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는 번벌 관료 중에서 근대 일본의 입헌군주제 형성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폐번치현을 가장 빨리 제기했으며, 군주권이 국가로부터 제약받는 헌법을 만들었으며, 초기 의회 이후는 정당권력에 유화적인 정당정치의 길을 촉진했다. - P5

이토가 쇼인에게 배운 것은 다음과 같다. 번주에게 무작정 복종하며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대세‘를 배경으로 바람직한 번주가 되도록 그를 교육하고 자질을 끌어내, 번주와의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가는 이토의 태도였다. 번주를 천황으로 바꾸어 놓으면 명치유신 후 이토의 천황에 대한 태도가 된다. - P25

군주는 국가에 의해 제약을 받는 하나의 기관이며, 군주가 입법부와 행정부로부터 제약을 받아도 문제가 안 된다(군주가 입법부와 행정부의 의사를 완전히 무시하고 자유롭게 행동해서 좋은 것은 아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주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군주는 전제적으로 행동해도 좋다는 생각을 부정하기 위해 생긴 인식으로 당시 유럽 군주제에 대한 첨단 학설 즉 군주기관설이었다. 이토는 슈타인과의 대화에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천황 전제가 행해지지 않은 일본의 실정에 맞는 헌법을 만들기 위한 단서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이토는 기뻐했다. - P145

이토는, 헌법상 주권은 군주에게 있지만, 그 대권은 각 기관에 위임되어 있으며, 그것은 간단히 빼앗을 수 없다는 일본의 전통에 입각한 설명으로 군주권을 제한하려고 했다. - P148

188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헌법조사를 하는 단계에서, 장래 일본 헌정이 성숙하면 앞으로 만들 헌법을 영국의 헌정과 같이 운용할 때가 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것은 천황의 정치관여를 억제하고, 행정부가 입법부의 의사를 존중하는 형태로 만들어지는(정당내각제) 것을 천황이 승인하면 되는 것이다. 후술하지만, 이토가 청일전쟁 이후에 정당과의 제휴를 지향하고, 약 18년 뒤에 이상적인 정당으로서 입허정우회를 창립하여 ‘헌법정치‘를 완성하려 한 것은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 P148

이토가 유럽의 헌법조사에서 배운 것은 헌법만이 아니라 그 헌법을 운영하기에 적합한 군주를 창출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헌법에 어울리는 군주는 전제군주가 아니다. 일상적으로는 정치관여를 삼가고 필요한 경우에는 번벌 내부의 대립을 조정할 수 있는 천황이다. - P167

천황은 신성하여 범할 수 없다는 유명한 조문은 천황이 법률적,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군주가 마음대로 관여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이토가 입헌군주제로서는 강한 천황대권을 헌법에 규정한 것도 당분간은 정부가 그것을 위임받고, 재야세력이 ‘헌법정치‘에 성숙하게 됨에 따라 중의원으로 위임을 확대해갈 것이라는 전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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