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 박찬일 셰프 음식 에세이
박찬일 지음 / 푸른숲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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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보다 에세이를 좋아한다. 소설도 작가를 반영하겠지만 에세이만큼 솔직 담백하고 사실적인 작가자신의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먹는 것을 좋아해서 요리도 좋아한다. 책과 영화도 좋아하는 편이다. 이런 내 취향에 딱 맞는 책을 발견했다.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바로 이 책. 노란 겉표지마저 예쁘다. '작가는 맛에 대한 어떤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궁금해 하며 책을 연다. 책을 읽기 전에 저자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었다. 서문을 읽다가 뭐하는 사람인데 글을 이리도 잘 쓰나 싶었다. 셰프인데 인문학교양상식이 풍부하구나 했다. 필력이 좋아 글을 읽자니 저자가 묘사한 것을 상상하게 되고 그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 왜 그리 많이 생기는지. 보고 싶다. 먹고 싶다. 무슨 원초적 동물이야. 본능에 충실한 건 나쁜 게 아니다. 본래 사람이 그러하다.

 

  P29 중국집을 찾는 또 다른 이유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우울을 떨쳐내기 위함이다. 찬거리를 장만하는 오후의 시장이나, 새벽의 수산시장에 가보시라. 악다구니 같은 삶의 전쟁터를 보면서 ‘다들 저렇게 살려고 애쓰는데’하는 경외감과 부러움이 샘솟게 된다. 나의 우울이 얼마나 가당찮고 에고적인지 뼈저리게 된다. 그런 목적으로 중국집에 가는 것이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오후 한두 시가 좋겠다. 외근 나온 영업사원이나 환경미화원이나 막노동자 같은, 혼자서 식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시간에 중국집에 깃든다. 건강한 육체 노동자들의 왕성한 식사 현장을 훔쳐보는 것이다. 대개 그들은 곱빼기를 시킨다.

 

  짜장면은 저자가 이야기하듯 가장 서민적인 음식이다. 곱빼기란 단어가 주는 인정스러움이란. 저자의 짜장면에 관한 추억을 읽으며 누구나 짜장면에 관한 추억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졌다. 어렸을 적 어머니께선 오빠와 나에게 천원을 주시며 짜장면을 먹고 오라고 하셨다. 아마도 한 그릇에 오백원이었나보다. 둘이서 짜장면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던 기억이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어렴풋이 난다. 그때 참 맛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짜장면에 관한 추억이 궁금해져 물어본다. 저자의 인생에선 짜장면이 기뻤던 순간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딸아이가 아직 아기였을 때 짜장면을 힘차게 빨아 당기는 모습의 경이가 마음에 새겨져 있단다. 나도 저자처럼 딸아이와 나의 짜장면에 관한 기쁜 추억을 만들고 싶다. 딸아이의 생애 첫 짜장면을 내손으로 만들어줘야지.

 

  짬뽕에 관한 이야기도 재미나다. 전통 짬뽕 국물은 돼지고기 맛이 난다는 사실. 미처 생각지 못했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우리동네 맛집인 고려반점의 짬뽕은 돼지고기 고명이 들어간다. 육수도 돼지고기로 만든 것 같은 깊은 맛이 있다. 수박을 화채로 만들면 스무명도 더 먹을 수 있었고 닭을 백숙으로 끓여 온 가족이 나눠먹은 이야기도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저토록 가난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옛날에 최빈국 한국을 위해 필리핀이 장충체육관을 지어줬다는 이야기처럼 믿기 어렵기도 하다.

 

  P242 하루키가 맛있게 두부를 먹는 법 세 가지를 말한 적이 있다. 좀 싱겁지만 두부의 정수가 들어 있는 얘기니 귀 기울여보자. “우선 제대로 된 두부 가게에서 사야 한다(슈퍼는 안 된다). 사가지고 오면 곧바로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그리고 그날 안에 먹어야 한다.”

 

  이 책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2 : 세라복을 입은 연필>인 듯하다. 하루키가 두부 매니아라 나도 그를 따라 두부를 사랑해보려고 손두부 세모를 샀었는데 한모도 제대로 못먹었던 기억이 난다. 이유는 맛이 없어서.

 

  P242 모두 중요한 얘기지만, 세 번째 얘기가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우리는 유통기한을 따지는 두부를 먹는다. 진열대에서 두부를 집어 들고 유통기한을 본다. 이런 두부가 맛이 있을 리 없다. 상품의 유통구조상 팩에 든 두부에는 맛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밤새 만들어 새벽에 놋쇠로 만든 종을 울리며 우리 식탁에 올라온 두부라야 진짜 두부 맛을 낼 수 있으니, 아파트와 맞벌이, 도회 같은 우리 삶의 변경된 회로에서는 애당초 맛있기는 글러버린 셈이다

 

  맞다. 예전에 이른 아침에 두부종소리가 들리곤 했었는데 두부를 파시는 할아버지가 두부리어카를 끌고 다니시며 두부종을 땡그랑 땡그랑 울리며 지나가곤 하셨다. 두부종소리가 울리면 엄마는 나에게 양푼이를 주시며 두부를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켰었는데 500원짜리 짜장면 먹던 기억만큼 오래된 일이다. 저자의 말처럼 이제 나는 마트에서 유통기한을 따지며 팩에 든 두부를 산다. 그때 그 추억의 두부종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맛있는 두부만큼 두부종소리가 그립다.

 

  이렇게 요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니 박찬일씨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입안에서 침이 고이고 음식의 이미지가 떠오르고 곧 먹고 싶어진다. 음식평론가를 해도 잘하시지 않으실까. 음식에 관한 칼럼도 재미나게 쓰실 것 같다. 박찬일씨의 푸드 칼럼이 신문이나 잡지에 연재된다면 매번 찾아서, 혹은 기다리며 읽는 재미가 쏠쏠할 듯하다(몰랐는데 실제 칼럼니스트였다.^^;;역시나). 요리를 좋아해서 요리에 관한 잡지나, 책, 에세이를 즐겨 읽는 편인데 스토리도 있으면서 재료에 대한 상식과 요리법까지 적힌 반짝이는 루비로 꽉 찬 석류 같은 책은 실로 오랜만이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십년 전쯤 읽었던 유명작가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보다 뛰어나다고 할까. 물론 류는 요리를 못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졌긴 하지만. 책을 소장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소장하고 싶다. 덮어뒀다가 음식에 대한 추억이 스쳐지나갈 때, 그가 가르쳐준 요리법이 궁금할 때 다시 꺼내보련다. 에세이를 보며 요리해 보고픈 충동이 일기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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