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이여, 영원히 안녕
마르셀라 세라노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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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한다.
여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각박하고 힘든지에 대해서.
그렇다고 남자의 그늘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때때로, 남자의 그늘이 없는 여자들에 대해 세상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때면 가슴이 아린다. 잘못한 것도 없이.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을 읽었을때 머리속을 스친 생각은 아버지가 돌아오셨으니 자매들에게 세상이 그리 차갑지만은 않겠구나...라는 것이였다. 왜 그랬을까? 결코 약한 자매들이 아니였지만, 그녀들을 보며 보호해주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었다.

마르셀라 세라노가 '작은 아씨들'을 리메이크 했다는 '작은 아씨들이여, 영원히 안녕'을 집어들고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보호해주고픈 아가씨들이 나오겠다는 막연한 불안감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어 내려가며 내 생각이 틀렸다는걸 천천히 인정해야만 했다. 

칠레의 한 작은마을 푸에블로에는 각기 다른 사촌자매 네 명이 여름방학마다 모인다. 어느 날, 수녀원에서 비밀리에 호세 호아킨을 낳은 어떤 귀부인이 있었다. 호세 호아킨은 수녀님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왔고, 수녀원을 떠나 정착한 곳이 바로 '푸에블로'였다. 그곳에서부터 네 명의 사촌자매의 뿌리가 시작된 것이다. 비록 그녀들은 사촌자매였지만, 친자매나 다름없었다. 금발머리의 손발이 곱고 예쁜 니에베스,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이 모호한, 그러나 문학을 사랑하는 씩씩한 아다, 늘 남을 생각하는 착한 마음을 가진 루스, 그리고 자신의 외모를 잘 가꾸고 자랑할 줄 아는 롤라-네 명은 여름방학마다 푸에블로에 모여 자신들의 꿈을 가꿔나간다.

카실다 고모할머니가 운영하는 제재소는 푸에블로의 중심이였다. 마르티네스 가문은 푸에블로 주민들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권력은 어느 순간 무너져내린다. 카실다 고모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제재소는 빚더미에 넘어가고 네 명의 사촌자매는 아름답던 여름날의 푸에블로를 뒤로 한 채, 여기저기 흩어지게 된다.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 가정주부로, 작가로, 성공한 경제전문가로 자리를 잡은 자매들은 늘 푸에블로의 여름날을 기억한다.
'과거는 더이상 아프게 하지 않을 경우에만 과거다' -p264
어느 문장에서 읽은 구절을 아다는 재빨리 적어 간직한다. 위 문장은 각각의 자매에게 모두 해당되는데, 푸에블로의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그 날에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원하던 가정을 꾸린 니에베스 였지만, 남편도 아이도 모두 바빠 자신을 상대해주지 않는 현실이 못내 쓸쓸하고 씁쓸하다. 어린시절, 사촌이였던 올리베리오와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간직한 아다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한 사랑에 안착하지 못한 채 방황한다. 그녀를 잡아준 유일한 것은 문학이였다. 경제 전문가로 성공한 롤라는 여전히 아름답고 부유하지만 늘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을 느낀다. 그녀들은 어렸을적 집안일을 도맡아하던 판초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칠레 푸에블로에 모이게 된다. 하지만 제재소가 있던 옛날집은 아다를 강간해서 거의 쫓겨나다시피한 에우세비오가 차지하고 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나무들마저 모두 잘려져 휑한 그곳을 바라보며 그녀들은 끝내 불을 지른다. 그렇게,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는듯이.

1973년 9월의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부터 2001년의 9.11 테러 등 역사의 소용돌이를 몸소 겪으며 살아온 사촌자매들은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 들려준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한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과거라는 어두운 존재에게 발목이 붙들려 괴로워하면서도 그녀들은 여전히 삶을 사랑했다. 그래서 보호해주고 싶다는 느낌보다는, 그녀들처럼 세상에 맞서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변화하고 있는 칠레처럼, 그녀들 역시 새롭게 변화하려 준비하고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그곳에 불을 질렀듯이 항상 발목을 붙잡던 과거의 기억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었으리라. 새로운 감각으로 고전의 작은 아씨들을 현대로 불러들인 '작은 아씨들이여, 영원히 안녕'-그녀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느낌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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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플라워 -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되는 비밀스런 이야기
스티븐 크보스키 지음, 권혁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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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하기 위해서는 통증이 수반된다. 그냥 쑥쑥, 아무일없이 자랐으면 좋으련만 이 세상 그 어느것도 통증없이 성장하는 것은 없다. 통과의례처럼, 성장과 통증은 서로 맞닿아있는 것이다.

책의 주인공 찰리 역시, 지독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십대 소년이다. 그는 얼마 전, 친한 친구 마이클을 잃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일하게 "사랑해"라고 말해주던 이모를 잃었고, 유일한 말상대였던 형은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났다. 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만 싶었다.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네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이해도 잘해준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줄 사람이 필요해. 네가 누구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해줄 것 같아>

민감한 십대 청소년답게 자신의 이름과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가명으로 쓰고 있지만, 그 어느때보다 진솔하게 편지를 이어나가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것이다. 찰리 역시 그걸 알았고 담담하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아직은 어리다며 무시당하는 아이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섹스를 하고, 친구들과 돌려가며 약물을 하며, 줄담배를 피워대는 아이들이 바로 그 세계에 속해있다. 찰리 역시 담배를 접하고, 약물에 빠지기도 하며 성장통을 제대로 겪어낸다.

아무도 다가오지 않던 찰리에게 친구들이 생기고 그 친구들과 함께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안에서도 상처를 받고 아픔을 겪기도 하지만, 그들과 함께한 일 년은 찰리에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 샘을 짝사랑하고, 메리를 사귀기도 하며, 친한 친구 패트릭이 동성애자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동안 찰리는 한 뼘 더 자라게 된 것이다.

또한 흔들리는 찰리는 놓지 않고 꽉 잡아준 부모님과 형제들이 있었기에, 유년기의 아픈 기억으로 병원에 입원까지 해야 했던 찰리는 천천히 회복하게 된다. 충격적인 일로 가득한 유년기였지만 찰리는 그것 역시 성장에 수반되는 통증이라 여기며 자신의 미래를 위해 한 발짝 내딛었기 때문이다.

자유분방한 섹스와 낙태, 그리고 약물복용과 왕따등의 문제로 지독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그들을 색안경을 낀 시선으로 좌지우지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겪고 있는 지독한 성장통은 마치 허물어지는 집 위에 서있는 느낌일테니까 말이다. 찰리의 부모님처럼 믿어주고 꽉 붙잡아주는게 최선일 것이리라. 나 역시 불안한 생각들로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다. 지나고보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였을 뿐이지만 그때는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시간이였다. 찰리 역시, 그런 시기였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마지막에 고백한 찰리. 그의 말대로 앞으로 남은 시간동안 무엇이 닥쳐와도 꿋꿋이 이겨내길 마음 속 깊이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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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샤워 in 라틴 - 만화가 린과 앤군의 판타스틱 남미여행기
윤린 지음 / 미디어윌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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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많고 소심한 나는 주로 패키지 여행 상품을 이용하는 편이다. 일정이 잡혀있고, 이동할 수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편안하고 안락한 숙소가 늘 대기하고 있는 패키지 상품은 편안하다. 하지만 편한 대신 단점이 있는데, 짜여진 일정이 너무나 빡빡하다는 것!

몇 해 전, 큰 맘 먹고 앙코르와트에 다녀왔을때, 패키지 일정에 질려버렸다. 가고싶지 않은 곳에 가야 하는것은 물론, 앙코르와트 사원의 멋진 모습에 반해 조금 더 머물고 싶은 내 바램을 가볍게 무시하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는 가이드의 모습에 왠지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람샤워 in 라틴'의 저자 윤린은 그렇지 않았다. 한국의 빡빡한 일상에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라틴에서 즐기는 한가하고 여유로운 일요일을 상상하며 기어코 떠난 것이다. 그것도 멋지게! 산텔모의 일요일은 역시 배신하지 않았다. 싼 커피값과 살랑이며 불어오는 바람에 여유를 실컷 즐기는 윤린씨는 불현듯 어떤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어딘가로 향해 걸어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뒤로 사람들이 계속 줄지어 그들을 따라 가고 있는 게 보였어요. 게다가 이 사람들 표정도 틀려. 뭐지? 저 건방진 여유로움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나를 보고 카페 주인아저씨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하셨습니다.
"도밍고(일요일이야)." -p.42

역시 남미의 일요일은 저자 윤린씨가 꿈꾸는 대로 달랐다.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모이는 벼룩시장이 열리고, 흥겨운 탱고를 즐길 수 있었으며 광대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상상만해도 즐거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도밍고~~~~

내일은 여기, 그리고 다음달엔 저기...라는 식의 빡빡한 일정이 아니라 마음에 들면 그곳에 몇 주고 머물며 사람들과 즐기는 여유로운 태도 역시 남미 여행에 매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소울메이트 앤군과 함께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만나며 그곳의 정취에 한껏 빠져드는 윤린씨를 보며, 어느새 나의 부러움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만 있었다.

마추픽추의 광엄한 장경, 유우이 사막의 화이트샌드, 이과수 국립공원에서 만난 폭포등은 여행길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여행 중간중간,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 만나게 되는 멋지고 멋진 광경들은 윤린씨와 더불어 나까지 숨이 턱~막히게 만들었다. 당장이라고 떠나고 싶을 정도로.

탱고를 추고 싶어, 일반인 신청자를 받을때 손을 번쩍 들기도 하고, 벼룩시장에서 조금의 사기를 섞어 물건을 팔기도 하며, 소울메이트 앤군이 떠났을때도 혼자 꿋꿋이 여행을 이어가는 윤린씨의 여행기를 따라가며 많이 웃고, 많이 감탄했다. 과연 나라면, 저렇게 과감하게 도전하고 뛰어들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윤린씨도 말했다. 여행길에 정해진것은 없다고. 어차피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가 아무리 정해놓은 계획이 있어도 어떤 불가피한 상황에 의해 뒤쳐지기도 하고 빨리 이뤄지기도 하는 것 말이다. 손가락 빨며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나도 산텔모의 도밍고를 상상하며, 그곳으로 떠나야겠다. 지금은 상상속에서지만, 곧 이루어질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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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나의 마나님
다비드 아비께르 지음, 김윤진 옮김 / 창비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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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배하는건 남자고, 그 남자를 지배하는건 침대 속 여자라는 말이 있다. 한 없이 약한 듯, 사회의 피해자인'척' 하는 여자들이지만 실상은 뒤에서 모든것을 조종하고 있는것 아닐까? 그런 현상을 꿰뚫어 본 남자가 있었으니 '오, 나의 마나님'의 저자 되겠다.

책의 저자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귀여운 두 딸의 아버지다. 겉으로 보기에 이 남자는 완벽하다. 피곤한 아내를 위해 요리를 만들고, 아내의 체조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주말마다 두 딸을 데리고 공원에 나간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 시간 속에서 늘 엉뚱한 상상을 한다.

자신의 임금은 늘 동결되어 있는데 아내는 15%나 올랐다.
"난 쓸모있어 보려고 애쓰는 중인데, 아내의 봉급 인상률 15%가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라, 그 인상이 공표되기 전 있었을 인사고과 면담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난 무능력자다. 솔직히 말해 내가 아내라면, 날 버렸을 것이다."
반면, 여자들만 있는 집안에서 남자는 자신 하나뿐인 사실을 과시하며 액자를 벽에 걸기위해 애쓴다.
-일요일 오후인 심삼시 사십오분, 망치 머리 부분의 잘 단련된 쇳동어기 왼손 엄지손톱 끝부분과 충돌한다...즉각적으로 손톱은 불룩 튀어나오고, 살덩이는 1,000분의 2초 동안 모세혈관이 파열되기에 충분할 만큼 극도로 압착된다.....아침이 되어 거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액자가 걸려 있음을 확인한다...그녀는 내게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소용없으니까.-
딸과 함께 방문한 인류학 박물관에서 전시된 모형과 아빠의 차이점을 묻자 딸은 이렇게 대답한다.
"음, 저들과 아빠의 차이는 말이야, 저들은 인간박물관에 들어와 있는데 아빠는 그렇지 않다는 거야. 그러니까 아빠는 인간이 아니야"

늘 멋진 가장, 멋진 아빠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그 노력들은 물거품이 되기 마련이다. 자신보다 임금이 오른 아내에게 버림받을까 눈치보고, 가족들 앞에서 멋지게 못을 박으려하지만 결국 손가락이 박살나고, 딸에게 인간이 아니라는 답까지 듣게된 이 남자. 어쩐지 조금 불쌍하다.

스스로를 희화화하면서도 결국 마나님에게 종속되어 버리는 저자는 이 시대의 남자들을 대변하는것만 같다. 이 소설은 프랑스 남자의 이야기지만,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남자들의 모습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점점 더 능력있는 여자들과 경쟁해야 하고, 결혼하면 아내에게 최선을 다해야하며, 주말에는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줘야만 한다. 결혼해서 살찌는건 자기관리에 무능하다는걸 보여주므로 메트로쎅슈얼인지 뭔지에 발맞춰 자신을 가꿔야만 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봤자 딸에게 인간이 아니란 소리나 들으면서 말이다.

자신을 희화화하면서 사회속에 드러나는 여러 문제점을 자신의 상황에 맞춰 날카롭게 풍자하는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다른 상황도 있지만,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게 어떤걸 뜻하는지 이해하게 되니 말이다.

엄살쟁이에 자기비하가 심한 이 남자, 하지만 어쩐지 오랫동안 이 남자를 기억하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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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크로폴리스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6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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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때 친구 한 명이 자살한 적이 있다. 흔히 자살하기 전에 여러 징후들을 보인다고 하는데, 그 친구는 일언반구 아무말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헤어질 때 미소를 보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참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왜 그랬었냐고 수없이 물어봤지만 대답해주지 않는 그 친구를 원망하면서.

하지만 어나더 힐에서는 그 친구를 만날 수 있다. '히간'이라는 특별한 기간동안 어나더 힐에는 '손님'들이 찾아온다. 그렇다. '손님'이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귀신, 유령을 뜻한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접하는 유령과는 차원이 틀리다. 히간중에 찾아오는 손님은 전혀 괴기스럽지 않다. 그저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어떤 이름 모를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손님인 것이다. 만질수도 있고 볼 수도 있는 손님에게 굳이 차이점을 둔다면 '손님'은 이미 현세에 존재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늘 그렇다. 몇 월 몇 일 몇 시에 죽는다고 알려주지 않는다. 불의의 사고로 죽을수도 있고, 자다가 죽을수도 있다. 죽음은, 늘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찾아온다.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은 그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미 떠난 사람에게 해주지 못한 말이 너무나 많다는 것, 해주지 못한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리라. 단 한 번 만이라도, 그 사람을 만나 내 마음을 전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그 소원을 어나더 힐의 히간 중에서는 이룰 수 있다.

학자인 '준'은 먼 친척의 도움을 받아 히간에 처음 참여하게 된다. 바깥세계에서 어나더 힐을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다. 사기이거나 혹은 미신이거나. 하지만 죽은 친척이나 동기간을 만나기 위해 '히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는다. v.파 출신은 항상 '손님'의 존재를 느끼며 살아왔기 때문에 호기심이 왕성하고 추리능력도 왕성하다.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이번 히간은 이상한 이들이 많다. 바깥세계의 살인마 피투성이 잭이 어나더 힐에도 침투했을지 모른다는 이상한 소문 때문이다. 어나더 힐의 입구인 대도리이에 매달린 피투성이 시체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이야기는 신비스러운 판타지에서 피투성이 잭을 추적하는 미스터리로 서서히 넘어간다. 그러면서 온다 리쿠는 각 장, 각 장마다 공포의 장치를 심어놓았는데 갑자기 나타나는 손님이라던지, 히간에 함께 참여한 지미의 죽은 쌍둥이 동생 테리의 공포스러운 출현등이 바로 그런것이다.

히간중에 나타나는 온갖 이상한 상황속에서도, 어나더 힐만의 특수한 전통, 즉 갓치(정령이 범인을 잡아내는 의식)라던지 햐쿠모토가타리(밤새 기담을 이어가는것)등이 등장하여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간다. 추리소설의 백미인 흥미진진한 전개는 없지만, 온다 리쿠만의 특유한 이야기 전개법과 각 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소름돋게하는 단서들은 충분히 책 속에 빨려들게 한다.

<죽음이 잔혹한 것은 불시에 찾아와 작별인사를 할 기회도 없이 모든 것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지막으로 한두 마디 주고받을 수 있었다면, 제대로 인사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유족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을까.
그러니 이렇게 제대로 인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이 자기는 괜찮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준다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될까.
그런 기회가 약속되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거실의 엔터테인먼트로 만들 수 있는지 모른다.>

뭐니뭐니해도 이 책의 장점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봤을법한 상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죽은 이들이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거쳐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그 곳, 어나더 힐. 그 상상만으로도 온다 리쿠가 그려내는 그 곳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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