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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밖의 시간
제이 그리피스 지음, 박은주 옮김 / 당대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세상에서 가장 길면서도 가장 짧은 것,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느린 것, 가장 작게 나눌 수 있으면서도 가장 길게 늘일 수 있는 것, 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한을 많이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소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 위대한 것에게는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시계 밖의 시간』은 이 질문의 정답, 시간에 대한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시간에 대한 추상적인 학술서는 아니다. 이 책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저자는 시계와 시간을 단호하게 구분한다. 가장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시간이라는 우리들의 믿음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는 스티븐 호킹의 표현을 빌어 “유일하고 절대적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시간이 강이라면, 시계는 한갓 시간인 척하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본다. ‘당신의 시계를 수장(水葬)하라’고 말하면서 저자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새로운 시간 개념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일찍이 자연은 가장 거대한 공공의 시계였다. 자연의 리듬은, 협동으로 일하고 자연의 풍경이나 계절에 맞추어 공동으로 경배하고 공동으로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시간공동체’를 세웠다. 이 공동의 시간의 표지(標識)를 하나하나 잃어버리자 근대성은 그 자리를 대신할 대체물들을 만들어냈다. 그 무엇보다도 시간과 계절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텔레비전이 자연을 대신하여 공공의 시계와 캘린더가 되었다. 텔레비전은 여름에는 납량특집, 겨울에는 성탄특집 프로를 내보냄으로써 계절의 변화에 존경을 표하며, 시청률이 높은 저녁 시간대의 신랄하고 자극적인 프로와 쓸데없는 얘기나 늘어놓는 주간프로로 밤과 낮을 구분한다. 게다가 토요일 저녁에는 알코올과 피자를 선전하고 일요일에는 숙취약을 선전하면서 광고에서까지 안식일을 지킨다. "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神)이 둘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절대적이고 직선적이고 연대기적이며 수량화 될 수 있는 시간’을 주관하는 크로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이보다 훨씬 다채롭고 파악하기 힘든 시간을 주관하는 ‘카이로스(Kairos)'이다. 예를 들어, 시계를 보고 잠자리에 들거나 밥을 먹는다면 그것은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따르는 것이고, 피곤해서 잠이 들거나 시간과 관계없이 배가 고파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은 카이로스적인 시간에 따른 것이다.
어린이들은 ‘시계’를 통해 시간 개념을 훈련받기 전에는 당연히 카이로스적으로 살게 된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카이로스적인 시간을 잊어버리고 크로노스적인 시간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본다. 현대인들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공공의 시계’를 잃어버린 이유를 저자는 근대성에서 찾고 있다.
"도시의 근대성은 시계들의 맹공격에 포위되어 있다. 알람시계는 사람들을 허겁지겁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금 몇 시지? 늦지 않았나? 따위다. 디지털 초로 시간을 쪼개는 디지털 시계는 무자비하게 엄격한 데드라인으로 시간을 채찍질하는 듯하다. 갈수록 더 쪼개지고 쪼개어진 스케줄은 시간을 결딴내고 있다. (중략) 이때부터 시간은 더 잘게 나누어지고 쪼개어졌으며, 저 무한한 아름다움의 시간을 천박한 무한 소수로 나누려는 망상은 근대성의 한 모습이 되었다. (중략)
오늘날의 시간 계산법은 시간을 더욱더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이것이 그려내고 있는 것은 근대성, 그 근대성의 자화상이다. 근대성은 시간에게 가혹하고 지나치게 직선적이며 비인간적이고 강압적인 특성을 부여하면서 사람들을 그 제물로 삼게 한다. 당신은 질주하는 시간의 새된 비명을 듣지만-마치 그것이 시간의 잘못인 양-일정한 틀 속에 시간을 짓이겨 넣고 시간의 측정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근대 사회이다. "
현대인들이 느끼는 이런 시간은 속도와 경쟁에 의한, 속도와 경쟁을 부추기는 시계에 지배당하는 시간일 뿐이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이런 시간 개념만이 유일무이한 시간이라고 믿고 산다. 저자는 이와 대비해서 1751년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의 실험을 들려준다. 린네는 꽃의 시간으로 시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린네의 꽃시계는 하늘거리는 갖가지 꽃송이들로 낮의 시간들을 표시한다. 즉, 알록달록한 황금초가 피면 아침 6시이고 팬지가 피면 정오이며, 달맞이꽃이 피면 그 시간은 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시계’는 현대인들에게는 맞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이미 이런 자연의 시간, 카이로스적인 개념의 시간을 잊은 채 다른 세계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연한 시간 구분이라고 받아들이는 7일이라는 한 주 단위의 리듬은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간 구분이다. 즉, 7일이라는 한 단위의 리듬에 해당하는 자연의 대상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은 1년과 하루라는 단위로 완성된다. 따라서 일주일 단위와는 달리 일년과 하루라는 시간은 인간의 몸이 저절로 느끼는, 인간의 몸에도 가장 ‘자연스러운’ 시간이 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가 잊고 사는 시간의 새로운 단위를 주제별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인도, 타일랜드,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시간을 느끼고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접할 수 있다. 저자는 시계의 홍수 속에 살면서 시계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현재 우리의 모습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이라는 순간이 묘사되는 다양한 방식들을 살펴보면서, 경쟁을 전제로 하는 속도에 대해 서술한다.
현재의 이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과거에 사람들이 누렸던 ‘카니발’ 즉 축제의 시간과 리듬에 관한 이야기도 여러 사례들과 함께 들려준다. 그리고 시간이 젠더와 권력, 돈에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또, ‘진보’나 ‘미래’라는 개념이 직선적인 시간관을 전제로 이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보와 발전은 분명 다르다는 점을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신이 ‘야성의 시간’이라고 이름붙인 시간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야성의 시간이란, 자유롭고 울타리가 없으며 인간이 자연의 리듬에 따라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하며 궁극적으로 초단위, 분단위의 수량화된 시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시간을 가리킨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이런 야성의 시간을 잊고 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대의 여러 병리적인 현상들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속도와 경쟁을 전제로 하는 시계에 지배당하는 현대의 삶은 옷의 디자인에서도 드러난다고 한다. 저자는 날렵한 디자인의 옷과 느린 디자인의 옷을 구별한다. 날카로운 선을 지향하는 날렵한 디자인의 옷에는 바지주름을 날렵하게 잡는 대부분의 슈트와 유니폼 등이 해당되는데, 이런 옷은 다림질 선을 도드라지게 해서, 그 옷을 입은 사람을 마치 경쟁자를 추월하는 자동차나 기업, 산업부문처럼 날렵해 보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양복이나 제복 스타일의 옷은 실제로 커리어를 강조하는 비즈니스맨들의 기본 의상이다. 이와는 달리, 헐렁한 점퍼에 너풀거리는 바지의 느린 디자인은 ‘바쁘게 일하는 현대인’이라는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패션이다. 즉 촌각을 다투며 일을 해야 하는, 경쟁력을 중요시하는 직장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임에는 틀림없다.
저자는 다양한 시간의 층위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의 시간 개념이 특히 여성들에게 어떻게 억압적으로 작용하는지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즉 여성에게는 ‘젊음’이라는 하나의 시간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나이듦이 남성에게는 중후함, 넉넉함, 여유있음 등의 의미를 가진다면, 여성에게는 더 이상 매력없음, 여성성의 상실, 추함 등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따라서 모든 여성들이 젊음이라는 시간대에 멈춰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이야기된다.
"화장품 산업과 성형수술은 모두 여성 신체에서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들에 의해서 여성들은 부정당하고, 또 여성은 자신-노인이라는 위치-을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지혜와 품위와 위엄이 부정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새로운’ 세대는 젊음의 소녀 같은 섬세함도 노년의 중후함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돈과 고통의 대가로 얻는 것은 젊음이 아니라 젊음의 가식이요 바로 그들에게만 설득력 있는, 덕지덕지 기운 양피지 같은 약속뿐이다. 어느 누구의 땅도 아닌 것처럼 이것은 어느 여성의 시간도 아니며, 그저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조크와 같은 것일 따름이다. "
저자의 이런 비판은 젊음 이외의 시간에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가 귀기울여 들어야할 부분이다. 다양한 주제들을 통해 저자가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시간 개념이란 고도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부분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시계가 아무리 완벽하게 규칙적인 박동을 따라 움직인다고 해도, 인간의 삶 속에서 시간은 그런 기계적인 규칙성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시간에도 쫓기는 심정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는 시간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봄직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