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로 부터 오는 상처와 체념이란 것

 2010-01-08 20:34  교보블로그에 실렸던 글

 

 

사람이 상실로부터 오는 마음의 상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상실은 애착하는 것으로 부터의 그 대상을 잃어 버리는 것일 듯!

분리라는 것! 분열이라고도 할 수 있을런지? 우리는 거의 모두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완전하게 통합하는 데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인 듯 하다. 이미 에리히 프롬이 오래 전에 말해 주었듯이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길 원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너무 분리되므로서 소외감과 분열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정서적, 정신적 방황도 이를 말해 주는 듯하다.

 

사람이 최초로 상실을 느끼는 것이 따뜻하고 포근하며 모든 것들이 제공되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처음 보는 낯설고 완전히 다른 경험의 혼돈의 세계로 태어나는 순간이고, 마지막 남은 한가지의 상실을 경험하는 곳이 너무나도 익숙한 세상으로부터 순간 어느 곳인지 모를 그런 곳으로 떠나는 죽음이란다.

 

상실로부터 얻는 깊은 상처와 충격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아마도 놓아 버리는 것일게다. 즉, 포기하는 것, 체념하는 것, 애착을 떨쳐 버리는 것, 집착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나와 남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닌 누구에게나 삶은 연속적인 상실의 과정이라는 것과 나의 불완전함과 불확실성을 숨쉬는 것 같이 깊은 깨달음을 거쳐 인정하는 것. 즉, 고집 피우지 않고 지배력과 주도권과 권력을 내어 버리는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사람은 나이가 들어 가면서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포기하고 체념하는 법! 고집을 버리는 것! 지배력과 주도권과 권력을 내놓아 버리는 것!

이는 자기를 넘어서는 지혜이자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자기의 마음 속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선택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가?


이것을 적절하게 체득하지 못하면 노쇠해질수록 더욱 힘들어지고 죽을 때는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천 명의 죽음을 지켜 본 전문의의 글이 있다 할지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집착하고 놓지 않으며 아직도 모른 체 다 안다는 생각을 가지고 죽음을 겪는 듯 하다. 지나온 가족사든 역사든 되풀이 되는 것은 이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의 정서가 처음에는 부인을, 다음에는 분노, 그 다음에는 거래와 협상, 다음엔 우울, 그리고 수용이라고 한다. 여기서 수용이란 포기나 체념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거의 모든 이들이 이 단계까지 못가고 우울 단계에서 머물다 간다고 한다. 이 우울은 너무나도 겪어 내기 어렵도록 힘들어서 다시 낮은 단계인 분노와 협상 쪽으로 되돌아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환상이다. 어짜피 막을 수 없는 과정에 대한 바라 봄이 아닌 몸부림과 저항이리라. 이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우리의 삶의 여정 전체에 놓여 있으나 한 번도 그러지를 못하고 마지막까지도 그러지 못하고 갈 수 밖에 없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자녀를 양육하는 일이 호기심과 신기함과 흥미로움이 없다면 그건 삶을 헛되게 사는 것이리라. 자녀의 반응과 상호작용을 통해 나의 과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이고, 나의 과거를 수정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며, 여기로부터서도 필연적 상실을 받아들일 수 있고 무상함를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다. 그런 좋은 기회를 놓아 버리는 경우에 조차 후회할 수 없는 마음들에 대해 삶은 단 한 번 뿐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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