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영원하다는 삶 자체에 대해서는 해체하지 않고 긍정한다. 위버멘쉬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스스로 사랑하고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이다.이것은 바로 차라투스트라가 `스스로를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최고 유형`으로 느끼는 것과 같다.
이들은 가장 무거운 숙명적 과제를 짊어지고서 가장 가볍고도 가장 피안적일 수 있으며 실재에 대하여 가장 가혹하고 무서운 통찰을 하면서도 삶의 영원한 회귀에 대하여 반박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에 대하여 영원한 긍정을 말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영원회귀 안에서 위버멘쉬는 목적 없이 순회하는 세계 현실 안에 거주하며 자신에게 주어지는 미래의 운명을 사랑하며 긍정한다.이처럼 인간의 주체적인 정신을 혹자는 불교에서의 해탈과 유사하다고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영원회귀에 대한 운명애적 태도를 불교적 열반사상과 비교함으로써 현실적인 삶의 세계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자기극복의 가능성에서 니체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려고 시도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