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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세고 촛불 불기 ㅣ 바통 8
김화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5년 6월
평점 :
분홍빛이 도는 딸기 생크림 케이크, 새하얀 크림 사이로 켜진 영롱한 촛불, 이 어여쁜 표지 덕에 나는 귀엽고 아기자기하고 행복이 가득한 기념일에 대한 이야기를 상상했다. 연애 소설? 힐링 소설인가? 하지만 이 얼마나 납작한 상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우리를 우리이게 한 모든 시간들 ”
생일이나 결혼처럼 흔한 기념일 보다는 나 또는 배우자가 죽었던 날, 이유없이 기억이 사라져버린 날, 어떤 사건이 발생한 날과 같이 우리의 흔한 상상 너머의 아주 특별한 날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리없이 스며들어 누군가의 기억속에 단단히 자리잡을
여덟 개의 기념일 앤솔러지.
자칫 스릴러 미스터리가 될 뻔 했다가, 표지를 보고 달콤함에 빠져들 독자들의 뒷덜미를 잡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고갈지 모를 이야기들이라 뭐라고 딱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지만
김화진, 남유하, 박연준, 서고운, 송 섬, 윤성희, 위수정, 이희주 총 8명의 작가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고스란히 뭍어나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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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좋았던 이야기는,
#박연준 #월드발레데이
#위수정 #비트와모모
특히 <월드 발레 데이>의 첫 문단은,
“ 나는 죽은 무용수다.
나는 왜 떠나지 못하지? 산 자들이 계속 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우고 퇴장해야 하는데. 목소리를 반납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하다. 사는 일에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나를 향해 들려오는 여자아이의 목소리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있다. ”
우아한 발레리나들의 고군분투를 상상했다가 첫문장부터 죽은 무용수가 튀어나와서 숨을 참고 읽어 내려가야 했지만, 스산하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갈수록 이렇게 애처로워지다니… 죽은 무용수가 죽은 후에야 깨닫게 되는 삶에 대한 통찰, 회한 같은 것이 느껴져 읽을수록 안타까움이 커져갔다. 죽었지만 죽지 못하는 그 마음이 아직 여전히 이 곳을 떠돌고 있고, 자신을 따르는 어린 발레리나에게 노력은 계속 하지만 자신을 다 태워버리진 말라고, 죽었음에도 무대 위에서 끝까지 한 마리 백조가 되고 마는 그녀의 움직임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영원히 그녀는 무용수라는 것을 보여주는듯 했다.
“ 쉬지 않고 계속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전문가가 된다. 좀 더 집요하고 열렬히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뛰어난 전문가가 된다. 집요하고 열렬하며 꾸준히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수월하게, 혹은 수월해 보이게 성장하며 자신을 믿고 긍정과 충만함으로 그 일에 뛰어드는 사람은 대가가 된다.
’뛰어드는‘ 이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뛰다가 걷고, 걷는 중에 지치고, 중단하고, 의심하고, 머뭇거리고, 돌아가다 숨는다. 물론 대가가 되기 위해 이 모든 지체가 필요하다. ” |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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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수정작가의 <비트와 모모>는 배우자와 사별하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다시 삶을 살아내는 용기를 갖기까지 잔잔하게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 특유의 섬세한 슬픔이 느껴져 무척 좋았다.
“ 거품으로 몸을 닦은 후 한참 뜨거운 물을 맞고 서 있었다. 영원히 그렇게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언젠가는 끝난다. 틀어놓은 물은 잠가야 한다. 새로 지은 집도 언젠가는 허물어진다. 나는 방금 태어난 것 같은데 이렇게 늙었다. 우리가 만난 게 언제였더라. 처음 만난 날 당신은 어떤 표정이었지. 나는 그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것 같은데 이미 모두 끝나버렸네. ” |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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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일이라는 한 가지 주제로 이렇게 다양한 스타일의 이야기 가지가 퍼져나가다니. 어느 하나 비슷한 이야기가 없고 모두 저마다의 특성이 있어 지루하지 않았고 약간 기대에 못미치는 작품 조차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어 작품들 간에 서로 주고받는 에너지가 조화롭다고 느껴졌다.
(도서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