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기를 앞 둔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로서 ...
그저그런 얘기들 2010-01-18 19:57 교보블로그에 실렸던 글
부모가 된 사람들이 늙어 가면서 갖추어야 할 덕목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걸까? 자녀에 대한 권력과 지배력과 주도권을 조금씩 조금씩 놓아 버리는 것이리라. 그리고 자녀와 협력하는 일일테고, 자신과 자녀와 세상에 대해 수동성, 단순성, 자족의 미덕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또 하나는 많은 책읽기나 명상하기를 통해 자신의 고착화된 마음의 습관(고집)을 풀어 가는 일이며, 살아 오면서 의도적으로 또는, 자기를 못이겨서 행한 잘못한 일(특히 자녀를 양육해 오면서 상처 주었던 일들)에 대해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자녀에게 털어 놓는 일들(들어 주는 일과 ‘미안했다’라고 말하는 일)과 노쇠해 가는 몸에 의한 고통을 이겨내는 일일 것이다. 지나 온 삶과 남은 삶에 대하여 돌이켜 보면서 진실되게 낮은 자리로 내려오도록 노력을 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보다 더 청결한 몸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일도 포함되리라. 이렇게 함으로서 자녀들과의 관계를 새로 짜므로서 여태껏 겪어 보지 못한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감을 얻는 것이리라.
내 경우를 예를 들면 지나 온 일들을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만들어 놓으면 어머니는 망가 뜨린다. 파괴적이란 얘기다. 나이가 더 들어 갈수록 완고한 고집과 독선적인 전횡이 접근과 대화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난 찾아 뵐 아버지도 조부모도 없다. 알아서 홀로 그린 드라마로 의논도 사려도 없이 혼자서 결정하고 해버리는 성격으로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이는 죽을 때까지 자녀를 죽이는 일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자녀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이고, 가시고 난 후에도 자녀를 구속하는 일이다. 2년에 걸쳐 기회를 보며 나를 변화시킨 모습으로 대하므로서 마음의 변화가 있으실까를 바래 봐도 그 홀로 드라마는 누구도 방향을 틀 수 없다. 오히려 홀로 드라마는 강화되고 깊은 뿌리를 내린 듯 보인다.
어머니는 심리 드라마를 혼자서 그린다. 대화나 남을 알 필요가 없다. 아직도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자신만한 그런 사람이 없으니까. 그 심리 드라마에 의해 움직이며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까지 말한다. 아마도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겪은 성장과정이 변화가 어려운 정도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스스로 평생을 감옥 속에서 지내게 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 옛날 외동 딸에 자신은 물론 아버지로부터 그 어머니 조차 난봉, 주사, 마작, 폭력에 시달렸고 어머니는 일찍 여위였다. 어머니 잃은 딸들의 심리적으로 어려운 난관들을 겪어 낼 긍정적인 내면들이 부족한 탓이리라. 어머니의 아버지가 그런 모습이었으니까. 누가 이를 알려 주는 이들도 없었을테고. 어찌보면 불쌍타. 불행히도 나 또한 그 부정적인 내면을 극복하는데 아직도 많은 에너지가 쓰인다. 요즘 여성들이 즐겨 사용하는 평생 지속되는 폭언과 폭력을 겪으며 성장했으니까! 젊은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녀에게 배우는 게 많다고 느끼는 부모는 미래의 노인이 되었을 때 더 행복하다. 교육은 자기교육이고 양육은 자기양육이란 말이 있다. 사람이 평생 살아 나가면서 부모의 내면화된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극복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 듯 하다.
한편 더욱 힘든 것은 방어적 성격이 선천적이고도 천재적이다는 것이다.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까지 말한다. 남의 말이 문장의 첫마디가 나오자 마자 줄줄히 꽤 차고 녹음기가 돌아가 듯 말을 한다. 이는 말을 선점하지 않으면 주도권을 잃는다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즉, 옛 사람이라지만 아직도 부모로서 삶에 대해 너무나 독선적이라는 의미이다. 내면의 참과 거짓 사이에 거짓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대다수의 모습이기도 하다. 구별할 수 있는 노력을 하는 자는 행복하다. 나이 5-60의 자녀들도 다가가기 어렵다. 항상 손자이던 자녀이던 사위이던, 자신의 심리적 충동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아니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문제에서 조차 욕과 불평을 입에 달고 산다. 여전히 자녀를 통제하고, 지배하며, 가르치려고 고집 피운다. 이런 면들은 과히 극단적이다. 또, 말은 막힘도 없고,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레파토리를 가지고 있어 고집스럽고, 기분에 따라 변한다. 우리 사회의 대물림인 자궁가족의 유산을 그대로 가진 모습일까? 고집의 내용에 대한 양상을 가만히 보면 텔레비전의 연속극과 뉴스의 지속적인 영향들에 의해 절로 방어적이 되어 버려 항상 홀로 독백한 결과로 자기암시(자기세뇌)효과인 듯 보인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들이고 또, 그걸 안고 사니까. 거기에 몇 몇 딸들의 심리드라마까지 중첩되어 이를 강화시킨다. 이는 막말로 애기하면 안보이는 곳에서 하는 은밀한 이간질이라는 것이다. 딸과 어머니는 하나라는 것이 이럴 땐 악마들의 동맹으로 느껴진다. 대화와 이해와 타협이 아닌 자꾸 분란을 일으키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생활비는 고사하고 단 돈 십 만원 낼 위치가 되면 다 빠져 버린다. 그리고 돈이 있으니 보약과 병원을 안고 산다. 젊은이들 못지 않게 너무나도 정정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 가신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들여다 보건데 혹시 체념과 무상함을 받아 들였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기대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충족시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가장 가혹한 곳을 참전했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 왔다. 인간인지라 그 어려움들에 대한 자신에 대한 연민이 있었을테고 ... 그래서 아들들의 어려움을 미리 사려깊게 생각하신 듯 하다. 어머니는 다르다. 그 아버지의 만들어 놓음의 덕에 오히려 노년이 더 힘들게 된 듯 하다. 아버지도 너무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족의 돌봄이란 멍에만을 전념한 그 시대의 남성이라서 그런지 자신을 돌보는 일에 어둑한 아버지들. 아버지의 소명은 그런거란다. 나를 소모시켜 디딤돌로 되거라라는 것! 그에 반해서 죽음을 회피하려고, 미련으로 삶을 붙들고 늘어질 수 있게끔 여전히 통속적인 지푸라기 같은 것에만 의존하는 것은 부모로서 보일 일이 아니다. 나머지 남은 길을 의연하고 초연하게 대처하면서 수동성과 단순성과 자족의 미덕을 가지고 그동안의 못다한 진지한 정을 자녀들과 나누는 것과 키워 오면서 줄 수 밖에 없엇던 상처들에 대하여 마음 편히 애기할 수 있는 것이 부모로서 마지막 해야 할 일이라고 보인다. 자녀가 가까이 가고자 해도 밀어내는 부모는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늙어서 해 나가야 할 삶의 과제 중 중요한 하나인 듯 하다. 바로 이런 면들이 아버지의 만들어 놓음으로 인해 어머니가 노년에 더 힘들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후 대비에 불안해 하지 말자. 어쩌면 없는 것이 더 낳을 수도 있다.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내 버릴 수 있게 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후에 정념하는 바른 스님들 같이 살면 생활비 거의 들지 않는다. 이 정도는 이미 사회적 지원이 가능하기도 할 것 같다. 그리고 노인이 되어서도 이 정도 자족할 수 있는 일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렇게 하는, 떠나는 길에 너무 두려워 하지 말자. 자녀들에게 의연한 모습으로 남는 것이 무언지를 알아 나가야 할 듯 하다.
어머니는 하나님보다 더 힘센 존재란다. 어머니가 권력과 고집을 내려 놓으면 모두가 편안하다. 그러나 어머니라는 본질은 자기 존재의 초월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이를 놓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그러는 한은 편안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리라. 불쌍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