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는 영화사에서 길이남을 걸작일 뿐만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나 그리스 비극과도 같은 인류의 고전이다. 무엇을 고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전은 우선 잘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야기란 재현(mimesis)이다. 이때의 재현은 복사기처럼 대상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똑같이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의 창작자는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특성을 부각하여 자신이 만든 인물과 세계에 투영한다. 그리고 단순히 투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처음과 중간과 끝이라는 형식에 맞추어 인물의 행동과 심리를 묘사해야 한다. 즉, 고전이 되기 위해서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수용자는 잘 짜여진 고전을 보며 인간 존재의 어떤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나아가 나 자신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다. <대부>를 고전이라 부른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대부>는 무슨 이야기이며, 그 주인공은 어떠한 인간형을 보여주며, 최종적으로 어떠한 주제를 전달하고자 하는가.

<대부>는 마이클 콜레오네의 파멸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주인공 마이클 콜레오네는 가족을 위해 폭력의 세계에 발을 담궜다가 타락해버리고 만다. 마이클 콜레오네의 아버지 비토 콜레오네는 뉴욕 5대 마피아 조직 중 하나인 콜레오네 패밀리를 이끄며, 본명보다도 통칭 '돈 콜레오네' 혹은 '대부'라고 더 많이 불리운다. 비토는 목적을 위해 협박이나 살인 등 온갖 수단도 가리지 않는 잔혹함을 보이지만, 누구도 반항하지 못하게 하는 카리스마와 지도력, 그리고 자신의 편에게는 한없이 인자한 인망을 보유하고 있다. 그는 인격적 관계를 맺은 사람의 부탁은 들어주면서도, 자신의 적에게는 총을 들이밀 줄도 안다. 그런 그에게는 소니, 프레도, 마이클, 코니, 이렇게 네 명의 자녀가 있는데, 그의 자녀들도 조직의 일에 몸 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이클은 예외였다. 마이클은 아버지가 음지에서 하는 활동을 알고 있었지만, 늘 거기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가족과 거리를 두며 살아왔다. 그는 콜레오네 가족 중 유일하게 범죄에 연루되지 않았고,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었을 뿐만 아니라 연인 케이 애덤스에게 한없이 자상한 남자였다. 비토 역시 그가 자신처럼 되지 않기를 원했다. 마이클은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그 일만 없었다면.

비토 콜레오네는 마약상 바질 솔로초의 마약 사업 합루 제안을 거절한다. 비토는 바질을 감시하기 위해 자신의 부하를 스파이로 보내지만, 바질과 손을 잡은 다른 뉴욕 마피아 세력인 타탈리아 패밀리에 의해 부하를 잃고 비토 자신도 총격을 당해 사경을 헤매게 된다.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마이클 콜레오네는 케이와 데이트를 즐기다가 길거리 신문에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접했고, 아버지를 쏘고 가족을 위험에 빠뜨린 이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마이클 콜레오네는 연기한 알 파치노는 캐릭터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신의 풍부한 연기력으로 이를 표현한다. 마이클은 이 시점부터 웃지 않게 되고, 그의 표정은 한결같이 차가워진다. 이제 그에게서 이전과 같은 인간적인 모습은 볼 수 없게 된다. 관객은 마이클의 내면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을 감지한다. 그는 이전의 선한 마이클 콜레오네가 아니다.

마이클 콜레오네가 본래 멀리하였던 패밀리의 일에 연루되면서 <대부>의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가족이 큰 위험에 빠질수록 마이클은 패밀리의 일원이 되고, 그럴수록 그의 영혼도 타락해버린다. 그 표정처럼 냉철한 판단력으로 마이클은 콜레오네 패밀리가 처한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궁리한다. 결국 마이클은 바질 솔로초와 그의 뒤를 봐주던 경찰 서장을 총살하고 시칠리아로 피신한다. 마이클은 안전한 시칠리아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뉴욕에서는 바질의 사망으로 마피아 세력 간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콜레오네 패밀리의 장남인 소니가 기습을 당해 사망해버렸다. 가족이 한 차례 더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비토는 총격 때문에 아직 회복 중이다. 차남 프레도는 믿음직스럽지 못하고, 여성인 코니는 애초에 패밀리의 일을 맡아본 적 자체가 없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하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마이클밖에 없다. 마이클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고 비토의 뒤를 이어 콜레오네 패밀리의 새로운 '돈 콜레오네'가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토 콜레오네도 사망한다. 마이클 콜레오네는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가족의 위협이 되는 마피아 세력의 두목을 모두 처치하기로 결심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세례식 장면'이다.

장소는 한 성당. 마이클은 코니와 카를로 사이에서 난 아들의 세례식에 아이의 대부로서 참석한다. 아이의 맑은 울음소리와 유아세례식을 준비하는 신부의 분주한 손이 교차되는 이 신성하고 경건한 가족행사 바깥에서는 뉴욕 5대 두목의 처형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코폴라 감독은 교차편집을 치밀하게 활용하여 무의식적으로 두 이야기 사이의 연관을 확립하고 유아세례식과 처형식의 대비를 더욱 선명히 한다. 세례식과 처형식은 서로에 대한 거울이다. 신부가 세례용 기름을 가지러 카메라 왼쪽으로 이동하면, 그 다음 쇼트에서 카메라 오른쪽에 있는 신부의 손이 아이의 얼굴에 기름을 뿌린다. 그 다음 씬에서 이발사가 카메라 왼쪽에서 면도용 크림을 가지러 가고, 카메라 오른쪽에서 이발사는 마이클의 부하에게 면도 크림을 바른다. 이러한 연출을 통해 감독은 서로 다른 두 공간의 서사를 하나로 이어지게 만든다. 그리고 두 서사의 중심에 마이클 콜레오네가 있다. 마이클은 세례식을 관찰하며 참여한다. 하지만 코폴라가 연결시킨 두 서사에서 마이클의 눈은 또한 처형식을 응시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부재하면서 부하들에게 감시한다. 그는 세례식에서 사탄의 유혹을 끊어내겠다고 선언함과 동시에 꼴레오네 패밀리의 적들을 끊어낸다. 이런 연출이 지시하는 것은 명백하다. 직접적으로 마피아 두목을 죽인 것은 부하들이나, 실질적으로는 마이클 콜레오네가 그들을 죽였다. 가장 경건한 장면과 가장 폭력적인 장면이 교차되는 이 시퀀스에서 마이클은 불안해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차갑게 눈앞의 상황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패밀리를 배신한 살 테시오와 가족을 배신하여 소니를 죽게 만든 매제 카를로도 살해한다. 바로 그 카를로 아들의 세례식 날에. 마이클 콜레오네는 더 이상 '대학생 샌님'이라 놀림받던 선한 인물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냉혈한 마피아 조직의 보스가 되었다.

세례식 시퀀스를 길게 서술한 이유는 이 장면이 <대부>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직설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이클 콜레오네가 마피아 세계에 가담하게 된 동기는 아버지와 큰형의 사망으로 위태로워진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의 행위 목적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었다. 그 목적은 정당하고 선한 것이었지만, 그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마이클이 택한 수단은 살인과 폭력이었다. 그러한 선택의 결과는 마이클의 영혼의 타락이다. 왜냐하면 마이클이 서로 모순된 두 세계에 몸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마피아 패밀리의 세계이다. 두 세계에 사는 마이클은 또한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다. 한 가정의 아버지라는 정체성과 마피아 조직의 두목이라는 정체성. 마이클의 행위 목적은 전자의 세계와 정체성이나 그 수단은 후자의 세계와 정체성이다. 그렇지만 가족의 세계와 폭력으로 돌아가는 마피아 패밀리의 세계는 양립할 수 없다. 마이클의 목적과 수단은 애초부터 조화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마피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피는 피를 부른다'라는 인과응보적 폭력의 원리이다. 누군가를 죽이면, 더 큰 복수를 불러오고, 그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 이러한 폭력과 복수의 연쇄에 빠져들면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가 이 세계에 더 깊이 연루될수록 사실 가족을 더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따라서 그의 목적과 수단은 처음부터 내재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목적과 수단의 이율배반으로 인하여, 가족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 대가로 마이클의 내면은 파탄나고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마이클을 '돈 콜레오네'라 부르며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부하들과 이 광경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케이 애덤스의 흔들리는 눈빛이 두 세계의 금방이라도 무너질듯한 위태로운 긴장을 드러낸다.

그 파탄과 모순은 <대부> 제2편에서 절정에 이른다. 2편에서도 마이클을 움직이는 원리는 하나다. 가족 혹은 패밀리를 배신하고 위협하는 존재를 가만두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가족에게 총을 겨눈 하이먼 로스를 잔혹하게 살해하고, 오해가 있어 패밀리를 배신했던 프랭크 펜탄젤리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 명령하였으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형인 프레도마저 사살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을 죽인 것이다. 심지어 프레도는 굳이 죽이지 않았어도 되었다. 어머니는 형제간의 갈등을 싫어하였고, 코니도 프레도를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마이클은 프레도를 용서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장례식 이후에 프레도를 죽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그 모든 행위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마이클의 논리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된다. 심지어는 마이클 자신도 이 때문에 고민한다. 2편 후반부에 마이클이 어머니에게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는 장면은, 1~2편을 통틀어 유일하게 그가 자신의 내면을 고백하는 중요한 장면이다.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해지다가 가족을 잃어버리지는 않는지를 묻는다. 어머니는 가족은 잃을 수 없다 하지만, 실제 벌어진 사태는 달랐다. 케이 애덤스는 변해버린 마이클에 실망하고 질려버려 그를 떠나버렸다. 마이클이 친형처럼 여기던 집안의 고문 톰 헤이건도 강압적인 그의 일처리 방식에 불만을 품는다. 하나 남은 친형 프레도는 마이클이 죽였다(정확히는 암살 지시를 내린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 모순된 남자의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바로 그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 가족의 상실이다. 이것이 제3편의 주제이자 플롯이다. 3편은 마이클의 속죄와 인과응보의 이야기다. 그는 불법적인 사업을 대부분 정리하여 합법적인 사업으로 전환하였고,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하지만 그의 내면은 공허하다. 마이클 콜레오네는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늙고 지치었다. 친형을 죽였다는 죄책감은 그를 고통스럽게 하였고, 평생을 냉혈한으로 살았던 탓에 모든 가족에게 외면받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마이클은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낀다. 이제 그에게 유일한 삶의 희망은 딸 메리 콜레오네뿐이다. 메리 콜레오네는 아버지가 그토록 위험한 세계의 인물임을 알지 못한다. 마이클이 딸에게만큼은 자신의 과거를 숨긴 것이다. 메리는 비토 콜레오네 재단의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주는데, 그에게 마이클은 사랑하는 아버지이다. 마이클에게 딸은 자신이 몸 담고 있던 세계를 영원히 모르고 또 이쪽 세계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는 메리가 패밀리의 일원인 빈센트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메리는 순수하며, 더럽고 음험한 마피아 세계에 물들지 않은 가족의 세계에 속한 인물이다. 따라서 마이클에게 메리는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자 한 '가족'이라는 목표의 최후의 보루였던 셈이다.

하지만 마이클이 완전히 마피아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이 목표와 안정은 지킬 수 없다. 그리고 이미 폭력의 세계에 너무 깊이 연루된 마이클로서는 애시당초 그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들 앤소니의 오페라 데뷔 공연을 계기로 케이와 관계를 개선하고, 빈센트에게 '돈 콜레오네'직을 물려주면서 마피아 세계에서 은퇴한다. 그렇다고 이 남자의 불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들의 오페라 공연날, 마이클을 죽이려 하는 암살자가 그를 향해 총격을 가한다. 마이클은 부상을 입는 정도로 끝났지만, 그의 딸 메리가 암살자의 총에 맞고 사망하고 만다. 왜 마이클이 아닌 그녀가 죽었을까? 이것은 앞서 말한 폭력이 지배하는 세계의 인과응보의 원리 때문이다.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고, 살인의 대가는 또 다른 사람의 목숨이다. 마이클이 그동안 저질렀던 끔찍한 죄들은 그가 마피아를 그만두었더라도 남아 그에게 죄값을 물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자신이 가장 지키고 싶어했던 가족의 목숨이었다. 이것이 잔혹한 마피아 세계의 보스이자 한 가족의 아버지라는 모순된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았던 이 남자의 불행의 결말이다. 마이클은 피범벅이 되어 쓰러진 메리를 품에 안으며 서글프게 울부짖는다. 어떻게든 지키려 했던 세계가 무너져내려 절규하는 마이클의 모습은 시체가 되어버린 딸 코델리어를 안은 리어왕의 마지막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개도, 말도, 쥐새끼도 목숨이 있는데, 그런데 너는 숨이 전혀 없다? 넌 더 이상 오지 않겠지,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적 주인공이란 "덕과 정의에 있어서 월등하지는 않으나 악과 죄업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떤 결점에 의해서 불행에 빠지게 된 인물"이라고 정의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덕망이 높은 인물이어서는 안 되고 반대로 <추격자>의 지영민(하정우)처럼 극악무도한 인물이어서도 안 된다. 이 양극단 사이에 위치한 인물이 비극의 주인공에 어울리는데, 이 정의에 따르면 마이클 콜레오네를 비극적 주인공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는 월등한 덕성과 정의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으며, 가족을 잃고 홀로 사망한다는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경우 불행한 결말을 초래한 원인은 그의 범죄행각보다는 앞서 말한 목적과 수단 사이의 이율배반 때문이다. 즉, 마이클에게 있어 불행은 폭력을 휘둘렀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고 폭력이 지배하는 마피아 세계와 평화로운 가정의 세계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 성취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 물론 그는 패밀리의 사업을 합법적인 사업으로 바꾸어 폭력의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나, 그 과정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폭력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한다. 가족의 위험 앞에 그는 어쩔 수 없이 계속 폭력의 세계를 지배하는 대부가 된다. 하지만 앞서 서술했듯이, 두 세계 사이의 균형과 안정은 성취될 수 없다. 그렇기에 마이클은 가족을 위해 행동하지만, 그 대가로 가족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돈 콜레오네'를 내려놓으면서 그는 빈센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번 빠지면 돌이킬 수 없다. 평생 이 바닥을 벗어나고자 노력했어. 가족도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고." 이것이 마이클이 추구한 목표였다. 하지만 그 목표는 폭력의 세계에 들어간 이상 도저히 달성될 수 없었고, 결국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자신이 만든 출구 없는 미궁에 스스로 갇히어, 안정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나, 그렇게 발버둥칠수록 더욱 깊이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 비극적 인물이다.

이러한 마이클 콜레오네의 파멸의 이야기를 표현한 <대부>는 현대의 비극이다. <대부> 이후 작품의 주제나 캐릭터, 연출을 오마주한 영화들이 많았지만(<신세계> 등), 느와르 장르의 쾌감을 치밀한 연출과 형식으로 선사하면서도 인물의 내면과 주제를 이토록 웅장하고 장엄하게 표현하여 하나의 비극으로 승화한 작품은 <대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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