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물리학은 19세기 말 인류가 자만심에 한껏 취해 있던 시기에 태동했다. 별들의 지도를 그리고, DNA를 분리한 뒤, 원자핵 분열을 일으키기 직전이었다. 우리의 지적 능력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러 인류가 세운 목표를 전부 성취하면서 과학이 막을 내리는 순간을 목격하는 듯했다. - <양자역학 이야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2943 - P6

양자물리학은 일반적인 규칙을 따르지 않는 네 변 삼각형과 숫자가 존재하는 세계다. 평행우주와 모순이 여기저기 숨어 있고, 사물들은 존재하기 위한 공간이나 시간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 <양자역학 이야기>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2943 -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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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가 할 일은, 애써서 받은 그 ‘연구 면허’가 별무소용인 종잇장이 되지 않도록 연구자로서 할 일을 다 하는 것뿐이다. 평가하고 평가받는, 누구나와 같은 그 삶 속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뿐이다.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30

거의 ‘지박령地縛靈’에 가까운 집순이, 연구실순이인 나의 인맥은 일가친척과 극소수의 어릴 적 친구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죄다 천문학자 아니면 곧 천문학자가 될 사람, 그러려다 다른 길을 찾아간 사람, 그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 등으로 아주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31

우리가 은하니 성단이니 얘기할 때 사용하는 ‘우주’는 ‘유니버스’다. 별과 먼지와 행성과 우리 생명체를 포함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과 상황과 환경이다. 영화, 소설 등 예술작품 속에서 설정된 배경을 ‘시네마틱 유니버스’라고 부르듯이, 유니버스는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 그 자체로서의 우주다. 별까지의 거리, 성운의 크기, 가장 멀리 있는 은하까지의 거리, 은하의 나이, 우주의 크기 등을 구하는 것을 두고 ‘우주를 측정한다’고 표현하는데, 천문학의 근간이 되는 중요한 분야다. 필요한 단위 체계를 정하는 일도 포함된다. 이 넓은 우주를 센티미터나 킬로미터 단위로 재려면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겠는가.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33

‘코스모스’는 질서와 조화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우주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에는 질서와 조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어버릴 텐데, 다행히도 우주의 먼지는 모이면 구름이 되고, 구름이 꼭꼭 뭉쳐 별과 행성을 만들어내고, 별은 제 안의 연료가 소진되면 남은 것을 폭발적으로 내어놓으며 다시 우주에 먼지를 공급한다. 별이 모이고 모여 성단을 이루고, 은하를 이루고, 은하단을 이룬다. 밤하늘의 별은 흘러가고 행성은 때때로 역행했다 다시 순행한다. 일식과 월식은 예측에 맞게 일어난다. 빅뱅 이론처럼 우주가 어떻게 생겨나고 진화했는가 살펴보는 분야를 ‘우주론cosmology’이라고 한다. 칼 세이건의 대표작인 그 책 이름이 『코스모스』인 것도 우주의 질서와 조화, 우주라는 대자연의 작동 원리를 논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우주’ 따위로 섣불리 번역하지 않고 원제를 그대로 사용한 것은 대단히 훌륭한 일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34

컴퓨터 자판에도 있는 ‘스페이스’는, 자판에서와 다름없이 ‘공간’으로서의 우주다. 특히, 인류가 인공위성이나 우주선과 같은 인공물체를 보내 탐사하는 공간을 칭한다. 지구 주변의 환경과 그곳에 존재하는 플라즈마 등의 입자를 연구하는 분야가 ‘우주과학space science’이다. 인공물체가 도달한 우주 공간의 범위는 지난 40여 년간 크게 확장되었다. 1977년에 발사한 행성탐사선 보이저 1, 2호의 끊임없는 항해 덕분이다. 보이저는 이제 태양계 끝자락을 넘어갔다. 태양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인 태양권계면heliopause을 지나 항해를 계속하는 보이저와 함께 우리의 우주는 매일,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34

지금의 속도라면 우리은하는 수십억 년 후 안드로메다와 충돌할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은하의 충돌은 돌끼리 부딪히는 것과는 매우 달라서, 태양 근처에서 초신성 폭발이 일어나 우리 태양계를 다 집어삼키거나 하지 않는 한, 우리는 밤하늘에 별이 유난히 많아지는 것 말고는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말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35

호주 밤하늘의 남십자성은 우리 밤하늘의 북두칠성에 견줄 만하다.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보이는 별을 주극성이라고 부르는데, 호주에서는 남십자성이 주극성이라서 생일이든 아니든 매일 밤 볼 수 있다. 남반구에서는 북두칠성을 볼 수 없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36

생일 별자리와 관련된 황도 12궁은 우리나라에서도 호주에서도 주극성이 아니다. 뜨고 지는 ‘출몰성’인데, 계절에 따라 뜨는 시각이 바뀐다. 생일 별자리는 태양의 위치가 중요한 시스템으로, 내 생일에 태양이 내 별자리 구역에 임한다는 뜻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36

블랙홀 자체는 볼 수 없지만, 빨려들어가면서 휘어지는 빛, 그리고 빨려들어가는 물질 일부가 방출하는 에너지로 블랙홀의 윤곽을 관측한 것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38

지구 기후 변화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시대는 13세기 초부터 17세기 말까지 지속된 소빙기와 상당 부분 겹친다. 빙하기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추운 시기였다. 그중에서도 1650년에서 1700년 사이에 특히 온도가 낮아서 온 지구가 추위에 떨었는데, 이 시기를 마운더 극소기Maunder minimum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한여름에 우박이 기록된 건수를 연도별로 살펴보았더니, 과연 마운더 극소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기록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40

1604년 10월 9일, 밤하늘에 별 하나가 갑자기 나타났다. 크고 무거운 별 하나가 제 수명을 다하고 장렬히 폭발하면서 갑자기 밝아진 것이다. 이것을 초신성이라고 하는데, 폭발할 때 급격히 밝아졌다가 서서히 어두워진다. 독일의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이 초신성의 기록을 남겼는데, 같은 시기 조선 관상감觀象監에서도 이를 관측한 기록이 있다. 시간에 따른 밝기 변화를 그려보면 케플러의 기록과 일치한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41

76년마다 돌아오는 핼리혜성도 우리나라 사료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989년 고려 성종 때의 기록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말인 1835년까지 매번 핼리혜성을 관측하고 기록했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41

‘대졸자’라는 꼬리표 하나를 위해 막대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소모되는데, 기업은, 화려한 스펙의 지원자가 몰리는 회사일수록, 큰 비용을 들여 대졸 신입사원을 재교육한다. 대학이 고등학교의 연장선이나 취업 준비소가 아닐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대학이 학문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공부라는 걸 조금 더 깊이 해보고 싶은 사람, 배움의 기쁨과 앎의 괴로움을 젊음의 한 조각과 기꺼이 맞바꿀 의향이 있는 사람만이 대학에서 그런 시간을 보내며 시간과 비용을 치러야 한다. 그러려면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경제적 부를 축적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여야 한다. 모두가 대학에 다니는 바람에 ‘반값 등록금’이니 ‘국가장학금’이니가 국가적 관심사인 사회에서는 택도 없는 일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45

관찰하고 탐구하는 그 자체가 학문적 태도다. 신기하고 새로운 현상을 배우고 발견하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한다. 밤하늘의 모든 별이 한 방향으로 흐를 때 홀로 역행하는 행성을 발견하고 두려워하거나 신기해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여러 사람이 수 세기에 걸쳐 지식을 쌓아올리는 것, 끊임없이 검증하고 반박하고 새로운 근거를 더하는 것, 나의 생각을 제삼자의 눈으로 조망하는 것, 그것을 대학에서 배워야 한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47

논문에서는 과거 다른 사람이 발견하고 연구하고 논했던 내용을 정확히 밝히며 인용한다. 남의 업적을 내 것인 양하는 태도는 국가나 가족에 대한 긍지를 느낄 때나 쓰는 것이요, 남의 글 베끼기는 타자 연습할 때나 하는 일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48

시적 허용은 허용되지 않는다. 대학생이라면 학문적 글쓰기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문적 글쓰기는 유려한 글솜씨를 요구하지 않는다. 연구 내용이 별것 아니더라도, 글이 서툴더라도, 남의 것을 베껴 열 쪽짜리 보고서를 쓰는 것보다 한두 쪽이라도 자신이 행하고 생각한 내용을 형식에 맞게 쓰는 것이 더 지적인 활동이다. 그것이 대학의 모든 강의에서 공통으로 배우는, 혹은 배워야 할, 대학생으로서의 기본 소양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48

내가 처음 시를 보여줬을 때, 그는 멍한 표정으로 노트를 앞뒤로 넘기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게 백상지 100그램짜리인가? 아주 비싼 종이에 시를 썼네. 다음부터는 싸구려 갱지에 시를 써." 그게 무슨 말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이건 그래도 시처럼 보인다고 말할 때까지 나는 수없이 많은 노트를 버려야만 했으니까.*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마음산책, 2004, 194쪽.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49

대학생은 시 쓰기를 연습하는 초보 시인과 같다. 남의 시를 베끼지 않고, 남의 시와 비슷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시상을 훌륭하게 표현하는 그런 시를 쓰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내 생각’ ‘내 의견’이 뭔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과생도 일필휘지로 글을 쓸 수 있기 마련이다.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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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 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알라딘 eBook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중에서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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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에 지하의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면 하얀색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병원을 걸어다녔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곤 했다.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2

하지만 내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글을 읽으며 그는 자기 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강의실에서 자신이 쓴 글의 한가운데로. 여기 있지만 저기에도 있는 사람. 그날은 내가 소설가에 대한 정의를 얻은 날이기도 하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다른 세계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5

외삼촌의 이야기에는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동시에 인간이 경험하는 비극의 핵심에 가닿는 진실이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기억하지 못해 슬퍼진다는 것. 그러므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슬픔은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6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 번의 삶을 살게 된다.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되는 첫번째 삶, 과거를 기억하며 거꾸로 진행되는 두번째 삶, 그리고 두번째 삶이 끝나고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되는 세번째 삶. 그런데 이 세번째 삶은 첫번째 삶과는 다르다. 그 안에 미래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6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7

유한한 육체의 시간 속에서 비관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김연수는 무한한 정신의 시간 속에서 낙관할 수 있는 "깊은 시간의 눈"(「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에 대해 말한다. 깊은 시간의 눈 속에는 나에게 들어온 타인이 있고 나를 품은 타인이 있다. 나와 타인이 섞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인생의 행과 불행에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시간이다.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7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현재 부부인 ‘나’와 지민이 연인이 된 1999년 어느 여름날에 대한 회상으로, 두 사람은 몇 가지 일을 경험하며 예언이란 예외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말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보통의 사건임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지민과 ‘나’는 지민의 엄마가 쓴 소설 『재와 먼지』의 줄거리를 알게 되는데, ‘시간여행’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 소설인 『재와 먼지』에서 한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이 끝나간다는 사실에 좌절해 동반자살을 한다. 자살 직후 임사 체험을 하게 된 두 사람은 그날을 시작으로 거꾸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날마다 어려진 끝에 자신들이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에 이른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고 그들 앞에는 세번째 삶이 펼쳐진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9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0

이들에게 세번째 삶이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실천하고 낙관을 확신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다. 미래가 기준이 되어서 현재를 결정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체를 변형시켜나가는 정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1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던 스토아주의자들은 죽음, 질병, 고통 등과 관련된 참된 원칙들을 발견하고 그에 부합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수련하기 위해 ‘죽음 명상’2)을 했다. 죽음 명상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죽음을 현재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수련의 핵심은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처럼 사는 데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1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건 기억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억이 흐르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지만 기억의 흐름을 만듦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 수 있다. 그 긴 시간 속에서, 짧은 시간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목도하는 우리는 세상을 낙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2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는 근대적 시간 개념은 기억의 대상을 과거에 한정 짓는다. 하지만 시간이 다시 정의되면 기억도 다른 범주를 필요로 한다. 경험한 것만을 기억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경험하지 못한 것도 기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바뀌고, 기억의 쓸모는 무한히 확장된다. 내게 생길 일을 기억하는 건 모두의 일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2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기억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5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75

세번째 삶을 살 수 있다면,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기억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매일의 시련과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새 바람을 맞을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5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6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도." 배우인 명준이 생각하는 좋은 얼굴은 좋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통한다. 새 바람은 공기가 전해주는 희망의 움직임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7

유진주는 달의 방향만을 생각했다.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만을. 방향은 선택하는 것, 방향은 변형이 시작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유진주는 자기 삶을 변형시킨다. 더이상 대답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9

이유의 통로가 없어졌으므로 이제 그녀는 이해의 통로를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답은 이미 그녀의 질문 안에 있었다.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는 것.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시도는 헛될 수 있지만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에는 패배한 이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20

희생적인 아버지와 함께했던 유년의 삶, 치매와 함께 시작된 혼돈과 혼돈의 한가운데서 지켜보았던 아버지의 과거, 그 모든 기억들을 품고 시작되는 세번째 삶. 이 순간 나는 진정한 마음으로, 진주에게 불어올 새 바람을 기다린다. 마치 나의 삶인 것처럼, 다른 방향에서 불어오는 새 바람을 기다린다. 정신의 삶에서 세 명의 바르바라가 겹쳐진 시간을 함께 살았던 것처럼 진주의 삶과 나의 삶도 중첩될 수 있다고 믿는다. 깊은 시간의 눈으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진주의 슬픔도 나의 슬픔도 새 바람 속에서 조금씩 괜찮아질 것이다. 바람이, 새 바람이 분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20

눈은 점점 침침해져 ‘삶이 끝날 때 나는 말하고 싶어’ 다음이 쉼표인지 마침표인지도 분간되지 않지만, 이런 시를 읽으면 용기가 생긴다. 잘 보이지 않는다면 안경을 벗고 눈을 좀더 책 가까이 가져가면 된다. 예전에는 하지 않아도 될 불편한 행동이지만, 몸은 불편해도 더이상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대신 가슴을 뛰게 하는 일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22

메리 올리버의 다른 시 「골든로드」의 한 구절을 들려줘야겠다.
그는 "빛으로 가득 찬 이 몸들보다 나은 곳이 있을까?"라고 썼다.
이 경이로운 문장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나는 잘 알게 됐다. 직전의 시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삶이라는 힘든 노동은/어두운 시간들로 가득하지 않아?"
‘어두운 시간’이 ‘빛으로 가득 찬 이 몸’을 만든다. 지금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언젠가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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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산책의 끝은 언제나 앨리스의 다락방이었다. 부암동 초입에서 골목길 안쪽까지 종아리가 좀 땅긴다 싶은 정도로 걸어가면 나오는 모퉁이의, 전혀 앨리스처럼 보이지 않는 중년 부인이 10월 하순의 은행잎보다도 더 샛노란 카레를 끓여주는 이층 카페였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5

나무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 계단 바로 뒤 창가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었다. 그 자리로는 늘 하오의 성기고 바랜 빛이 비스듬하게 드리워졌다. 원목 테이블 위 가지런히 놓인 아이비와 산호수와 포인세티아의 초록과 빨강은 저녁을 앞두고서야 또렷해졌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5

"그런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온 앨리스인가요?"
지훈이 카페 주인에게 물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Alice’s Attic〉이란 단편영화에서 따온 이름이에요."
Alice’s Attic. 지훈은 기억하기로 했다.
"자기 안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못 봐요."
"네?"
"그 영화가 그런 내용이에요."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6

서른한 살에 자살한 실비아 플라스는 "튤립은 맨 먼저 너무 빨개서,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썼고, 무대의 모리타 도지는 죽은 친구를 기억하기 위해 검은 선글라스를 한 번도 벗지 않았으며, 기억을 모두 지운다고 해도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미셸 공드리는 영화를 찍었다는 것을 지훈은 전혀 몰랐을 뻔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67

사람은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한다. 이름과 얼굴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은 삼백 명 정도인데 그중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서른 명이고, 절친으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세 명이라고. 그렇다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72

그처럼 내 안에는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말들, 아무런 쓸모도 없는 말들이 가득하네요. 끝내 부치지 못할 이 편지에 적힌 단어들처럼. 그중에서도 가장 쓸모없는 말은, 그때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던, 하지만 이제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게 된 그 말, 한때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는 말할 수 있었으나 이제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 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사랑했던 너에게, 그리고 더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당신에게.
부디 잘 지내고, 잘 지내시길.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74

주석에는 할아버지가 번역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라벨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적혀 있었다.

육체는 우리 외에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협소한 영역 안에 우리를 가둬버린다. 그러나 영적 삶은 이와 반대로, 우리를 존재하는 것의 공통적인 첫 시원으로 이끌어간다. 또한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82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했다. 덕분에 책은 우리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83

‘여아가 항행하여 무화하면 기식우지진부재리오如我恒幸無禍, 豈識友之眞否哉’라면 리마두의 그 책에 나오는 문장으로, ‘만약 내게 항상 행복만 있고 불행이 없다면 어찌 벗의 참되고 거짓됨을 알 수 있으리오’라는 뜻인데, 그 몇 년 뒤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이승훈이며 이벽이며 정약용 형제들은 그 문장이 가리키는 바를 온몸으로 절감하게 되지. 추국청에서 고문을 받으며 한때의 벗이었던 그들이 서로를 부인하고 고발하는 중심에 정약용이 있었어.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85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91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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