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오뒷세이아 - 영원한 고전, 철저한 고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호메로스 지음, 김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8월
평점 :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의 새로운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이로써 천병희, 김기영, 이준석에 이어 네 번째 원전 완역본이 출간된 것이다. 누군가는 어떤 번역이 가장 좋고 추천할 만한지 궁금해할 수 있다.
번역자는 원전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이에 따라 독자를 원전에게로 움직이든지 아니면 저자를 독자에게로 움직이게 한다. 이를 현대 번역 연구의 용어로 표현하면, 번역은 이국화(foreignizing)와 자국화(domesticating)의 혼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번역자가 텍스트를 어떻게 정의하고, 어떠한 전략을 구사하는지를 중심으로 책을 읽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김헌의 번역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약 3천년 전 텍스트의 '낯섦'을 강조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역자에 따르면, 호메로스 시대 "인간관은 지금 여기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그 특이성을 일단 횡격막에 주목하여 설명하고 번역하였다." 호메로스 시대에 인간은 횡격막으로 사고하고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횡격막은 "감정과 사고, 판단과 숙고, 그리고 관심과 배려, 호감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기능한다." 역자는 횡격막 등 표현에서 드러나는 특이성뿐만 아니라 이 서사시의 형식적 측면까지 최대한 살리고자 원문의 어순을 따르는 방식으로 번역했다.
한 대목을 비교해보자. 페넬로페가 오뒷세우스를 알아보는 장면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무릎과 심장이 풀렸으니
오뒷세우스가 말한 확실한 특징을 그녀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울면서 오뒷세우스에게 곧장 달려가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머리에 입 맞추며 말했다." (23.205-8, 천병희 역)
"이렇게 말하자, 거기서 풀렸다, 그녀의 무릎과 소중한 심장이,
오뒷세우스가 그녀에게 여실히 보여준 징표를 알아챘기에.
눈물을 흘리더니 곧이어 그대로 달려가, 양손으로
오뒷세우스의 목을 감쌌고, 머리에 입을 맞추고 말을 건넸다." (23.205-8. 김헌 역)
김헌의 번역은 '거기서 풀렸다'를 원문처럼 문장의 앞에 배치해두어 문장이 다소 읽기 어렵게 되었다. 이처럼 횡격막 등의 낯선 표현, 한국어와 다른 어순 배치 등으로 인해 이 번역본은 다른 번역본과 비교했을 때 읽기 힘든 것이 사실이며,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호메로스를 처음 읽는다면, 이 번역본보다는 다른 번역본을 먼저 읽고, 김헌의 번역을 통해 보다 원전에 가까운 독서를 경험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역자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낯섦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가 가진 보편성도 강조한다. 역자에 따르면, "<오뒷세이아>는 이름을 잃은 '남자'가 자기의 이름 '오뒷세우스'를 되찾아 가는 이야기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감추고, 개성을 지우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고 다시 찾지 못한 채 표류하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는 이 서사시 첫 10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호메로스는 '남자'의 이야기로 이 서사시를 정의했으며, 다시 '곡절이 많은'으로 이 사내에 대해 규정한다. <오뒷세이아>는 어떻게 보자면 불특정의 '그 사람'이 많은 곡절을 통해 특정의 누군가, 즉 '오뒷세우스'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서사시의 줄거리는 오뒷세우스가 10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며 집으로 귀향하는 이야기지만, 이것만으로는 작품 전체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귀향의 의미다. 오뒷세우스의 귀향은 영혼의 자기 정체성을 위한 편력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질문은, 오뒷세우스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다. 오뒷세우스는 알케노오스 왕, 텔레마코스, 페넬로페에게서 이 질문을 받았고, 자신이 무엇을 겪었는지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겪음을 얘기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던 것이다. 오뒷세우스에게서 고통은 자기 정체성의 일부였다.
고통을 자기의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오뒷세우스는 신적 존재로서 편안히 살아가자는 칼륍소의 제안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원하고 갈망합니다, 모든 날마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그리고 귀향의 날을 볼 수 있기를.
설령 신 중에 누가 다시 포도주빛 바다에서 난파시켜도
참을 겁니다, 가슴 속에 참아내는 기개를 지녔으니.
이미 나는 많은 일들을 겪었고 많은 고생도 했으니까,
파도와 전쟁으로. 여기 이것도 그것들에 더하라지요."
(5.219-24행)
칼륍소를 떠난 이후로도 오뒷세우스는 산전수전 다 겪고 나서야 고향에 도착한다. 자신의 집에서 자신의 가족을 괴롭히고 재산을 축내는 구혼자 무리를 모두 무찌르고 페넬로페와 만나면서, 올 것 같지 않았던 귀향도 드디어 완결된다. 하지만 그의 겪음은 끝나지 않았다. “여자여, 결코 우리가 모든 시합의 끝에 이른 것은 아니라오 아직도 측량 못할 고생이 이후에도 있을 거요.” (23.248-49) 이는 다르게 말해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기에 인간으로 살아갈 동안에는 고난이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즉 겪음은 끝이 없다.
<오뒷세이아>의 모험은 인간의 조건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여정임과 동시에 고난의 여정이었다. 낯선 곳으로 가게 될 때, 또는 불확실한 상황을 마주치게 되었을 때 누구나 그것을 피하고 싶어하지만, 오뒷세우스는 그러지 않았고, 당당히 그 불확실한 여정을 받아들여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오뒷세우스적 인간’을 말할 수 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여 겪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