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친 엄마 - 요양원을 탈출한 엄마와 K-장녀의 우당탕 간병 분투기
유미 지음 / 샘터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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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그다지 숭고하지 않고,
인간은 스러져 가는 서글픔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숙명을 알기에 사람들은 죽음에 가까워진 사람을
기꺼이 돕고 너그러이 품어 주는 게 아닐까? p205

‘아픈 엄마’
유방암, 신우암, 폐암을 거쳐 이제 뇌종양으로 다시 입원한 ‘엄마’의 간병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딸 ‘유미’에게도 가족이 있다. 남편과 아직 어린 딸아이를 돌보며 엄마의 병원 생활을 함께 하기란 매일이 전쟁같았고, 살얼음판을 걷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뇌종양 이후 엄마의 갑작스러운 성격 변화, 폭언, 섬망 증상과 치매라고 오해할만한 상황들이 수시로 등장했다.

유미는 두 가지 마음 사이에서 늘 줄다리기를 한다.
엄마를 지키는 딸 — 가정을 지키는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

어떤 것이 옳은 선택일까.
아니, 이 선택이 옳은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선택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래서 유미는, 유미의 삶은…
모든 것이 물음표다.

/ 간병이 아직 낯선 딸과 자유를 찾아 도망친 엄마,
/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화와 질병의 문제를 두고
/ ‘좋은 죽음’은 곧 ‘좋은 삶’임을 보여주는 모녀의 이야기

-

“ 그리고 생각이 나시면 기억하고,
잊고 싶으면 잊어 주시오
해가 뜨거나 저물지도 않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꿈을 꾸며 어쩌면 기억하겠지요,
어쩌면 잊을지도 모르지요, ”
| p52,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시

그러고보면 ‘엄마’는 한번도 스스로 죽음을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죽거든…’ 이런 말은 이 책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미 온갖 암을 거쳐오신 어머니는 오히려 ‘나는 운동화를 신으면 용감해져요’라며 스스로의 삶을 지탱하고 일어서는데 온 힘을 다 쏟는 분이셨다. 그러나 이 시를 외우는 순간 만큼은, 조용히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하게 마주하고 계셨을지도 모르겠다.

또 다시 재발한 암, 그리고 믿기지 않는 뇌종양 진단. 유미는 슬퍼할 틈도 없이 간병이라는 현실로 넘어와야 했다. 간병인을 고용하는 하루치 고용비가 12~15만원이 든다는 것을 알까? 한달을 고용하면 쉽게 400만원을 넘어간다. 한달만에 이 모든 일이 끝난다는 보장도 없다. 간병파산이라는 말이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니었다.

간병이라는 현실에 한 번 무너지고,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셔야하는 상황을 마주하며 수도 없이 본인을 원망하고 과거의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달라졌을 미래를, 결코 오지 않았을 미래를 탓하며 유미 또한 무너져갔다.

하지만 무기력한 날도 잠시, 요양원에 모셨던 엄마는
매일 밤 유미에서 전화를 걸기 시작한다.
‘유미야 나 꺼내줘. 지금 와. 나 못 견디겠으니까.’

뇌종양 수술을 받은 엄마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밤마다 잠에 들지 못하고 집 밖을 배회하거나 화장실에서 넘어져 응급실에 실려가고, 알 수 없는 말들을 이어가며 가족들을 당황하게 한다. 유미도 돌봐야할 가정이 있고 갓난 아이의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 마음껏 엄마의 간병으로 뛰어들지 못했던 마음이 내게는 마치 그 속을 들여다 본 것 처럼, 시커멓게 타버린 마음이 이 글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유미의 그 타들어가는 마음이
마치 내 것 같아 속이 뜨거워졌다.

마음껏 엄마를 돌볼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면하고 싶지도 않은 현실. 어떻게든 내가 이끌어가야하는 현실에서 유미의 고민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난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마음에 더 없이 큰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한 자리에 매몰되지 않고 이 모든 기록을 남겼다는 것. 낯선 현실을 마주한, 아픈 가족을 둔 사람들에게 전하는 치열한 전투의 기록이 남겨졌다는 것은 간병의 현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흔하게 일어나지만 그 고통의 크기를 짐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이 글이 유미와 같이 환자의 가족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다면 어딘가 아쉬웠겠지만 무엇보다 아직까지도 요양원이나 암병동이 아닌 본인의 집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며 노년을 보내고 계신 어머니의 글로 진정한 끝이 맺어진다는 점이 마치 소박하게 빛나는 희망을 본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 도서제공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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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나
이종산 지음 / 래빗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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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와 나, 고양이가 된 그를 여전히 사랑하는 나”

한 해의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던 사람들 앞에 별안간 거대 고양이가 나타나 묻는다,

“ 앞으로 남은 삶을 고양이로 사시겠습니까?
고양이로 살기를 원한다면 ‘예’,
원하지 않는다면 ‘아니오’에 체크하시오. ”

이렇게나 갑자기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고양이의 삶을 선택할지 말지 결정하라니, 너무하다 싶은 생각이 드는 찰나, 마음 속 한 구석에서는 분명 매혹적인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친구들과 다음 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다음 생에는 결혼을 안할란다, 애도 안낳고 나 혼자 살란다, 아니다, 다 싫다, 나는 그냥 냇가에 돌로 다시 태어날란다.. 우리의 결론은 늘 돌멩이가 되어 끝이 나곤 했다.

그런데 고양이라니? 🐈
그 귀엽고 새침한 작은 생물체?

처음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제안에 갈수록 묘하게 끌리는 나를 추스르며, (결국 나는 고양이는 될 기회가 없었지만), 책을 통해 고양이가 된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볼 수 있었다.

-
이 변화의 물음을 던진 거대 고양이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이 책은 일단 고양이가 된 이후의 사람들과 고양이들의 삶에 더 깊이 관여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양이가 되었지만 어떨떨한 마음에 소리내어 울어보지도 못한 채 서둘러 해야할 일들을 처리해내는 남겨진 사람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한 채 고양이가 된 배우자, 파트너, 친구를 위해 오롯이 그들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최선을 다해 보살피는 사람들.

“ 그도 귀여운 생물이고, 고양이도 귀여운 생물인데, 그가 고양이가 되니 두 배로 귀여웠다” , p32

나는 좀 슬플 것 같다. 더 이상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손 잡고 거닐며 보내는 시간이, 사람으로서 존재했던 시간이 사라지다니… 그리고 끊임없이 나를 붙잡았던 질문, 그 사람은 왜 고양이가 되길 선택했을까.

“ 내가 그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해서, 나와 사는 것이 행복하지 않아서 차라리 고양이로 사는 쪽을 선택한 거라고… ” | 30

마음을 추스릴 틈도 없이 내가 그를 힘들게했나 싶은 생각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지만 이 책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서로를 지지하는 그들의 소리 없는 연대, 옆에 앉아 같이 눈물 흘릴 줄 알고 위로하고 보살피며, 또 서로의 고양이를 존중하며,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함께 한다는 점이다.

동네 작은 책방을 하던 친구가 고양이가 되면서 어떨결에 사장이 되어버린 번역가, 출판하고싶은 원고를 찾느라 2년 넘도록 책 한 권 출판하지 못한 어느 이름 없는 출판사 사장, 파트너가 고양이가 되어버린 작가

묘하게 책이라는 매개체로 연결된 세 사람.
세상을 짝사랑하는 소박한 마음들, 한없이 서투르기만 해서 세상과 제대로 이어지고 소통해본 적 없는 이들이 용기를 내어 한걸음씩 서로에게 다가가는 이야기.

고양이와 나
고양이가 된 그를 여전히 사랑하는 나

소박한 사랑을 전하는 고양이 판타지 소설 💗
우리의 얼어버린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줄
사랑스러운 이야기들, 같이 읽어볼래요?

+
그는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존재다. 그런데 그 존재가 고양이가 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고양이가 된 사람의 수명은 어 느 정도일까? 고양이만큼 살까, 사람만큼 살까?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다니. | 31

물리적 형태가 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소리로 바꾸는 것이 '말'이고, 눈으로 볼 수 있게 문자로 옮기는 것이 '글'이다. 그러고 보면 말이나 글은 번역이기도 하다. | 156

우리의 관계가 하나의 방이라면, 그 방의 창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창문으로 상쾌한 바람이 들어오고 나갔다.
우리의 방에 꽉 닫힌 문은 없었다. 언제나 부담 없이 들어왔다 나갈 수 있는 방. 아침의 빛이 들어오기도 하고, 오전이나 오후의 빛이 들기도, 저녁이나 밤, 새벽의 어둠이 내리기도 하는 방이었다. | 181

그때는 우리 사이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고양이가 된 지금은 알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자유롭게 둘 수도 있었다. 고양이가 된 지금의 나처럼 해야만 하는 것들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하는’ 대신 그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만' 할 수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 199

그냥 내가 그를 너무 사랑해서. 사람이었던 그도 너무 사랑하고, 고양이가 된 그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건데. 사람이었던 그가 그립고, 고양이가 된 그가 너무 아름다워서, 우리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서, 여러 마음이 너무 복잡하게 뒤섞여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 순간이 있는 건데. | 217

(도서제공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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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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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 이런 기획, 그리고 작가의 사유를 더욱 빛내주는 번역, 어느 하나 아쉬운게 없는 ‘작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함께 보면 더 좋은 책. 논픽션의 정수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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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 대량학살자의 밝혀지지 않은 삶
베티나 슈탕네트 지음, 이동기.이재규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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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가 거짓말로 사람들을 조종하고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투명성을 만들고 아이히만을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두는 것이지, 그가 쏟아내는 말에 놀라 말문이 막혀버리는 것이 아니다. ” p703


#예루살렘이전의아이히만
#베티나슈탕네트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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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역사적인 대량학살을 조직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 지시자로 지목되어 예루살렘의 법정에 세워졌다.

한 민족을 상대로 ‘최종해결’, ‘절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더 많은 유대인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는지에 골몰했던 그에 대해,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주었다. 법정에 세워진 그는 근면한 나라의 일꾼으로, 그 누구보다 독일이라는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자로 둔갑하여 카리스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인물로 이 세상에 비춰졌다.

독일인들은 이 프레임을 좋아했다.
이 얼빠진 젊은이 하나가 민족 살해라는 ‘버튼’을 잘못 누르는 바람에 그런 치욕의 역사가 새겨졌으니, 이는 독일 민족 전체의 잘못은 아니라고, 악의 평범성의 탈을 쓴 어느 성실한 근무자의 헛된 욕망으로 치환하기 아주 적절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눈을 감고 싶어했다.
치욕의 역사를 저 안쪽 깊은 곳에 묻어두고,
조용히 잊혀져 가기만을 바라왔다.
하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늘 그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
작가 베티나 슈탕네트는 예루살렘 법정에서의 그의 모습과 그의 진술 보다는, 그가 어떻게 그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예루살렘으로 납치되기까지의 그의 행적과 그에 대해 남겨진 모든 녹취록, 인터뷰, 기록들을 살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론은,
악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비범했다.

‘사유의 결핍이 낳은 도덕 불감증’
법정에서의 아이히만이 고의적으로 초라한 증언자가 되어 자신은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지목에 의해 이 자리에 세워졌을 뿐이라고 증언했고, 오랫동안 누군가를 심문해왔던 그는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이 심문 당하는 역할을 수행해냈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의 사유를 반박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루살렘 법정에서의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적확한 표현으로 다시 구현해 냈으니,
이제 예루살렘 이전의 그가 진실로
한낱 일꾼에 불과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슈탕네트가 발견한 기록들은
그가 단지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숫자에 연연했고(얼마나 많은 유대인을 죽일 수 있는가) 더 높은 지위를 갈망했으며, 도피 신세가 되어서도 그곳에서 다시 세력을 모아 혁명을 도모하고자 했다. 자신이 직접 쓴 기록을 수도 없이 남겼고, 언론이 밝혀낸 사실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해왔으며, 어느 한 순간도 그는 누군가의 지시만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었고,
스스로 권력을 손에 넣으려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혀 평범하지 않은 의지를 갖고
한 민족을 말살하려 한 악인이었다.

-
우리는 이 비범한 악인의 이미지를 오늘날까지도 눈앞에서 마주해야 했다. 2024년 12월 3일이 가슴에 새겨진 우리에게, 4월 4일 금요일 11시 22분, 탄핵이 인용되던 그 순간, 그제서야 차가웠던 겨울이 끝이 났다.

우리가 지켜봐왔듯, 그 어디에도 ‘무사유’는 없었다. 오히려 계엄이라는 아주 적극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억압하려 했던 그를, 우리는 방관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옳은 것을 향해 걸어갔다.

슈탕네트는 어쩌면 이런 모습을 보고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던 잔인한 민족 말살 자행한 사람을 아무런 꾸밈 없이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보이는 것. 그것이 아물때까지 함께 연대하고 극복하며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가는 것.

오늘 그 역사를 마주했기에 나는 이 책이 더 뜻깊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거짓으로 치장을 해도 진실은 드러난다. 우리가 그 진실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으므로.

#도서제공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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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사람 열린책들 한국 문학 소설선
고수경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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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지 않아,
하지만 여전히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 ‘옆사람’.

그는 나의 친구이기도 하고, 배우자 이기도,
나의 학생이기도, 가족이기도, 이웃이기도 하다.
마음을 모두 내어줄듯 늘 가까운 것 같지만
한 걸음만 물러나면
관계의 깊이는 어느새 납작해져 버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한없이 깊어지다가도
어떤 한계에 부딪히면 너무 쉽게 산산조각이 나고,
우리는 그렇게 조각난 관계의 파편 속을 살아간다.

이미 꺼져버린 촛불을 바라보며,
이 자리에 빛이 나고 있었지.. 떠올리는게 고작인데,
희붐하게 눈가를 맴도는 빛은
여전히 남아있는 어떤 감정을 떠오르게 한다.

잊고 있었던 나의 감정.
어떤 선의에서 우러나는 감정일수도 있고,
관계에 대한 불편한 감정일수도 있다.

고수경의 글은 이 사소한 감정들을
아주 얇은 종이처럼 만들어서
수많은 레이어로 재탄생시킨다.

서로 다른 색과 이미지가 놓여진 종이들을
겹치고 겹쳐 한 데 모으며,
갈수록 오묘한 빛을 띠는 작품을 보는 듯,
익숙한 상황 속에서 자주 생각해왔던 것들이
거짓말처럼 글 속에서 재현된다.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나의 마음을 살펴본다.
옆사람을 곁에 두느라 정작 소홀했던 내 마음이
엉엉 우는 소리를 이제서야 듣는다.

“ 잘 모르고 지나친 오래된 마음,
그것이 꺼지지 않고 보내오는 신호,
이를 알아차렸을 때의 후련한 상태 ” | p262

이 낡고 지친 마음을 들고
다시 한 번 숨을 불어넣어본다.

그래서 이 관계의 끝은 해피엔딩일까.

‘내 마음을 외면하지 않은 채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석하는 일.’(p263)을 위해,
우리는 또 한번 관계의 바다로 기꺼이 빠지고만다.

+ 문장들,

이건 내 탓은 아니야. | 242, 옆사람

어차피 다 똑같아. 어디든 비슷할 거야. 나는 이런 곳 하나만 있으면 돼. 지우와 윤아에게는 이곳이 세 시간짜리 에어비앤비였던 거라고, 이제야 강은 생각했다. 바꿀 수 없는 것들을 피해 숨을 수 있는 방 한 칸. 그중에는 모텔이 아닌 곳도 한 군데는 있었다. 강은 거기서 본 지우의 뒷모습을 기억했다. | 33, 새싹 보호법

윤아야, 미안한데, 너희가 정말 괜찮을까? 괜찮지 않은 거라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지우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돌아갔을 때 강이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고개를 내밀자 한 블록 너머에 스쿨 존 표지판이 보였다. | 41, 새싹 보호법

매일 아침에 반 층의 계단을 내려가고 저녁에 반 층의 계단을 올라오면서 여기에 내 하루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누구에게 아는 척하고 말을 걸기에는 일곱 칸의 계단이 너무 짧다고. | 110, 이웃들

지영이 온 이유는 다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지영은 은희가 그 공을 버리는 걸 보고 싶었다. 그 모습을 보면 이전의 일들은 중요하지 않고,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144, 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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