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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지독한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온화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모든 일의 시작은 '연민'이였다.
호프밀러 소위는 한 기병대에 속한 활달한, 그러나 자신의 앞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가벼운 사람이였다. 그런 그가 우연히, 도시의 가장 부자인 케케스팔바씨를 알게 되고 저녁식사에 초대받게 된다. 맛있는 음식과 흥겨운 음악에 취한 그는 곧, 분위기에 젖어든다. 흥겨운 기분에 젖은 그가 예의를 차린답시고 집주인의 딸에게 청한 춤신청이 그를 헤어나올 수 없는 연민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집주인의 딸 에디트는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이였다. 호프밀러 소위가 비록 악의없이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의 행동으로 인해 에디트는 큰 충격을 받는다. 맨 처음, 호프밀러 소위는 자신의 행동이 부대와 거리에 나쁜 소문으로 퍼질 것이 두려워, 전전긍긍하게 된다. 자신의 실수를 덮고자 케케스팔바 저택에 드나들며 친해지게 된 에디트와 일로나는 소위가 전에 느끼지 못한 가정의 따뜻함과 남매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주었고, 그는 그녀들과 허물없이 친해진다.
하지만 에디트가 키워 온 감정과, 호프밀러 소위가 키워 온 감정은 다른 것이였다. 소위는 연민이였지만 에디트는 사랑이였다. 그것도 일방적이고, 열정적인 사랑. 소위는 그것을 알았을때 냉정하고 차분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대처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연민'이 이 소녀에게, 그리고 등이 굽은 유태인 노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되고, 자신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 되는 부녀에게 마치 자신이 '신'이 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느낀다.
모든 악은 절반의 우유부단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도저도 결정하지 못하고 그들이 불쌍하다는 연민의 감정만으로, 호프밀러 소위는 케케스팔바 집안에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모든것을 놓아두고 도망치려고도 했고, 사실대로 이야기하려고도 했으나 노인의 창백하고 하얀 손마디 앞에, 에디트의 신경질적이고 병색이 완연한 얼굴 앞에 매번 굴복하고 만다.
"친애하는 소위님, 우리는 연민을 제대로 관리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보다도 더 나쁜 해를 끼치게 됩니다. 우리 의사들은 그것을 알고 있고, 판사와 경찰과 전당포주인까지도 그걸 압니다. 그들이 모두 그 연민에 양보하려고만 든다면 우리의 세상은 멈출 것입니다. 위험한 것이지요. 연민은 위험한 것입니다! 당신이 직접 보셨잖아요. 연민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p.222>
우리는 살아가면서 '연민'이란 이름의 칼을 자주 꺼내든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며 '연민'이라 불리는 도구로 도움을 주고자 하지만 그것은 양날의 칼과 같다. 조심해서 다루면 도움이 되겠지만, 잘못하면 나에게까지 칼날이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걸 알아야한다. 호프밀러 소위는 연민이란 칼이 자신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는대도 모르는척 했고, 결국 자신에게 그리고 케케스팔바 집안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만다.
호프밀러 소위는 자신의 죄책감으로 인해 전쟁에서 다른 사람보다 용감하게 전투에 임한다. 그리고 그 결과,훈장까지 받는다. 그러면서 잊혀지지 않을것만 같았던 자신의 연민으로 인한 끔찍한 결과를 차츰 잊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알게 된다. 자신의 양심까지 속일 수는 없다는 것을.
<진실을 알고 있는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사람인, 이 남자의 존재가 나를 압박했다. 점잖게 차려입은 고상한 사람들 사이에 앉은 나는 어둠 속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진 것처럼 덜덜 떨고 있었는데, 그것은 조명이 들어오기만 하면 곧바로 내가 발각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첫 막이 끝나고 중간 휴식을 알리는, 짧은 어둠과 밝음 사이 그 찰나에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아주 재빨리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가 나를 보지 못했을 거라고,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거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나는, 양심이 알고 있는 한 그 어떤 죄도 결코 망각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p.444>
호프밀러 소위의 연민은 분명 의로운 동기에서 출발한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적절하게 조절할 줄 몰랐다. 그래서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까지 파멸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연민으로 인해 평생 자신의 양심을 마주대하며 살게 될 것이다. 잊혀졌다고 생각하는 그 찰나의 시간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