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눈이 내리다
김보영 지음 / 래빗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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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 고래눈이 내리다

5년 만에 돌아온 김보영 작가의 신작 소설집으로, 자연과 비인간 존재의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그려낸 9편의 단편이 수록된 SF 작품집이다. 표제작 고래눈이 내리다는 로제타상 후보작으로 선정되었으며, 세계 각지에서 찬사를 받은 작품들을 모았다.

17p 그들은 먹을 수 없는 유독물을 매일 수천 톤씩 배설해 대양에 버린다. 심해는 그나마 피해가 적지만 조금만 윗동네로 가도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연이어 창궐하고, 산호처럼 귀한 목숨들이 어처구니없이 사라진다.

고래눈이 내리다 햇빛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다. 어둠 속에서도 생명은 살아 있었다. 문명은 멸망했고 인간은 사라졌지만, 심해의 생명은 여전히 서로를 감지하고 지켜보며 기억해간다.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 처음이 찾아왔다.

22p '맹독이든, 병균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여기에서는 모두 같아. 모두가 아름다운 눈송이가 되지. 은혜로운 양식이자 생명의 기쁨이 되지. 이 아래에서는 모두가 다 같아지지.'

심해 우주, 서버, 낯선 공간과 그 속의 이질적인 존재들. 책의 거의 모든 이야기는 기존의 인간 중심주의를 깨려는 시도로 가득하다. 기계와 동물, 서버 속의 존재, 심해의 생명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이 존재들은 놀랍게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이 담겨 있다.

김보영이 구축한 세계는 우주처럼 넓고 바다처럼 깊어, 제목부터 마음을 빼앗겼다. 한 문장도 허투루 쓰이지 않은 깊이 있는 문체는 감정을 진동시켰고, 현실과 비현실 사이 어딘가, 저 깊은 심해 속 매력에 퐁당 빠져들게 했다. 고래눈이 내리다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모양을 가진 소설이었다.

141p 디스크에도 수명이 있다. 단순한 파일도 오래 보관하거나 전송을 계속하다 보면 품질이 열화한다. 생물이라는 방대하고 복잡한 데이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178p 함께 있어줄게.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을 거야 나랑 같이 있어서 정신 사납게 죽었단 말은 들었어도 심심하게 죽었단 말은 못 들어봤어.

출판사 '래빗홀' 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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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나인경 지음 / 허블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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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경 /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SF 소설 나인경 작가의 첫 장편소설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근미래 2035년, 기억을 저장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ID칩을 이식한 채 살아간다.

초거대 기술기업 유니언워크가 개발한 ID칩은 인간의 뇌와 클라우드를 연결시켜 기억을 손쉽게 관리하는 편리한 미래를 약속했지만, 사용자들의 기억에서 감정을 은밀히 제거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전 세계 유니언워크 사용자들에게 기묘한 메시지가 도착한다. '먼 미래에서 기다릴게. 너를 기억하는 나를 기억해 줘.' 사용자들은 이 메시지를 읽는 순간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을 강렬하게 떠올리며 혼란에 빠진다.

디도스공격 메모리 데이터 해킹으로 인한 메세지 테러. 유니언워크 공식 입장이었지만, ID칩의 치명적인 결함 혹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기밀, 반유니언워크 모종의 계획과 숨겨진 음모들이 난무하다.

주인공 안과 정한은 유니언워크 블루진 프로젝트로 인해 어린 시절 ID칩 생체 실험을 당했다. 안을 포함한 다섯 명의 아이들의 의식이 한 명에게 주입되었고, 반면 정한은 기억을 끊임없이 분해하고 파편화하는 실험의 대상자였다.

세월이 흘러 안은 기억을 지워 가며 살아가고, 정한은 기억을 복원하며 살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택 모두가 사라지지 않는 감정과 그리움에서 비롯된 것. 서로를 잊은 채, 각각 방송 작가와 AI챗봇 설계자로 살아가지만,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와 그리움이 늘 웅크리고 있다.

잊었지만 여전히 그리운 것,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것.

소설 속 안과 정한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서로를 향한 감각은 여전히 남아있다. 누군가는 그걸 환청이라 부를 수도 있고, 버그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렴풋한 감각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고유하고 아름다운 능력이 아닐까. 우리는 왜 누군가를 사랑했는지를 기억하지 못해도, 그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출판사 '허블' 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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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셸리
이정연 지음 / 산지니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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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연 / re, 셸리

수림문학상 수상 이정연 소설가의 장편소설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불공정성과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왜곡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선택을 밀도 있게 담아낸 소설

삶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다르다. 그 무게를 견디기 위해, 때로는 무너지고 왜곡되면서 나아갔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지홍이라는 인물을 통해 들여다본 우리 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그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한 인간의 고군분투.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조각처럼 흩어진 진실을 하나씩 맞춰 간다.

주인공 윤지홍은 불우한 가정환경 지방대 출신으로 대기업에 가까스로 입사했지만,승진이나 인정 대신, 팀장 재욱의 허드렛일을 처리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던 어느 날, 병원에서 우연히 대학 동기 승훈을 만나며 잊고 있었던 과거의 진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지홍은 대학 시절, 연극 무대 위에서 이상과 희망을 품은 셸리를 연기했다. 그 시절의 셸리는 맑고 자유로운 청춘의 상징이었으며, 지금의 지홍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인생의 여러 갈림길에서 만난 재욱과 승훈은 그녀의 삶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로, 지홍은 그들 사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잡한 입장에 놓인다.

과거의 자신을 철저한 피해자라고 믿었던 지홍. 하지만 돌이켜 보았을 때 타인을 짓밟고 지나온 순간도 있었다. 이처럼 이 소설이 매혹적인 이유는, 선과 악의 선명한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모든 인물은 자기만의 이유로 움직이고, 타인을 이용하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그런 구조 속에서 지홍이 겪는 혼란, 후회, 자기방어는 인간적이었다.

이정연 작가는 냉정하리만큼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회를 응시했고,
생생하게 파고드는 문장들은 매력적이었다.

완전한 피해자도, 완전한 가해자도 없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것으로 면죄부를 받을 수 없다.

출판사 '산지니' 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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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란히 계절을 쓰고 - 두 자연 생활자의 교환 편지
김미리.귀찮 지음 / 밝은세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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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리X귀찮 / 우리는 나란히 계절을 쓰고

우리는 나란히 계절을 쓰고는 도시와 회사를 떠나 시골에서 살아가는 두 작가, 김미리와 귀찮이 사계절 동안 주고받은 교환 편지를 엮은 책이다. 이들은 자연 생활자이자 프리랜서로서의 삶을 선택한 동반자다. 서로 다른 지역에 살지만 비슷한 고민과 일상, 선택의 이유를 공유하며, 이 책은 그들의 나란한 삶의 궤적을 진솔하게 그려낸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지만 선뜻 옮기기 어려운 도시 밖의 삶. 시골살이의 낭만뿐 아니라 그 속에 담긴 불편과 불안, 자립의 무게까지 함께 기록했다. 나만의 시간을 찾기 위해 왔지만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나날, 숨김없이 전하는 이들의 고백. 그럼에도 이 삶을 택하길 잘했다고 말하는 두 사람의 편지.

누군가 내 삶을 묻고, 내가 답하며, 그 답을 함께 지나가는 방식으로 사는 삶은 너무 아름답고 따뜻했다.

잡초가 무성해도 계절의 흐름을 오롯이 느끼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충만한지, 이런 삶도 괜찮지 않을까 한 번쯤 떠올렸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어 주었다.

삶이 버거울 때, 새로운 삶을 꿈꿀 때, 나다운 삶을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특별한 일이 없어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귀하다.

당신은 늘 도시의 바쁜 하루를 살아가지만
사실 누구보다 자연을 그리워하고,
느린 삶을 동경하는 사람이다.

출판사 '밝은세상' 으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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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푸른 벚나무
시메노 나기 지음, 김지연 옮김 / 더퀘스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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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메노 나기 / 그해 푸른 벚나무

도쿄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며 이야기를 짓는 작가, 시메노 나기는 자신이 경험한 계절의 변화와 사람들 사이의 온기를 담아, 따뜻하고 서정적인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다.

카페 체리 블라썸의 마당에는 100년 된 벚나무가 서 있다. 한때는 외할머니 야에의 호텔이었고, 어머니 사쿠라코의 레스토랑 이었으며, 지금은 손녀 히오의 카페가 된 이곳. 그 모든 시간을 기억하는 벚나무의 시선으로, 우리 모두의 삶을 다정히 바라보는 따뜻한 소설이 시작된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남긴 공간을 물려받은 히오는 완벽하진 않지만 진심을 다해 커피를 내리고, 손님을 맞이하며 자신만의 속도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녀가 운영하는 이 조용한 카페에는 화과자를 만드는모녀, 장난꾸 러기 아들을 둔 워킹맘, 불안한 마음으로 꿈을 좇는 소녀들까지 다양한 사연을 품은 여성들이 찾아와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다.

잎이 진 겨울을 버텨낸 벚나무가 다시 꽃을 피우듯, 등장인물들 역시 각자의 아픔을 지나 작은 기적과 재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이야기는 계절의 흐름을 따라 잔잔히 이어지며, 삶의 순환과 치유, 그리고 성장을 따뜻하게 그려냈다. 그 모든 시간은 100살 된 벚나무 아래에서 피어나고 흘러가며, 계절처럼 다시 돌아오는 삶의 순환이 된다.

작은 카페를 드나드는 다양한 여성들, 모두가 조용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지나간 계절은 끝이 아니라 다음 계절을 위한 시작이라는 것. 시들고, 지고, 다시 피는 그 모든 자연의 순리를 사람의 삶에 빗대어 풀어낸 방식이 정말 아름다웠다.

나무의 존재는 마치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인생의 어른 같았다. 판단하지 않고, 조언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며 말없이 지탱해주는 존재. 우리는 모두 그런 벚나무를 필요로 하지 않을까. 사람일 수도 있고, 공간일 수도 있고, 혹은 시간일 수도 있다. 히오에게 체리 블라썸이라는 공간이 그렇듯, 독자인 나에게는 이 책 한 권이 그랬다.

출판사 '더퀘스트' 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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