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지식총서 182
홍명희 지음 / 살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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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명은 이성에 기반을 둔 객관적 사고만이 가치가 있다는 사고 방식에 기반해 왔다. 이런 합리주의적 사고 방식은 오직 명확하게, 바꿔 말하면 과학적 지식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만이 진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물론 이런 사고 체계는 인류에게 눈부신 물질문명의 발전을 가져다주었지만, 인간이성 이외의 가치들은 철저하게 폄하해 온 것이 사실이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서구문명의 객관적 과학의 세계에서, 이미지와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주관적 상상력의 세계가 우위에 있음을 주장한 사람이다.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는 바슐라르를 20세기의 코페르니쿠스라고 칭하면서, 상상력과 이미지에 대한 바슐라르의 연구를 소개하는 책이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이미지나 상상력을 인간의 정신활동 중에서 가장 무익한 것으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피하고 제거해야 할 것으로 생각해왔다. 서구 철학사에 있어서 이미지에 대한 연구는 오랜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 감각적 이미지의 현상, 그것도 주로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것도 언제나 이성을 가리는 방해물로서의 이미지에 대한 연구였지, 이미지 자체에 대한 연구는 아니었다. 즉, 이미지는 인류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핵심적인 가치는 아니라 언제나 이성과의 대립 과정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주변적 가치로 인식되었다. "

합리주의는 이원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이원론이란 상반되는 두 개의 가치를 설정해놓고 둘 중 하나에 우월함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적이다. 즉, 이성과 감성은 마치 참과 거짓처럼 이성이 우위를 차지한다. 저자는 이를 ‘진리와 선으로서의 이성’과 ‘거짓과 오류의 원천으로서의 감성’이라고 설명한다.

바슐라르가 강조하는 이미지나 상상력이란 이성이나 객관적 사고를 방해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위상을 이성의 종속물이나 방해물이 아니라 인간 활동의 근원적인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현실의 세계와 꿈의 세계를 연결하는 것은 우리들의 감성이고, 이 감성의 세계는 우리가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는 것보다 인간의 삶에 훨씬 중요하게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미지(image)와 상상력(imagination)의 영어단어를 비교하면서, 이미지는 상상력의 활동으로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라고 설명한다. 상상력이란, 엉뚱하고 쓸모없는 공상을 하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 정신활동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 전반을 가르치는 포괄적인 용어라는 얘기다.

바슐라르는 과학철학을 전공하는 교수가 되기 전에는 중학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과학 선생님이었다. 그런 이력을 가진 바슐라르가 과학과 객관의 세계에서는 늘 평가절하의 대상이었던 이미지와 상상력의 힘을 복원하고 인간성 회복을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모순적인 듯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는 『불의 정신분석』을 집필하면서 인간의 삶에는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이 있고, 그것들은 자생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항상 인간의 내면에서 새로운 에너지로 작용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미지와 상상력은 엄격한 이성의 지배하에 있는 의식의 억압 아래서도 항상 미래를 향해 뻗어나간다. 그때부터 그는 이미지와 상상력은 인간의 정신활동에 있어서 하나의 오류가 아니라, 주관적 가치체계이고, 이 주관적 가치체계야말로 인간 정신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슐라르는 문학작품을 통해 이미지와 상상력에 대한 연구를 해나갔다. 동양의 음양오행설처럼 서구 사상의 바탕이 되는 4원소론을 기반으로 하여 바슐라르는 문학적 이미지와 상상력을 연결짓는다. 세상의 모든 물질들이 물, 불, 공기, 대지의 네 원소 사이의 결합이라는 것은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상상력’이면서 객관적 인식을 방해하는 한낱 ‘공상’일 뿐이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상상력과 이미지의 발현으로서의 4원소론이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의 꿈, 혹은 몽상의 틀을 보여준다고 믿었다.

바슐라르는 문학에 나타난 이미지들을 4원소론을 바탕으로 연구하면서, 문학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작가들도 이 네 가지 원소들 중 하나의 원소를 강하게 드러낸다고 보았다. 즉 모든 시인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원소가 있으며 그런 사실이 무의식적으로 작품 속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니체의 저작들에는 공기의 이미지가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고 본다.

바슐라르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미지와 상상력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저마다 제각각 나타나는 듯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상상력에는 일정한 방향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바슐라르는 이를 ‘문화 콤플렉스’라고 이름 붙였다. 문화 콤플렉스란 자신이 자라온 문화에 의해서 생기는 연상작용을 말한다. 상상하는 개별적인 주체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가 자신만의 고유한 것이라고 믿기 쉬우나 사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체화하고 있는 문화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며 교양이라는 이름의 교육에 길들여져 있는 서구의 교양인들은, 자신이 이미 배웠던 것과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의 모티프를 발견하게 되면 반사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연상되는 것이다. 이렇듯 손쉬운 연상에 의해 나오는 이미지들은 자신은 “세상의 광경들로부터 길어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어두운 영혼의 투사에 지나지 않는 자신이 좋아하는 이미지들일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는 객관적인 교양을 쌓아 간다고 믿으면서, 문화콤플렉스들을 키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콤플렉스의 본질은 상상력의 주체인 개인이 자신이 속해있는 문화에 의해 상상력의 방향 설정에 영향을 받는다는 데 있다. 이미 상상의 내용이 자신이 속해있는 주변 환경, 즉 자신의 문화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가장 특징적인 의식 활동 중의 하나인 상상 현상은 구체적인 결과물인 이미지의 발현을 통해 이루어진다. "


비록 문화 콤플렉스에 기반을 두고 형성된 이미지일지라도, 문화 콤플렉스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이 쉽게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한 형성물이므로 상상하는 주체의 역할에 따라 그 이미지는 얼마든지 새로운 감동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문화 콤플렉스를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는 것 역시 상상력을 발휘하는 주체의 포용력에 달려있다.

바슐라르는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낙관적인 확신을 보였던 사람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인간을 꿈꾸게 하는 것은 외적인 요소들이 아니라 모든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몽상하고 상상하는 힘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슐라르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본다.  

바슐라르가 말하는 ‘꿈 꿀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은, 단순히 ‘실현불가능한 헛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바슐라르는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따로 떨어져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비현실적인 상상력은 결국 현실을 바꿔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바슐라르 이전에 이미지와 상상력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이유를 비현실의 세계에 속해있는 가치를 현실의 잣대로 평가하려 했다는 데에서 찾고 있다. 현실과 비현실이라는 두 세계는 서로 별개가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며 심지어 비현실의 세계가 현실 세계의 미래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또 비현실 세계는 현실세계에 자신의 뿌리를 두고 있다. 현실 세계가 없다면 비현실 세계는 성립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까지 인간이 실현시킨 모든 것들은 처음에는 ‘한낱 몽상’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상력들이 현실에서 해결해야할 문제점들이 무엇인지 지적해주고, 결국에는 현실을 바꿔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비현실의 세계가 없다면, 현실 세계는 방향성이 없는 우연의 세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 이미지와 상상력, 몽상의 힘을 강조하는 바슐라르의 연구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라는 표현 역시 깊이 수긍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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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밖의 시간
제이 그리피스 지음, 박은주 옮김 / 당대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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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길면서도 가장 짧은 것,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느린 것, 가장 작게 나눌 수 있으면서도 가장 길게 늘일 수 있는 것, 가장 하찮은 것 같으면서도 가장 회한을 많이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소한 것은 모두 집어삼키고, 위대한 것에게는 생명과 영혼을 불어넣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시계 밖의 시간』은 이 질문의 정답, 시간에 대한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시간에 대한 추상적인 학술서는 아니다. 이 책은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경험하는 다양한 방식의 시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저자는 시계와 시간을 단호하게 구분한다. 가장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시간이라는 우리들의 믿음에도 이의를 제기한다. 저자는 스티븐 호킹의 표현을 빌어 “유일하고 절대적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저자는 시간이 강이라면, 시계는 한갓 시간인 척하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본다. ‘당신의 시계를 수장(水葬)하라’고 말하면서 저자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새로운 시간 개념을 일깨워주려고 한다.


"일찍이 자연은 가장 거대한 공공의 시계였다. 자연의 리듬은, 협동으로 일하고 자연의 풍경이나 계절에 맞추어 공동으로 경배하고 공동으로 씨앗을 뿌리고 수확하는 ‘시간공동체’를 세웠다. 이 공동의 시간의 표지(標識)를 하나하나 잃어버리자 근대성은 그 자리를 대신할 대체물들을 만들어냈다. 그 무엇보다도 시간과 계절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텔레비전이 자연을 대신하여 공공의 시계와 캘린더가 되었다. 텔레비전은 여름에는 납량특집, 겨울에는 성탄특집 프로를 내보냄으로써 계절의 변화에 존경을 표하며, 시청률이 높은 저녁 시간대의 신랄하고 자극적인 프로와 쓸데없는 얘기나 늘어놓는 주간프로로 밤과 낮을 구분한다. 게다가 토요일 저녁에는 알코올과 피자를 선전하고 일요일에는 숙취약을 선전하면서 광고에서까지 안식일을 지킨다. "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시간을 관장하는 신(神)이 둘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절대적이고 직선적이고 연대기적이며 수량화 될 수 있는 시간’을 주관하는 크로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이보다 훨씬 다채롭고 파악하기 힘든 시간을 주관하는 ‘카이로스(Kairos)'이다. 예를 들어, 시계를 보고 잠자리에 들거나 밥을 먹는다면 그것은 크로노스적인 시간을 따르는 것이고, 피곤해서 잠이 들거나 시간과 관계없이 배가 고파 음식을 먹는다면 그것은 카이로스적인 시간에 따른 것이다.

어린이들은 ‘시계’를 통해 시간 개념을 훈련받기 전에는 당연히 카이로스적으로 살게 된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카이로스적인 시간을 잊어버리고 크로노스적인 시간에만 매달리고 있다고 본다. 현대인들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공공의 시계’를 잃어버린 이유를 저자는 근대성에서 찾고 있다.


"도시의 근대성은 시계들의 맹공격에 포위되어 있다. 알람시계는 사람들을 허겁지겁 잠에서 깨어나게 한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지금 몇 시지? 늦지 않았나? 따위다. 디지털 초로 시간을 쪼개는 디지털 시계는 무자비하게 엄격한 데드라인으로 시간을 채찍질하는 듯하다. 갈수록 더 쪼개지고 쪼개어진 스케줄은 시간을 결딴내고 있다. (중략) 이때부터 시간은 더 잘게 나누어지고 쪼개어졌으며, 저 무한한 아름다움의 시간을 천박한 무한 소수로 나누려는 망상은 근대성의 한 모습이 되었다. (중략)
오늘날의 시간 계산법은 시간을 더욱더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자부하지만, 사실 이것이 그려내고 있는 것은 근대성, 그 근대성의 자화상이다. 근대성은 시간에게 가혹하고 지나치게 직선적이며 비인간적이고 강압적인 특성을 부여하면서 사람들을 그 제물로 삼게 한다. 당신은 질주하는 시간의 새된 비명을 듣지만-마치 그것이 시간의 잘못인 양-일정한 틀 속에 시간을 짓이겨 넣고 시간의 측정에서 압도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근대 사회이다. "


현대인들이 느끼는 이런 시간은 속도와 경쟁에 의한, 속도와 경쟁을 부추기는 시계에 지배당하는 시간일 뿐이다. 게다가 현대인들은 이런 시간 개념만이 유일무이한 시간이라고 믿고 산다. 저자는 이와 대비해서 1751년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의 실험을 들려준다. 린네는 꽃의 시간으로 시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린네의 꽃시계는 하늘거리는 갖가지 꽃송이들로 낮의 시간들을 표시한다. 즉, 알록달록한 황금초가 피면 아침 6시이고 팬지가 피면 정오이며, 달맞이꽃이 피면 그 시간은 밤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시계’는 현대인들에게는 맞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이미 이런 자연의 시간, 카이로스적인 개념의 시간을 잊은 채 다른 세계의 시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연한 시간 구분이라고 받아들이는 7일이라는 한 주 단위의 리듬은 자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시간 구분이다. 즉, 7일이라는 한 단위의 리듬에 해당하는 자연의 대상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은 1년과 하루라는 단위로 완성된다. 따라서 일주일 단위와는 달리 일년과 하루라는 시간은 인간의 몸이 저절로 느끼는, 인간의 몸에도 가장 ‘자연스러운’ 시간이 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가 잊고 사는 시간의 새로운 단위를 주제별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인도, 타일랜드,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 세상 곳곳의 사람들이 시간을 느끼고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다양한 사례들을 접할 수 있다. 저자는 시계의 홍수 속에 살면서 시계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현재 우리의 모습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계 곳곳에서 ‘지금’이라는 순간이 묘사되는 다양한 방식들을 살펴보면서, 경쟁을 전제로 하는 속도에 대해 서술한다.

현재의 이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과거에 사람들이 누렸던 ‘카니발’ 즉 축제의 시간과 리듬에 관한 이야기도 여러 사례들과 함께 들려준다. 그리고 시간이 젠더와 권력, 돈에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또, ‘진보’나 ‘미래’라는 개념이 직선적인 시간관을 전제로 이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진보와 발전은 분명 다르다는 점을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신이 ‘야성의 시간’이라고 이름붙인 시간 개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즉, 야성의 시간이란, 자유롭고 울타리가 없으며 인간이 자연의 리듬에 따라 인식할 수 있는 시간을 말하며 궁극적으로 초단위, 분단위의 수량화된 시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시간을 가리킨다.

저자는 현대인들이 이런 야성의 시간을 잊고 살기 때문에 생겨나는 현대의 여러 병리적인 현상들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속도와 경쟁을 전제로 하는 시계에 지배당하는 현대의 삶은 옷의 디자인에서도 드러난다고 한다. 저자는 날렵한 디자인의 옷과 느린 디자인의 옷을 구별한다. 날카로운 선을 지향하는 날렵한 디자인의 옷에는 바지주름을 날렵하게 잡는 대부분의 슈트와 유니폼 등이 해당되는데, 이런 옷은 다림질 선을 도드라지게 해서, 그 옷을 입은 사람을 마치 경쟁자를 추월하는 자동차나 기업, 산업부문처럼 날렵해 보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양복이나 제복 스타일의 옷은 실제로 커리어를 강조하는 비즈니스맨들의 기본 의상이다. 이와는 달리, 헐렁한 점퍼에 너풀거리는 바지의 느린 디자인은 ‘바쁘게 일하는 현대인’이라는 이미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패션이다. 즉 촌각을 다투며 일을 해야 하는, 경쟁력을 중요시하는 직장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임에는 틀림없다.

저자는 다양한 시간의 층위를 인정하지 않는 현대의 시간 개념이 특히 여성들에게 어떻게 억압적으로 작용하는지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즉 여성에게는 ‘젊음’이라는 하나의 시간만이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된다는 것이다. 나이듦이 남성에게는 중후함, 넉넉함, 여유있음 등의 의미를 가진다면, 여성에게는 더 이상 매력없음, 여성성의 상실, 추함 등의 이미지로 연결된다. 따라서 모든 여성들이 젊음이라는 시간대에 멈춰있어야만 하는 것처럼 이야기된다.


"화장품 산업과 성형수술은 모두 여성 신체에서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들에 의해서 여성들은 부정당하고, 또 여성은 자신-노인이라는 위치-을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지혜와 품위와 위엄이 부정되었다. 그리하여 이들 ‘새로운’ 세대는 젊음의 소녀 같은 섬세함도 노년의 중후함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이 돈과 고통의 대가로 얻는 것은 젊음이 아니라 젊음의 가식이요 바로 그들에게만 설득력 있는, 덕지덕지 기운 양피지 같은 약속뿐이다. 어느 누구의 땅도 아닌 것처럼 이것은 어느 여성의 시간도 아니며, 그저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웃음을 자아내는 조크와 같은 것일 따름이다. "


저자의 이런 비판은 젊음 이외의 시간에는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가 귀기울여 들어야할 부분이다. 다양한 주제들을 통해 저자가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시간 개념이란 고도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부분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시계가 아무리 완벽하게 규칙적인 박동을 따라 움직인다고 해도, 인간의 삶 속에서 시간은 그런 기계적인 규칙성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시간에도 쫓기는 심정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는 시간에 대해 한번쯤은 생각해봄직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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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 - 역사 이야기 지식전람회 8
김기봉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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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이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친 말이다. 사실과 허구가 합쳐졌다는 말인데, 주로 역사적인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영화나 드라마, 문학 등을 일컫는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팩션’이 모든 서사 장들들을 휩쓸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소설도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들을 불러내어 다시 형상화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다시 가공해서 극화(劇化)할 때는 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고증이 이루어졌는가는 문제가 제기되곤 했다. 어떤 드라마에서는 어느 시대의 왕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있으나 그 왕의 성격이나 행동들이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으며, 등장인물들이 입고 있는 옷 역시 당시의 시대상에는 맞지 않는다는 등의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우리가 접하는 팩션은 이제 그런 문제제기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아예 ‘퓨전 사극’이라는 용어가 생겼을 정도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상상력이 자유롭게 가미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팩션을 보는 사람이나 만드는 사람이나 그 내용이 실제 과거의 사실과 얼마나 일치하느냐 아니냐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는 바로 이런 부분에 주목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잘 형상화되었느냐와는 무관하게 펼쳐지는 팩션 장르는 문학적 상상력에 의한 허구의 산물일 뿐인지, 그래서 팩션을 통해 역사를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현재의 팩션은 ‘역사라는 콘텐츠를 소설의 목적에 따라 이용할 뿐’이기 때문에 팩션을 ‘유사’ 역사로 취급해서는 안 되며, ‘사람들의 삶에 역사가가 쓴 역사보다 더 많은 영향’을 미치므로 역사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봐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실과 해석 가운데 무엇에 더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구성하느냐에 따라 역사인가 사극인가가 결정된다. 근대 역사학은 둘 사이의 우위를 명확히 설정했다.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학만이 과학의 분야로 인정받을 수 있고, 허구가 가미된 사극은 기껏해야 예술의 장르에 속할 뿐이다. 근대란 과학이 독점했던 시대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한 과학적 진실인가이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삶의 의미이지 과학적 진실이 아니다. 역사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의 자기인식이다. 그래서 부르크하르트와 같은 역사가는 역사 연구의 변하지 않는 중심은 인내하며, 고뇌하며, 또 노력하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역사의 의미를 이렇게 파악하고 나면, 역사가 그간 왕들의 치적을 중심으로, 한 영웅의 업적을 바탕으로 서술되는 역사란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저자는 그동안 교과서 중심의 즉 ‘국사(國史)’로 대표되던 역사나 역사학, 역사 교육이 모두 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팩션’이라는 얘기다.

"사극이 사실로 알려진 이야기의 시작과 결말 사이에서 무한한 해석을 시도하는 목적은 단순히 재미만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본래 목적은 이미 일어난 역사로서 닫혀 있는 텍스트를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열린 텍스트로 만듦으로써, 사라진 역사 또는 실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역사들을 발굴해내기 위해서다. 그래서 승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를 되돌려 줄 수 있는 꿈의 역사를 그려내는 사극에 대중은 열광한다. 독일 계몽주의 극작가 레싱의 말대로 ‘의미있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역사라면, 역사학자들보다 사극제작자들이 더 훌륭한 역사가인 셈이다.
‘꿈의 공장’으로서 영화는 사회적 무의식을 표출한다. 현실에서 억압된 것이 꿈으로 표출되듯이, 영화는 우리의 사회적 무의식을 드러낸다. (……) 사극은 이성적 대화가 아니라 ‘꿈의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역사가 진보하는 과정 속에서 잊혀지거나 패배한 사람들을 꿈속에서라도 호명하고자 한다. (……) 따라서 나는 기록되지 않거나 일어나지 않아서 꿈이 되어버린 역사를 재현한 영화들을 분석함으로써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하고자 한다."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저자는 <왕의 남자>, <태극기 휘날리며>, <웰컴투 동막골>, <이재수의 난>, <황산벌> 등의 영화를 분석한다. 이 영화들을 통해서 저자는 기존의 역사연구와 역사학이 간과해온 주체로서의 다수 민중의 삶과 열망 등을 읽어낸다.

저자는 우선, 역사라는 것이 마치 우리 몸 속에 각인된 유전자인 것처럼 여기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역사를 ‘유전자처럼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집단적 삶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봉의 사회적 기억장치’라고 본다. 즉 역사는 과거의 잔상들을 임의적으로 조합하거나 정리해서 재구성해낸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역사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자연적 유전자가 아니라 교육에 의해 주입된 ‘문화적 유전자’라고 본다. 이렇게 문화적 유전자로 조합되고 재구성된 것이 역사라면, 무엇이 역사적 사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를 밝혀내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지게 된다. 결국, 위에서 저자가 강조한 대로 팩션이나 역사가 사실이냐 아니냐가 의미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현재 우리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얼마나 미치느냐가 중요해진다.

<왕의 남자>로 유명해진 이준익 감독의 2003년 영화 <황산벌>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코미디이다. 이 영화가 크게 흥행에 성공했을 때 이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만만치 않았다. 민족사의 장엄한 순간을 잔혹하고 무의미한 전쟁으로 그려내었으며, 전쟁의 아비규환 장면에서 흐르던 조금은 경쾌한 배경음악 역시 부적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황산벌>에서 다른 것을 읽어낸다. <황산벌>은 역사 교과서에 화석화 된 채로 남아있는 사건이 아니라 코믹한 상황 설정과 불협화음에 가까운 음악을 통해 당시의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즉, 영화는 당시의 민중들에게 삼국통일전쟁이란 무슨 의미이며,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는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 영화를 ‘역사의 힘은 화랑처럼 개죽음을 하더라도 군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가진 자들에게서가 아니라, 전쟁터에 끌려 나와서도 두고 온 농토와 가족을 생각하는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에서 연원한다는 숨겨진 역사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고자 했다’고 평가한다. 이런 영화는 늘 이긴 자의 역사였던 종래의 공식 역사를 뒤집는 역할을 한다. 저자는 이런 점에서 <황산벌>이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구현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런 점이야말로 기존의 역사연구나 역사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진정 ‘인간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덧붙인다.

또, 박광현 감독의 2005년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찾을 수 있는 역사교육적 의미를 저자는 세 가지로 정리한다. 우선, 분단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가벼운 코미디로 풀어내면서 인간애만이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치열한 문제의식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이 영화는 ‘탈역사적인 공간’을 설정하여 한국전쟁이라는 거대담론이 소외시켜버린 민중이나 타자들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웰컴투 동막골>은 한국전쟁이 동존상잔의 민족 모순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외세의 개입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북핵문제를 둘러싼 현재의 상황이나 한반도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우리 시대에 팩션의 의미와 역할을 짚어내면서, 앞으로 역사교육이 변화해 가야하는 방향까지도 제시한다. 저자가 설명하는 영화와 역사 이야기를 읽다보면, 팩션이라는 장르가 쉽게 지나가버릴 한때의 유행이 아니며, 최근의 서사 장르들이 소재의 빈곤이나 창작자들의 게으름 때문에 역사적이 설정들이 유행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 교육의 변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저자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우리가 영화로 역사를 생산하고 그런 영상역사를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영상 시대에 살고 있다는 시대적 조건 이외에 역사학과 역사교육 자체가 처한 상황과 관련 있다. 역사 교육은 일차적으로 역사생산자 교육이 아니라 역사 소비자 교육이어야 한다. (중략) 영화를 통한 역사 교육은 교과서라는 텍스트를 전범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역사교육의 한계와 공백을 극복하고 보완할 수 있다. 역사교과서 특히 국사교과서는 공식적인 역사 담론을 주입하는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학생은 물론 교사의 역사적 사고력뿐만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을 억압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종래의 역사 교육의 주로 교사가 교과서에 나와 있는 역사지식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일방적 관계로 이뤄졌다면, 오늘의 역사교육은 교사와 학생 모두가 역사의 인지과정에 함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인식론적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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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
김보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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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박종훈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가리켜 ‘크로스 오버’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이런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자신이 음악의 여러 장르들을 넘나들면서 음악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은 원래 하나였다고. 사람들이 원래 하나였던 음악을 쪼개고 나누어 다른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라는 얘기다.

비단 음악뿐 아니라, 우리는 예술은 장르로, 학문은 분과별로 구분지어 놓고 있다. 문제는 그런 구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구분이 편의에 의한 기능적인 구분이 아니라 마치 고정불변의 범주이며 서로 소통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인문학 전공자의 경우는 과학적 지식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과학 전공자의 경우에는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가이면서 철학자였고 과학자였으며, 피타고라스는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이기도 했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피타고라스가 예외적으로 천재적인 인물이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지금과는 달리 여러 학문분야를 넘나들며 공부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오히려 ‘가장 과학적인 상상력이 가장 문학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신기하게 느낀다. 소설가 김연수는 어느 글에서 좋은 소설을 쓰려면 과학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면서 ‘가장 과학적인 것이 가장 문학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소설을 쓰는 일이야말로 과학적으로 사고해야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나누는 오랜 전통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김보일의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이다.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는 인문학과 과학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진리가 결코 다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인문학과 과학의 ‘링커(linker)’ 역할을 해준다. 이 책은 저자가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인문학의 화두들을 과학에서의 사례들과 연결짓는 ‘영역 전이’의 방식을 통해 학생들에게 유연한 사고력을 길러주고자 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소설가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고 했다. 카프카는 괴테나 니체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쓴 책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잘 씌어진 한 권의 과학책 역시 인간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 즉 고루한 편견과 상식을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설명을 더 들어보면 이렇다. ‘인간이 자연계에서 최고로 소중한 존재요, 자연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인간 중심주의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라는 인식’은 박이문의 『더불어 사는 인간과 자연』이나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실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은 팔리 모왓의 『울지 않는 늑대』나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등의 소위 ‘과학책’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의 꼭대기에 있는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나 그런 ‘겸손만이 지구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은 이제 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얘기가 되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어서 더 이상 구체적인 성찰을 하지 않게 된 명제들에 생생한 호흡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자연과학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사례들이다. 과학책을 통한 인문학적 성찰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과학자들은 남들 같으면 그냥 지나쳐버릴 미생물, 기생충, 벌레와 잡초와 같은 아주 사소한 미물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거기에서 놀라운 비밀들을 읽어낸다. 과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학자들과 같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일이고, 과학자들이 찾아낸 자연계의 비밀을 공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학책을 읽으며 우리는 내가 얼마나 편협한 상식과 편견의 울타리 안에 안일하게 거주하고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과학책을 통해 인문학적 성찰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자가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를 통해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는 과학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과연 정당하게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적 앎’이다. 과학의 발달은 인류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해주었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이들에게 고른 혜택을 준 것은 아니다. 저자는 과학이 과연 정의로운 방식으로 평등하게 분배되었느냐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과학은 인류에게 무조건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은 환상이며 무지라는 얘기다. 과학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성찰적 지식도 갖출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성찰적 앎’이다. 저자는 인간은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이 성찰적 앎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머리말의 제목도 ‘사유하는 과학을 꿈꾸며’이다.

이 책은 전체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우리가 보통 쓸모가 없으며, 인간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는 생물들이 실은 인간의 삶을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과의 공존을 통해서만 인간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부지런한 대지의 청소부 쇠똥구리」, 「기생충이 있어 건강한 지구」, 「잡초가 쓸모없는 풀이라고?」 등의 글을 보면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고루한 편견과 상식’이 깨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장 ‘편견에 물들지 않는 섬세의 정신’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아무 성찰 없이 ‘상식’이라고 믿어왔던 지식에 대해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무런 성찰 없이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사물이나 대상의 미세한 차이를 보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인식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박지원의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우리들의 인식론적 오류를 지적한다.

저 까마귀처럼 깃털이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빛으로 아롱지고, 다시 석록빛으로 반짝인다. 햇살이 비치면 자줏빛이 되었다가, 어느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색깔[色] 가운데 깃든 빛깔[光]인 줄을 알겠는가? 검은 것[黑]을 일러 어둡다[闇]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물은 검기[玄]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칠[漆]은 검은[黑]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색깔 있는 것치고 빛깔 없는 것이 없고, 형상[形] 있는 것에 태깔[態] 없는 것은 없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편견이나 통념을 벗어나서 자신만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섬세의 정신’, 섬세한 사유이다. 인문학적인 상상력이나 성찰로는 미처 보지 못한 부분들을 과학적 상상력과 성찰이 만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3장 ‘과학과 유토피아’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이나 환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 장의 「저엔트로피 사회를 향하여 삶의 틀을 바꾸자」라는 글은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라는 책의 내용을 통해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세계관 전환의 필요성을 설명해주고 있다. 성장이 삶의 목표였던 고엔트로피 사회를 지나 검약이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하는 저엔트로피 사회로의 전환이 이제 인류의 미덕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말하는 ‘중간기술’ 모델이 리프킨의 논의와 통하는 점을 저자는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과학책은 구체적인 낱낱의 사실의 인식에만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성찰할 수 있게 해준다.’ 과학이나 과학적 지식에 대한 무지, 혹은 무관심이 지적인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를 읽다보면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적 태도의 부재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 또는 자신의 삶이나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대한 무관심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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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12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땡스투하고 담아가야겠어요^^

니리 2007-10-31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궁~ 감사합니다.
 
뻔fun한 드라마 찡한 러브 - 드라마 속 멜로 즐기기
신주진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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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교보 매대에 하나 남은 걸 가져왔다.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지만 드라마평만으로도 재밌었다.

<발리에서 생긴일>을 사랑, 계급, 권력의 문제로 설명하는 부분도 흥미로웠고,

왜 사람들이 임성한 드라마에 열광하는지, 출생의 비밀은 왜 그리도 자꾸 등장하는지에 대한 분석도 그럴 듯하게 느껴졌다.

 

개별 드라마에 대한 단평도 좋지만, 각 챕터의 마지막에 그리고 책의 마지막 챕터에 모아놓은 긴 글이 훨씬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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