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
김보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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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박종훈은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을 가리켜 ‘크로스 오버’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이런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자신이 음악의 여러 장르들을 넘나들면서 음악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음악은 원래 하나였다고. 사람들이 원래 하나였던 음악을 쪼개고 나누어 다른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라는 얘기다.

비단 음악뿐 아니라, 우리는 예술은 장르로, 학문은 분과별로 구분지어 놓고 있다. 문제는 그런 구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구분이 편의에 의한 기능적인 구분이 아니라 마치 고정불변의 범주이며 서로 소통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긴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인문학 전공자의 경우는 과학적 지식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과학 전공자의 경우에는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예술가이면서 철학자였고 과학자였으며, 피타고라스는 철학자이면서 수학자이기도 했다.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피타고라스가 예외적으로 천재적인 인물이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살았던 시대가 지금과는 달리 여러 학문분야를 넘나들며 공부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오히려 ‘가장 과학적인 상상력이 가장 문학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신기하게 느낀다. 소설가 김연수는 어느 글에서 좋은 소설을 쓰려면 과학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면서 ‘가장 과학적인 것이 가장 문학적인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소설을 쓰는 일이야말로 과학적으로 사고해야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나누는 오랜 전통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 김보일의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이다.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는 인문학과 과학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진리가 결코 다르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인문학과 과학의 ‘링커(linker)’ 역할을 해준다. 이 책은 저자가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인문학의 화두들을 과학에서의 사례들과 연결짓는 ‘영역 전이’의 방식을 통해 학생들에게 유연한 사고력을 길러주고자 하는 고민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소설가 카프카는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고 했다. 카프카는 괴테나 니체와 같은 인문주의자들이 쓴 책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잘 씌어진 한 권의 과학책 역시 인간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 즉 고루한 편견과 상식을 깨부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의 설명을 더 들어보면 이렇다. ‘인간이 자연계에서 최고로 소중한 존재요, 자연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인간 중심주의가 생태계 파괴의 주범이라는 인식’은 박이문의 『더불어 사는 인간과 자연』이나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실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은 팔리 모왓의 『울지 않는 늑대』나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아』 등의 소위 ‘과학책’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의 꼭대기에 있는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의 한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나 그런 ‘겸손만이 지구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은 이제 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얘기가 되었다. 그러나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인정하고 있어서 더 이상 구체적인 성찰을 하지 않게 된 명제들에 생생한 호흡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자연과학에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사례들이다. 과학책을 통한 인문학적 성찰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과학자들은 남들 같으면 그냥 지나쳐버릴 미생물, 기생충, 벌레와 잡초와 같은 아주 사소한 미물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거기에서 놀라운 비밀들을 읽어낸다. 과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과학자들과 같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일이고, 과학자들이 찾아낸 자연계의 비밀을 공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과학책을 읽으며 우리는 내가 얼마나 편협한 상식과 편견의 울타리 안에 안일하게 거주하고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과학책을 통해 인문학적 성찰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자가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를 통해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는 과학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과연 정당하게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적 앎’이다. 과학의 발달은 인류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풍요롭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해주었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이들에게 고른 혜택을 준 것은 아니다. 저자는 과학이 과연 정의로운 방식으로 평등하게 분배되었느냐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과학은 인류에게 무조건적인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은 환상이며 무지라는 얘기다. 과학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계에 대한 성찰적 지식도 갖출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성찰적 앎’이다. 저자는 인간은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이 성찰적 앎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인지 머리말의 제목도 ‘사유하는 과학을 꿈꾸며’이다.

이 책은 전체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우리가 보통 쓸모가 없으며, 인간에게 이익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는 생물들이 실은 인간의 삶을 움직이고 있으며, 그들과의 공존을 통해서만 인간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부지런한 대지의 청소부 쇠똥구리」, 「기생충이 있어 건강한 지구」, 「잡초가 쓸모없는 풀이라고?」 등의 글을 보면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고루한 편견과 상식’이 깨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2장 ‘편견에 물들지 않는 섬세의 정신’에서는 우리가 그동안 아무 성찰 없이 ‘상식’이라고 믿어왔던 지식에 대해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무런 성찰 없이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사물이나 대상의 미세한 차이를 보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규정하려는 것은 ‘인식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박지원의 <능양시집서(菱洋詩集序)>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우리들의 인식론적 오류를 지적한다.

저 까마귀처럼 깃털이 검은 것은 없다. 그러나 홀연 유금빛으로 아롱지고, 다시 석록빛으로 반짝인다. 햇살이 비치면 자줏빛이 되었다가, 어느새 비췻빛이 된다. 그렇다면 내가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고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까마귀는 본디 정해진 색깔이 없는데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 버린다.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색깔[色] 가운데 깃든 빛깔[光]인 줄을 알겠는가? 검은 것[黑]을 일러 어둡다[闇]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물은 검기[玄]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칠[漆]은 검은[黑]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색깔 있는 것치고 빛깔 없는 것이 없고, 형상[形] 있는 것에 태깔[態] 없는 것은 없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편견이나 통념을 벗어나서 자신만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섬세의 정신’, 섬세한 사유이다. 인문학적인 상상력이나 성찰로는 미처 보지 못한 부분들을 과학적 상상력과 성찰이 만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3장 ‘과학과 유토피아’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맹목적인 신봉이나 환상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 장의 「저엔트로피 사회를 향하여 삶의 틀을 바꾸자」라는 글은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라는 책의 내용을 통해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세계관 전환의 필요성을 설명해주고 있다. 성장이 삶의 목표였던 고엔트로피 사회를 지나 검약이 중요한 덕목이 되어야 하는 저엔트로피 사회로의 전환이 이제 인류의 미덕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말하는 ‘중간기술’ 모델이 리프킨의 논의와 통하는 점을 저자는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과학책은 구체적인 낱낱의 사실의 인식에만 그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고,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성찰할 수 있게 해준다.’ 과학이나 과학적 지식에 대한 무지, 혹은 무관심이 지적인 게으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국어 선생님의 과학으로 세상읽기』를 읽다보면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적 태도의 부재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 또는 자신의 삶이나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대한 무관심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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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10-12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땡스투하고 담아가야겠어요^^

니리 2007-10-31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