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론의 역사 - 홀연히 사라진 4천 년 역사의 위대한 문명도시를 다시 만나다 더숲히스토리
카렌 라드너 지음, 서경의 옮김, 유흥태 감수 / 더숲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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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의 역사를 다룬 책은 클라아스 빈호프의 <고대 오리엔트 역사>, 조르주 루의 <메소포타미아의 역사>, 그리고 마르크 반 드 미에룹의 <고대 근동 역사> 등 한국에 번역된 것이 몇 권 있다. 이런 책들이 고대 근동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개설했다면, 이 책의 특별한 점은 바빌론이라는 도시에 초점을 맞춘 바빌론 문명 개설서라는 점이다.

 

저자는 1장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리적 환경과 그 속에서 바빌론의 지정학적 가치 등을 다룬다. 바빌론은 오늘날의 바그다드 지역에 위치한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세 강, 즉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다얄라강이 만나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주변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데, 바그다드는 이러한 요충지에 세워진 정착지 중 가장 늦게 자리 잡은 도시이다. 이곳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매우 가까이 흐르며, 자그로스산맥에서 발원하는 디얄라강이 티그리스강으로 흘러들면서 동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이상적인 경로를 이룬다.”



 

이렇듯 바빌론은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두고 각축전이 벌어졌다. 함무라비는 주변 도시국가들을 병합하여 바빌론을 메소포타미아의 패권국으로 만들었다. 바빌론은 히타이트나 아시리아의 공격으로 부침을 겪기도 했으나, 그 영향력은 잃지 않았다. 이를 알 수 있는 것이,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두크 신앙이다. 바빌론에서는 왕권의 정당성이 혈통이 아니라 마르두크가 왕으로 인정했다는 데에서 나왔던 것이다. 왕권을 마르두크로부터 하사받았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왕이 마르두크 예언을 실현하고 얼마나 신전 활동에 관심을 가졌는지에서 판가름났다. 이러한 바빌론의 왕권 개념에 따라 정치권력이 왕가에서 마르두크 신전으로 옮겨 가며 신전공동체가 정치적 주체로 떠올랐다.” 바빌론의 독특한 정치 감각을 이해했고 바빌론의 왕이라는 특권에 집착했던 아시리아의 사르곤 2세와 샬만에세르 3세 등은 바빌론 엘리트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마르두크를 찬양하고 마르두크 예언의 있는 내용을 실천했다.

 

전통적 적대국인 아시리아가 무너지고, 네부카드자네르 2세 시기 바빌론제국은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다. 7장은 고고학 유물을 통해 바빌론이 세계의 중심을 당당하게 선언하던 시절의 모습을 확인한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론을 정복하면서 바빌론은 영원히 독립을 잃고 만다. 페르시아의 왕들은 아시리아와 달리 마르두크 신앙을 표방하지도 않았고, 바빌론의 신전 활동도 지원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 바빌론의 지위나 역할이 전성기에 비해 크게 축소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바빌론의 전통 귀족 세력은 반란도 일으켰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이들 세력은 끝내 와해되고 만다. 알렉산더 대왕 때 잠깐 원래의 지위를 회복하는듯 싶었지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바빌론 문명은 쇠퇴했다.

 



바빌론은 군사적 패권국이었을 뿐만 아니라, 문화·학문적으로도 후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국가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홍수를 관리하기 위해 댐이나 수로 등이 발달되었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거대한 구조물을 건설해야 한다는 필요가 정교한 수학을 발전시켰다. 바빌론이 멸망한 뒤에도 그들의 지식은 여러 텍스트를 통해 전수되었다. 그중에서도 바빌론의 천문학은 여러 학자들을 통해 전파되었는데, 가장 유명한 학자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이다.

 

개설서 수준에서 필요한 내용은 담았고, 서술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시각 자료도 풍부하여 개설서로서의 가치는 톡톡히 하는 책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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