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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고대사 ㅣ 한강문화재연구원 학술총서 5
리펑 지음, 이청규 옮김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17년 8월
평점 :
2013년 <Early China>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이 책은 원서 출간 당시까지의 최신 고고학 성과를 반영한 중국고대사 개설서이다. 개설서답게 이 책은 서론에서 "중국의 지리"와 북미에서의 고대중국사 연구사를 다루고, 제2장부터 14장까지는 양사오 사회부터 한제국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전공자 혹은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연구사를 비롯하여 각 장 말미에 수록된 참고문헌 및 고대 문헌에 대한 설명, 주요 고고학 유적에 대한 설명을 꼼꼼하게 읽을 것이나 나처럼 제자백가 사상의 사회적 맥락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제8장 "패자와 무사: 춘추시대의 사회 변모" 부터 "제10장 정치인 사상가"를 유심히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상은 특정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형성된다. 혹은 사상은 그 사상이 나오게 되는 시대적 상황이 있다. 물론 시대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상도 있으므로 하나의 사상체계를 사회적 맥락에 온전히 종속시키는 환원주의적 태도는 지양해야 할 것이나, 사상사를 공부할 때는 반드시 그 사상이 나오게 된 특정한 사회적 맥락을 동시에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고유한 사회적 맥락 속에 사상체계를 위치시킬 때, 오독의 가능성을 줄이고, 더 나아가 현 시대 및 사회와 비교하여 재구성함으로써 현대적 관점에서도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류쩌화의 <중국정치사상사>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상사 서적들은 사회사를 간과했다는 한계가 있다. 류쩌화의 책을 보자. 3권 분량의 방대함을 자랑하는 이 책은 풍부한 원전 인용이 장점이나 중국의 사상가들이 살았고 사상의 대상으로 삼던 사회에는 놀랍도록 무관심하다. <중국정치사상사> 1권은 선진 제자백가의 사상을 다룬다. 제자백가는 춘추전국시대 출현한 중국사상사에서 핵심 개념과 범주들을 개발하였지만, 왜 이런 지적 르네상스가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모호하고 추상적 설명만 나열할 뿐이다. "중국 역사상 대변동의 시기"라고 하나,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 구체적 정보에 대해서는 서술한 바가 매우 적다.
고고학 자료를 통해 고대 중국의 물질문화와 사회상을 재구성한 리펑의 책은 류쩌화 책의 빈곳을 채워준다. 서주의 붕괴는 급격한 제도적 변화가 나타난 중요한 요인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춘추시대 사회적 변화의 핵심은 "현(縣)"이라는 새로운 행정 단위의 등장에 있다. 현은 국가간 전쟁의 결과로 탄생하였는데, 주로 인구와 조세 확보를 목적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국경 지역에 설치되었다. 현은 서주와는 전혀 다른 매커니즘에 의해 운영된 행정단위였다. "현은 서주의 초기 왕실 행정 시스템과는 직접 연관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서주 시대에는 혈연구조를 통해 국가 통치자가 귀족에게 토지를 재분배하였지만 현은 국가 최고 통치자가 임명한 지사에 의해 직접 통제되고 관리되었다. 현의 출현은 중국 사회정치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현 제도가 창안되고 확산되면서 "종족 조직에 토대를 고대 중국 사회"가 파괴된 것이다. 서주에서는 왕실의 사무와 정무를 하급 귀족 가문이 맡았지만, 심각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은 뒤에는 종족과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이 국가나 권력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임무의 수행이 더욱 중요해지게 되었다.
전국시대에는 사회경제적으로 "현 제도가 이전 국가의 중심지에 멀리 떨어진 주변 지역에도 확산 적용되면서, 자연스럽게 영토 국가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그나마 남아있던 종족적 혈연망이 완전히 붕괴된 시대가 전국시대였다. 영토 국가는, 군대에 의해 보호되는 경계가 명백한 영토적 실체를 단순화되고 통일된 정치권력이 다스리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영토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새로운 영토의 획득이고 이는 전쟁으로만 달성되었다. 영토 국가는 이 목적을 무엇보다 우선시하였기에, 이 시대 중국은 대규모의 희생을 수반하는 군사적 승리를 중요한 발전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 영토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근간으로서 '소규모 농민' 가구를 재편성하였다. 이들은 "전통적인 종족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독립적이고...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있는 새로운 국가 시민"이었다. 이것은 전국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으로, 제자백가 사상가들과 정치가들은 이 새로운 소농 가족을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처럼 중국 고대 사회에서의 급격한 변화란 종족적 질서의 해체이고, 전국시대는 그 사회적 전환의 영향이 확장된 시기였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역시 다른 사회적 맥락을 가지므로 관습적으로 춘추전국시대라 구분없이 지칭하는 것은 부적절하겠다. 다른 사회적 맥락은 곧 상이한 문제의식으로 나타난다. 이를 제례에 대한 공자와 맹자의 차이점에서 알 수 있다. 공자는 종족적 혈연망이 무너진지 얼마 안 된 시대에 살았다. 그는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적절한 예의 실천을 통해서 바른 사회정치적 질서를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임금', '신하', '아버지', 그리고 '아들' 등 이미 결정된 사회적 위계 속에서 각 구성원이 자신들의 이름에 걸맞는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할 때 비로소 그 결과로서 바람직한 사회 질서가 생성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제사나 예가 실천되지 않는 현실에 분개했고 제례를 기반으로 정명이 실천되던 서주의 시스템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반면 "공자 이후 약 100년이 지난 뒤 제례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시기에 살았기 때문에 맹자는 '제례'가 손상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또한 주 왕실이 오래전부터 희망이 없음이 드러"났기 때문에 "공자와 달리 서주 시스템을 복원하는 데에도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제례에 대한 이 같은 차이는 공자와 다른 결론으로 이어진다. 맹자에게는 제례와 정명의 확립 대신 '인'과 '의'를 갖춘 어진 통치자를 찾아내 전쟁을 끝내고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사상가들의 문제의식이 그 시대 사회경제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