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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올리비아 개트우드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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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

바닷바람이 스치는 산타크루즈의 해변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오래된 집에 몸을 숨긴 채 살아가는 미티와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인 새집으로 이사 온 레나.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기 오래전부터 이미 서로를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미티가 밤마다 산책하며 바라보던 유리의 집은 처음엔 동경에 가까웠다. 빛이 새어나오고, 우아한 움직임이 보이는 그 집은 미티에게 자신에게 없는 삶 자체로 느껴진다. 그러나 레나를 가까이 마주하게 된 순간, 그녀가 지닌 매끄러운 말투와 아름다운 이미지가 오히려 어떤 틀에 갇힌 듯 낯설게 느껴진다.

화려한 외양 뒤의 불안, 완벽한 연인이란 타이틀 뒤에는 거대한 통제가 있다. 스스로의 감정이 맞는 감정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흐릿한 눈빛을 보며 미티는 본능적으로 그 공허함을 감지한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공기의 밀도였다.

과거에서 도망친다면 현재의 ‘나’는 건재할까. 타인의 욕망으로 만들어진 삶에도 ‘나’라고 부를 무언가는 여전히 남아 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폭력은 어떤 상흔을 남기는가.

이 작품은 그두 여성의 뒤돌아보는 초상 위에 조용히 물결을 남기고, 독자로 하여금 각자의 자리에서 그 흔들림을 오래 바라보게 만든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처럼 여성들의 사랑과 연대를 볼 수 있어 좋았다.

미티가 레나에게 영감을 주었고, 레나가 미티를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냈던 것처럼. 『네가 누구든』은 ‘나’라는 각별한 타인을 되찾는 이야기다. 나는 나의 세계를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 여성 서사의 힘을 온전히 품은 이 작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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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안인
우밍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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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

어쩌면 근미래의 이야기.

태평양 한가운데 거대한 쓰레기섬이 떠 있다. 우밍이 작가의 『복안인』은 그 섬을 중심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의 잔해와 그 안에서 살아가려는 생명들의 이야기를 펼쳐낸다.

문자도, 불도 없는 가상의 섬 ‘와요와요’. 그곳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소년 아트리에는 백여 번째 보름달이 뜨는 날, 자신이 만든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서야 한다. 섬의 율법은 잔혹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우르슐라와의 마지막 시간을 뒤로한 채 운명처럼 바다로 떠난다. 끝없이 이어진 항해 끝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죽음과 악취, 오색빛 쓰레기로 뒤덮인 섬이었다.

한편, 타이완 해안가 마을에서 살아가는 앨리스는 어느 날 갑자기 남편과 아들을 잃는다. 사고인지 실종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실의 시간을 견디며, 그녀는 바다의 속삭임과 함께 조금씩 붕괴되어간다. 그 두 세계가 거대한 쓰레기 소용돌이를 통해 조우하는 순간, 독자는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마주하게 된다.

작가는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며 얻은 문명의 대가가 무엇인지 묻는 동시에, 상실과 재생을 이야기한다. 또한 존재의 본질에 관한 신화적 서사를 완성한다. 와요와요 섬의 율법과 타이완의 개발 현실은 대비되지만, 결국 그 둘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환경 파괴는 이미 오래전부터 야기되어 왔다. 그동안 아무 생각없이 버려왔던 것들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인지 우리조차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소설이 근미래의 이야기로 느껴졌다. 바닷속에 떠 있듯 고요하게 마음을 출렁인다.

쓰레기 섬 위의 아트리에, 바닷가에서 남겨진 앨리스, 그리고 복안인의 존재는 모두 우리 자신을 비춘다. 문명과 자연, 인간과 신, 과거와 미래가 겹쳐 보이는 겹눈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조금 늦게나마 깨닫는다. 『복안인』은 끝이 아닌 시작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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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론은 어쩌다
아밀(김지현) 지음 / 비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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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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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는 현실과 거리가 멀지만, 한편으로는 가장 밀접하게 닿아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아밀의 두 번째 소설집 『멜론은 어쩌다』는 소설 속 배경과 현실 속 이야기를 교차해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집이었다. 여덟 편의 단편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현실의 차별과 억압을 비춘다.

1.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기영과 미나의 관계를 통해 우정과 사랑의 경계를 묻는다. 레즈비언이자 뱀파이어인 미나는 철저히 소수자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고, 기영은 그런 미나와의 관계를 ‘우정’이라 믿으며 애써 감정을 외면한다. 둘은 서로를 잃고 싶지 않았기에 때로는 상처를 주고받고, 또 사랑을 자각하지 못한 채 우정을 이어간다. 우정이야말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작품은 사랑과 우정의 경계선에 대해, 나아가 소수자에 현실을 되새기게 한다.

2.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
강렬한 제목처럼, 부치인 영민이 섹스 로봇 리아를 통해 관계와 사랑을 배워가는 이야기다. 첫사랑의 실패로 상처받은 영민은 여성과의 관계에 자신감을 잃지만, 리아와의 시간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다. 로봇과 인간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와 감정은 근미래에 우리가 맞닥뜨릴지 모를 윤리적 질문을 선명히 던진다. 성적 욕망, 인간의 존엄, 그리고 사랑의 본질에 대한 문제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3. 〈노 어덜트 헤븐〉
작품은 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 멜론(재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아이는 엄마의 재판을 통해 이승에서의 기억을 되찾고 자신이 겪어온 억압과 아픔을 떠올린다. 이 소설은 정상성과 비정상이라는 경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억누르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들만의 순수한 천국은 차별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유토피아로, 우리에게 진정한 성장은 무엇인지, 반성과 변화는 어떻게 가능할지 묻는다.

《멜론은 어쩌다》 속 인물들은 서툴면서도 사랑스럽고, 낯설지만 묘하게 친근하다. 경쾌한 외피 속에 숨겨진 질문들은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현실의 문제를 환기한다. 아밀은 환상과 유머를 빌려 지금 이 시대의 차별과 혐오를 선명히 드러내고, 동시에 더 나은 가능성의 세계를 제시한다. 모든 소재가 독창적이고 인상 깊어 몇 개의 작품은 장편화되기를 바라게 된다. (제발이라는감정...) 아밀의 세계 속 우리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어떤 사랑을 지켜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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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앉는 프랜시스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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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

마쓰이에 마사시의 『가라앉는 프랜시스』는 연애소설이라는 장르 속에 자연과 시간이 쌓아 올린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계절의 흐름과 함께 천천히 익어가는 삶의 풍경까지 포착해낸다는 점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마쓰이에의 문장은 특히 자연의 묘사에서 빛난다. 얼어붙은 땅 위에 소리 없이 내리는 눈, 뺨을 스치는 바람과 따사로운 햇볕, 대지 아래 흐르는 강 등등 페이지마다 오감을 깨우는 묘사는 홋카이도의 사계 속에 직접 서 있는 듯한 체험을 선사한다.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라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읽는 내내 영화 속 설원 장면이 떠올랐다. 계절이 변화하는 흐름은 두 사람의 사랑이 자라나는 과정과 맞물려, 더 서정적이고 깊은 울림을 준다.

『가라앉는 프랜시스』는 사랑과 삶, 사라짐과 재생의 순환을 함께 그려낸 작품이다. 나와는 무관한 인물들의 사랑인데도 그들의 삶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공감하고, 위로를 받았다. 아직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어 더욱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어 이 소설을 재독할 때마다 감상이 달라질 것 같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마다 가즈히코에게 향하던 게이코를 생각하며, 또 펼쳐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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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공현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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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

삶은 결국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하루를 살아낼수록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종착지에 가까워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내일을 계획하고,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서로의 안녕을 빌어준다. 과거를 발판 삼아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하는 그 마음은, 어쩌면 인간다움의 가장 단단한 뿌리일 것이다.

공현진 작가의 첫 소설집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에는 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등장인물들은 특별히 영웅적이지도, 세상을 구원하려 나서지도 않는다. 대신 이들은 자기 앞에 놓인 하루를 살아내고, 타인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며, 그 작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확인한다.

“어차피 멸망할 세계라면, 우리 함께 멸망하자고. 이 말은 내게 함께 살아가자고, 살자고, 하는 말과도 같다.” 작가의 말 中

공현진의 소설은 ‘멸망할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긴다. 체념할 것인지, 혼자의 길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타인과 손을 맞잡고 함께 살아갈 것인지. 작가는 ‘함께 멸망하자’는 말을 ‘함께 살아가자’는 뜻으로 바꿔 전한다. 차갑게 굳어가는 세상, 혐오가 깊어지고 개인주의가 과장되는 시대에 그의 소설은 미약하지만 확실한 희망처럼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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