음 어딘가가 거북했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61

엄마 아빠는 편지를 천천히 읽었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차분히 말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내 모습이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혼자 마음을 다 정해놓고 휙 가버리는 모습이 얼마나 서운했는지, 자꾸만 위험한 길로 가는 내가 얼마나 걱정스러웠는지, 마음을 알아주고 싶어도 그게 잘되지 않아서 얼마나 답답했는지, 그리고 모진 말밖에 할 수 없어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더듬더듬 말했다. 그때 처음으로 엄마 아빠의 마음을 알았다. 그동안 내가 듣지 않은 건지, 아니면 엄마 아빠가 말을 안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의 진심을 제대로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61

결국 나는 사랑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기에서는 모든 걸 내 뜻대로 하며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 귀찮고 번거로운 사랑이 좋다.

-알라딘 eBook <작고 단순한 삶에 진심입니다> (류하윤.최현우 지음) 중에서 - P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ings are not easy. Everyone’s having troubles." - P19

The girl had a firm body like a pale block of wood—much in the shape of her mother—with great strength in her dexterous hands, well-muscled arms, and powerful legs. Her short, wide frame was thick, built for hard work, with little delicacy in her face or limbs, but she was quite appealing physically—more handsome than pretty. - P21

Her dark eyes glittered like shiny river stones set in a polished white surface, and when she laughed, you couldn’t help but join her. - P21

when her father died, Sunja changed from a joyful girl to a thoughtful young woman.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음악이 손님처럼 나타나,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하다가 우연히 만난 아주 친한 친구처럼, 식사를 함께하고 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익숙한 사운드는 11월의 상쾌한 이 저녁, 어느 것도 익숙하지 않고 낯설기만 한 이국의 도시에서 그들을 과거로 이끌어, 거의 잊고 지내던 공유의 느낌과 삶을 나누는 느낌을 되살려 주었다. 마치 이 좁은 둘레, 돗자리를 깐 부분, 선반 두 개, 전축, 원뿔 모양 전등갓이 만들어낸 둥근 빛 둘레로 시간과 거리가 침범하지 못하는 안전지대가 옮겨져 소생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유배지요, 미지의 땅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96

이렇게 한 주 한 주가 흘러갔다. 거의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4주가 한 달을 만들었다. 달들은 대부분이 엇비슷했다. 낮이 짧아지는가 싶더니 점점 길어져 갔다. 겨울은 축축하고 추웠다. 그들의 인생이 흘러갔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1

얼마 안 가 삶 전체가 그들 안에서 멈춰버릴 것 같았다. 시간은 동요 없이 흘렀다. 더 이상 어느 것도 그들을 이 세계에 붙잡아 두지 못했다. 때늦게 들어오는 신문들이 선의의 거짓말이거나 혹은 이전 삶의 추억, 다른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들은 스팍스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 것이다. 더 이상의 계획, 더 이상의 조바심도 없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늘 멀기만 한 휴가나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조차 꿈꾸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4

기쁨도 슬픔도 심지어 권태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인지, 과연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실망스러운 질문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만족도 얻지 못했지만, 이따금 혼란스럽고 모호하게나마 이곳에서의 삶이 분수에 맞고, 심지어 역설적이게도 이런 삶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들은 무(無)의 한가운데, 직선으로 난 길과 누런 모래, 석호, 잿빛 야자수로 된 무인도에,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을 세계에 살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5

대신 무(無)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정확히 이 전무함 때문에,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부재하는 완전한 진공 상태로서의 중성의 장소, 백지상태 때문에 자신들이 정화되고 위대한 단순함과 진정한 겸손을 되찾은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5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요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6

이 여행에서 남은 것이라곤 무(無)와 메마름의 인상이었다. 황량한 가시덤불, 대초원, 석호,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광물질의 세계, 그들만의 고독, 그들만의 척박함에 갇힌 세계.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10

기억 없는 세계, 추억 없는 세상. 헤아리지 않아도 무미건조한 날과 주, 시간은 여전히 흘러갔다. 그들은 더는 욕망하지 않았다. 무심한 세계.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12

일상은 똑같이 반복되었다. 수업, 레장스 카페에서의 에스프레소, 저녁 시간에 보는 영화 두 편, 신문, 낱말 맞히기. 그들은 몽유병자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상실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12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경주의 끝, 6년 동안 삶이 굴러온 모호한 궤도의 끝, 어느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우유부단한 탐색의 끝에 서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13

떠날 것이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날 것이다. 달아날 것이다. 아무것도 그들을 묶어둘 수 없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21

여행은 오랫동안 감미롭게 이어질 것이다. 정오쯤,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식당 칸에 갈 것이다. 창가에 머리를 맞대고 앉을 것이다. 위스키 두 잔을 시킬 것이다. 다시 한 번, 공모의 미소를 서로에게 지을 것이다. 매끄러운 냅킨과 침대차 문장(紋章)이 찍힌 묵직한 식기류, 받침 접시를 댄 두꺼운 접시는 사치스러운 정찬의 서막을 알리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들이 맛볼 식사는 밋밋할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22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일부이다.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한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진실성을 의미한다.

카를 마르크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23

"오늘날 물질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풍요로움이 어떤 정형화된 행복을 가져다주었지요. 현대사회에서는 행복해지기 위해 전적으로 ‘모던’해져야 합니다. (……) 실비와 제롬이 행복하고자 하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벗어날 수 없는 사슬에 걸려든 겁니다. 행복은 계속해서 쌓아 올려야 할 무엇이 되고 만 것이지요. 우리는 중간에 행복하기를 멈출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25

네 가지 밭에 각각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농부의 작업에 빗대어 자신의 작품 활동을 설명한 페렉은 사회학적 글쓰기(『사물들』), 로마네스크적 글쓰기(『인생 사용법』), 유희적 글쓰기(『실종』), 자서전적 글쓰기(『W 또는 유년의 기억』)라는 자신만의 밭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부지런히 가꾼 작가였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멈춰서서 가만히 - 유물 앞에 오래 서 있는 사람은 뭐가 좋을까
정명희 지음 / 어크로스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번쯤 큐레이터> 에 이어 드디어 두번째 글을 접하게 되네요. 덕분에 박물관에서 귀한 유물과의 대화를 ‘도슨트’를 통해 직접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공유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