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 정신분석을 통해 본 이슬람, 전쟁, 테러 그리고 여성
오은경 지음 / 시대의창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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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민족을 넘어 가장 약한 자의 눈으로 폭력을 넘어 생명으로

오은경이슬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시대의창, 2015.

 

이슬람이라는 낯설고 이질적인 문명은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강타당한 9.11이라는 사건’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관심사 안으로 들어왔다. ‘9.11 테러라고 명명된 사건 이전에 우리 사회는 솔직히 이슬람 문명에 관심이 없었다. ‘이슬람하면 일단테러라는 단어부터 떠올리는현재 우리의 오해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른다이슬람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

이슬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저자가 서문에서 서로에 대한 인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우리의 정체성은 타자의 인정recognition이나 불인정non-recognition 혹은 타자의 오인mis-recognition에 의해 만들어지는데불인정이나 오인은 타자를 왜곡하고 축소시켜 억압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그러므로 저자는 타자에 대한 정당한 인정은 예의가 아니라 바른 관계를 맺기 위한 필수요소라고 강조한다마찬가지로 우리가 모든 문화를 동등하게 인정하는 것은 다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이슬람 문화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전제가 필수적이다지금까지 우리는 서구와 비서구를 나누고기독교와 이슬람 문명혹은 서구 문명 대 이슬람 문명억압하는 남성과 피해자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이슬람을 이해해왔다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런 오해를 바로잡으려 한다저자는 성찰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지금의 전쟁과 폭력을 만들어냈다고 보고이슬람에 대한 오해를 바른 이해로 바꿔내고자 한다.

이슬람대상이 아니라 관계망 속으로

이슬람은 중세까지 세계사를 주도한 화려한 문명을 꽃피웠다지금도 이슬람 문화권의 유적지들은 정치적종교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수많은 여행객들을 매혹시키고 있다그러나 근대화와 과학기술 발전에서 뒤처지면서 이슬람은 서구의 경제대국들과 힘의 불균형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서구 문명의 혜택을 받고자 고향땅을 떠났던 이슬람 이주민들은 서구 사회의 타자가 되어 냉대와 소외를 겪었다소외와 차별 속에서 이슬람 이주민들이 기댈 수 있었던 것은이슬람의 종교와 문화가 부흥하기를 희망하면서이슬람의 전통을 더욱 지키고자 하는 것이었다저자는 이슬람 문명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재의 갈등을이처럼 오래된 힘의 불균형과 뒤틀림에서 찾는다전쟁과 테러라는 문제는 이슬람이라는 문명 자체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주변 국가들과의 권력 관계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이 책 전체를 통해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서구 대 이슬람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가 허구라는 점이다우리가 편의상 이슬람이라고 통칭하고 있을 뿐 이슬람은 하나가 아니다미국이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의 독재정권을 지원해왔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대로다더구나 이슬람이 하나로 뭉쳐 다시금 세계사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서구 사회를 표적으로 해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표적은 이슬람 사회를 침식하는 자본주의그리고 부패한 아랍의 전통주의 체제이지 결코 서구 사회 자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즉 진보적인 서구 문명과 보수적 전통을 주장하는 이슬람 문명’ 사이에서 벌어지는 문명 간의 충돌이 문제가 아니라 이슬람 문명 내의 충돌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슬람이 하나의 대상이 아니고이슬람 문명과 서구문명이라는 단순한 대립구도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해서도 안 되는 것이라면우리에게 필요한 올바른 관점은 무엇일까저자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빌어 연대를 말한다우리는 이슬람 문화권의 극단적인 테러와 전쟁에도 반대해야 하지만서구의 패권주의적인 태도에도 반대해야 한다테러에 맞서야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테러리즘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확장해서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패권적인 행위 역시 테러에 포함시켜야 한다우리는 모든 형태의 테러에 반대하며모든 희생자들과 연대해야 한다.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라는 대립 구도가 아니라저자는 우리와 그들이라는 새로운 구도로 사유할 것을 주장한다. ‘우리는 모든 테러에 반대하고 모든 희생자들과 연대하는 이들이다반면에 그들은 테러와 희생자를 만들어내는 서구의 패권주의적 권력자들과 극단적인 이슬람 세력을 가리킨다. ‘이슬람을 하나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새로운 관계망 안에서 이해하는 것여기에서 이 책의 논의는 시작된다.

 

정신분석을 통해 보는 이슬람과 여성

이슬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부제는 정신분석을 통해 본 이슬람전쟁테러 그리고 여성이다저자는 이슬람 여성들의 베일 착용과 여성 할례명예 살인 등 예민한 사안들의 의미를 정신분석적인 방식으로 읽어낸다이 책에서 정신분석에 기댄 분석 방식은 매우 유용하다흔히 억압의 상징으로 읽히는 베일 착용이나 여성 할례를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의 의미명예살인 속에 감춰진 남성들의 불안 등 복잡한 의미망을 드러내는 데에 정신분석은 매우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베일 착용을 예로 들어 보자베일은 원래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풍습이었다고 한다당시 사람들은 남녀노소계급에 상관없이 자발적으로실용적인 이유로 베일을 썼다문제는 국가가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하고 가부장제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베일이 여성의 의무가 되면서 점차 제도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또한 베일 착용이 이슬람 전통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면서 여성들의 베일 착용은 서구에 저항하는 민족적인 차원의 의미까지 띠게 되었다.

여성이 민족의 상징으로 작동하는 방식은사실 이슬람 문화권에서뿐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도 유사하다민족의 상징으로서의 여성은 가부장적 혈통을 유지시켜주는탈성화된 어머니와 등치된다이들 여성은 민족의 순수성과 순결성의 상징이 되어 반드시 지키고 보호해야할 존재가 된다마찬가지로 이슬람에서 베일을 쓴 여성은 민족의 순수성을 상징하는 알레고리이다베일이란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하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을 구분해주는 표식이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베일을 쓴 여성이란 이슬람 남성들이 만들어낸 민족의 완전성에 대한 환상이고이슬람 남성들이 보호하고 존중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실체적 존재라기보다 자신들의 환상이다.

민족의 순수성과 완전성이란 세계 어느 민족에게나 환상일 뿐이다정신분석은 완전성전체성순수성 등은 주체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와 고통을 적당히 회피하고 살 수 있도록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환상을 가로지를 수 있어야 주체는 문제에 직면할 수 있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주체와 환상의 문제는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해당되는개인이나 집단적 주체의 실존의 기본 요건인 셈이다.

베일이 민족으로 대표되는 남성주체의 환상일 뿐이라면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베일을 착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실제로1980년대 이슬람의 페미니스트들은 서구 문명을 모방하고 추종하는 데에 대한 저항 담론으로 베일착용 운동을 벌였다서구의 인권 개념서구 여성주의 운동의 방향이 이슬람 사회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면서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은 서구 담론에 저항하고자 전통적인 이슬람 여성의 정체성을 베일 착용에서 찾았다저자는 이를 두고,이슬람 페미니즘이 제3세계 여성을 이해하는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의 틀로서 유용한 장점이 있음에도이슬람 전통이라는 한계를 벗어나는 데는 실패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볼 때이들의 실패는 단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베일을 쓴 여성들이 이슬람 전통의 희생자인 것만도 아니다베일을 착용함으로써여성들은 이슬람 사회의 질서 안에서 가능한 협상을 해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앞서 지적한 대로베일이 남성들이 믿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전통의 순수성과 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베일을 착용하는 여성들은 환상의 구도 속에서 또 다른 권력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베일을 씀으로써 여성들은 남성들이 숭상하는 민족의 순수성과 완전성이라는 가치 자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차별과 엄격한 사회적 제약이라는 현실 안에서 여성들은 베일을 씀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나름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기존의 질서와 협상함으로써 미약하나마 권력을 확보하는 셈이다그러므로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베일을 쓰는 것은이슬람이라는 성차별적인 질서 안에서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하려는 몸짓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분석을 통해 베일 착용이 정치적인 올바름을 획득한다거나 베일 착용에 내포된 여성 억압적인 의미가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베일 착용의 복합적인 의미를 밝힘으로써베일을 착용하는 여성들을 전적으로 무기력하고 수동적이며 희생적인 존재로 위치시키지 않을 수 있다대신 베일을 쓴 여성들의 주체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읽어낼 수 있는 것이 가능해진다그래야 베일을 쓴 여성들을 주체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논의의 출발이 이렇게 합의되지 않으면 지금까지 반복되어온상투적이고 일반적인 논의이슬람의 베일 문화와 베일을 착용하는 여성들을 대상화시키는 기존의 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베일을 쓴 여성들을 수동적인 희생자로 타자화/대상화시키는 것은 그들을 나와는 관계없는 존재로 배제시키기 쉽다.우리 역시 보편적으로 민족과 국가남성과 역사가부장제전쟁과 테러섹슈얼리티 등의 문제와 마주하고 있다이런 보편적인 상황들이 특수한 형태로 드러난 것이 이슬람 여성의 베일 착용 문제일 뿐이다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런 복합적인 의미망을 읽어내야만저자가 나비효과라는 말로 서문을 열면서 연대와 관계망을 언급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저자는 자발성의 의미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간다베일 착용뿐 아니라 여성 할례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분명히 자발적으로’ 이를 수용하는 측면이 있다그러나 어디까지를 자발적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저자는 말한다베일을 착용하고 할례를 받아야만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라면 여성들의 베일 착용이나 할례는 어디까지나 암묵적인 강요일 뿐이라고.

모든 주체는 사회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순응해야 비로소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그렇게 되기 위해서 주체는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포기해야만 한다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적절히 회피하고 포기해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거나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사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정신적 이상이나 분열의 상태로 남든가정신분석학자 지젝은 이를 가리켜 강요된 선택’, ‘나쁘거나 더 나쁘거나의 선택이라고 표현했다.

이슬람 여성들의 자발적인 베일 착용과 할례도 어디까지나 나쁘거나 더 나쁘거나의 강요된 선택에 불과할 수 있다그러나 이슬람 여성들의 자발적인 베일 착용과 할례는 스스로 주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사회질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협상하려는 주체적인 결단이라고 봐야 옳다. ‘나쁘거나 더 나쁘거나’ 선택지가 둘뿐이라고 해도 말이다여기서 중요한 것은이런 강요된 선택이 이슬람 여성들에게만 주어진 한계가 아니라 남성중심적인 문화와 질서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공통된 조건이라는 점이다그러므로 이슬람 여성들의 베일 착용과 할례의 문제를 근거로 해서서구 사회가 더 진보적이고 문명화되었으며 이슬람 문화권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단순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것은 부적절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와 민족을 넘어 가장 약한 자의 시선으로

이슬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터키와 유라시아 투르크 전문가로 불리는 저자가터키의 문학작품들과 정신분석을 통해 이슬람과 여성의 문제를 진단하는 책이다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저자가 궁극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을 읽어내야 한다저자는 정신분석과 함께 여성주의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논의하고 있다.

이슬람의 극단주의 무장 세력이 테러를 자행하고 서방의 국가들은 또 다른 테러로 이에 반응하면서 전쟁의 위협과 공포는 이 땅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이슬람 국가들이 서구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내세우고 있는 민족과 전통에 대한 집착은 여성들을 억압하고전쟁과 테러라는 악순환을 만들어 낸다이슬람 공동체의 이상향이라는 환상을 악용하고 있는 IS(이슬람 국가)의 폭력, ‘이슬람과 서구라는 허구적 대립 구도 등은 국가민족남성적 논리로는 해결할 수 없다왜냐하면 이것들은 국가민족남성적 논리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여성주의적인 관점이다국가민족종교권력의 관점이 아니라 이런 상황이 여성들에게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통찰과 사유의 방향을 전환해야만 해법을 찾을 수 있다생명과 평화는 국가와 민족의 눈이 아니라 사회의 가장 약한 자의 눈으로 볼 때 가능성이 열린다이슬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여성의 눈으로폭력을 넘어 생명으로 나아가는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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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은 이야기다
마이클 고힌 &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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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관은 이야기다의 원제는 ‘Living at the Crossroads’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문화 이야기의 교차로에 있다는 의미이다. 저자들은 이 두 가지 이야기가 충돌하는 상황을 선교적 대면’(275)이라고 표현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각자가 속해있는 문화의 비판적 참여자가 되어야”(279)한다고 역설한다.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서 문화적 형태를 띠어야”(273)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세계관의 회심’(25)을 요청한다. 세상의 모든 경험이 세계관을 통해 걸러진다는 사실에 각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누구나 자신이 세상을 독립적이고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보고 있다고 단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런 오해를 우리 시대의 문화가 종교적으로 중립적이라는 신화’(282)라고 단언한다. 무슨 일에나, 중립이나 객관적인 태도가 올바르다는 착각은 과학기술로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근대적 믿음이나, 계몽주의적 세계관의 영향일 뿐이다. 성경적인 관점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단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세계관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적인 설계와 회복의 계획을 방해하려는 어둠의 세력에 무의식적으로기울게 된다

 

 

성경은 모든 것의 기준이 되며 그 범위가 포괄적이다.”(74) 저자들은 역사적으로 어떤 세계관들이 서구 사회의 중심이 되었는지를 성경의 관점으로 다시 기술하면서 이를 증명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시대를 복음의 빛이 없는 상태에서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이교 시대로 지칭하고, 중세는 포괄적인 세계관이 타협하여 섞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혼합시대라 표현한다. 현대는 중세 이후의 인본주의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의 대척관계가 심화된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대립 시대라 부른다. 이처럼 저자들은, 서구의 철학적 흐름을 성경의 관점에서 다시 정의하고, 소위 학문이라는 영역이 꽤나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오해임을 밝혀준다. 말 그대로 세계관의 회심을 가능하게 한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삶의 영역에서 성경적 세계관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구체적인 적용의 원리를 설명한다. 사업, 정치, 스포츠와 경쟁, 창의력과 예술, 교육, 학문 등의 영역에서 복음은 언제나 문화적 형태를 띠어야 한다”(180)는 사실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안내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 학자들은 서구의 학문 전통을 잘 알아야 하지만 자신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것과 대립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 학자가 정립하는 이론에 성경적 세계관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우상숭배의 문화이야기가 그 공백을 메울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은 어떤 글을 읽고 어떤 글을 쓰든지, 그 중심에는 항상 성경적 소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공모와 전복을 가르는 경계는 너무 얇으며, 공모할 수 없으면 전복할 수도 없다는 여성학자 엘리자베스 그로츠의 말이 생각난다.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여성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이제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가리키는 말로도 읽힌다

 

 

이 책의 저자들이 자꾸 우리의 삶은 교차로에 있다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내가 속한 세상의 모든 영역에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설계와 구조가 반드시 있고, 그것을 왜곡시키고 모호하게 만드는 세력도 있다. 그 둘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예민하게 구분할 수 있는 감수성이 교차로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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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지방의 진실 - 어느 심장병의사의 12년의 실험과 기록
콜드웰 에셀스틴 지음, 강신원 옮김 / 사이몬북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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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저자인 콜드웰 에셀스틴 역시 자신의 을 고치기 위해 연구하고 시도한 결과로 '무가공, 식물성 식이요법'을 주장한다. 저자의 아버지도 장인어른도 저자 자신도 모두 의사이면서 심장병을 앓았고, 두 어르신은 이른 나이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장인어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에셀스틴 박사는 돈 많이 버는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음식으로 병을 치료하는, 의료계에서 싫어하는 의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자가 우유를 끊어야 하는 이유>의 제인 플랜트처럼 에셀스틴도 서구식 식습관이 없는 지역에서는 유방암 발병이 거의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방암은 일본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후 일본인이 서구의 지방 가득한 음식을 섭취하면서 발병률은 급격히 높아졌지만 말이다. (이는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


유방암이 아니어도 심장질환의 발병률도 서구식 생활습관과 음식습관을 따라 급증하기 시작하는데 "혈관에 문제가 생겨 심장병이 발생했다는 것은 단지 심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만성질환(고혈압, 당뇨, 비만)의 결정체가 심장질환"(35쪽)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을 구석구석 누비고 있는 혈관의 길이가 12만km다. 이것은 지구를 세 바퀴나 돌 수 있는 길이다. 그러니까 우리 몸에 혈관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163쪽) 그렇다면 혈관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은 결국 만병을 초래할 수 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 중 흥미로웠던 것은 콜레스테롤에 대한 것이었다. "콜레스테롤은 흰색의 기름진 물질로 식물에는 없고 오직 동물에서만 발견된다. 이것은 인간의 세포를 보호하는 막을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 것이며, 성호르몬의 기본적인 원료이기도 하다. 우리 인간의 몸은 콜레스테롤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콜레스테롤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따라서 인간은 그것을 일부러 따로 먹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61쪽)

놀라운 얘기다. 인체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우리 몸의 신비!


이 책이 중요한 것은, 이 책의 기록은 좀더 건강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심장수술을 몇 번이나 받고도 재발을 겪고 병원에서도 환자들 자신도 속수무책이었던 이들이 완치된 이야기라는 점이다. 

에셀스틴의 처방은 아래와 같았다. 스스로도 이를 실천해서 심장질환을 완치했음은 물론이다.


- 생선, 고기는 어떤 것도 먹지 말아야 한다.

- 우유 및 우유로 만든 어떤 제품도 먹지 말아야 한다.

- 어떤 종류의 기름도 먹지 말아야 한다.

(올리브오일 및 건강에 좋다는 어떤 기름도 안된다.)

- 아보카도 및 견과류도 먹지 말아야 한다.


- 아보카도를 제외한 모든 야채, 푸른색 채소 및 뿌리식물, 노랑, 빨강, 노란색 등 모든 색깔의 잎채소

- 완두콩, 렌틸콩을 비롯한 각종 콩류

- 통곡물, 그리고 어떤 첨가물도 없이 통곡무로만 만들어진 각종 빵이나 파스타

- 모든 종류의 과일


(안타깝지만;;) 에셀스틴도 <여자가 우유를 끊어야 하는 이유>의 제인 플랜트와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기름이나 지방(우유, 버터, 아이스크림, 치즈, 올리브유)도 먹지"(41쪽) 말라고 한다. 딱 한 번만, 이 정도는 괜찮지라는 생각이 병을 키운다는 것이다. 두 책의 저자는 공통적으로 "단순히 지방과 콜레스테롤의 섭취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식물에 자연스럽게 함유되어 있는 지방(많아야 10% 정도)을 제외하고는 어떤 지방도 섭취하지 않는 것"(71쪽)을 원칙으로 한다. 재미있는 것은 완전한 비건 채식만으로도 우리 몸에 필요한 지방(10%)이 채워진다는 점이다. 

유제품뿐 아니라 생선을 단호하게 금지하는 내용도 재미있었다. 

"생선을 음식으로 먹는 거은 아주 위험하다. PCB(폴리염화비페닐)나 수은과 같은 독성물질이 있어서, 특히 임산부는 삼가야 할 음식이다. 특히 양식업이 발달함에 따라 바다가 심하게 오염되어 있어서 새로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양식업은 반드시 항생제를 사용해야 물고기를 대량으로 사육해서 이익을 낼수밖에 없는 사업이다. 양심이 있는 어떤 학자도 양식업으로 기른 생선을 권하지 않을 것이다."(111쪽)

 

저자는 무지방, 지방제로 등의 표기법을 조심하라고 하는데, 이런 표기는 지방이 정말 0퍼센트라는 게 아니라 일정 기준(?) 이하이면 무지방이나 지방제로라고 표기할 수 있는 규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방, 지방제로의 탈을 쓴 늑대들이 마트에 속속 등장하고 있다. 샐러드 드레싱으로 시작해서, 크래커, 프레츨, 쿠키 등 셀 수도 없이 많아졌다. 상표를 잘 살펴봐야 한다. 성분표시를 꼼꼼히 읽어보고 의심나는 것이 있다면 그 제품을 만든 회사에 전화를 걸어봐도 좋다. 결코 부끄럽거나 쩨쩨한 일이 아니다. 당신은 현찰을 지불함으로써 그 회사를 살찌우는 사람이므로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129쪽)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이런 제품들은 어떻게 포장하고 어떻게 그럴듯하게 표기하든 어쨌든 해롭다면서 이런 표현을 쓴다. "돼지는 립스틱을 발랐건 귀걸이를 했건 돼지다."(128쪽)


환자였으면서 의사, 과학자였던 이 책의 저자나 <여자가 우우를 끊어야 하는 이유>의 제인 플랜트는 이런 음식들을 아주 단호하게 단번에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약이나 알콜 중독자들이 서서히 조금씩 약과 술을 줄이면서 끊는 법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맞다! 초콜릿이나 케이크 등에 마음을 빼앗길 때마다 이 책에 나왔던 혈관 사진들이 떠오를 것 같다. '이 정도는~'이라고 생각하는 아주 적은 양의 지방이 혈관 속 상태를 즉시! 직접적으로!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주었던 사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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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끼 채식 도시락 - 먹을수록 가벼워지는 진짜 비건 식단
김선희 지음 / 미디어윌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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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하루 한끼 채식 도시락>, 미디어윌, 2013.

 

 

 

제목 그대로 '도시락'에 관한 요리책.

저자가 베지푸드의 연구원이라서 베지푸드의 비건 식재료들(콩단백을 비롯, 채미료, 채식중화소스 등)을 활용한 레시피가 많다.

덕분에 간단하게 한끼 도시락을 만들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비건이든 아니든 가공식품 자체를 꺼리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반갑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최대한 오신채 사용을 자제(?)하는 레시피라는 느낌도 든다.

간장으로 비빔양념 등을 만들 때 항상 팽이버섯을 넣는 게 특이하기도 하고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되도록 오신채를 덜 사용하려는 의도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다.

고추장볶음오니기리에 대파가 쓰이고, 몇 가지 채소볶음 요리에 양파가 쓰인 것을 제외하면, 거의 무오신채 레시피라고 봐도 무방하다.

 

 

도시락에 관한 책이다보니, 전날 미리 만들어 두면 좋은 것을 알려주고,

음식을 준비할 때 무엇을 먼저하고 그 사이에 어떤 것을 준비하면 좋은지 등,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팁을 주는 것도 유용하다.

나처럼,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기보다는 목차를 보고 원하는 요리법을 찾아서 활용하는 사람이 많은테니,

중복되는 레시피이지만 간략하게 다시 알려주거나,

앞뒤로 넘겨가며 찾아볼 수 있도록 관련 요리법의 페이지수를 친절하게 적어주고 있는 것도 장점이다.

 

채식을 하면서 비로소 찾게된 요리책들 중 요긴하게 뒤적여볼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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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미술의 고백 - 우리가 미술관에서 마주칠 현대 미술에 대한 다섯 답안
반이정 지음 / 월간미술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새빨간 미술의 고백우리가 미술관에서 마주칠 현대 미술에 대한 다섯 답안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은 조금 어렵고 조금 낯설다고 느끼는 현대미술을 재미있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전문적인 이론서도 아니고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대중적인 책이다.

이 책에 소개된 작품들은 현재 활동 중인 작가들이 2000년을 전후로 내놓은 작품들이다. 새빨간 미술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말 그대로 동시대 미술(contempory art)’을 만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작품의 미학적 성과를 호들갑스레 상찬하여 독자를 기죽이지 말자”(4)는 다짐도 하고 있다. 저자의 의도대로 작품에 대한 순발력 있고 코믹한 묘사”(4)들 덕분에 난해한 현대미술과의 만남이 부담 없고 유쾌하다. “일반인의 경직된 인식에 참신한 자극을 주고픈 게 평소 소신”(5)이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 소개된 작품들을 통해 예술적 감수성과 상상력에 대한 새로운 자극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예술의 가면, 예술의 시사성

 

예술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믿음은 가히 도그마에 가깝습니다. 이는 곧 유미주의를 최선으로 간주하는 예술 수용 태도지요. 쉽게 말하면 예술은 그 자체로 완결적인 것이지 세상사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군말하지 말자는, 일종의 예술지상주의입니다. 그러나 빼어난 조형미를 전면에 내세운 미술사의 걸작들조차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항시 당대 역사의 산물로 이해하는 것이 학계의 추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중략)

끔찍한 세계사를 은유를 통해 유머러스하게 치고 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의 가면(假面)이 하는 역할입니다. 또한 예술의 시사성은 예술이 현실과 더불어 사는 건전한 처세술입니다. (64)

 

예술이라고 하면, 우리는 일단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것이 주는 즐거움을 먼저 떠올린다. 심지어 미술(美術)이라는 말에도 아름답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예술의 존재 이유를 감각적 즐거움의 제공에서 찾는 입장을 저자는 유미주의 또는 탐미주의라고 설명한다. 이런 입장은 예술의 목적과 의미를 예술 그 자체라고 보는, 소위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과 일맥상통하는 미학적 입장이라고 덧붙인다.

저자는 미술평론을 하다보면, 사람들이 도대체 이 작품의 의미가 뭐냐는 질문을 유난히 많이 하는 작품이 있다고 한다. 진짜로 작품의 의도를 파악하기가 힘들어 질문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작품의 시각적 충격에 심기가 몹시 불편해져”(151) 묻는 일도 많다고 한다. 저자의 말처럼 작품의 시각적 충격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은, 그 작품이 사람들이 예술작품에서 기대하는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미술에는 관객의 보편적 요구 사항인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불쾌감을 촉발해 관객에게 시비를 거는 현대 미술의 극단적 도발”(47~48)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다. 극단적인 충격을 통한 도발이든, 정치적 메시지이든 예술은 당대 역사의 산물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예술은 예술이라는 가면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에 나름의 방식으로 발언한다. 그래서 저자는 미술의 본질을 아름다움에 국한시키는 시각과 관람 태도는 여러모로 반쪽짜리 답안지에 불과하다”(49)고 말한다.

예술의 가면(假面)을 통해 예술의 시사성을 보여주는 몇몇 작품들을 저자의 소개를 따라 살펴보자. 존 나바(John Nava)<계산대(Check out)>(2005)라는 작품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폴리 베르제르 술집(Un Bar aux Folies-Bergere)>(1882)2005년을 배경으로 다시 그렸다고 볼 수 있다. 마네의 그림은 19세기 어느 술집의 바텐더에 서있는 여자 종업원의 무표정 속에 숨겨있는 노동의 고단함과 우울을 전면에 드러낸다. 존 나바의 그림은 마네의 그림과 유사한 구도 속에 역시 무료하고 피곤해 보이는, 비디오 가게의 여자 점원을 배치시켰지만 분위기는 좀 다르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술집(Un Bar aux Folies-Bergere)>(1882)에서는 피곤하고 우울해 보이지만 여자 종원원이 화면 전체를 장악했다. 그러나 존 나바의 <계산대(Check out)>(2005)에서 여자 점원은 화면 중앙에 배치되었으면서도 비디오 가게의 다른 상품들에 밀려 존재감이 크지 않다. 저자는 이 그림을 노동 현장의 을씨년스러운 풍속화”(20)라고 설명한다. 19세기 마네의 그림과 2005년의 그림을 비교해보면, 몇 세기 전 여성 노동자들의 상황과 현재의 상황이 달라진 게 없다라기보다, 노동자들이 화려한 상품들의 후광에 밀려 노동현장에서 점점 더 소외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조습의 <습이를 살려내라!>(2002)는 최병수 등이 공동 제작한 걸개 그림 <한열이를 살려내라!>(1987)를 모티프로 제작된 작품이다. 마네와 존 나바의 그림도 그렇지만, 조습의 작품과 최병수 등의 걸개그림도 두 시대와 두 장면을 동시에 불러내어 하나의 맥락 속에 병치시킨다. <한열이를 살려내라!>(1987)는 당시 군사정권 퇴출을 요구하며 시가전을 벌인 학생 시위대의 결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습이를 살려내라!>(2002)는 월드컵의 승리를 갈망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응원의 무리를 배경으로 한다.

조습의 작품은 시청 앞을 배경으로 작품 속의 인물이 월드컵 응원의 상징이었던 붉은 티셔츠를 입었지만, 이들이 재현하고 있는 것은 1987년의 상황이다. 저자는 조습의 작품이 “1987년 무자비한 공권력과 15년이 지난 2002년 맹목적 애국주의 모두 일개인의 숨통을 죄는 수난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다”(68)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처럼 저자가 소개하는 현대 미술은 예술은 아름다움이라는 통념을 넘어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의 문제에 개입한다. 저자는 예술의 정치적 개입을 사회적 억압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술품을 아름다움 자체와 동일시하는 일반 관객의 획일화된 미학적 고집에 대한 저항”(49)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 사라지는 예술 - 현대미술의 일회성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이 산더미의 정체를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한 예술가가 뉴욕 맨해튼의 브루클린 다리 밑 길바닥에 3톤 분량의 바나나를 쏟아놓고, 반나절 동안 관객에게 먹어 치우게 했답니다. 바로 현대 미술의 트렌드 가운데 관객 참여일회성 해프닝을 요령 있게 이용한 것이지요. 행사가 끝난 후 작품의 행방은 어떻게 됐을까요? 당연히 참여한 관객들의 배 속에 소장되었지요. ! 이때, 이 작품의 진정한 작가는 바나나를 바닥에 옮겨놓은 예술가일까요, 먹어치운 관객들일까요? (102)

 

관람객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현대 미술의 몇 가지 특징이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단 한 번의 퍼포먼스로 끝나는 일회성일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작품 역시 그렇다. 저자가 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작품은 더그 피시본(Doug Fishbone)<4만 송이 바나나(40,000 Bannas)>2002년에 맨해튼의 브루클린 다리 근처에 설치되었다. 물론 지금 브루클린에 가도 더그 피시본의 작품을 볼 수는 없는데, 작가의 설치와 보행자인 관람객의 참여를 통해 작품은 이미 사라졌기 때문이다. 저자는 <4만 송이 바나나(40,000 Bannas)>가 단 한 번의 이벤트를 통해서 작품이 참여자들의 배속에 일시적으로 보관된 후 소화와 함께 사라졌다는 점에서 일회성 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문에서 저자도 질문하는 것처럼, 이 작품의 진정한 작가는 바나나를 옮겨다 놓은 예술가일까, 아니면 바나나를 먹어치움으로써 작품을 완성(?), 브루클린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일까. 또 진정한 작가가 누구이든간에 이런 작품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작품의 요체는 참여자의 기억 속에 그들이 관람하고 참여한 하나의 사건이 던져준 인상이다. 그것이 뇌리에 새겨지는 것은 비()물질화된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작품은 물리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미학적 감동은 참여자 모두의 기억 속에 저장된 것이다.”(87)

더그 피시본의 작업처럼, 현대미술의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특성은 예술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충격을 준다. 예술작품이란 어떤 형태로든 물질적으로 남겨지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일반적인 대중들에게 더그 피시본의 작업은 예술작품의 개념 자체를 흔들리게 한다. 물질적으로 남겨지는 것이 없으니 예술작품을 사거나 팔 수도 없고, 미술관에 전시할 수도 없고 다음 세대를 위해 보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디어 자체를 예술로 만드는 이런 작품들은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일회성의 예술이지만, 그 작업이 이루어지는 동안의 즐거움이 있으며, 참여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 즐거움과 감동이 남는 것은 분명하다. 저자는 이런 작품들이 예술가와 예술작품에 대해 일반 대중이 품고 있는 필요 이상의 경외심을 없애주고,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감상태도에 경종을 울린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고 있다. “‘일시적인 미학적 충격자체에서 예술의 존재 가치”(86)를 찾는 것은 현대예술의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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