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마음에 지하의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면 하얀색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병원을 걸어다녔다. 그럴 때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곤 했다. "과거의 우리를 생각할 수 있는데, 왜 미래의 우리는 생각할 수 없을까?"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2

하지만 내가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글을 읽으며 그는 자기 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강의실에서 자신이 쓴 글의 한가운데로. 여기 있지만 저기에도 있는 사람. 그날은 내가 소설가에 대한 정의를 얻은 날이기도 하다.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다른 세계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사람.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5

외삼촌의 이야기에는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동시에 인간이 경험하는 비극의 핵심에 가닿는 진실이 각인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기억하지 못해 슬퍼진다는 것. 그러므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우리의 슬픔은 괜찮아질 수 있다는 것.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6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세 번의 삶을 살게 된다.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되는 첫번째 삶, 과거를 기억하며 거꾸로 진행되는 두번째 삶, 그리고 두번째 삶이 끝나고 다시 과거에서 현재로 진행되는 세번째 삶. 그런데 이 세번째 삶은 첫번째 삶과는 다르다. 그 안에 미래가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6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고 말씀하셨는데, 누군가를 이해하는 게 정말 가능하기는 할까요?"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7

유한한 육체의 시간 속에서 비관할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김연수는 무한한 정신의 시간 속에서 낙관할 수 있는 "깊은 시간의 눈"(「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에 대해 말한다. 깊은 시간의 눈 속에는 나에게 들어온 타인이 있고 나를 품은 타인이 있다. 나와 타인이 섞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은 인생의 행과 불행에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는 시간이다.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7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현재 부부인 ‘나’와 지민이 연인이 된 1999년 어느 여름날에 대한 회상으로, 두 사람은 몇 가지 일을 경험하며 예언이란 예외적인 존재만이 할 수 있는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말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보통의 사건임을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지민과 ‘나’는 지민의 엄마가 쓴 소설 『재와 먼지』의 줄거리를 알게 되는데, ‘시간여행’에 대한 일종의 판타지 소설인 『재와 먼지』에서 한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이 끝나간다는 사실에 좌절해 동반자살을 한다. 자살 직후 임사 체험을 하게 된 두 사람은 그날을 시작으로 거꾸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날마다 어려진 끝에 자신들이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에 이른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시간은 다시 원래대로 흐르고 그들 앞에는 세번째 삶이 펼쳐진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09

"정신의 삶은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고독의 삶을 뜻하지. 개별성에서 멀어진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은 얼마간 서로 겹쳐져 있다는 거야. 시간적으로도 겹쳐지고, 공간적으로도 겹쳐지지. 그렇기 때문에 육체의 삶이 끝나고 난 뒤에도 정신의 삶은 조금 더 지속된다네. 우리가 육체로 팔십 년을 산다면, 정신으로는 과거로 팔십 년, 미래로 팔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네. 그러므로 우리 정신의 삶은 이백사십 년에 걸쳐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지. 이백사십 년을 경험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미래를 낙관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0

이들에게 세번째 삶이란 유한한 인간이 영원을 실천하고 낙관을 확신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다. 미래가 기준이 되어서 현재를 결정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주체를 변형시켜나가는 정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1

실천을 중요하게 여겼던 스토아주의자들은 죽음, 질병, 고통 등과 관련된 참된 원칙들을 발견하고 그에 부합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수련하기 위해 ‘죽음 명상’2)을 했다. 죽음 명상은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 죽음을 현재화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 수련의 핵심은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처럼 사는 데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1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는 건 기억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억이 흐르는 길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지만 기억의 흐름을 만듦으로써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살 수 있다. 그 긴 시간 속에서, 짧은 시간 속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을 목도하는 우리는 세상을 낙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2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흐른다는 근대적 시간 개념은 기억의 대상을 과거에 한정 짓는다. 하지만 시간이 다시 정의되면 기억도 다른 범주를 필요로 한다. 경험한 것만을 기억할 수 있다는 믿음은 경험하지 못한 것도 기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바뀌고, 기억의 쓸모는 무한히 확장된다. 내게 생길 일을 기억하는 건 모두의 일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2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기억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5

자신은 이제 새들이 모두 날아가고 난 뒤의 빈 나무 같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한번 시작한 사랑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떤 사람도 빈 나무일 수는 없다고, 다만 사람은 잊어버린다고, 다만 잊어버릴 뿐이니 기억해야만 한다고, 거기에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다고.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175

세번째 삶을 살 수 있다면,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기억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매일의 시련과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새 바람을 맞을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5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6

"우리의 얼굴은 유동한다. 흐르는 물처럼 시간에 따라 조금씩 과거의 얼굴에서 미래의 얼굴로 바뀌어간다. 그렇게 우리의 얼굴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거기 희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게 예술이 하는 일이라고도." 배우인 명준이 생각하는 좋은 얼굴은 좋은 삶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통한다. 새 바람은 공기가 전해주는 희망의 움직임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7

유진주는 달의 방향만을 생각했다.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만을. 방향은 선택하는 것, 방향은 변형이 시작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유진주는 자기 삶을 변형시킨다. 더이상 대답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19

이유의 통로가 없어졌으므로 이제 그녀는 이해의 통로를 걸어야 한다. 그러므로 대답은 이미 그녀의 질문 안에 있었다. 타인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만 우리 인생은 살아볼 만한 값어치를 가진다는 것.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시도는 헛될 수 있지만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에는 패배한 이후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20

희생적인 아버지와 함께했던 유년의 삶, 치매와 함께 시작된 혼돈과 혼돈의 한가운데서 지켜보았던 아버지의 과거, 그 모든 기억들을 품고 시작되는 세번째 삶. 이 순간 나는 진정한 마음으로, 진주에게 불어올 새 바람을 기다린다. 마치 나의 삶인 것처럼, 다른 방향에서 불어오는 새 바람을 기다린다. 정신의 삶에서 세 명의 바르바라가 겹쳐진 시간을 함께 살았던 것처럼 진주의 삶과 나의 삶도 중첩될 수 있다고 믿는다. 깊은 시간의 눈으로 미래를 기억할 수 있다면 진주의 슬픔도 나의 슬픔도 새 바람 속에서 조금씩 괜찮아질 것이다. 바람이, 새 바람이 분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20

눈은 점점 침침해져 ‘삶이 끝날 때 나는 말하고 싶어’ 다음이 쉼표인지 마침표인지도 분간되지 않지만, 이런 시를 읽으면 용기가 생긴다. 잘 보이지 않는다면 안경을 벗고 눈을 좀더 책 가까이 가져가면 된다. 예전에는 하지 않아도 될 불편한 행동이지만, 몸은 불편해도 더이상 거기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
대신 가슴을 뛰게 하는 일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온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22

메리 올리버의 다른 시 「골든로드」의 한 구절을 들려줘야겠다.
그는 "빛으로 가득 찬 이 몸들보다 나은 곳이 있을까?"라고 썼다.
이 경이로운 문장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나는 잘 알게 됐다. 직전의 시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삶이라는 힘든 노동은/어두운 시간들로 가득하지 않아?"
‘어두운 시간’이 ‘빛으로 가득 찬 이 몸’을 만든다. 지금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언젠가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알라딘 eBook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중에서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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