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손님처럼 나타나,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하다가 우연히 만난 아주 친한 친구처럼, 식사를 함께하고 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익숙한 사운드는 11월의 상쾌한 이 저녁, 어느 것도 익숙하지 않고 낯설기만 한 이국의 도시에서 그들을 과거로 이끌어, 거의 잊고 지내던 공유의 느낌과 삶을 나누는 느낌을 되살려 주었다. 마치 이 좁은 둘레, 돗자리를 깐 부분, 선반 두 개, 전축, 원뿔 모양 전등갓이 만들어낸 둥근 빛 둘레로 시간과 거리가 침범하지 못하는 안전지대가 옮겨져 소생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유배지요, 미지의 땅이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96

이렇게 한 주 한 주가 흘러갔다. 거의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4주가 한 달을 만들었다. 달들은 대부분이 엇비슷했다. 낮이 짧아지는가 싶더니 점점 길어져 갔다. 겨울은 축축하고 추웠다. 그들의 인생이 흘러갔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1

얼마 안 가 삶 전체가 그들 안에서 멈춰버릴 것 같았다. 시간은 동요 없이 흘렀다. 더 이상 어느 것도 그들을 이 세계에 붙잡아 두지 못했다. 때늦게 들어오는 신문들이 선의의 거짓말이거나 혹은 이전 삶의 추억, 다른 세계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그들은 스팍스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살 것이다. 더 이상의 계획, 더 이상의 조바심도 없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늘 멀기만 한 휴가나 프랑스로 돌아가는 일조차 꿈꾸지 않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4

기쁨도 슬픔도 심지어 권태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인지, 과연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실망스러운 질문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만족도 얻지 못했지만, 이따금 혼란스럽고 모호하게나마 이곳에서의 삶이 분수에 맞고, 심지어 역설적이게도 이런 삶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들은 무(無)의 한가운데, 직선으로 난 길과 누런 모래, 석호, 잿빛 야자수로 된 무인도에,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들지도 않을 세계에 살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5

대신 무(無)만이 감돌았다. 하지만, 정확히 이 전무함 때문에,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부재하는 완전한 진공 상태로서의 중성의 장소, 백지상태 때문에 자신들이 정화되고 위대한 단순함과 진정한 겸손을 되찾은 것 같았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5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요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06

이 여행에서 남은 것이라곤 무(無)와 메마름의 인상이었다. 황량한 가시덤불, 대초원, 석호,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는 광물질의 세계, 그들만의 고독, 그들만의 척박함에 갇힌 세계.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10

기억 없는 세계, 추억 없는 세상. 헤아리지 않아도 무미건조한 날과 주, 시간은 여전히 흘러갔다. 그들은 더는 욕망하지 않았다. 무심한 세계.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12

일상은 똑같이 반복되었다. 수업, 레장스 카페에서의 에스프레소, 저녁 시간에 보는 영화 두 편, 신문, 낱말 맞히기. 그들은 몽유병자나 다름없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더 이상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상실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12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경주의 끝, 6년 동안 삶이 굴러온 모호한 궤도의 끝, 어느 곳으로도 인도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은 우유부단한 탐색의 끝에 서 있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13

떠날 것이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날 것이다. 달아날 것이다. 아무것도 그들을 묶어둘 수 없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21

여행은 오랫동안 감미롭게 이어질 것이다. 정오쯤, 여유 있는 발걸음으로 식당 칸에 갈 것이다. 창가에 머리를 맞대고 앉을 것이다. 위스키 두 잔을 시킬 것이다. 다시 한 번, 공모의 미소를 서로에게 지을 것이다. 매끄러운 냅킨과 침대차 문장(紋章)이 찍힌 묵직한 식기류, 받침 접시를 댄 두꺼운 접시는 사치스러운 정찬의 서막을 알리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들이 맛볼 식사는 밋밋할 것이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22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일부이다.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한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진실성을 의미한다.

카를 마르크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23

"오늘날 물질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현대 문명의 풍요로움이 어떤 정형화된 행복을 가져다주었지요. 현대사회에서는 행복해지기 위해 전적으로 ‘모던’해져야 합니다. (……) 실비와 제롬이 행복하고자 하는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벗어날 수 없는 사슬에 걸려든 겁니다. 행복은 계속해서 쌓아 올려야 할 무엇이 되고 만 것이지요. 우리는 중간에 행복하기를 멈출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25

네 가지 밭에 각각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농부의 작업에 빗대어 자신의 작품 활동을 설명한 페렉은 사회학적 글쓰기(『사물들』), 로마네스크적 글쓰기(『인생 사용법』), 유희적 글쓰기(『실종』), 자서전적 글쓰기(『W 또는 유년의 기억』)라는 자신만의 밭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부지런히 가꾼 작가였다.

-알라딘 eBook <사물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중에서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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