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태어나는 곳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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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

책은 고레에다 감독의 직접적인 기록들을 모은 구성이라, 마치 그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영화의 기획 단계부터 캐스팅, 촬영지 섭외, 언어와 문화의 차이 등 한 장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가 있었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도 영화 현장 안에 있는 듯한 생생함을 느끼게 된다. 모든 페이지에 고레에다다운 성실함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묻어난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그는 거장이라는 타이틀에 갇히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작품을 끌고 나가야 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방식만을 고집하지 않고 배우들과 수없이 논의하며 장면을 함께 만들어간다. 배우들에게 편지를 보내 의견을 구하고 캐스팅 단계에서는 배우들의 필모를 열심히 꿰뚫으며 많은 대화를 통해 신뢰를 쌓아간다. 또한 현장에서는 배우, 스태프의 의견을 반영해 즉흥적으로 장면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도록 여백을 남기는데, 이런 유연함이 있기에 그의 작업이 사람의 감정과 관계를 정직하게 담아내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책은 ‘파비엔느에 관한 진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어느 가족’, ‘브로커’, 그리고 아직 제작 전이던 ‘괴물’에 대한 초기 구상까지 담겨 있어 고레에다의 영화 세계를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의 영화는 늘 가족이라는 주제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영화마다 주제의 접근 방식은 언제나 새롭다.

나는 여전히 극장에서 그의 영화를 볼 때가 가장 설레고 그의 신작을 기다린다. 또 이미 봤던 영화를 n차 관람하며 재개봉 소식이 뜰 때마다 극장으로 향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사람의 소중함을 아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진심을 잃지 않고,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며, 사랑과 인간의 내면을 조용히 비춘다. 그는 감독이기 이전에 진실된 사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영화를 통해 위로를 받고 고레에다의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폭력이 만연하고 감정이 파편화된 오늘날, 그의 영화는 여전히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앞으로도 그 방향성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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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 - 건설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 삶, 투쟁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외 기획, 이은주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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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는 단순한 노동 현장의 이야기를 넘어 인간답게 살고자 했던 이들의 절박한 몸부림을 기록한 책이다. 우리가 사는 집, 오가는 도로,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 등 사회를 구성하는 이 모든 공간이 건설 노동자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겨왔지만, 정작 그 손의 주인들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맨 처음 이 책을 펼치며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은 전태일 열사였다. 그리고 곧,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양회동. 그는 철근 노동자였고, 노동자들의 삶을 위한 투쟁 속에서 스스로를 불살랐다. 2주기를 맞아 출간된 이 책을 통해서야 나는 양회동이라는 이름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었다.

책은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흔들리지 않을 용기’, ‘행복을 짓는 노동’, ‘연대를 향한 발걸음’. 각 장에는 노동자들이 등장해 자신의 삶과 건설업의 처참한 현장, 그리고 투쟁의 이유를 이야기한다. 이들은 자신을 노동운동가라 부르지 않는다. 그저 ‘살기 위해’ 마땅한 권리를 주장했을 뿐이다. 저녁이 있는 삶,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 약속된 임금을 제때 받는 것. 너무도 기본적인 것들을 위해 그들은 싸워야만 했다.

대개 언론은 늘 노동자들을 시끄러운 존재로 묘사했고, 노조는 회사의 발목을 잡는 집단처럼 다뤘다. ‘건폭’이라는 낙인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퍼졌는지, 그리고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잔인하게 훼손할 수 있는지 이제는 안다. 이 책은 그 낙인을 거두는 일이다. 침묵으로 사라졌을 수많은 목소리를 다시 살아 숨 쉬게 만드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노동을 위계적으로 바라본다. 머리를 쓰는 일과 몸을 쓰는 일, 사무직과 생산직. 하지만 삶을 지탱하는 모든 일이 똑같이 귀하고 값진 노동이다. 건설 노동자는 ‘노가다’가 아니다. 그들은 도시의 기초를 쌓고, 사람들의 삶터를 짓는 ‘노동자’다. 우리가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매일 새벽부터 어둑한 저녁까지,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의 삶에 귀 기울여왔는가? 단지 뉴스 속 한 줄 기사로 스쳐 보낸 적은 없었는가. 그 질문은 불편하지만, 꼭 필요하다. 『노가다가 아닌 노동자로 삽니다』는 단지 누군가의 고된 하루를 보여주는 기록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외면해온 진실을 마주하라는 요청이자, 더 늦기 전에 함께 바꿔보자는 제안이다. 노동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는 기다린다고 오지 않는다. 그러니 읽고, 말하고, 연대하자. 지금 여기서부터.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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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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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진공 붕괴》는 해도연 작가의 작품이자, 내가 이 작가를 처음 만난 책이다. 평소에도 SF 장르를 좋아하긴 했지만, 이 책은 다른 SF와는 결이 조금 달랐다. 실제로 작가가 우주과학 연구원이여서 그런지 이야기 하나하나가 허공에 그린 환상이 아니라 촘촘한 이론과 숫자 위에 놓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생생하게 몰입됐다.

여섯 편의 단편은 모두 제각기 다른 세계를 보여주지만,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감정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사랑은 기계에게도 가능한가. 죽음을 아는 채로 행복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외면하는 사이, 소멸은 이미 시작된 게 아닐까.

소설집을 읽고 나서 깊은 여운에 잠겼다.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생각이 예상보다 더 묵직하고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외계 생명체, 진공 붕괴, 타임루프 같은 소재는 허구지만,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슬픔, 고독, 애정 등의 여러 감정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그 허구의 세계가 더 진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학이 단지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의 중심축이 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작가가 가진 전문성과 깊이가 그대로 녹아 있어서, 단어 하나도 허투루 쓰인 느낌이 없었다. 뭔가를 보고 외우는 공부가 아닌, 사유하고 사는 이과의 감성. 그래서인지 단편 속 과학 이론조차도 시처럼 느껴졌다. 《진공 붕괴》는 단순한 SF의 범주를 넘어 과학과 문학, 감성과 이성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던지는 하나의 질문이다. 우주란 넓고 광활한 공간 속에서 때론 인간의 존재가 무력하게 느껴지지만, 우리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존재가 되어야지 않을까.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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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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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에는 영혼이 깃든다’는 말을 무서워하면서 동시에 좋아했다. 어릴 적, 인형에게 이름을 붙여 말을 걸고, 몰래 고민을 털어놓던 시간이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인형에게 꼭 마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책을 읽는동안 그때의 인형이 생각났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골동품점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님은 이 작품을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책 속 인물들은 선악으로만 구분되지 않는다. 심지어 악인조차, 그 안의 외로움이 조금이나마 묻어난다. 인간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감정을 다루면서도, 문장은 끝내 따뜻함을 놓지 않는다. 세상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호미‘ 이유요와, 언제나 그의 곁에 있는 동이는 고요하지만 단단하게, 외로움 속 사람들을 지켜주는 존재다.

참 따뜻했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내겐 그리 가까운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알지 못한 외로움까지도 위로받고 있었던 기분을 느꼈다. 이 책의 챕터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아마 블로그에도 다시 긴 후기를 남기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을 책을 만나 행복하다.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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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개자식에게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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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동안 줄곧 밑줄을 그었다. 특히 '우리 어머니에게는 페미니즘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는 대목에서는 울컥했다. 나의 엄마, 외할머니, 그 이전 세대의 여성들이 그토록 많은 억압을 당하면서도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그들이 조심해야 한다고, 참고 견뎌야 한다고 말했던 건 단지 그게 현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 조에는 오스카를 고발했지만, 돌아오는 건 지지보다 공격이었다. 댓글, 루머, 조롱, 혐오. 그녀는 병원 신세를 지기도 하고, 고립되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SNS에서 누군가를 몰아가는 무리를 떠올렸다. 한 명의 개인을 쓰러뜨리기 위해 단어 하나로 칼날을 만든 그들. 때로는 그 안에 나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끝까지 대화를 포기하지 않는다. 오스카와 레베카는 끊임없이 이메일을 주고받는다. 때로는 싸우고, 공감하고, 과거를 고백하며면서, 이들의 대화는 완전한 화해로 끝나지 않지만, 적어도 '시작'은 한다. 그리고 이어진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듣고, 말하려는 시도는 계속된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이야말로 이 소설이 전하는 가장 큰 메시지라고 느꼈다. 

*본 서평을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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