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문제들의 현실적인 예들(퍼온 글)

 2009-07-09 17:14  교보블로그에 실렸던 글

 

 

● 부모가 싫다.  자쿰님  09.04.23

부모가 있다해도, 부모가 늘 싸우는 집안에서 자란 형제들은 우애가 없다.

부모의 싸움때문에 자식들은 각자 자신을 지키고 방어하는데 급급했다.

지금도 서로 만나면 잡아먹을것 같이 덤벼든다.

각자 성질들이 욱하고, 기본적인 대화 조차 배우지 못했다.

더욱이 모든 문제를 싸움으로서 해결하는 부모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모르고 문제 해결 능력을 배우지 못했다.

그런데도 부모는 이렇게 말한다. 다른 집 자식들은 잘만 서로서로 잘 만나고 우애도 좋은데 너희 들은 왜 그러냐 !소리 지른다. 그리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

내 부모는 평생 (70)살면서 반성이라는 것이 없다.

모든것이 남의 탓이다


● 우리가 출근하면, 30~40대 유부녀들은 자유부인. 

오늘도 좋아님  2009.06.25

부인이 바람을 피면 남자들은 쉬쉬 덮는다...모르는척 한다.. 부끄러우니까..

마치 자기가 성적인 능력이 없어서 바람핀걸로 생각하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부인 바람을 숨긴다....하지만 여자들은 다르다...동네방네 자기 남편 바람핀거 광고한다... 심지어 자식들에게까지 다 말한다...아빠를 걸레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복수라면서 맞바람을 피운다... 이건 맞바람이니 양심에 가책이 없다면서, 부인들은 바람을 피운다. 아주 지능적이다.


● 과거에도 문제 많은 부부 많았는데    해사랑님  09.04.23..

이혼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사회적인 끈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자식을 위해서라도 감히 이혼을 생각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이혼을 권하는 전세계 단일 암흑정부에서 모든걸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본인들이 하는 짓이 무슨 짓인지도 모르고 ㅡㅡ특히 여성들 ..자유를 사회로 진출하여 남성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개념을 잡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이야기 하고 도덕적으로 이야기 하고 경험적으로 이야기 하고 위험 신호를 알려도 아무도 거들떠 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 인간의 힘이 아니라고 아무리 외쳐대도 모두 미신 ,,,아님 미친사람 ... 참 힘이 듭니다..


이혼만은 백번 천번 만번...생각하시고 결정합시다.  스마일맨님  09.04.23.

이혼후 자녀들이나 당사자들이 다들 행복히 잘 산다면 이혼이란 것이 사회문제는 되질 않겠지요!!

하지만 남편이든 부인이든 자녀이든 반드시 어느 하나는 인생의 나락으로 빠지기 쉽습니다,,,아무리 맘 잡고 살아보려 해도 새벽녘까지 사무치는 외로움은 마음에 병을 먼저 가져다 주더군요.무얼해도 의욕도 않생기고...

주변 남자들 이혼당하고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 보면 십중팔구는 폐인이 되가더군요...나역시 술없인 잠들수 없는 지경까지 같구요...독한 마음으로 아무 흔들림 없이 나 자신만을 위해 애들 잘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더라도 이혼만은 재고하시길...


이혼의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배우자의 바람, 도박, 폭행...도저히 상대배우자에게서 희망을 발견할 수 없을때는 이혼이 당연하겠지요...하지만 그렇치 않은 일방적인 이혼당한 사람 심정은 격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심정 모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애들은 왜 아빠랑 같이 않사야구? 언제 함께 사야구?

가진거 다주고 나와 빈손으로 골방에 처박혀 살아가는 심정, 죽지 못해 살아가는 심정,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혼으로 인해 피해보는 사람이 어느 한 쪽은 있다는 걸 아셔야 할겁니다,,,이혼 원한쪽은 두다리 쭉 벗고 재혼이나 애인두고 즐기며 인생 잘 살아가더군요...이혼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 보는 사람은 이혼당한 당사자와 자녀들입니다



● 부모에게 자녀의 독립은 절대로 안되는 일???

(마마걸, 마마보이의 양산화 - 소위 피터팬 증후군, 어디로부터 오는가???)

6섯살 난 사내아이를둔 00입니다...

장모와, 마누라의 횡포 때문에 미치겠네요..

하루이틀도 아니고 결혼후 아니 동거후부터 각종 참견부터 시작해서

애키우는 방법까지 미치겠네요....나열하면 2박3일도 부족하네요...

지금 이혼할려고 맘먹고 있어요..서로 원하고요. 너무힘드네요

아들 녀석 때문에라도 버텨 볼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안될 거 같아요..

숨이 콱콱 막히네요...하루하루가 악몽이여요 피가 말르고, 진정이 되지 않네요

무서워요 장모하고 마누라가 얼마나 무서운지 치가 떨려요

0000입니다. 직장에 이런일이 알려질까 겁도 나고 정말 미치겠네요...

무조건 제가 잘못했다고들 하네요..(장모,마누라) 저 때문에 우울증도 걸리고

몸도 안좋다고 하고,,,이번에 영화배우 자살사건 이후로 우울증이란걸 알고나서

자꾸 우울증 걸리겠다고 하면서 괴롭혀요. 나는 완죤히 돌아버리기 일보 직전인데

평생을 이렇게 살기 싫네요....자세한 내용은 내일 올릴께요..지금은 너늦었고, 조금전에 마누라의 언어 횡포와 장모의 전화로 저에게 엄청나게 따져서 기력이 없네요..

담배하나 피우고 잘랍니다................경기도 00에서 행복을 추구하고픈 00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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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나서 화나는 대로 써 본 글

2009-07-09 17:10  교보블로그에 실렸던 글

 

 

집단망상 속에서 갖가지 독성을 내 뿜으면서...

가장 잔혹하게 많은 가정들을 파괴하고도 그 뻔뻔함이 하느님을 초월한지 오래이며. 집단 패거리문화(자신들은 공동체라고 하나 그게 그거, 말하자면 조직이라는 거지)로 성스러운 척하면서 가족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최악의 짓들을 해도 성당만 가고 고백성사만 하면 용서가 되는 가톨릭신자들을 ㅈㅇ해..


중세유럽의 면벌부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6세기에 있었던 유럽놈들의 성상문제의 다툼도 여전히 21세기 우리 사회의 가정에서도 일어나면서 집단따돌림(마녀사냥)까지 경험한다는 사실에 그저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성상문제는 권력다툼의 문제이다. 무식한 게르만족에게는 성상이 필요했겠지. 그걸 우리와 연관해 생각해보아라. 우리 속의 무지한 그런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성상은 필요하질 않는가? 이곳 저곳... 즉, 6세기 때 게르만족 같이 다루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되질 않는가?. 여전히...


모든 종교는 돈과 권력과 밀착하여 발전해 왔음은 역사공부를 하다 보면 알 수 있는 사실! 가톨릭신자들의 이런 문제는 우리 역사의 이재수의 난에서도 이미 있었던 바... 서방자본주의세계의 부를 위한 착취와 살육의 원천이 된 아프리카 흑인노예무역이나, 그 전의 권력욕으로 인한 십자군전쟁에서의 약탈과 대량살육은 고사하고도, 나치와의 연합(묵인)은 물론 교황의 한마디 말의 변화로 우습게 죽어간 그 수 많은 영혼들은 어찌 하겠는가를 먼저 생각하며는 그런 소리가 나올 수는 없을 듯... 인간이라며는... 그들의 영혼부터 ...

 

나는 가톨릭을, 가톨릭신자들의 무지와 영혼의 게으름과 무모한 망상을 정말 정말 ㅈㅇ한다.

자고로 신은 죽을 때까지 회의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지극히 인간다운 것.

자신들이 마치 하느님이고 신 인양 모든 일들을 평가하고, 결정하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그런 망상적인 인간들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일들을 앞장서서 한 역사적 사건들은 너무 많았다라는 것. 그리고 지금도 가장 비양심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일들이 가정 내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왜그럴까? 망상적, 자기기만적인 삶을 그렇게 오래 살다 보니 자기를 완전히 잃어 버린 사람들인데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인간은 인간일 뿐...


종교를 거부한 일반인들이 더욱 양심적이고 인간적일 수 밖에...

기준이 인간이니까..굳이 예를 들자면 서구의 르네상스라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거세당한 꼴의 결과가 지금의 현실 아니던가???


역사 속에 저지른 죄악이나 잘못들을 치유하는데 온 시간을 써도 모자를텐데...

치유함도 없이 무조건적인 망상적 믿음, 사탄, 하느님이라는 것으로, 그리고

무식한 게르만족의 교화를 위해 타협된 성상을 붙들고 21세기에도 기도를 하는 당신들...


상시 거짓말을 하면서 자신을 절대적으로 속이는 일을 그렇게 오랜 동안 지속하다 보니 망상 속에서 망상인지도 모르고 자신을 잃어 버린체 껍데기만을 가지고

허공과 인형에 대고는 하느님, 세상에 대고는 사탄이라고 하며 자신들을 더 빈껍데기로 만들어 가면서 함께 사는 사회를 병리적 올가미 속에 밀어넣으려고 한 지도 참으로 너무나도 오래된 일이고 지금도 여전히 죄책감도 없이 저지른는 일인데도...


그런데도 아직도 그런 짓을 안이나 밖에서나 그저 끝을 모르고 해 대는 인간들을

신계서 계시다면 참으로 어떻게 보시겠는가?

신은 없다. 망상적인 인간들, 집단들만이 있을 뿐...

나는 가톨릭과 가톨릭신자들을 ㅈㅇ한다.

원망과 복수하지는 않아도 가까이 하지는 절대로 아니할 것이다. 

죽어서 만나보겠다.

그들로 인해 상처받고 무지 속에 죽어 간 영혼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 드릴 뿐이다.

그들에 의해 상처 받고 힘들어 하는 다른 여러 사회와 가족 구성원들을 위해서도 조용히 기도할 뿐...  자기들은 죽지 않을 것 처럼 역사는 책에서만 나오는 것이라는 듯이 하는...


그냥 넘어가려다가 카돌릭이고 개신교고 하는 망상병 환자들이 망상적인 짓들을 하 데에 씨알로 먹히지 않으련만 반대의 의미로 화 좀 내본다.


가톨릭신자들이 말로는 가족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가족만인게 문제이지.가톨릭에다가 혈연적이고 배타적인 가족중심주의가 섞인, 그리고 섞인 것도 모르고 그냥 망령된 행동을 해대는, 가톨릭과 유교와의 짬뽕인게지. 깨닫지도 못하니까... 황사영이가 자기 집단만을 위해서 한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무엇이든지??? 자기 밖에 모른다는 증거!


가톨릭의 궁국적인 목적은 돈과 권력이다. 교묘히 위장된 수단과 거짓말과 집단화를 통한... 천주교 신자였던 괴벨스와 흡사한 그런 모습을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

역사가 증명하고, 지금도 되풀이는, 천연덕스럽게 사회에서, 가족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바다를 얘기하는데 왜 물고기를 얘기 하는가?

조선의 조상숭배를 우상숭배라고 하다가 우상숭배가 아니다로 칙령이란 것을

내리는데 까지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에서 1939년 교황 바오 12세까지

2백 십수년이 걸렸는데 그 동안 그 문제로 순교한 그 많은 조선사람들은 뭐죠?

그리고 왜 바꾸었을까? 교황이 신이라도 되는가? 신이 계시를 받았을지?????

성상도 이것도 모두 권력문제 아닌가? 선교가 그것 아닌가? 십자군전쟁도 권력

소유의 문제 아닌가? 노예무역은? 돈 아닌가?  과거에 (지금도 여전하지만)

유럽에서나 조선에서나 신교와의 경쟁은 바로 권력문제 아닌가?

권력집단 속의 또 하나의 다른 권력집단!

어찌 한 사람의 말을 그리 과거도 돌아보지 않고 잘 받아들이는가?

국가통치자의 말이라도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은 없다.

요즘은 교황청이 다윈의 진화론까지 수용하는 단계까지 왔는데???


16-19세기 서세동점이라고 카돌릭이 왜 동방이나 해외 족으로 선교를 했을까?

이미 다 아는 사실...


백날 무지한 상태에서 봉사한답시고 해 본들 그렇게 무지해서 죽음으로 몰아

가는 신이 아닌 그러한 사람의 한마디 말을 적어도 좀더 회의적으로 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 아닌가? 봉사해서 자신의 내면적인 기쁨이란 댓가는 이미

받았을텐데 무슨 댓가를 더 원해서 그런 것을 자주 말하시는가?

희생??? 이 말자체가 사디즘으로 가기 위한 마조히즘적인 발상 아닌가?

봉사는 고아원이나 양노원에 가서 궂은 일하는 것만이 봉사인가???

너무도 이런 말들을 천연덕스럽게 위든 아래든 거침없이 말을 한다.

무지한 것을 보고도 웃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무지할수록 좋다.  이유는 계속된다.

모든 것들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 보고 좀 더 이면의 모습을 알고 싶다면

우선 ‘자비를 팔다’라는 책을 참고해 보시기를...

 

불교는 안그런가? 호국불교란 말 들어 보셨는가?

불교가 고대왕국들에 의해 수용된 것은 지배자인 왕은 작은 부처이고 피지배자인

백성은 작은 부처인 왕을 잘 받들어야 하는 한다는 그런 측면의 교리이기 때문에

고대국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즉, 백성은 그렇게 태어 날 수 밖에 없었

으니 이 생에 착한 일 많이 하면 내생에는 좀 더 단계가 향상된 좋은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윤회도 알고보면 백성의 통치를 위한 우민화 도구로 시작했다는 것이다란  말.


권력과 밀착하지 않으면 종교도 역사 속에서 사그러진다. 이건 가톨릭과 로마

제국이 결탁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일.. 그것도 토속종교와 경쟁을 통해 막말로

이겨서... 또, 지옥, 구원, 심판 등이라는 조르아스터교의 논리를 그대로 이어 받은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가 마치 자신들만의 참다운 유일한 신인 양 하는 것이 ....

 

요즘도 불교의 말씀들을 들어 보면 갈등과 번뇌가 업고요, 받아들여 하는 해탈

해야 하는 바로 (그 옛날의 우민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래서도 불교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

지배자에게는 피지배자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고분고분해질 수 있다는 것은 다루기 쉽다는 것...

살육전쟁도 얼마던지 가능하도록..

 

부모가 자녀에게 바른 사실을 알려 주면 자녀는 때로는 충격과 반항을 하게 되는데.

이 반발을 막으려면 바른 사실을 알려 주기 힘든 것. 억압시켜야. 거짓말하던지...

국가통치자도 마찬가지...

역사와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기 힘든 것. 제대로 알면 단체로 대들거든...


종교도 마찬가지...

종교(원시, 유대교도 마찬가지)는 제정일치냐 제정분리(정교분리)냐로 시작했다

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 유럽애들은 중세 때까지 제정일치라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는 것 아시지 않는가? 정치의 최고봉은 곧 권력소유이다. 그러나 만만치

않치.잘 다루려면 잘 합리화된 사상이 필요하지. 이건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즉, 좀 더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오기는 아직도 머나 먼 길이라는...

그래야 부부와 가족 사이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평화로운 모습이 될 것

아닌가?  


유럽애들은 운명이란 개척하는거다로 밖아 놓고(중세 때부터 서구인의 무의식

세계인 가톨릭이 부와 권력에 대한 재미와 습관이 되어 있거든, 아니 국교화시킨

로마제국 때부터이네) 식민지쟁탈을 통한 약탈, 착취, 억압 등을 해 온 거고 이를

합리화시켜 준 인간들이 캘빈이고 막스 베버 아니냐?


베버는 유럽중심주의 역사와 사고를 혼 속에 불어 넣는데 최고의 인물 아니던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부에 대한 무한한 추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사람 아니

던가? 그러니 약한자들을 짓밟는 역사를 만들어 내 것이 19-20세기 역사 아니던가.

그리고 지금도 되풀이 대물림 되고 있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게...

그러니 개신교가  돈이면 물불을 안가리는 거 아닌가? 주변에 다 뿌리면서..


그게 좋다고 요즘 우리 사회의 모양새가 전통문화를 다 잃어 버린 체 돈이면 가족

도 애들도 안보고 버리고 바람피고, 이혼하고, 여권운동이고 뭐고 등등 하는 거, 부정 하겠는가? 어느나라 법인지 정체성을 잃은 법은 남의 나라 법리를 그대로 가져다가 그냥 무조건 이혼만 시키면 이래서 신문에 꽝 나고 저래서 자살하고...

모두 권력싸움이던데... 부부도, 남녀도 모두가.... 주도권 싸움이고..

이것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보자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지금도 우리들의 의식 속에서... 위 아래가 타협이란 없지 않은가?  온 사회가...


백인이면 우월하다는 무의식에 아주 완벽하게 각인시킨 놈이 누군가? 베버를 비롯해 스팬서, 헤겔... 이런 놈들이다. 그래서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등 서열이 정해 인종적차별이 극심해진 이유가 식민지쟁탈(부의 축적 즉, 돈)을 하기 위한 유럽놈들의 작당질때문이 아닌가? 왜? 돈과 권력을 위해서.. 누가? 개신교도의 총수겪인 사람들이... 그거 또 멋 모르고 들여 온 분들이 유길준과 윤치호 선생들라고 하던데.. 서재필은 어떻고? 공개적으로 떠들던 것이 독립신문이고... 지금도 보통 우리같은 서민은 그 속에서 헤메는거 아닌가? 부모의 부모를 통해 대물림되면서 유럽애들이 한 짓거리가 자신에게 독이 되는 줄도 모르면서 안방까지 머리 속 깊은데까지...

뭘 좀 알아야 의문이 풀려야 바꾸려고 노력하던 할 것 아닌가???


가돌릭이 중세 때 다 해 먹고 있었던 걸! 그 역사 개신교라고 버리겠느냐는 말이다.

그게 어디로 왔는가?  우리 속에 다 들어 와 있지.

기득권도 없이 예속되고 부러워하면서 또 다른 이들을 그렇게 하고 있는...


나는 이걸 말하는거라는 것!  무지에서 벗어 나려면 ...

갈 길은 멀었다. 아마도 그 사이에 인류가 자멸하지나 않을지 모르겠네!

가돌릭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도전적인 비판에 문을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고연히 침묵이나 부인과 방어적 공격을 해 보았자 그 자체가 병리적 현상이라는

것 ,즉, 사회의 문제점인 패거리문화가 합류했는 말 밖에 못듣는다는 것.

아니면 회피하던지. 무엇이든 굴복, 회피, 반격은 정상이 아니다.

뭐 가끔 심각하지만 않으면 넘어갈 수는 있긴 하겠지만 ...

주변의 작금의 가족들의 사태들을 보면 당장이라도 주임신부들과 논쟁을 하고

싶으나...   그들은 받아 들이지 못한다. 이유는 파계가 될테니까! 아니면 거짓말이나 억압시키는거겠지. 근데 교황청도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하는 시대 아니던가?????



아무튼 국가나 종교단체나 부모나 권력자들이 교육과 치유 보다는 병리적인

권위주의적 자아도취적인 행위에만 빠져있어, 자신들이 여기에서 빠져있음을

인식만이라도 하던가, 이를 벗어나기란 역사적으로 불가능 함을 보여준다는 것을

인식만이라도 한다면 희망은 있겠다. 하기야 밑에서도 그러니까... 무지!!!

그들의 보편적인 행동은 억압과 거짓말, 그리고 책임안짐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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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내기에 인내를 필요로 하는 책

 2014-01-17 19:10  교보블로그에 실렸던 글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선 내용의 서술형태가 내가 읽어내기에 아주 힘이 든다는 점들이 있다.
자기정당화의 심리학, 거짓말의 심리학, 기억의 일곱가지 죄악, 비합리성의 심리학, 행동경제학, 느끼는 뇌, 머니앤브레인, 이기적 유전자 등등등등 관련된 그리고 기타 분야의 도서들을 정독해 봤지만 이 책 만큼 읽어내기에 인내를 요하는 경우는 드믄 것 같다. 저자의 서술방식인지(나에겐 좀 산만하다) 외국어 번역상의 어려움인지, 아마도 양 쪽 모두인 듯 하다. 그리고 내가 집중력의 지속성을 잃은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는 서너번씩 반복해서 읽어보고 문맥을 따져 봐도 이해불가한 구절들이 꽤 있다. 전체적인 내용 자체는 그렇게 어렵다고 할만 것들이 있는 것은 아닌데 ...

그래서인지 뉴욕타임지 선정이라든가(크리수 레만이란 저자는 이를 '현대의 귀족들이 세상을 보는 창'이라 했음)의 찬사와 인사들의 짧은 추천사들이 있지만 그것들이 광고와 홍보만으로 와 닿는, 그런 기분 나쁜 마음으로 와 닿는 것은 왜일까? 이것도 나의 자기이익추구적 자기기만일까? 강요된 기만은 아닌 듯하고, 기만이라기 보다는 힘들다라는 것!

보리스 시뤌니크의 국내 번역서들(가족과 북원력에 관한 내용들)은 모두 탐독하고 지금도 종종 밑줄 친 글과 요약문을 들여다 보는 정도로 나에겐 귀한 저작이지만 사실 이 책들도 초반에는 읽어내가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불어의 번역인데다가 저자의 독특한 필체 때문('아주 독특하고 흥미롭다')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워낙 내용들이 주옥 같아서 두 세번씩 반복하여 읽어내는 인내가 필요했어도 흥미가 진진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었다. 트리버스의 책을 아직 분량으로 30% 정도만 읽었지만 워낙 답답하여 답답풀이(일종의 호소?)로 먼저 적는 소감글이라서 모두 읽어낸 후 다시 책읽은 소감을 내용 위주로 적어 보겠다. 아마도 책의 중후반부에서 기대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첨언하고픈 것은 '이기적 유전자'처럼 소프트커버로 해서 저렴한 보급형으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다음날인 오늘 기대를 걸고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역시 스트레스 받는다. 우선 500쪽이 넘는 책인데 각 하부섹션에서 소제목과 함께 논하는 내용이 알맹이(예로 밑줄을 칠만한 통찰?)가 너무 적다라는 점. 아니면 충분한 배경 설명이 부족하던지 ... 더욱 불필요한 자신의 사소한 개인경험으로부터 일방향의 일반화시키는 형태인 '그러므로 맞다, 그렇다'라는 이야기들(별로 수긍하기도 어려운)이 틈틈히 삽입되어 쪽 수만 늘어나는 경향이 있어서 읽어 내기가 여간 인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책장을 덮고 1-2 주 후에 다시 무언가가 있겠지라는 희망을 가지고(아니면 나의 어떤 문제점을 볼 수 있던지) 독해시도를 해보고 소감을 적어야겠다. 이 상태가 왜 그럴까?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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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기를 앞 둔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로서 ...

 2010-01-18 19:57  교보블로그에 실렸던 글

 

 

부모가 된 사람들이 늙어 가면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걸까? 자녀에 대한 권력과 지배력과 주도권을 조금씩 조금씩 놓아 버리는 것이리라. 그리고 자녀와 협력하는 일일테고, 자신과 자녀와 세상에 대해 수동성, 단순성, 자족의 미덕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또 하나는 많은 책읽기나 명상하기를 통해 자신의 고착화된 마음의 습관(고집)을 풀어 가는 일이며, 살아 오면서 의도적으로 또는, 자기를 못이겨서 행한 잘못한 일(특히 자녀를 양육해 오면서 상처 주었던 일들)에 대해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자녀에게 털어 놓는 일들(들어 주는 일과 ‘미안했다’라고 말하는 일)과 노쇠해 가는 몸에 의한 고통을 이겨내는 일일 것이다. 지나 온 삶과 남은 삶에 대하여 돌이켜 보면서 진실되게 낮은 자리로 내려오도록 노력을 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보다 더 청결한 몸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일도 포함되리라. 이렇게 함으로서 자녀들과의 관계를 새로 짜므로서 여태껏 겪어 보지 못한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감을 얻는 것이리라.


내 경우를 예를 들면 지나 온 일들을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만들어 놓으면 어머니는 망가 뜨린다. 파괴적이란 얘기다. 나이가 더 들어 갈수록 완고한 고집과 독선적인 전횡이 접근과 대화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난 찾아 뵐 아버지도 조부모도 없다. 알아서 홀로 그린 드라마로 의논도 사려도 없이 혼자서 결정하고 해버리는 성격으로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이는 죽을 때까지 자녀를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자녀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이고, 가시고 난 후에도 자녀를 구속하는 일이다. 2년에 걸쳐 기회를 보며 나를 변화시킨 모습으로 대하므로서 마음의 변화가 있으실까를 바래 봐도 그 홀로 드라마는 누구도 방향을 틀 수 없다. 오히려 홀로 드라마는 강화되고 깊은 뿌리를 내린 듯 보인다. 


어머니는 심리 드라마를 혼자서 그린다. 대화나 남을 알 필요가 없다. 아직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자신만한 그런 사람이 없으니까. 그 심리 드라마에 의해 움직이며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까지 말한다. 아마도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겪은 성장과정이 변화가 어려운 정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스스로 평생을 감옥 속에서 지내게 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 옛날 외동 딸에 자신은 물론 아버지로부터 그 어머니 조차 난봉, 주사, 마작, 폭력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일찍 여위였다. 어머니 잃은 딸들의 심리적으로 어려운 난관들을 겪어 낼 긍정적인 내면들이 부족한 탓이리라. 어머니의 아버지가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누가 이를 알려 주는 이들도 없었을테고. 어찌보면 불쌍타. 불행히도 나 또한 그 부정적인 내면을 극복하는데 아직도 많은 에너지가 쓰인다. 요즘 여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평생 지속되는 폭언과 폭력을 겪으며 성장했으니까! 젊은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녀에게 배우는 게 많다고 느끼는 부모는 미래의 노인이 되었을 때 더 행복하다. 교육은 자기교육이고 양육은 자기양육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평생 살아 나가면서 부모의 내면화된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극복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 듯 하다.


한편 더욱 힘든 것은 방어적 성격이 선천적이고도 천재적이다는 것이다.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까지 말한다. 남의 말이 문장의 첫마디가 나오자 마자 줄줄히 꽤 차고 녹음기가 돌아가 듯 말을 한다. 이는 말을 선점하지 않으면 주도권을 잃는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즉, 옛 사람이라지만 아직도 부모로서 삶에 대해 너무나 독선적이라는 의미이다. 내면의 참과 거짓 사이에 거짓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대다수의 모습이기도 하다. 구별할 수 있는 노력을 하는 자는 행복하다. 나이 5-60의 자녀들도 다가가기 어렵다. 항상 손자이던 자녀이던 사위이던, 자신의 심리적 충동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아니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문제에서 조차 욕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산다. 여전히 자녀를 통제하고, 지배하며, 가르치려고 고집 피운다. 이런 면들은 과히 극단적이다. 또, 말은 막힘도 없고,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어 고집스럽고, 기분에 따라 변한다. 우리 사회의 대물림인 자궁가족의 유산을 그대로 가진 모습일까? 고집의 내용에 대한 양상을 가만히 보면 텔레비전의 연속극과 뉴스의 지속적인 영향들에 의해 절로 방어적이 되어 버려 항상 홀로 독백한 결과로 자기암시(자기세뇌)효과인 듯 보인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들이고 또, 그걸 안고 사니까. 거기에 몇 몇 딸들의 심리드라마까지 중첩되어 이를 강화시킨다. 이는 막말로 애기하면 안보이는 곳에서 하는 은밀한 이간질이라는 것이다. 딸과 어머니는 하나라는 것이 이럴 땐 악마들의 동맹으로 느껴진다. 대화와 이해와 타협이 아닌 자꾸 분란을 일으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생활비는 고사하고 단 돈 십 만원 낼 위치가 되면 다 빠져 버린다. 그리고 돈이 있으니 보약과 병원을 안고 산다. 젊은이들 못지 않게 너무나도 정정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신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 보건데 혹시 체념과 무상함을 받아 들였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기대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충족시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가장 가혹한 곳을 참전했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 왔다. 인간인지라 그 어려움들에 대한 자신에 대한 연민이 있었을테고 ... 그래서 아들들의 어려움을 미리 사려깊게 생각하신 듯 하다. 어머니는 다르다. 그 아버지의 만들어 놓음의 덕에 오히려 노년이 더 힘들게 된 듯 하다. 아버지도 너무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족의 돌봄이란 멍에만을 전념한 그 시대의 남성이라서 그런지 자신을 돌보는 일에 어둑한 아버지들. 아버지의 소명은 그런거란다. 나를 소모시켜 디딤돌로 되거라라는 것! 그에 반해서 죽음을 회피하려고, 미련으로 삶을 붙들고 늘어질 수 있게끔 여전히 통속적인 지푸라기 같은 것에만 의존하는 것은 부모로서 보일 일이 아니다. 나머지 남은 길을 의연하고 초연하게 대처하면서 수동성과 단순성과 자족의 미덕을 가지고 그동안의 못다한 진지한 정을 자녀들과 나누는 것과 키워 오면서 줄 수 밖에 없엇던 상처들에 대하여 마음 편히 애기할 수 있는 것이 부모로서 마지막 해야 할 일이라고 보인다. 자녀가 가까이 가고자 해도 밀어내는 부모는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늙어서 해 나가야 할 삶의 과제 중 중요한 하나인 듯 하다. 바로 이런 면들이 아버지의 만들어 놓음으로 인해 어머니가 노년에 더 힘들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후 대비에 불안해 하지 말자. 어쩌면 없는 것이 더 낳을 수도 있다.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내 버릴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후에 정념하는 바른 스님들 같이 살면 생활비 거의 들지 않는다. 이 정도는 이미 사회적 지원이 가능하기도 할 것 같다. 그리고 노인이 되어서도 이 정도 자족할 수 있는 일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렇게 하는, 떠나는 길에 너무 두려워 하지 말자. 자녀들에게 의연한 모습으로 남는 것이 무언지를 알아 나가야 할 듯 하다.      

어머니는 하나님보다 더 힘센 존재란다. 어머니가 권력과 고집을 내려 놓으면 모두가 편안하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본질은 자기 존재의 초월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이를 놓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그러는 한은 편안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리라. 불쌍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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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로 부터 오는 상처와 체념이란 것

 2010-01-08 20:34  교보블로그에 실렸던 글

 

 

사람이 상실로부터 오는 마음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상실은 애착하는 것으로 부터의 그 대상을 잃어 버리는 것일 듯!

분리라는 것! 분열이라고도 할 수 있을런지? 우리는 거의 모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완전하게 통합하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인 듯 하다. 이미 에리히 프롬이 오래 전에 말해 주었듯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길 원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분리되므로서 소외감과 분열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정서적, 정신적 방황도 이를 말해 주는 듯하다.

 

사람이 최초로 상실을 느끼는 것이 따뜻하고 포근하며 모든 것들이 제공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처음 보는 낯설고 완전히 다른 경험의 혼돈의 세계로 태어나는 순간이고, 마지막 남은 한가지의 상실을 경험하는 곳이 너무나도 익숙한 세상으로부터 순간 어느 곳인지 모를 그런 곳으로 떠나는 죽음이란다.

 

상실로부터 얻는 깊은 상처와 충격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아마도 놓아 버리는 것일게다. 즉, 포기하는 것, 체념하는 것, 애착을 떨쳐 버리는 것, 집착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나와 남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닌 누구에게나 삶은 연속적인 상실의 과정이라는 것과 나의 불완전함과 불확실성을 숨쉬는 것 같이 깊은 깨달음을 거쳐 인정하는 것. 즉, 고집 피우지 않고 지배력과 주도권과 권력을 내어 버리는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사람은 나이가 들어 가면서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포기하고 체념하는 법! 고집을 버리는 것! 지배력과 주도권과 권력을 내놓아 버리는 것!

이는 자기를 넘어서는 지혜이자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기의 마음 속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이것을 적절하게 체득하지 못하면 노쇠해질수록 더욱 힘들어지고 죽을 때는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천 명의 죽음을 지켜 본 전문의의 글이 있다 할지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집착하고 놓지 않으며 아직도 모른 체 다 안다는 생각을 가지고 죽음을 겪는 듯 하다. 지나온 가족사든 역사든 되풀이 되는 것은 이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의 정서가 처음에는 부인을, 다음에는 분노, 그 다음에는 거래와 협상, 다음엔 우울, 그리고 수용이라고 한다. 여기서 수용이란 포기나 체념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거의 모든 이들이 이 단계까지 못가고 우울 단계에서 머물다 간다고 한다. 이 우울은 너무나도 겪어 내기 어렵도록 힘들어서 다시 낮은 단계인 분노와 협상 쪽으로 되돌아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환상이다. 어짜피 막을 수 없는 과정에 대한 바라 봄이 아닌 몸부림과 저항이리라. 이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의 삶의 여정 전체에 놓여 있으나 한 번도 그러지를 못하고 마지막까지도 그러지 못하고 갈 수 밖에 없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 호기심과 신기함과 흥미로움이 없다면 그건 삶을 헛되게 사는 것이리라. 자녀의 반응과 상호작용을 통해 나의 과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이고, 나의 과거를 수정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며, 여기로부터서도 필연적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고 무상함를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다. 그런 좋은 기회를 놓아 버리는 경우에 조차 후회할 수 없는 마음들에 대해 삶은 단 한 번 뿐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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