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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시간 ㅣ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평점 :
“아아, 시작하려니 몹시 두렵다.”
소설이 진정한 진실을 포착하지 못할까 봐 정체성과 실존적 위기에 씨름한다. 창조의 편재성과 언어의 한계에 스토리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생각과 단어 배합의 단순함을 쏟아 내는 이 책의 화자 호드리구는 계속되는 자기 의심으로 피로와 고립을 반복하다 이를 좌절시키는 방법을 그녀에게서 찾는다.
그녀의 인생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낡고 금이 간 채로 머리카락이 잔뜩 낀 세면대 위 어둡고 희뿌연 거울을 바라본다. 작은 싸구려 거울 속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의 그녀는 브라질 북동부 출신으로 불운한 운명의 무지한 여성인 타이피스트 마케베아다. 저임금 타이피스트로 일하며 빈민가에서 네 명의 여성과 함께 지낸다. 타자 실력은 형편없어 해고의 위협을 받고 있지만 가난과 비참함을 모른 채 병적인 삶을 헤쳐 나가며 결여되는 일에 둔감함을 맡긴다. 함께 사는 여성들이 없는 시간대에 빈방이 주는 고독과 집주인에게서 인스턴트커피와 끓는 물을 빌릴 수 있음에 감격하는 걸 보면 그녀의 본성은 행복에 있다.
마카베아의 무지는 두려움이나 외로움에서 구해주지 못하지만, 호드리구에게는 탈출구이다. 자신을 인식하지 않음으로써 행복을 추구하고, 라디오에서 들은 지식의 조각들은 흐트러짐을 유지하기에 무지를 더욱 부각시킨다. 마케베아의 순수하면서도 둔함을 인식하는데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정치인이 되려는 꿈을 가진 마초남 올림피쿠, 마케베아와 상대적으로 대조적인 글래머 글로리아, 그리고 폐결핵을 알려주는 뚱뚱한 여의사에게 예의를 갖춰 감사함을 전하는 그녀를 보면서 호드리구는 볼품없음과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철저한 익명성의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아무것도 투영하지 않아 안도감에서 나오는 고백일까.
호드리구는 그녀의 미래를 점쟁이 마담 카롤로타를 통해 선물한다. 미래를 잉태한 마케베아는 그 어떤 절망보다 더 격렬한 희망에 차 있는 삶을 선고받는다. 인생의 첫날, 빛나는 미래를 토하여 보고 싶어 한다. 드디어 그녀는 공명을 경험하며 존재와 운명에 대한 거대한 정적을 남기는데.
제한된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사소하면서도 심오한 인간의 조건과 숨 막히는 서정의 순간을 철학으로 순화하는 별의 시간이다.
‘생각은 행위다. 느낌은 사실이다. 이 둘을 합치면 내가 된다. 진실은 언제나 내적이며 설명할 수 없는 접촉이다. 나의 가장 진실한 삶은 알아차릴 수 없고, 지극히 내적이며, 어떤 말로도 정의할 수 없다.’
‘나는 분명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예감 속에 담긴 진실이 더 좋다. 나는 이 이야기에서 벗어나면 보다 무책임한 영역으로, 그저 약간의 예감들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리스펙토르, 두 번째 삶은 잘 써 내려가고 있는지. 화자는 맑고 순수한 아이는 아닐까. 그렇다면 진정한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는 건가. 당신이 반짝이는 그곳에서 아주 귀여운 모험을 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이 미완성이라 기쁘다. 섬광으로 끝나지 않으니. 그리고 지금이 별을 볼 시간이라는 걸 잊어버리지 마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