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공산주의의 이념

 

오늘 내 목표는 – 몇 가지 설득력이 있기를 희망하는 근거들을 위해 – 내가 공산주의의 이념(Idee)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지성적 작용을 설명하는 것이다의심할 여지 없이 이러한 구축에 있어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가장 일반적인 것즉 이념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인데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진리들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이 경우에 이념은 공산주의의 그것이다), 모든 진리에 관한 것이다(이 경우에 이념은 플라톤이 에이도스[eidos]나 이데아[idea]라는 이름으로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이데아[Idee de Bien]라는 이름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어떤 것의 근대적 형태이다). 나는 공산주의의이념에 관해 가능한 한 분명하게 말하기 위해이러한 일반성의 상당 부분을 암시적인 채로 내버려 둘 요량이다.1

 

P182

 

<<공산주의적 이념>>의 작동은 세 가지 기본적인 구성요소들을 필요로 한다정치적 구성요소역사적 구성요소 그리고 주체적 구성요소를 말이다.


먼저 정치적 구성요소이것은 내가 하나의 진리즉 정치적 진리라고 부르는 것에 관련된다내가 제시한 중국의 문화 혁명(하나의 정치적 진리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분석에 관해영국의 일간지 옵저버Observer에 글을 기고한 한 비평가는오로지 이 중국 역사의 에피소드(물론그에게 있어불길하며 유혈이 낭자한 혼란인)와 나의 확실한 관계만을 인정하며영국의 경험주의적 전통이 <<이념적 정치의 전횡에 대한 전적인 자만에 대항하여 [옵저버 지의 독자들에게예방주사를>> 놓았다는 점으로 인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평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이다요컨대 그는 사실상 <<이념 없이 살라>>는 오늘날 세계 내에서 지배적인 명령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그를 만족시키기 위해나는 정치적 진리가 결국 순수하게 경험적인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서두를 떼고자 한다,그것은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집합적 해방의 실천이 일어나고실존하며결국에는 사라지게 되는 구체적으로 날짜가 기록된 시퀀스라고 말이다.2 우리는 또한 몇 가지 설명들을 제시할 수 있다말하자면, 1792년부터 1794년까지의 프랑스 혁명, 1927년부터 1949년까지 중국에서 일어난 인민해방 전쟁, 1902년부터 1917년까지 지속된 러시아의 볼세비즘(la bolchvisme), 그리고 – 불행히도 옵저버 지의 비평가는 아마도 나의 다른 모든 예들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 1965년부터 1968년까지의 문화대혁명이 그런 예들일 것이다그런 이후명백하게말하자면 철학적으로우리는 여기에서내가 존재와 사건L’Etre et l’evenement 이래로 제시해왔던 그런 의미에서진리의 절차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잠시 후 이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여하간에 모든 진리 절차는 그 진리의 주체를 규정한다는 점에즉 또한 경험적으로도 개인으로 환원불가능한 주체를 규정한다는 점에 유의하도록 하자.

 

P183 두번째 문단

 

이어서 역사적 구성요소에 대해 살펴보자연대적인 추정은 이를 드러낸다어떤 진리의 절차는 국지적 형식 아래 그 지지가 공간적이며일시적인 그리고 인류학적인 인류의 전체적인 변전 내에 기입된다. <<프랑스의>>라던지 또는 <<중국의>>라는 수식어들은 그 국지화의 경험적 색인이다그 수식어들은 실뱅 라자뤼스(cf. 앞의 주석을 볼 것)가 <<정치의 역사적 양상들>>에 대해 말하며그저 <<양상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실제로 어떤 진리의 역사적 차원이 있는데비록 진리가 최종심급에 있어 보편적이거나(내가 예를 들어 윤리학Ethique이나 성 바울 또는 보편주의의 정초Saint Paul ou la foundation de l’universalisme에서 그 말을 제시했던 의미에서또는 영원함에도(내가 세계의 논리Logiques des mondes나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Secnod Manifeste pour la philopsophie에서 말하기를 선택했던 그대로불구하고 말이다우리는 특히진리에 의해 결정된 전형(정치적인그러나 또한 사랑의예술적인 또는 과학적인)의 내부에서역사적 기입이 다른 진리들 사이의 관계들을 포함하며따라서 전체적인 인간에 속한 다른 지점들 내에 상황지어진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특히 진리에 앞서 창조될 다른 진리들에 관한 어떤 한 진리의 소급적인 효과들이 실존한다이 모든 것이 진리들의 시간을 가로지르는(trans-temporelle) 개방성을 요구한다.

 

P184 두번째 문단

 

결국 주체적인 구성요소가 나온다관건이 되는 것은 하나의 단적인 인간 동물로 정의되는그리고 명백히 모든 주체로부터 구분되는 인간동물이 정치적 진리 절차의 한 부분이 되는 결정3을 위한 가능성이다간단히 말하자면그러한 진리의 투사가 될 가능성인 것이다나는 세계의 논리에서그리고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에서 보다 간단하게그러한 결정을 통합(incorporation)으로 기술한다말하자면개별적 신체들(corps)과 그들이 사유정동활동적인 잠재성으로부터 끌어내는 모든 것들이 하나의 다른 신체즉 진리--(le-corps-de-verite)에 의해생성 중인 진리에 의해 주어진 세계 내에서의 물질적 실존의 원소들이 된다그것은 한 개별자가 개별성(또는 동물성그 둘은 같은 것이다)에 의해 부과된 경계들(이기주의경쟁유한성…)을 넘어설 수 있음을 선언하는 계기이다그 사람은 전적으로 그 사람인 그대로 있으면서도다른 한편으로는통합을 통해새로운 주체(Sujet)의 활동적인 부분이 될 수 있다나는 그러한 결정을즉 그러한 의지를 주체화라 명명한다.4 더욱 일반적으로주체화는 언제나 한 개인이 그 사람에게 고유하며 중요한 실존에 관하여 그리고 그러한 실존이 배치되는 세계에 관하여 진리의 장소를 고정하는 운동이다.

 

P185 두번째 문단

 

나는 세 가지 기본적 원소들의 추상적 전체화를즉 진리의 절차를역사적인 귀속(appurtenance)과 개별적인 주체화를 <<이념>>이라고 말한다우리는 즉각적으로 이념의 명료한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말하자면이념은 진리 절차의 단독성과 역사(Histoire)의 재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주체화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사례에서우리는 이념이 한 개인에게 있어 단독적인 정치적 과정에 대한 그의 참여(그의 진리--몸에 대한 연루)가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적 결정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말할 것이다이념을 통해그 개인은새로운 주체의 원소로서역사의 운동에 대한 그의 귀속을 실현한다. <<공산주의>>라는 말은 약 2 세기 동안(바뵈프[Babeuf] <<평등한 자들의 공동체>>이래로 지난 세기의 80년대에 이르기까지해방의 정치 또는 혁명적 정치의 전장 내에 위치된 이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름이었다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확정된 국가 내에서 공산주의 정당에 속한 투사가 되는 것이었다그러나 공산주의 정당의 투사가 된다는 것은 모든인류 전체의 역사적 방향설정에 대한 수백만의 행위자들 중 하나가 된다는 것이었다주체화는 공산주의의 이념에 속한 그 원소 내에서 국지적 귀속을 집합적 해방을 향한 인류의 행진이라는 정치적 절차와 막대한 상징적 영역에 연결시켰다시장에 전단을 돌리는 것 또한 역사의 무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P186 두번째 문단

 

따라서 우리는 <<공산주의>>라는 말이 왜 순수하게 정치적인 이름이 될 수 없는가를 알게 된다말하자면그 말은 주체화를 지탱하는 개인에게 있어 실제로 정치적 절차를 그 절차 이외의 다른 것에 연결 짓기 때문이다그 말은 더 이상 순수하게 역사적인 말이 될 수 없다왜냐하면우연성(contingence)으로 환원할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효과적인 정치적 절차가 없다면역사는 비어있는 상징체계(symbolism)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그리고 결국역사는 또한 순수하게 주체적인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말 일 수 없다실제로 주체화는 정치와 역사 <<사이에서>>,상징적인 전체성 내에 있는 단독성과 그 단독성의 투영(projection) 사이에서 작동하며그 물질성들과 그 상징화들이 없이 없다면주체화는 결정의 상태에 이를 수 없다. <<공산주의>>라는 말은 이념의 지위를 지니는데그것은 통합으로부터그리고 따라서 정치적 주체화의 내부로부터그 말이 정치역사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종합을 나타낸다는 것을 의미한다그것이 바로 공산주의를 개념으로 이해하기 보다 작용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은 이유다공산주의의 이념은 오로지 개인과 정치적 절차의 가장자리에서 정치의 역사적 투영에 의해 지탱되는 주체화의 그러한 구성요소로서만 실존할 뿐이다공산주의의 이념은 또한 그리고 동시에 역사 가운데로의 투영인 개인의 정치적-주체-(devenir-Sujet-politque)을 구성하는 것이다.

 

P187 두번째 문단

 

내 친구 슬라보예 지젝의 사변적인 영역을 향해 내가 이동하게 되기는 하지만5나는 라깡의 세 가지 주체의 심급들 – 실재상상계 그리고 상징계 – 의 등재 내에서 전반적으로는 이념의 작용을그리고 특정하게는 공산주의의 이념을 정식화하는 것이 이를 해명한다고 믿는다우리는 우선 진리의 절차 그 자체가 이념을 지탱하는 실재라고 가정할 것이다우리는 다음으로 역사가 오로지 상징적 실존만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실제로역사는 나타날 수 없다나타나기 위해서는 세계 내에 귀속되어야만 한다그러나 역사인간들의 변전의 전체로 상정되는 이상효과적인 실존 내에 그 자체를 위치시킬 수 있는 세계를 가지지 않는다역사는 사후적인 서사적 구성이다우리는 마지막으로 실재를 역사의 상징계(le symbolique) 내에 실재를 투영하는 주체화가 어떠한 실재도 그 자체로 상징화되지 않는다는 중요한 이유로 인해 상상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실재(le reel)는 결정된 세계 내에그리고 내가 재검토하게 될 것들에 관한 매우 특정한 조건들 아래에 실존한다그러나 그것은라깡이 반복해서 말했던 것처럼상징화할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사람들이 역사의 상징적 서사 내에 진리 절차의 실재를 투영할 수 있다는 것은 <<실재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다그것은 오로지 상상적으로만 그럴 것이나이는 그것이 무용하거나부정적이거나또는 부질없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며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오히려 반대로개인은 이념의 작용 가운데 <<주체6>> 구성되기 위한 자원을 찾는다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이념은 허구의 구조 내에서 진리를 드러낸다공산주의적 이념이라는 특정한 경우에이 이념은 관여하는 진리가 해방적인 정치의 시퀀스 일 때 작용하는데,우리는 <<공산주의>>가 이 시퀀스를 (그리고 따라서 이 시퀀스의 투사들을역사의 상징적 질서 내에서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혹은 다시 말해서공산주의적 이념은 개별적 주체화가 정치적 실재의 단편을 역사의 상징적 서사 내에 투영하는 상상적 작용이다그런 의미에서 이념이 (예상되는 것처럼이데올로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7.

 

오늘날 <<공산주의적>>이라는 말이 더 이상 어떤 하나의 정치를 규정하는 형용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이 실재와 이념 사이의 단락(court-circuit)은 잘못 형성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서사시적이면서도 동시에 끔찍한 한 세기의 경험들을 필요로 했던 표현들을 <<공산주의정당>> 또는 – <<사회주의 국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피하고자 했던 모순어법인 – <<공산주의 국가>>와 같은 표현들을 야기했다우리는 이러한 단락(court-circuit)에서 마르크스주의의 헤겔적 기원으로부터 온 오랜 과정의 효과를 볼 수 있다헤겔에게 있어 실제로정치의 역사적인 노출은 상상적 주체화가 아니며그것은 실재 그 자체다왜냐하면 그가 착상했던 그대로의 변증법에 있어 결정적인 공리는 <<은 그 자체의 변전이다>>, 또는 동일한 것에 상응하는 <<시간은 개념의 현존재[etre-la]>>라는 것이다따라서헤겔적인 사변적 유산에 의하여우리는 <<공산주의>>라는 이름 아래 실행되는 혁명 정치적 시퀀스들의또는 집합적 해방이 지닌 상이한 파편들의역사적 기입이 역사의 의미에 따라 발전하는 그것들의 진리를 드러낸다고 생각할 근거가 있다역사적 의미에 대한 진리들의 이러한 잠재적 종속은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공산주의적 정치에 대해공산주의 정당에 대해 그리고 공산주의적 투사들에 대해 말할 수 있도록 이끈다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형용사화를 경계해야만 함을 안다그런 경향과 싸우기 위해나는 여러 차례 역사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말하자면 진리들에 다른 의미가 없다는특히 역사라는 의미가 없다는나의 진리 관념에 부합하는 주장을 단언해야만 했다그러나 오늘 내게 있어 그 판단은 명확히 말해져야만 한다확실히역사의 다른 실재는 없으며따라서 역사가 실존할 수 없다는 것은 참이며선험적으로 참이다세계의 불연속은 나타남의 법칙이며따라서 실존의 법칙이다그렇지만조직된 정치적 행동의 실재적 조건 하에거기 있는 것,그것은 공산주의적 이념즉 지성적 주체화에 연결된그리고 실재와 상징적인 것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을 개인적인 층위에 통합시키는작용이다우리는 그 이념을 모든 술어적 사용으로부터 풀어내어 회복시켜야만 한다우리는 이념을 구원해야 하지만그러나 또한 실재를 모든 이념과의 직접적인 융합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오로지 공산주의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결국 터무니 없는 그러한 정치 만이 개인들의 주체-됨의 가능적 역량으로서의 공산주의적 이념에 의해 구원될 수 있다

 

P190 두번째 문단

 

따라서 실재적-정치상징적-역사상상적-이데올로기라는 삼중성 내에서 이념을 식별하기 위해서는 진리들로부터즉 정치적 실재로부터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나는 상당히 추산적인 그리고 상당히 단순한 형식 하에 나의 통상적인 개념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P191

 

나는 특정한 상황에 대해 실존하는(만일 우리가 존재와 사건[1988]이나 철학을 위한 선언[1989]에 준거한다면또는 특정한 세계 내에 나타나는(세계의 논리[2006]나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2009]에 준거한다면그러한 신체들과 언어들의 정상적 배치 내에서 일어나는 단절을 <<사건>>이라고 명명한다.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상황에 내부적인 가능성의 실현이라거나또는 세계의 초월적인 법칙들에 의존적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사건은 새로운 가능성들의 창조다사건은 단순히 객관적으로 가능한 것들의 층위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가능한 것들의 가능성에 위치한다또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터인데상황 또는 세계에 비추어 볼 때사건은 그 상황 또는 그 세계의 합법성의 구성에 대한 엄격한 관점으로부터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개방한다만일 라깡에게 있어 실재 = 불가능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것을 기억한다면즉각적으로 우리는 사건의 본질적으로 실재적인 차원을 알게 된다우리는 또한 사건이 그 자체의 가능적 미래로서의 실재의 도래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정확하게 가능한 것들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제약의 체제를 <<국가[Etat]>> 또는 <<상황의 상태[etat de la situation]>>라고 명명한다우리는 마찬가지로 국가가가능한 것의 분명한 규정으로부터 볼 때주어진 상황 내에서그 상황에 속한 고유하게 불가능한 것을 규정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국가는 언제나 가능성의 한계이며거기에서 사건은 무한화(infinitisation)예를 들어오늘날 정치적으로 가능한 것들이라는 관점에서 국가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생각해 보자면자본주의적 경제정부의 헌정적 형식소유와 상속에 관련한 법들(사법적인 의미에서), 군대경찰 등이 있을 것이다.우리는 당연히 알튀쎄르가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라고 명명했던 – 그리고 공통적인 목적을 통해 규정할 수 있었던말하자면 공산주의적 이념이 하나의 가능성을 지정하는 것을 금지하는 – 것들을 포함하는 그 모든 배치들과 그 모든 장치들을 통해어떻게 국가가 통상적으로 강제력을 통해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지를 알게 된다명백하게 그로부터 사건은 국가의 힘으로부터 감산되는 것으로서 도래하는 어떤 것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P192 두번째 문단

 

나는 상황 내에서(세계 내에서하나의 사건의 결과로부터 연속된 조직화를 <<진리의 절차>> 또는<<진리>>라고 명명한다우리는 그런 이후에 하나의 본질적인 우연성이즉 그러한 조직화의 사건적 기원의 우연성이 모든 진리에 공-외현한다는 점에 유의할 것이다나는 국가의 실존으로부터 오는 결과들을 <<사실들>>이라고 명명한다우리는 그 완전한 필연성이 언제나 국가의 편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따라서 우리는 하나의 진리가 순수한 사실들에 의해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진리의 사실적이지 않은 부분은 진리의 방향설정에 속하며우리는 그것을 주체적이라 말할 것이다우리는 또한 진리의 물질적 <<신체>> – 주체적으로 방향 지어진 것으로서의 – 가 하나의 예외적인 동체라고 말할 것이다거리낌없이 종교적 은유를 사용하여나는 기꺼이 진리--몸이그 안에서 사실들로 환원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으로 인해영광의 신체(un corps glorieux)로 명명될 수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정치적으로 새로운 집합적 주체의다수적 개인들의 조직의 그것인 그 신체와 관련하여우리는 그러한 신체가 정치적 진리의 창안에 참여한다고 말할 것이다그러한 창조가 활성적인 세계의 상태(l’Etat du monde)와 관련하여우리는 역사적 사실들을 말할 것이다역사적 사실들에 의해 구성된역사 그 자체는 결코 상태/국가의 힘으로부터 감산되지 않는다역사는 주체적이지도 영광스럽지도 않다차라리 역사는 국가의 역사라고 말해야만 한다.8

 

P193 두번째 문단

 

그런 이후 공산주의적 이념에 관한 우리의 주제로 되돌아갈 수 있다만일 이념개별자에게 있어,특정한 실재적 진리가 역사의 상징적 운동에 상상적으로 투영된다면우리는 이념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진리를 현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또는 달리 말하자면이념이 어떤 사실들을 진리에 속한 실재의 상징들로서 현시한다고 말이다따라서 공산주의의 이념은 우리가 혁명적 정치와 그것의 정당을 공산주의가 필연적인 결말이었다는 역사적 의미의 재현 내에 기입하는 것을 승인할 수 있었다또는 정의상 연약한 가능한 것의 창조를 권력의 육중함으로 인해 상징화하는 것에 상당하는 <<사회주의의 조국>>을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p193-194] 실재와 상징계 사이에서 작동하는 매개인 이념은 언제나 개인에게 사건과 사실 사이에 위치하는 어떤 것을 제시한다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적 이념의 실재적 지위에 관한 끝없는 토론들이 난관에 봉착하는 이유다관건이 되는 것은 칸트적 의미에서 현실적 효력은 없지만 이성적 합목적성을 우리의 지성(entendement, 이해력)에 고정시킬 수 있는 규제이념인가아니면 혁명 이후의 새로운 상태(Etat)의 세계에 관한 행동을 통해 점차적으로 실현해야 하는 계획인가?그것은 하나의 유토피아위험한 그리고 또한 범죄적인 유토피아인가아니면 역사의 이성이라는 이름인가이념의 주체적 작용은 단순하게 구성되는 것이 아니기에우리는 이런 유형의 논의를 잘 이끌어갈 능력이 없다이념의 주체적 작용은 그것의 절대적으로 실재적인 조건으로서 해방의 정치를 이루는 실재적 시퀀스들의 실존을 둘러싸지만그 작용은 또한 상징화에 적합한 역사적 사실들을 담은 팔레트의 배치를 상정한다그 작용은 사건과 그것으로부터 조직된 정치적 결과들이 사실들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진리의 절차를 상태/국가의 법에 종속시킬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념은 사라지고,빠져나가며잡을 수 없는 것을 진리의 생성(devenir) 내에 역사적으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정은 오로지 그러한 불확실하고사라져버리며빠져나가는그리고 잡을 수 없는 차원을 그것의 실재로 인정하는 한에 있어 이념인 것이다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적 이념이 <<정확한 이념들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마오가 했던 것처럼 대답하는 이유다, <<정확한 이념들>>은 실천으로부터 온다고 말이다(정확한 이념들이란 상황 내에 있는 진리의 노선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우리는 명백히 <<실천>>이 실재의 물질적 이름이라고 이해한다그러므로 정확한 (정치적이념들의<<진정한(en verite>> 생성을 역사 내에 상징화하는 이념즉 공산주의의 이념은 결국 실천 그 자체(실재의 경험에 대한)가 되지만그렇다고 해서 실천 그 자체로 환원되지는 않는다그것은 바로 실천은 실존이 아니라 활성적인 진리가 드러나는 프로토콜이기 때문이다.

 

P195 두번째 문단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결국 정반대의 형식을 취하는즉 국가(Etat)의 형식을 취하는 해방의 정치 진리들로부터 진리들을 드러내는 데까지 이르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며어느 정도는 정당화한다진리의 절차와 역사적 사실들 간의 이데올로기적(상상적관계가 관건이 되는 이상왜 그 관계를 끝까지 밀고 나가기를 주저하며왜 사건과 국가 사이의 관계가 관건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국가와 혁명그것은 레닌의 매우 유명한 텍스트의 제목이다그리고 이 텍스트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국가와 사건이다하지만레닌은 그러한 논점에 관해 마르크스를 따라서 혁명 이후의 문제가 될 국가가 국가의 소멸에 관한 국가-국가(non-Etat)로의 전이를 조직하는 국가이어야만 한가고 조심스럽게 말한다.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공산주의의 이념은 언제나 국가의 힘으로부터 감산된(soustrait) 정치의 실재를 <<다른 국가>>라는 역사적 형상 안으로 투영할 수 있다말하자면그 본질이 소멸하는 것인 이상 <<다른 국가>> 또한 국가의 힘으로부터따라서 그것의 고유한 힘으로부터감산된다는 의미에서그 감산(soustraction)이 이 주체화 작용에 내부적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말이다.   

 

P196 두번째 문단

 

그것은 모든 혁명적 정치 내에 있는 고유한 이름들이 지닌 결정적인 중요성을 사유하고 인정해야 한다는 그러한 맥락 내에 있다그 중요성은 사실상 사변적이며 역설적이다한편으로확실히해방의 정치는 본질적으로 익명적 대중들의 정치이며그것은 이름 없는 자들(sans-noms)9국가에 의해 거대한 무의미함에 붙들려 있는 자들의 승리다다른 한편으로해방의 정치는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적으로 그것을 규정하는그것을 재현하는 고유한 이름들에 의해 식별되며다른 종류의 정치가 그런 것 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그런 경향을 보인다왜 이런 고유한 이름들의 연속이 있는가왜 혁명적 영웅들의 이 영광스러운 만신전인가왜 스파르타쿠스토마스 뮌쩌로베스피에르투쌩-루베르튀르블랑퀴마르크스레닌로자 룩셈부르크마오체 게바라그리고 너무나 많은 다른 영웅들이 있는가그것은 그 모든 고유한 이름들이 역사적으로개인의 형상즉 신체(corps)와 사유의 순수한 단독성의 형상을 통해정치의 사라지는 시퀀스들로 이루어진 드물고도 동시에 소중한 그물망을 진리로서 상징화하기 때문이다진리--몸의 미묘한 형식주의는 여기에서 경험적 실존으로서 읽을 수 있다평범한 개인은 그 고유한 개별성의 매개로서의그가 그로부터 유한성을 돌파할 수 있는 증거로서의 영광스럽고 전형적인 개인들을 발견한다수많은 투사들의반란자들의병사들의 익명적 행동은 재현불가능한 그것 자체를 통해 고유한 이름의 단순하고 힘있는 상징 내에서 유사해지고 하나로 셈해진다따라서고유한 이름들은 이념의 작용에 참여하며우리가 언급했던 자들은 다른 단계들 내에서 공산주의의 이념을 이루는 구성물들이다주저하지 말고 이렇게 말하자스탈린 <<개인 숭배>>에 관한 흐르시초프의 비난은 잘못된 것이며민주주의라는 허울 아래우리가 지난 수십년 동안 조력했던 공산주의의 이념의 효력상실을 고지했다고 말이다스탈린에 대한 그리고 그가 가졌던 국가의 공포정치적 비전에 대한 정치적 비판은 엄격한 방식으로혁명적 정치 그 자체의 관점으로부터 주도되어야만 했으며마오는 그의 여러 텍스트들을 통해 그 이상을 그려냈다10실제로 스탈린적인 국가의 지도자 집단을 옹호했던 흐르시초프는 반대로 그러한 방향으로 나가지 않았으며스탈린이라는 이름 아래 실행된 공포정치(la Terreur)에 대해 말하는 것에즉 정치적 주체화에 대해 고유한 이름들이 지닌 역학에 대한 모호한 비판에 만족했다그로 인해 흐르시초프 그 자신이, 10년 뒤에반동적 인간주의의 <<신철학자들[nouveaux philosophes]>>이 의탁하는 기반이 되었다그로부터만일 정치적 반동이 특정한 이름으로부터 그 상징적 기능이 박탈할 것을 요청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우리는 그 기능 자체를 제거할 수 없다는 매우 귀중한 교훈이 따른다왜냐하면 이념은 – 그리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대중적인 무한을 지시하므로단독적으로 공산주의적 이념은 – 고유한 이름들의 유한성을 필요로 한다.

 

P198 두번째 문단

 

가능한 단순하게 요약해보자진리는 정치적 실재다역사는고유한 이름들의 보고로서도상징적 장소다공산주의의 이념이 지닌 이데올로기적 작용은 역사의 상징적 허구 내에 있는 정치적 실재의 상상적 투영이며여기에는 고유한 이름의 하나(l’Un)에 의해 셀 수 없이 많은 대중들의 행동이 드러내는 재현의 형식 아래 있는 허구 또한 포함된다그 이념의 기능은 진리의 절차의 규율에 개인적 통합을 지지하며그들 자신의 눈에 진리--몸 또는 주체화 가능한 신체의 일부가 됨으로 인해 개인이 생존의 상태적 제약들을 초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P199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왜 이 모호한 작용에 의존해야만 하는가왜 사건과 그 결과들은 또한<<개인 숭배>>의 변형들을 수반하는 사실의 형식 아래그리고 흔히 폭력적인 사실의 형식 아래 드러나는가해방의 정치가 취하는 이 역사적 가정은 왜 그러한가?

 

가장 단순한 근거는 평범한 역사(histoire), 즉 개인적 삶의 역사가 국가 내에 잡혀 있다는 것이다어떤 삶의 역사는 그 자체로 결정도 선택도 없이 고전적으로 가족조국재산종교관습들 등에 의해 매개되는 국가의 역사의 일부다그 모든 것에 대한 예외라는 영웅적인그러나 개인적인투영은 – 하나의 진리 전차가 그런 것처럼 – 또한 타자들과의 분할에 있으며그것은 예외로서만이 아니라또한 그 이후로 모두에게 공통적인 가능성으로 드러날 필요가 있다그리고 이념의 기능들 중 하나는 예외를 실존들 가운데 평범한 것 안에 투영하는 것즉 단지 실존할 뿐인 것에 어느 정도의 전대미문의 것을 채워 넣는 것이다내 주위에 있는 개인들에게남편이나 부인이웃과 친구동료들에게 또한 만들어지는 중인 진리들이라는 멋진 예외가 있음을우리가 국가의 제약에 의해 우리의 실존들의 형식에 대해 예정되지 않았음을 확신시키는 것 말이다물론종국에는오로지 진리 절차의 가식 없는또는 투사적인경험이 이러 저러한 사람들이 진리--몸에 들어가기를 강제할 것이다그러나 그를 이러한 경험이 주어지는 지점으로 끌어들이기 위해그를 진리에 중요한 것에 대한 구경꾼으로그리고 따라서 이미 반은 행동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이념의 매개와 분할은 거의 언제나 필수적이다공산주의의 이념은(그것에 어떤 다른 이름을 부여하더라도 거의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인데말하자면 어떠한 이념도 그 이름에 따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국가의 불순한 언어로 진리의 절차를 말할 수 있는그리고 따라서한 동안국가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규정하는 강제력의 선들을 옮길 수 있는 그런 것이다가장 평범한 몸짓은정황에 대한 이런 관점에서 볼 때그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그의 코드화된 실존적 특질들로부터 거리가 먼예를 들자면말리 출신 노동자들의 숙소나 공장 입구에서 이루어지는진정한 정치적 회합에 누군가를 데려가는 것이다정치가 발생하는 장소에 오게 될 때그는 그의 통합(incorporation)을 또는 그의 후퇴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그가 그 장소에 가기 위해서는이념이 – 그리고 2세기 동안또는 아마도 플라톤 이래로그것은 공산주의의 이념이다 그를 재현의 질서즉 역사의 그리고 국가의 질서 안으로 이미-옮겨(pre-deplacer) 넣어야 한다그 상징은 실재의 창조적인 미끄러짐(fuite)을 지지대 삼아 상상적으로 도래해야 한다참된 것의 연약함은 우의적(allegorique) 사실들을 이데올로기화하고 역사화 한다어두운 방에서 행해지는 네 명의 노동자들과 한 명의 학생의 빈약하지만 중요한 토론은 순간적으로 공산주의의 차원으로 확장되며따라서 참된 것(le Vrai)의 국지적 구축의 계기가 될 수 있고또한 이미 그 계기가 되어있을 것임에 틀림없다참된 것은 상징의 확장을 통해 가시화 되며, <<정확한 이념들>>은 이 거의 비가시적인 실천으로부터 도래한다외딴 교외에서 이뤄진 다섯 사람의 회합은 그 덧없음의 양식으로 영원한 것이다그로 인해 실재는 허구의 구조 내에서 드러나야 한다.

 

P201

 

두 번째 근거는 모든 사건이 갑작스러운 것이라는 점이다그렇지 않다면사건은 사실로서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며결국 사건과는 모순적인 국가(Etat) 역사 내에 기입될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다음과 같이 표명할 수 있다왜 그러한 갑작스러운 것들을 준비해야 하는가그리고 이번에는아무리 우리가 이미 실제로 과거의 사건에 영향을 받은 투사들이라고 하더라도우리가 진리--몸 안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그 문제는 실존한다분명히우리는 새로운 가능성들의 배치를 제안한다그러나 도래하는 사건은 우리에게도 또한 여전히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최소한 이데올로기적으로또는 지성적으로새로운 가능성의 창조를 예상하기 위해우리는 이념을 가져야만 한다말하자면 당연히 우리를 투사들로 삼는 진리의 절차가 실현하는 가능성들의 새로움을 포함하는그리고 실재적 가능성들인그러나 또한 우리가 아직 생각해 보지 못한 다른 가능성들의 형식적 가능성을 포함하는 이념을 말이다이념은 언제나 새로운 진리가 역사적으로 가능하다는 단언이다그리고 불가능을 가능의 방향으로 강제하는 것이 국가(Etat)의 힘으로부터의 감산을 통해 실행되는 이상,이념은 이 감산적 과정이 무한하다는 것을 단언한다고 말할 수 있다말하자면우리가 실제로 투사로 참여하는 이동을 포함하는 그 이전의 이동들이 아무리 급진적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국가에 의해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 고정된 분할의 선이 한 번 더 이동될 것이라고 말이다그것이 바로 오늘날 공산주의적 이념의 내용들 중 하나는 – 그리고 새로운 국가(Etat)의 기능을 통해 이를 수 있는 목적으로서의 공산주의라는 주제에 반하는 그것은 – 국가의 소멸이 의심의 여지 없이 모든 정치적 행동 내에서 가시화 되어야 하는 원칙이지만(국가에 대한 모든 직접적인 포함국가에 대한 모든 자금 요구모든 선거에 대한 참여 등을 불가피하게 거부하는 것으로서의 <<국가로부터 거리를 두는 정치>>라는 정식이 표현하는), 다른 한편으로언제나 새로운 정치적 진리의 창조를 통해 상태적인따라서 역사적인,사실들과 사건의 영원한 결과들 사이에 그어지는 분할의 선이 이동할 것이기에그 소멸이 또한 영원한 과업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P202 두번째 문단

 

그로 인해 우리는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한 동시대적 변경에 관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11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는내가 말했던 것처럼그 말의 위치가 더 이상 <<공산주의적 정당>>이나 <<공산주의적 체제들>>와 같이 형용사의 위치일 수 없다는 것이다사회주의-국가의 그것과 같은 -형식은 이제 이념의 실재적 지지를 보증하기에 부적합하다뿐만 아니라 그 문제는 중국의 문화 혁명과 모호하게 명명된 프랑스의 <<68 5>>이라는 이전 세기의 60년대와 70년대의 중요한 두 사건에서 우선적인 부정적 표현을 발견했다이어서그 문제는 이전에 실험되었고 여전히 실험되고 있는전적으로 당-없는 정치에 의존하는 새로운 정치적 형식들로부터 이러한 표현을 발견한다12그렇지만집합적 층위에서세계화된 자본주의가 지지하는 부르주의적 국가의 – 소위 <<민주주의적>>– 근대적 형식은 이데올로지의 장 내에서 경쟁상대가 없는 것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30년 동안, <<공산주의>>라는 말은 완전히 잊혀졌고실제적으로 범죄적 기획과 동일시 되었다그것이 바로 정치의 주체적 상황이 그다지도 불명확하게 되었던 이유다이념이 없다면인민의 대중들의 방향상실은 불가피하다.

 

P203 두번째 문단

 

그렇지만여러 가지 징후들로부터그리고 특히 현재 이 강연에서그 반동적인 시기가 완결되었음이 나타난다역사적인 역설은어떤 의미에서우리가 20세기로부터 물려받은 문제들 보다 19세기의 전반기에 검토되었던 문제들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1840년 무렵에 그랬던 것처럼우리는 파렴치한 자본주의에그것이 사회들을 합리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이라는 문제에 대면하고 있다.모든 곳에서 가난한 자들은 존재의 과오이며아프리카인들은 뒤떨어졌고미래는말하자면서구 세계의 <<문명화된>> 부르주아지들에게일본인들과 같이 동일한 궤적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속해 있다고 암시한다오늘날 그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우리는 부유한 나라들의 동일한 내부에서 극심한 비참함으로 매우 잘 알려진 지역들을 발견한다우리는사회적 계급들 간에서와 마찬가지로 나라들 사이에서엄청나게 증대되는 불평등을 보게 된다 3세계의 촌부들 사이에서한편으로는 우리의 <<발전한>> 사회들의 실업자들과 가난한 임금 노동자들 사이에서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적>> 중간 계급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서주체적이고 정치적인 단절은 절대적이며일종의 증오에 찬 무관심을 통해 나타난다정치적 권력은 그 어느 때 보다현실적인 위기가 <<은행들을 구원한다>>는 유일한 모토로 드러내는 것처럼오로지 자본주의의 권력에 토대를 둘 뿐이다혁명가들은 청년 대중의 넓은 부분들과 반목하고약하게 조직되어 있으며허무주의적 절망에 의해 사로잡혀 있으며대다수의 지식인들은 굴종적이다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또한 이후에 유명해진 1847년의 공산당 선언Manifeste du parti communiste의 시기에 마르크스와 그의 친구들만큼이나 고립되어우리는 더욱 수가 늘어나 노동자 및 인민의 대중들 내에서 새로운 유형의 정치적 과정들을 조직하고실재 내에서 공산주의적 이념의 되살아난 형식들을 지탱할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19세기 초와 같이문제가 되는 것은이후에 그렇게 될 것처럼 – 20세기 전체에 걸쳐너무나 무모하고 교조적이었던 것처럼 –, 이념의 승리가 아니다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의 실존과 그것의 표명의 기한들이다우선공산주의적 가설에 대한 힘있는 주체적 실존을 부여하는 것그것이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가 우리 자신의 방식으로 이행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그리고 그것은 흥미로운 과제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언제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유의 구축과 국지적이고 단독적이지만 보편적으로 전이가능한(transmissible) 진리의 단편들에 대한 실험을 조합하여,우리는 공산주의적 가설이라는또는 보다 정확히 말해서 공산주의의 이념이라는새로운 실존을 개인적 의식 내에서 보증할 수 있다우리는 그 이념이 실존하는 세 번째 시기를 만들 수 있다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며따라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

 

 

 

1. 이념이라는 주제는 내 작업에서 차차 나타나게 된다그 주제는 분명히 <철학을 위한 선언>에서 내가 착수한 작업에 이념의 본성에 대한 새롭게 재개된 탐색을 요구하는 ‘다수의 플라톤주의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인 80년대 후반에도 이미 현존하고 있었다. <세계의 논리>에서이 탐색은 하나의 명령으로 나타난다. ‘참된 삶은 우리에게 모든 이념이 결여된 삶을 살라고 명령하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적 유물론이라는 규범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이념에 따라서 사는 삶으로 이해된다나는 이념의 논리를 <철학을 위한 두 번째 선언>에서 훨씬 더 자세하게 검토했는데여기에서 이념화라는 개념이그리고 이에 따라이념의 작동적인 또는 실행적인 가치가 도입된다이것은 플라톤 저작 사용의 르네상스와 같은 어떤 것에 대한 다면적인 헌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예를 들자면, ‘오늘날을 위해플라톤!’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2년간 진행되었던 나의 세미나라던가나의 영화 기획 <플라톤의 삶>, 그리고 2010년까지 완성하여 출간하고자 하는 나의 <국가편의 전체 번역 – <도시국가(공산주의)에 관하여>라는 이름을 다시 붙이고 9장으로 다시 구분한 – 과 같은 플라톤에 대한 책에 의해서 말이다.

 

2. 내재적 종결로 운명 지어진 시퀀스들로 가장된 정치의 희소한 실존은 <이름의 인류학L’Antthropologie du Nom(Seuil, 1996)>에서 실뱅 라자뤼스에 의해 매우 강력하게 단언된다그는 이러한 시퀀스들을 <<정치의 역사적 양상들>>로 지칭하는데이 양상들은 어떤 유형의 정치와 그것의 사유 사이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다진리 절차에 대한 나의 철학적 설명은 외관에 있어 이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사건과 유적임[genericity]이라는 개념은 라자뤼스의 사유에서는 완전히 결여된 것이다). 나는 <세계의 논리>에서 내 철학적 기획이 정치 그 자체의 입장에서 설명된 정치에 대한 사유를 개진하는 라자뤼스의 기획과 어떤 의미에서 결코 양립할 수 없는지에 대해 설명했다그에게 있어서도 역시 분명하게 양상들의 시간적 틀이라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주지할 것.

 

3. 이념(Idee)이 개별적인 참여(engagement)을 둘러싸는 결정선택의지(the Will)의 그러한 측면은 피터 홀워드의 작업들에서 더욱 더 잘 드러나고 있다결과적으로그 범주들이 더욱 가시적인 프랑스와 아이티의 혁명들에 대한 준거가 이제 그 모든 작업들에 출몰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4. 1982년에 출간된 내 책 주체의 이론Theorie du Sujet에서주체화 및 주체적 과정들의 개념쌍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그것은브루노 보스틸즈가 그의 작업들(최근에 출간된 훌륭한 주석을 싣고 있는 전술된 책의 영역본이 포함된 작업들)에서 주장하는 그대로내가 점차적으로 그 책의 변증법적 직관들 중 일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의 징조이다.

 

5. 슬라보예 지젝은 아마도 오늘날 라깡의 공헌에 가장 가까이 인접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끈기 있으면서도 정력적으로 공산주의의 이념의 회귀를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사상가일 것이다이것은 그의 진정한 스승이 헤겔이며그가 전체(Totalite)라는 모티브에 해석을 종속시키기를 그만 둔 이상헤겔에 대한 전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오늘날 철학에는 공산주의를 구원할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말하자면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의 텍스트들에 대한 반복적인 검토의 대가로(그것이 내가 실행하는 것인데헤겔을 단념하는 것또는 하나의 다른 헤겔을미지의 헤겔을 제시하는 것그것이 바로 지젝이 라깡을 논거로 하여 행하는 일이다(라깡은 줄곧우선은 명시적으로이어서 비밀스럽게훌륭한 헤겔주의자였다고 지젝은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6. <<주체>> 산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에서 이해된다첫 번째 의미는 <<불멸적인 것으로 살라>>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번역된 금언과 같다. <<()[en]>>라는 말은 <<마치 그런 것처럼>>을 의미한다두 번째 의미는 위상학적이다말하자면 통합이란 실제로 개인이 진리의 주체-(le corps-sujet) <<내에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그러한 미묘한 의미들은 세계의 논리가 결론짓는 진리--몸에 대한 이론에 의해 해명된다내가 인정해야만 할 것은 그것이 결정적인 결론이기는 하지만,여전히 너무나 압축적이고 난해하다는 점이다.

 

7.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ideologie]>>라는 닳아빠진 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가장 간단한 방법은 그것의 형성에 가장 가까운 것에 의존하는 것이다말하자면이념[Idee]에 속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ideologique]>>이다.

 

8. 역사가 국가의 역사라는 것은 실뱅 라자뤼스에 의해 정치적 지성의 장에 도입된 테제이나그는 그 모든 전개들을 추가로 발표하지 않았다여기에서 또한국가에 대한 나의 존재론적-철학적 개념 – 80년대 중반에 도입된 – 이 다른 (수학적증명과 (메타정치적운명에 의해 표명되었음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그렇지만중요한 지점에 관해 공존가능성이 유지된다말하자면어떠한 정치적 진리의 절차도고유한 본질에 있어국가의 역사적 활동들과 혼동될 수 없다는 지점에 대해서 말이다.

 

9. <<이름 없는 자들[sans-noms]>> <<몫 없는 자들[sans-part]>>, 그리고 마침내오늘날의 모든 정치적 행동들 내에서, <<등록증 없는[sans-papier]>>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기능이 모든 사람들이 부정적 현시에또는 보다 독점적으로 말해서해방의 정치의 인간적 영역에 속한다자끄 랑시에는,특히 19세기의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철저한 연구로부터철학적 장 내에서지배적 분류에 귀속되지 않는 것의 민주주의적 영향력에 대해 특별히 강조했다이러한 관념은 실제로 적어도 프롤레타리아를 유적인 인류로 정의하는 1844년 수고(Manusrits de 1844)를 쓴 시기의 마르크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그 이유는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부르주아지들이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그대로예의 바른,정상적인또는 <<정직한>>) 인간(Homme)을 정의하는 기준인 재산의 소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그 관념은민주주의의 혐오(La haine de la democratie)에서 나타나는 것처럼랑시에르가 <<민주주의>>라는 말에 대해 단언하는 구원의 기본에 대한 것이다나는 우리가 그 말을 매우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의견을 따르지 않는데달리 말하자면어쨌든 공산주의의 이념을 통한 우회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그 논의는 시작되었고계속될 것이다.   

 

10. 스탈린에 관한 마오의 텍스트들에 대해서분명히 <<소비에트 모델 또는 중국의 길>>이라는 부제로 후치시(Hu Chi-hsi)가 번역하여 소개한 소책자 마오쩌둥과 사회주의의 구축Mao Tse-Toung et la construction du socialisme을 참고한다나는 세계의 논리의 도입부에서 참된 것의 영속성이라는 이념에 의해 방향 지어진 주석을 제시했던 바 있다.


11. 공산주의의 이념이 지닌 세 가지 단계들특히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되는 것을(강령 그리고국가라는 의미에서시도했던 그 단계(두 번째)에 관해우리는 사르코지는 무엇에 대한 이름인가?(De quoi Sarkozy est-il le nom?)라는 제목을 붙인 정황들 4(Circonstances 4)의 마지막 장들을 참조할 것이다.

 

12. 새로운 정치적 형식들의 경험은 과거 30년 동안 여러 차례 그리고 열정적으로 진행되었다. 1980-81년에 폴란드에서 진행되었던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sc) 운동이란 혁명의 첫 번째 시퀀스프랑스의 정치 조직(l’Organisation politique), 멕시코의 자파티스트 운동네팔의 마오주의자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고갈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관련된 운동의 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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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플라톤의 국가 강의La Republique de Platon par Alain Bdiou(1989-1990)


1강


철학의 종말이라는 동시대의 테제, 몰락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내재적 종말이라는, 말하자면, 라꾸-라바르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철학의 역사에 내재하는 >을, 즉 그것의 종말이라는 주제를 생산했던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테제와는 반대로, 철학은 그 종말의 형상 내에 실존한다. 우리는 철학이 계속된다는 테제를, 즉 철학이 실존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그 종말의 형상이 아닌 이행의 형상 가운데 오늘날 철학이 실존하는 양식을 제시하기 위한 테제를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철학의 종말에 관한 모든 이론은 또한 그 시작의 이론임이 드러난다는 것을 – 그러나 그것이 아마도 철학의 역사적 단독성일 것임을 – 말한다. 


그런 이론은 그리스에 관한 논쟁을 초래하는데, 그 논쟁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반대한다.

- 기원 또는 그리스적 기원의 지지자들에 대해

- 근대적 인류학의 지식, 특히 장-피에르 베르낭(Jean-Pierre Vernant)과 비달 나께(Vidal Naquet)의 학파의 지식에 종속된 철학의 이해를 제시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또한, 레비나스와 같이, 철학의 그리스적 시작을 중심에서 어긋나게 하며, 철학에 유대적 시작을 복구할 수 있지만, 그 탈중심화에는 그리스적 시작에 관한 판단이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사실상, 철학의 종말에 내려진 모든 판단은 언제나 철학의 현실적 상황에 관해 언표를 가로지르는 정세의 판단을, 그리고 그것의 기원 또는 시작에 내려진 판단을 포함한다.


철학의 재개라는 테제를 지지하기 위한 우리의 방법은 무엇이 될 것인가? 우리는 국가로부터 플라톤에 대한 재검토에 착수할 것이다. 즉, 우리는 두 가지 테제에 의지하여 플라톤으로부터 출발한다.

시작에 관한 테제: 철학은 플라톤과 함께 시작한다.

상황에 관한 테제: 플라톤과 같이, 우리는 오늘날 소피스트들에, 즉 철학이 끝났다고 하는 것을 바로 그 언표들 중 하나로 하는 근대적인 소피스트적 변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만일 고대의 소피스적 변설이 불가능성의 테제를, 다시 말해 철학은 가능하지 않다는 테제를 주장했다면, 이번에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철학의 완성이라는 테제를 주장하는 근대적인 소피스트적 변설은 그 동일한 불가능성의 테제와 연관된다. 그에 반해, 우리에게 그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던 플라톤의 가이드를 통해, 우리에게 그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따라서 플라톤에 대한 의지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진다. 즉, 철학의 시작에 대한 조건들을, 그리고 오늘날 그것의 속행에 호의적인 가능성의 논증을 검토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서 동시대성을 발견하도록 부추겼던 한 논거는 철학적인 우리의 세기가 매우 반-플라톤적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있어, 플라톤은 사유의 질병에 속한 고유한 이름이다. 따라서 철학이 지속한다는 것에 따라 거기에서 지탱되는 반-플라톤주의와 종말의 테제 사이의 유대, 그리고 플라톤주의에 대한 의존과 그 테제 사이의 유대가 있었다. 우리는 국가에서 철학에 관한 그리고 철학자 – 플라톤이 철학을 통해 의미하는 것을 결정하는 – 에 관한 다양한 정의와 언표를 추출해낼 것이다. 그 시작이라는 주제 아래 연결되어, 우리는 명명의 체계가 실행되는 것을 가로질러 철학적 담론의 배치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검토는 우리를 인도하여 철학과 그것이 아닌 것 사이의 이중적 관계를 고찰하게 한다.

소피스트들이라는 철학의 상대자들에 대한 논쟁적 관계  

- 에로스, 시 그리고 정치에 대한 지식들과 철학의 관계. 동일성의 관계에 속하는 것이 아닌 이상, 다른 것들과의 관계는 철학을 위해 필연적이며 긍정적이다. 정치에 대한 관계는 그 두 번째 지도적 맥락의 난점에, 즉 플라톤에게서 철학과 정치의 관계 가운데 실행되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논점에 집중될 것이다. 플라톤에 의한 철학의 시작이라는 개념에 관한 결정으로의 회귀로부터 철학의 종말에 관한 테제 가운데 관건이 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첫 번째 혜택으로서, 철학의 조건들에 관해 공격할 수 있는 각도를 그리고 따라서 현실적인 정세 분석을 위한 도구들을 얻게 되며, 두 번째 혜택으로서, 그리스적 기원과 철학의 문제에 관한 테제들을 얻게 된다.


그 목적들에 이르기 위해 플라톤의 책 국가 5, 6, 7, 8권 내에 놓인 문서적 매개들은 무엇이며, 그 목적들은 무엇인가?


그 우선적인 목적은 살아있는 로고스(logos), 즉 대화에 대한 발단으로 기능하는 1권이 나타내는 것 의해 생명력을 가지게 된 프쉬케(psuche)를 위한 정의(Justice)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것은 에 대한 셈의 규칙인가? (10권에서 어쨌든 소크라테스가 시에 관해, 즉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매우 심한 조건들 아래서가 아니라면 도시국가(폴리스)의 일부가 될 수 없을 시인들에 대한 준엄한 법을 부과해야 하는 시에 관해, 좋은 기능을 인정하는 이상.) 그리고 그로 인해, 국가는 영혼의 불멸성과 인간의 운명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에르 신화(le mythe d’Er)로 종결된다.


대화편들은 사실상 상당히 정확한, 그리고 또한 우리가 보기에 역설적인, 척도들을 포함하는 도시국가의 조직에 대해 상당히 상세하게 설명된 분석에 의해 구성되는데, 왜냐하면 지도해야 할 의무가 그 투쟁들에 매우 가까이에서 아이들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République)라는 말에 의한 politeia>>의 프랑스어 번역은 라틴어의 res pulblica에 따른, 즉 공적인 것이라는 말에 따른 것인데, 이 제목은 이 책에서 관건이 되는 것이 정확하게 헌정적인 개론이라는 사실을 해명하지 않는다. 그 제목은 헌법(Constituition, 또는 정체)이라는 말을 통해 번역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헌법이 아니라 –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단독적인 도시의 헌법이 아니기에 – 살아있는 영혼 안에 있는 정의의 본질로 볼 수 있는 것에 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질문을 결정하지 않는 헌정적 개론은 전체 도시의 차원으로 확장된 영혼의 층위에서 공적인 것을 재검토하여 시민들의 정의로운 영혼과 그들의 도시 사이의 동일성을 발견한다. 일단 미메시스(mimesis)로서의 시가 지닌 심대한 해악을 말하는 이 헌정적 개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인 신화에서 종결된다는 사실에 서도록 하자. 말하자면, 죽음 이후 그리고 그의 전생(윤회, métempsychose) 이전의 영혼들의 방황을 이야기하는 팜필리아인 에르의 신화(le mythe d’Er le Pamphilien)로 말이다. politeia>>라는 제목 하에, 이 대화의 진정한 관건은 철학의 정의일 것인데, 왜냐하면 철학의 중심에는 철학의 정치에 대한 관계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상적인 도시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그 조건 하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왕, 즉 정치적 지도자를 서술한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누가 철학자들인가?


실제로, 국가는 철학과 정치 사이에 일종의 단독적인 매듭을 제시하는 것을 진정한 목표로 삼는다. 정치는 이상적인, 그러나 또한 실재적인, 헌법의 등재부 내에서 다루어진다. 철학은 철학의 정의 보다는 철학자의 정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관점을 통해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중적 난점이 제시된다.

- 한편으로, 그 누구도 철학자들이 지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대화상대자들에게 철학자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제시하려고 의도하는 입장을, 즉 그의 신념을 내포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논증을 말이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는 정치를 경멸하며, 지배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도시를 통치할 능력을 갖추게 된 훌륭한 철학자에 대한 설명은 50년에서 60년 사이에 그가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 – 그가 정치를 혐오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 – 을 통해 사라진다.


따라서, 정의를 통해 파악된 철학과 헌법(정체, 조직, 구조, constitution)을 통해 파악된 철학 사이의 매듭은 결국 두 형식 아래 제시된다.

- 마키아벨리가 의미하는 군주와 같이 철학자가 지배해야만 한다는 (철학자가 왕과 같은 이상) 이상적인 매듭의 형식 하에서.

- 철학이 정치의 불가능성이라는, 즉 >의 실재적인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되돌리는, 달리 말해서, 철학이 정치의 불가능성이라는 척도를 부여하는 실재적인 매듭의 형식 하에서.


철학은 따라서 정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의 접합부에서 결정되는 것이 드러난다 – 그것은 정확하게 그 지점에 실존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있다.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일자(l’Un)의 문제에 관한 아포리아적 대화

테아테투스 편에서, 그 자체로 전적인 인식을 배제하는 지속적인 생성 가운데 있는 존재에 관한 헤라클레이토스적 테제 반박

소피스테스 편에서, 엘레아적 테제에 대한 반박. 플라톤이 비-존재로부터 존재의 실존을 제시 – 정치 지도자의 본질에 대한 정치적 논고, 그러나 소피스테스 편에서 소크라테스에 의해 고지된 철학자라는 제목의 대화는 결여하고 있음. <<테오도로스: 그래서 누구에 관해 말하기 원하십니까? 소크라테스: 소피스트, 정치적 인간, 철학적 인간에 관해서>>(217 a). 소피스트들은 따라서 정치를 하지만, 철학적 결정에 의해 제거된 현실에 대한 그리스적 원리에 따를 때, 대중선동적 정치를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치와 철학 사이의 비-소피스트적 관계를 정립하고자 한다. 그는 철학과 정치적인 것의 교차에서 철학자를 결정하기에 이르지만, 이러한 철학자에 대한 결정은 정치의 중지에, 즉 가능과 불가능의 혼합의 중지에 의지하는데, 실제로 만일 철학자가 군주라면, 정치는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치는 불가능하며, 철학자는 정치적인 것의 형상에 대해 중심을 잃은 자로 판명된다. 철학과 정치의 밀접한 연관에 대한 그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철학과 정치가 분리된 정의를 내놓는다. 그것은 그의 바램이 아니었지만, 그 결과는 두 가지에 의해 분리된 지성을 제공한다. 정치와 철학 사이의 밀접한 연관을 위한 프로토콜에 따라, 결합의 의지로 인해 생산된 것은 실제로는 분리를 발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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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 1.2 SE (2disc + 책자48P)
송두율 외 감독 / 디에스미디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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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시대의 욥이야기 또는 경계도시2

[* 오래 전에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접하고 적었던 글.]


3월 중순 어느 날 아직도 겨울은 언제쯤에나 갈 건지 확실하지도 않았던 어느 목요일운수가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별로 보러 올 사람이 없었던 것인지 '경계도시2'라는 송두율 교수의 귀국 이후 몇 개월 간의 이야기를 다루었던 다큐멘터리 시사회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배당된 영화표가 마침 두 장이라 이런 '우울한영화를 함께 보더라도 별 문제가 없을 만한 녀석 하나를 불러 낮부터 커피에 담배로 노가리를 풀며 상영시간을 기다린다.

 

때는 2003 '경계도시 1' 이후 홍형숙 감독은 송두율 교수의 귀국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시작했고독일 베를린의 송두율 교수 자택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이 영화는 굳이 '경계도시 1'을 보지 않더라도 별 상관없이 볼 수 있다어쩌면 전편과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전편에서의 송두율은 민주주의를 위해 70~80년대의 독재자들에 반대하고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념분쟁으로 휩싸인 한반도의 상황에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아갈 것을 천명했던 존경 받는 지사이며동시에 위르겐 하버마스라는 당대의 석학의 제자이자 학문 동지로서 학계에서도 추앙 받는 학자이다그러나 '경계도시 2'의 송두율은 이런 존경 받는 혹은 기표로서의 모습들이 지워져 버리고 모든 사람 앞에 내던져져 자신이 천명했던 '경계인'으로서의 삶까지도 위협을 받게 된다들은 이야기지만 '경계도시 1'에서의 송두율은 여유롭기까지 했다고 한다그러나 '경계도시 2'의 송두율은 마치 궁지에 몰려 상처 입은 짐승과 같은 모습이다아니 차라리 상갓집 개가 더 나은 표현일지도...1

 

독일을 떠나 국내로 금의환향한 송두율은 가족들과 함께 시민운동가들과 학계의 동지들에게 둘러싸여 여러 행사에 불려 다니기에 바쁘기 그지 없는 일정을 진행한다그러나 그 이후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 미디어와 각종 보수 단체들의 이념논쟁 그리고 국정원과 검찰의 국가보안법 위반에 관한 수사였다수사 및 항간에서 떠도는 논란의 핵심은 그가 과연 북한의 대형간첩이자 노동당 예비후보 김철수인가 하는 것이었다지난한 수사와 신문 과정 그리고 마침내 법정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보수 미디어에 의한 마녀사냥과 같은 여론몰이는 계속되고 송두율이 입고 있던 민주지사로서의 옷 그리고 학자로서의 옷 하나 하나가 벗겨져 나간다결국 그가 국내로 돌아온 것을 후회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를 편들던 시민운동가들마저도 이 땅의 이념편향적 지형에서 그 동안 얻었던 정치적 지분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그의 경계인으로서의 입장에 대해 비난하고 '기술적으로'라도 체제에 순응한다는 태도를 취할 것을 강권한다그들도 북녘 체제에 동조한 간첩 혹은 노동당 예비후보 김철수에 대한 지지를 계속하다가는 일반 시민들로부터 시민운동 세력이 엄청난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심지어 그를 믿어주고 필름밍(filming)을 계속해 나가던 홍형숙 감독마저도물론 잠시 잠깐이기는 하지만이 시점에서 스스로 일종의 의심에 빠졌던 것을 감추지 않는다.

 

이 때 떠오르는 이미지가 성서에 나오는 욥이라는 사람의 이미지였다욥은 원래 의로운 사람이며 부자로 신 앞에 순전한 사람이다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집안 식구들이 다 죽고재산은 날아가고자신은 욕창에 걸렸으며부인으로부터는 '신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극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이 때 욥의 친구들이 나타난다그들은 처음에는 그를 위로하는 듯 했지만 욥이 죄를 지었기에 벌을 받는다는 어찌 보면 당연하고 합리적인 생각에 욥에게 신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라고 권한다하지만 욥은 완강하다스스로 죄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그러자 이들은 욥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어째 욥의 친구들이 그려진 모습에 당시 송두율이라는 개인을 둘러싸고 비난을 퍼부어 대는 대한민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입혀질 수 있을 듯 하다보수 미디어가 내새우던 어쩌면 지금도 합리적이고 당연할 듯한 이념지향성과 경계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의문과 비난그리고 이에 이은 그를 편들던 진보 미디어들과 시민 단체들 그리고 운동가들의 그의 이념적 태도에 대한 의심과 이를 분명히 결정하라는 강요.

 

홍형숙 감독의 시각은 분명 한 개인의 '우리와 다른이념적 지향에 관용하지 못하는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 돌려져 있었다법원 앞에서 있었던 지나가던 두 사람의 남자와의 인터뷰가 떠오른다그들은 분명 대한민국의 일반 시민이다그저 매일매일의 삶을 열심히 살아가고 가족에게 매일매일의 먹이를 물어가려고 노력하는 당나귀 같은 사람들이다그러나 그들도 '송두율과 같은 간첩'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가진다그것은 습관과 같이 대한민국 사회 곳곳을 물들이고 있는 좌빨 알레르기였다.

 

홍형숙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여기서 한가지 재미있는 역설적 상황이 들어선다송두율 교수의 스승 하버마스는 내세우는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유명하다모든 사람이 공론의 장에서 계급장 떼고 동등하게 이야기 하여 모두가 이상적인 합의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론그러나 대한민국이야말로 이념적 소통불가능의 영역이었고 하버마스의 이론이 완전할 수 없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되는 곳이었으며 하버마스의 제자 송두율은 바로 이 덫에 걸리고 만 것이다송두율은 바로 이 소통불가능의 영역에서 모든 존경 받는 모습이 벗겨져 버린 '벌거벗은 삶'으로 드러난다마치 그의 모습은 자신을 죄인으로 비난하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신을 대면하고자 하는 욥의 모습 그 자체였다.

 

욥의 이야기는 이후 욥의 불평을 듣고 있던 신이 직접 나타나 욥과 친구들을 꾸짖는 장면으로 치닫는다체스터튼과 같은 보수 기독교 논객은 이 때 신이 나타나 인간 보다 더 높은 신의 논리를 보여주고 욥이 신의 말씀을 듣던 중에 이를 깨닫고 회개한다고 말한다.2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욥이 신의 장광설을 들으며 신도 어쩔 수 없이 무력하구나라는 그런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인간이 처한 여건에 더 잘 들어맞지는 않을까어떤 기표로서의 욥존경받는 장자로서의 욥은 상처받았다그리고 친구들의 비난에 화를 내던 욥에게 나타난 신 역시 욥의 깨달음 안에서 더 이상 하늘에만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신이 아니라삶이라는 불확정적 영역 안에서 인간만큼이나 어쩔 수 없는 땅 위의 신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실제로 영화 말미에서는 인간 송두율을 법정에 세웠던 '국가보안법'으로 대변되는 이념 지향적 국가가 상처받게 되는 모습다시 말해 송두율 교수에 대한 간첩혐의에 대해 검찰이 패소하는 모습이 잔잔히 그려진다왠지 법원을 나서는 송두율 교수의 모습은 기쁜 한편 왠지 어깨가 처져보이는 듯 하다단순히 피곤함 때문일까... 그 모든 혼란하고 복잡한 상황들을 통해 타의에 의해 여기까지 달려온 피곤 탓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그는 분명 이전과 같은 송두율이 아니다그는 자신이 입고 있었던 학자교수민주지사라는 기표에 상처를 받았다국가 역시 이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보수 언론과 반공 보수세력의 결탁을 통해 작동했던 이념 지향성은 분명히 송두율 교수에 대한 무죄 판결에 일정 이상 상처를 받게 된다.  

  

이 이중부정 혹은 이중구속의 상황에서 어떤 것이 나올 수 있을까욥기의 이중부정에서는 땅 위로 내려온 신다시 말해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와 만나는 상처받은 인간이 있다여기에서 기독교는 구원을 말한다그러나 2003년 대한민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송두율 사건의 이중부정은 어떤 효과를 가져왔을까아니 혹은 잠정적으로 어떤 효과를 가져올 것인가? 2010송두율 사건 이후 7년이 지난 지금원칙 없는 보수정권이 들어서 모든 것이 혼란하고 어느 때보다 더 자기 앞가림이나 할 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러워지는 이 때이 사건 혹은 비결정적인 것에 대한 판단은 더더욱 힘들어지기만 한다.

 

어쩌면 홍형숙 감독의 편집 기간이 그렇게나 길었던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누군가의 말 그대로 한국이란 나라는 통치라는 것이 불가능한 비결정성이 지배하는 나라인지도 모른다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주체적 결정을 해 낼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혼돈 속에서 영속적으로 과거를 반복하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그런 의미의 변화가 아니라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인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을 나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우리 사회의 난맥상도대체 왜 우리는 지금까지도 이런 이념적 편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우리에게 역사의 진보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언제까지나 과거의 망령에 휩싸여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갖은 상념적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그러나 그럴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미래를 낙관하는 태도가 아닐까가로등이 내려 비치는 거리를 걸으며 그런 생각을 해 본다.

 

실제로 어떤 형태로든 사건의 진보성에 대한 판단 혹은 평가는 사후적일 수 밖에 없다비록 앞 길이 불분명하고 두렵더라도 미래를 끝없이 긍정하고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이상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물 뿐이다지금은 어쩔 수 없더라도 앞으로 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결정될 것이고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지금 할 수 있는 일이란 앞으로 나가기 위한 한 걸음을 옮기는 일이다.

 

 

 

 1. 경계인은 두 가지 색깔을 가지는 동시에 두 가지 색깔 모두를 가질 수 없는 자일 것이다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경계 위에 선다는 것은 모든 특성을 내려놓아야 함을 말한다선이란 것에는 넓이가 없고 색이 칠해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경계인이란 발붙일 자리 없는 진정한 이방인일 뿐이다물론 이 경계라는 것이 넓이가 없는 선이 아니라 어떤 범위가 설정된 양측 간의 경계영역이 될 수도 있다독일의 송두율은 어땠을까그는 경계영역이 인정되는 곳에서 일종의 경계인으로 자신의 색깔을 유지할 수 있었다그러나 대한민국의 경계 안으로 들어온 송두율은 더 이상 색을 가질 수 없는 자였다어떤 의미에서 그가 진정한 경계인이 된 것은 독일을 떠나 남한 사회 내에 들어왔던 순간이었을 것이다절대로 발붙일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 말이다.

 2. 체스터튼의 욥기서문은 꽤 읽어 볼만한 글이다그러나 그의 보다 높은 의미 혹은 철학의 신혹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우매한 인간을 가르치는 신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그것은 마치 물자체와 같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초월적 관념일 것이다체스터튼이 본 욥기는 그런 의미에서 이중적이다그리고 그 구조 내의 양극은 해결할 수 없는 난제로서의 신 혹은 물자체라는 문제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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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87
빅토르 위고 지음, 이형식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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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 서평 - 세 인물의 삼각형, 삼각형의 열림, 자연 보다 위대한 인간


랑뜨낙 - 자네들은 헌신하고 희생할 능력이 없는 배신자들이며 비겁자들이야. 자작 나리, 이제 기요띤느로 나의 목을 자르시게.

씨무르댕 - 자연보다 위대한 사회, 자네에게 분명히 말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네. 꿈일 뿐이지.

고뱅 - 도대체 인간을 변질시키는 것이 혁명의 목적이란 말인가? 가족을 파손하고 인간성의 숨통을 조이기 위하여 혁명을 감행하였단 말인가?


이 책과 관련한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세프 비사리노비치 주가쉬빌리라는 한 조지아(이전에 그루지아라고 불렸고 러시아에 속해있던 흑해 연안국)의 청년 신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반사회적 인사로 낙인이 찍혀 감옥에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위고의 이 마지막 소설을 감명 깊게 읽은 후 '스탈린'으로 개명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말하자면 레닌 이후 러시아를 '공포 정치'를 통해 지배한 이 스탈린이라는 인물에게 특히 감명을 주었던 인물은 혹자에게는 이 소설의 악당으로 인식되는 시무르댕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시무르댕이라는 인물을 악당이라고 묘사하는 것은 상당히 부적절한 일이다. 그는 자신이 이전의 질서, 즉 자신이 몸 담고 있던 교회의 질서를 버리고, 새롭게 시작된 공화국의 법에 충실한 자였다. 이런 새로운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에게 어떤 폭력적인 일면이 존재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일이다. 누가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 대해 욕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한 집안 사람으로 서로에게 총칼을 겨눠야 했던 랑뜨낙 후작(이하 랑뜨낙)이나 고뱅 자작(이하 고뱅)의 경우는 어떤가. 사실상 그들 이외에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각양각색의 인물들 중 어느 누구도 전쟁의 와중에 부를 쫓는 용병과 같이 천한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스스로 헌신하기로 결정한 대의에 자신의 방식으로 충실했던 것이다. 그들은 숭고하다. 그러나 동시에 비인간적이다. 그리고 법을 만드는 동시에 법을 위반한다. 역설적으로 인간은 인간의 가장 진부한 측면을, 다시 말해 정해진 틀 안에서 안주하고 편안함을 추구하는 동물적인 측면에서 벗어날 때, 일정 이상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추구할 때, 어떤 의미에서는 괴물이 될 때,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주지했다시피 이 소설에는 너무나 많은 인물들이 쏟아져 나온다. 위고의 마지막 소설답게 그의 인물에 대한 창작력이 최대한 발휘된 이 소설에 대해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특히 우려되는 바는 이 소설을 깊이 보기 시작하면 글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 글에서는 간략히 중심이 되는 세 인물을 각각의 점으로 하는 도식적 접근을 해 볼 요량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잠시 간략히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방데 전쟁'에 대해 살펴보자. 


방데 전쟁


93년은 유럽이 프랑스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고, 프랑스가 빠리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 그리고 대혁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프랑스가 유럽을 상대로 거둔, 그리고 빠리가 프랑스를 상대로 거둔 승리이다. 그것에서 93년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순간의 광대함이 비롯되며, 따라서 그 순간이 그 세기의 나머지 전체보다도 위대하다.


<93년>은 혁명에 관한 이야기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실질적으로 19세기의 프랑스 역사를 주도하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인간 역사의 위대한 전환의 과정이었다. 1793년은 프랑스 역사에서 혁명 이후 펼쳐진 외국 군주들과의 전쟁으로 점철된 한 해이며, 혁명을 통해 선언된 공화정을 전복하고 왕정 복고를 노린 왕당파들의 반동혁명이었던 '방데 전쟁'이 발발한 한 해다. 분명한 것은 위고가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그 순간이 세기의 나머지 전체보다도 위대'했던 그런 시기라는 점이다.* 


미로운 것은 이 전쟁이 '내전(Guerre civile)'이 아니라 '방데 전쟁(Guerre de Vendee)로 명명된다는 점이다. 이 전쟁은 위고가 한 소 챕터에서 취한 '플루스 쿠암 키빌리아 벨라(Plus quan civilia vella)'라는 말 그대로 내전 이상의 것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명명과 이 전쟁의 '내전 이상의 것'이라는 특성은 방데라는 지역의 특수성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이 지역은 원래 골족(영국에서는 켈트족)이 살던 지역이며, 오래 전 프랑스 국왕에게 복속되기 전에는 영국 왕가가 다스렸던 지역으로, 이 지역 출신자들을 브르통(Breton)이라 부르는 것도 다 이런 사실에 연유한다. 다시 말해 이 지역은 프랑스 내에서도 '프랑스어가 아닌 말'(켈트어)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일종의 프랑스 국토 내에 있는 외국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이런 면면이 묻어나고 있다. 프랑스 혁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던 위고는 이 소설 속에서 공화파와 왕당파 어느 쪽에 대해서도 폄하하는 서술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방데 지역 즉 브르타뉴를 비롯한 로와르(Loire) 강 이남의 지역에 대해서는 파리와 대별하여 시대에 뒤처진 지방으로 말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어쨌든 역사가들이 꼽는 방데 전쟁을 촉발했던 이유는, 1. 사제들에 대한 탄압, 2. 과도한 징병이다. 우선적으로, 프랑스 혁명 정부가 교회에 대해 어떤 의심의 눈초리를 던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교회 조직(가톨릭)이 왕정 사회 내에서 일종의 최고 신분의 지위를 누리면서, 왕정과 귀족 신분에 대한 조력자로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교회는 일종의 선동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고(일요일에 행해지는 미사에서 사제의 강론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사제들은 왕과 귀족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던 이유로, 혁명 정부는 이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선 서약을 강요했다. 그러나 반이 넘는 교구 사제들과 단 몇명의 주교들 이외에는 이 충성서약 조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둘째로, 당시 프랑스는 혁명 이후 유럽의 모든 군주국들의 공통적인 적으로 규정되어, 국경의 대부분이 전선으로 확대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전국에 징병 명령을 하달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하달된 과도한 징병 쿼터는 방데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반기를 드는 빌미가 되었다. 


방데 전쟁은 이런 이유로 촉발되었고, 소설 속의 등장인물 랑뜨낙은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영국 왕실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봉토였던 브르타뉴 지역을 장악하여 영국 육군을 상륙시키도록 하는 사명을 띠고 영국으로부터 돌아온다. 


간단히 소설의 배경이 되는 방데 전쟁에 대해 살펴보았으니 이제부터는 각 인물들을 연결하는 선과 이들 세 사람이 그려내는 도형을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국가적 이념의 두 괴물 - 랑뜨낙, 시무르댕


랑뜨낙은 브르타뉴 지역의 전통적인 귀족이다. 그는 그 지역에 오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가문은 과거 그 지역에 정착하여 지배권을 가졌던 골족의 왕가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브르타뉴 대공이며, 랑뜨낙 후작, 퐁뜨네 자작이라는 여러 타이틀로 불린다. 하지만 이 이름들 보다 더 분명한 것은 그가 일종의 괴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오랜 시간을 자신의 영지 보다는 전쟁터를 누빈, 베테랑 지휘관이다. '뒤섞인 영국과 프랑스', '뒤섞인 귀족과 평민'이라는 혁명이 가져온 특수한 상황 속에서도, 바다의 험난한 파도가 가져온 배 안에서의 혼란의 상황에서도, 랑뜨낙은 초연하고 결의에 찬 모습이다. 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다. 랑뜨낙은 합목적성(finalite)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목적, 방데 지역에서 반군의 활동을 지원하고, 돌-드-브르타뉴 지역에 영국군이 상륙할 교두보를 마련하는 목적은 그를 '괴물'로 만든다. 랑뜨낙이 잠시 그를 죽이려 했던(배 위에서의 잠시의 촌극으로 인해) 알말로라는 평민을 통해 각 지역의 지휘관들에게 보내는 지령은 그의 일면을 잘 드러낸다. "봉기하라. 가차없이 처단하라." 그리고 실제로 전쟁의 국면에서 그는 공화파 병사 및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모토를 실행한다. 공화파라면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도륙하는 그의 모습은 '괴물'이라는 말에 가장 적합할 것이다.


또 하나의 괴물, 시무르댕은 한 때 랑뜨낙의 봉토 내에서 교구 사제직에 있었다. 랑뜨낙과는 말하자면 영주와 교구 사제라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시무르댕은 한편으로 랑뜨낙의 종손 고뱅의 교육을 책임졌던 사람이다. 그러나 - 아마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자유 사상에 심취했을 법한 - 그는 혁명이 발발하자 자신의 사제직을 가차없이 버리고, 혁명에 가담한다. 


93년은 강렬한 해이다. 한껏 노하여 팽창한 뇌우가 그 속에 있다. 씨무르댕은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 광란적이고 야수적이며 눈부신 환경이 그의 웅대한 심기에 잘 어울렸다. 그 사람은, 바다수리처럼, 외견상 모험을 즐기면서도 내면의 깊은 고요를 간직하고 있었다. 사납되 태평스러운, 날개 달린 특정 생물체들은 큰 바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폭풍의 영혼들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


<93년>이라는 폭풍과 같은, 혁명으로 인해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안정을 찾을 수 없는, 시기 가운데서 그는 '외견상 모험을 즐기면서도 내면의 깊은 고요를 간직하고 있었다.' 혁명과 이를 이끄는 혁명 정부가 만드는 새로운 법, 그것은 자연 상태로의 복귀를 말한다. 물론 인간은 이미 자연으로부터 유리되었고,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불가능하다. 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이란, 왕도 귀족도, 누구든 다른 누구를 지배하는 자가 없는 자연 상태로의 복귀이며, 시무르댕은 그러한 과거의 질서를 타파하고 과거의 모든 유대를 끊어내는 새로운 질서에, 새롭게 창조된 법에 누구보다 충실한 자다. 그러므로 시무르댕에게 있어, 자연은 법과 같은 것이며, "자연보다 위대한 사회, ..., 그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그는 법에 충실한 자, 즉 새로운 법의 현현이다. 따라서, 공화국의 법을 위반하는 자, 그 누구라도 법의 이름으로 심판할 수 있는 법의 인간,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또는 아들)까지도 심판할 수 있는 그에게서 우리는 또 하나의 괴물을 본다.****


가족, 아버지와 아들 - 시무르댕, 고뱅


고뱅의 부모는 그가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다. 그런 이유로 고뱅을 교육할 후견인이 필요했고, 그 역할은 지역 교구 사제였던 시무르댕이 떠맡게 된다. 한 때 사제였던 시무르댕에게는 자식이 없었던 까닭에, 고뱅은 그에게는 마치 자식과도 같은 제자였다. 고뱅 역시 세상을 등진 부모나 거의 언제나 전쟁터나 파리의 왕궁으로 주유하는 종조부 랑뜨낙 보다는 시무르댕이 더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들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그것이다. 그리고 고뱅은 자신의 영지나 지위의 보전 보다는 아버지와 같은 선생님의 가르침에, 혁명을 떠받치는 자유, 평등, 우애의 가르침에 더 끌리게 되어, 이후 당시 프랑스의 여러 귀족출신 공화파들과 같이 혁명군에 지휘관으로 참가하게 된다. 


문제는 고뱅이 이상주의적 인간이라는 점이다. 고뱅은 명백히 훌륭한 지휘관이었고 방데 지역에서 야기된 혼란을 정리하여, 지역의 지배권을 잡는데 일조한다. 무엇보다 '작은 군대와 위대한 전투'를 성공적으로 연결시켰던, 그의 훌륭한 전술로 인해 랑뜨낙이 영국군을 위한 상륙 교두보를 마련하는 일이 수포로 돌아간다. 하지만 혁명 정부 수뇌부(아직 <공포 정치>가 시작되기 이전의)는 고뱅을 믿지 못한다. 그는 너무나 이상적이며 고귀하다. 다시 말해 귀족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공화국이 규정한 선을 넘어 왕당파 군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돌출행동을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혁명 정부는 고뱅을 제어할 한 사람을 파견하는데, 그 사람은 공교롭게도 시무르댕이었다. 아버지와도 같은 은사가 공화국의 법을 위반할 경우 그를 가차없이 심판하라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파견을 통해 소설은 역설적 비극의 모습을 띤 종결부를 예비한다. 


자비, 인간성, 두 인간 - 고뱅, 랑뜨낙


세 사람이 그려내는 도형을 이루는 마지막 선분은 고뱅과 랑뜨낙이 그려내는 자비와 인간성의 선분이다. 이에 관해 서술하기 전에 잠시 책 속에서 울려퍼지는 위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 상황은, 서로 적대적인 진리들이 결국 맞닥뜨리게 된 일종의 무시무시한 교차로였고, 그곳에서 인간의 절대적 세 이념이, 즉 자비와 가족과 조국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세 음성이 각자 차례대로 발언권을 얻었고, 각자 나름대로의 진리를 개진하였다. 어떻게 선택한단 말인가? 각자 나름대로 현명함과 정의로움의 접합점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것 혹은 저것을 하라고 말하였다. 해야 할 것이 그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하는가 하면 아니라고도 하였다. 이치가 이 말을 하면 감정은 다른 말을 하였다. 두 조언이 상반되었다. 이치가 이성에 불과한 반면, 감정은 대개 양심이다. 이성이 인간으로부터 오는 반면, 양심은 더 높은 곳으로부터 온다. 감정에 명료함이 부족하되 힘이 더 많은 것은 그러한 연유이다.


극한에 이르는 '라 뚜르그'에서 치뤄진 랑뜨낙과 고뱅의 결전은 공화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는 듯 했다. 그러나 랑뜨낙과 몇 남지 않은 방데 지역 왕당파의 잔당들은 때 맞춰 요새의 비밀통로를 열고 나타난 알말로를 따라 탈출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요새에 화재가 일었고, 이 요새 안에 있는 서재에는 세 아이들이 잠긴 철문 뒤에 갇혀 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짐승처럼 울부짖는 미셸 플레샤르라는 시골 여자, 랑뜨낙은 이 장면을 도처히 그대로 지나치지 못한다. 비록 후일을 기약해야만 할 자신의 임무가 있음에도, 그는 공화파 군대로부터 빼앗은 사다리로 화재가 난 서재에 있던 아이들을 구출한다. 그는 비록 괴물이었지만 동시에 인간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뱅은 적이지만 종조부이기도 한 랑뜨낙의 인간적 행동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도저히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이 기요띤느(단두대) 앞에 서게 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의 양심은 치명적인 결정으로 향하게 되며, 결국 지휘관의 군복을 입혀 랑뜨낙을 탈출시키게 된다. 그 결과는 자명하게 비극적이다. 랑뜨낙을 탈출시킨 고뱅은 군법 재판을 통해 참수형에 처해진다. 그리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시무르댕은 자신의 머리에 총을 발사한다. 


미셸 플레샤르와 아이들 - 삼각형을 열어내는 보충물


이런 비극적인 결말은 이 소설이 만들어내는 삼각형 구도를 무너뜨린다. 잘 알려진 것처럼, 삼각형은 도형 중 가장 처음으로 구성되는 것이며,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도형들 중 가장 완전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그려내는 인물적 도식은 매우 완전하다. 그러나 그 완전성은 동시적인 불완전성을 부르고 있다. 말하자면 이 완전한 도형의 두 꼭지점이 사라지는, 또는 이 도형이 '열리는' 방식*****으로 결말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완전성 또는 '열림'이야말로 어떤 소용돌이와 같은 과정의 특성일 것이다. 


어쨌든 이 '열림'을 일으킨 것은 가난한 촌동네 여인 미셸 플레샤르와 그녀의 아이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들은 프랑스라는 집합 속에 있는 가장 약한 자들, 말하자면 혁명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어떤 부분으로 재현되지 못한 자들을 나타낸다. 그들은 존재하지만 사회적인 의미 속에서 실존하지 않으며(모든 집합 속에 포함된 공백과 같이), 어떤 방식으로도 보호받지 못한다.(미셸 플레샤르가 아이들을 찾아 라 뚜르그로 향하는 여행길에 대해 위고가 서술해 놓은 부분을 보면 이런 이야기는 매우 자명해진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라도 그들은 프랑스라는 집합 또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새롭게 구성된 집합에 속한 자들이며, 랑뜨낙이나 고뱅과 같은 국가 이념을 따르는 자들이라면(서로 다른 이념이기는 하지만) 어떻게든 보호해야만 할 자들이다. 어쩌면 바로 여기가 위고의 기층 민중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드러나는 지점인지도 모른다(레 미제라블에서처럼). 이들은 비록 '실제적'으로는 없는 것이나 다른 없는 자들이지만, 언제나 국면 속에 '실재'하며,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보이지 않는 보충물(supplement) 혹은 꼭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더해짐'으로 인해 삼각형이라는 완전하게 폐쇄된 구도는 붕괴된다. 


여기에서 드러나는 이념은 혁명의 운동성이다. 물론 혁명은 어떤 새로운 '상태'로 가기 위한 운동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말하자면, 이 운동이 어떤 하나의 상태에 고착되는 순간, 운동은 사라지고, 그것은 더 이상 앞을 향한 전진이 될 수 없다는 것.*******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세 인물들의 꼭지점들 - 그리고 각 인물 간의 관계가 만드는 국가 이념, 가족 이념, 인간성이라는 선분들 - 은 하나의 완전한 삼각형을 구성하는데, 이 완전한 도형은 폐쇄되어 있으며, 스스로 완전하기에 어떤 운동성을 결여한다. 미셸 플레샤르와 아이들은 바로 이 완전성을, 다시 말해 폐쇄성과 고정성을 붕괴시켜 운동의 이념을 드러내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보충물인 것이다(이들은 소설의 국면 속에서 마치 소설의 전개와는 무관한 것처럼 나타나며, 종결부에서야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시무르댕의 "자연보다 위대한 사회(는)... 꿈일 뿐이"라는 말은 이들을 통해 뒤집어진다. 자연보다, 시무르댕이 이상으로 삼는 인간의 법이나 자연의 법칙 보다 위대한 인간들이 바로 이들의 '더해짐'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연보다 위대한 인간, 그것은 법을 넘어서며,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위고의 소설 읽기는 언제라도 해 볼만한 일이다. 특히 <레 미제라블>이 드러내는 인물의 구도와 이야기의 배경은 독자가 언제라도 이야기를 - 이념을 통해 - 새롭게 보도록 한다. <93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백년이 넘는 세월 이전에 쓰여진 이 소설이 마치 어떤 정체 속에 갖혀버린 듯한 이 시대에 드러내는 이념은 탁월하다. 이 훌륭한 소설에 대한 이 졸고가 누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주 


* 우리는 가무한이 아니라 실무한을 말하는 칸토르의 정리로부터 무한수의 영역에서는 '부분이 전체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히 무한서수의 멱집합을 통해 해당 서수의 부분들을 모두 하나로 셈하는 기수는 서수 보다 더 큰 멱(또는 힘, power)를 가진다. 그로부터 우리는 자연적인 원소들이 속해 있는 세계 혹은 상황(사회) 보다 이 안에 있는 상태 혹은 국가(공히 state)가 더 크며, 후자가 전자를 지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에 있어서도 단순히 연속되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 보다 어떤 사건이 벌어진 시간, 즉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 지니는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 사실상 이런 측면은 프랑스 혁명이 표방했던 입장과 연관된다. 혁명 이후 프랑스는 '로마'를 본 뜬 '공화국'이었다는 것이다. 소설 내에서 위고가 곳곳에서 말하고 있는 이런 측면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역자의 해설에 대해, 특히 로마라는 공화국과 관련한 역주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역자가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자연보다 위대한 사회', 법 또는 자연의 법칙 보다 위대한 인간은 가능하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법을 이기는(위반하는) 인간을 선언적으로 드러내고 있으며, 바로 거기에 법의 인간이라는 괴물, 혹은 법 그 자체라는 괴물의 죽음이 수반된다. 이런 부분은 위고의 다른 작품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에서 서술된 자베르의 자살과 공명한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레 미제라블> 역시 '1832년 6월 봉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혁명과 연관된 작품이다.


**** 실상 이런 괴물적 측면은 자명하다. 어떤 이념 혹은 질서를 확신하던 자가 그것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향할 때, 그는 철저하게 이전의 것을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그 방향전환이 일종의 자기 부정이자 배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배신자에게서 이런 모습을 발견한다.


***** 도형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닫혀야 한다. 삼각형을 생각해 보면 세 개의 선분으로 닫혀있는 공간을 만든다. 이런 닫힘은 어떤 완전한 결정, 규정을 나타낸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이유로든 '열림' 혹은 구멍이 생기면 이 도형은 더 이상 닫히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가 된다.


****** 그렇다면 애초부터 사회 혹은 법의 외부로 등장하고 있는 거지 뗄마르는 어떨까? 그 역시도 어떤 국외자로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한 가지 더 생각해 봐야할 점은 그가 어떤 '자연의 법'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자연의 법'이란 시무르댕이 재현하는 새로운 사회 혹은 질서를 구성하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법과는 다른 것이다. 그는 시무르댕과는 달리 애초에 자연 속에 있는 자이다. 게다가 뗄마르는 랑뜨낙을 숨겨주고 미셸 플레샤르를 치료하는 등, 등장 인물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할 뿐 소설 속의 구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소설 내에서 자연 혹은 대지와 같은 존재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 운동과 상태(/국가)의 관계는 서로 모순적이다. 프랑스어로 etat라는 말은 상태라는 의미를 가지는 동시에 국가라는 의미를 가지며,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서 말해지는 상태라는 말에는 국가라는 의미가 함께 포함된다. 어떤 운동, 역사 또는 정신의 상승 운동으로서의 혁명, 이것을 고착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공포 정치'가 끼치는 문제는 심대하다. 인간은 정신을 고양하는 운동을 통해, 한편으로, 비인간적이거나 또는 인간 이상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포를 통해 비인간적이거나 또는 인간 이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족 -
 번역문과 역주에 대한 불만.


1. 번역문은 전체적으로 상당히 잘 읽힌다. 솔직히 프랑스어는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 할 정도로 제대로 하는 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잘 읽히는 글을 만들어 준 역자에게 감사한다. 그러나 한 가지 꼬투리를 잡고 싶은 점은 랑뜨낙이 하는 말을 굳이 고어체로 옮길 필요가 있었는지 하는 것이다. 꼭 무슨 개역판 성서 읽는 것 같은 느낌은 좀 별로였다. 


2. 이렇게 말하면 본격적인 비판이 될 듯 한데, 역주는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있었다. 소설 자체는 훌륭한데 역주가 망치는 꼴이었다. 이에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지적하는 바이다.


p23 역주 24. Houzard는 세르비아 용병으로 구성된 헝가리나 폴란드 기병을 뜻하는 단어 Hussar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역자가 언급하는 Hussard도 이후에 Hussar를 본 딴 경기병대. 


p56 역주 76. vis는 힘, 에너지, vir는 용기, 명예를 의미한다. vir를 spiritus(정신)이나 intelleligentia(지성)으로 새기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 하다. 


p88 역주 95. La parole, c'est le Verbe. 이 말은 '말씀은 곧 신이다'로 풀기 보다는 '언변, 그것은 신의 말씀이다' 정도가 더 좋을 듯하다.  


p160 역주 2. 아테네의 체제는 공화정이 아니라 민주정이다. 


p208 역주 91. dictator는 집정관이 아니라 독재관이라는 용어로 정착되어 있다. 집정관은 consul.


p245 역주 145. 떡갈나무가 갈리아의 상징인지는 모르겠으나, 로마 공화정에 떡갈나무 가지로 엮은 관에 얽힌 관습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시민관(corona civica)라고 하는 관은 동료 병사의 목숨을 구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관이며(두번째로 영예로운 훈장), 이를 수여한 사람들 중 유명한 예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율리우스 카에사르가 있다. 프랑스 혁명이 로마 공화정으로의 복귀의 의지를 저변에 깔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조각상들의 머리 위에 놓인 떡갈나무 관은 시민관으로 보는 편이 옳다. 


p313 역주 52. 사념으로 옮긴 idee는 이념으로 옮기는 것이 좋을 듯 보인다. 동작어로 봐야할 이유가 없다. 


p585 역주 209. 아들을 죽인 만리우스는 기원전 353, 349, 320년에 독재관을, 347, 344, 340년에 집정관을 지냈던 사람으로, 339년에 있었던 라틴족과의 전쟁에서 각자의 위치를 떠나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전투에 나서 전공을 세웠던 자신의 아들을 반역죄로 처단했던 사람이다. 


p596 역주 213. 여기에서 저울은 '이성'이 아니라 '법'을 상징한다. 법의 여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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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식탁 -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다윈의 식탁

진화론은 살아있다.

 

 

다윈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진화론입니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화론 하면 다윈 이후의 학자들(심지어 동시대 진화론자들까지도)을 떠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진화론은 학교에서 잠시 가르치고 말 뿐이죠그러나 이런 형식으로 남아있는 낡은 지식으로서의 진화론은 죽어있는 것입니다.

 

부제를 보니까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이라고 써져 있네요이 책은 낡은 지식으로서의 죽어있는 진화론이 아닌 다윈 이후에 발전을 거듭하고그것이 좋은 영향이든 나쁜 영향이든 사회의 다른 분야들과 생생하게 영향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해온아니 진화해 온 진화론에 대한 것입니다살아있기 때문에 다윈 이후 150년간 변화했고적응했으며스스로의 모순과 끊임 없이 제기되는 난제들을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죠마치 살아있는 동물과 같습니다. (동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변화하고 적응하며생체내의 갈등들을 중재하고 균형의 범위 내에 넣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합니다그것이 바로 살아있는 생물의 특징이겠죠.)

 

어쨌든 이 책에서 장대익 교수는 상당히 특이한 용어를 사용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런 용어를 만들어낼 필요까지 있었나 싶은데…) 그것이 식탁하다tablize라는 용어입니다말하자면 모두가 식탁에 둘러앉아 생생한 지성의 만찬에 참여한다는 의미인데이것은 논쟁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아무래도 논쟁을 하다 보면 분위기도 험악해지고 하니 식탁에 둘러 앉아 먹을 것이라도 먹어가면서 자유로운 분위기로누그러뜨려진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해보자는 의도였던 것 같네요 (인간은 혈당량이 높아지면 신경이 좀 무뎌지는 법이죠). 나름 재미있는 발상입니다.

 

다윈의 식탁은 현존하는 또는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최고의 진화론 학자들을 모셔놓고일종의 팩션(faction = 사실fact + 허구fiction; 사실에 바탕을 둔 허구형식을 취하여 이들 간의 논쟁을 통해 현재까지 진화론이 진화해 왔던 궤적을 돌아보고현재 진화론의 쟁점들을 부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각 장의 제목 역시 흠이 유발을 위해 다소 원색적이거나또는 생각을 유발할만한 방식으로 붙여졌는데

 

1장 강간도 적응인가?’에서는 자연선택의 힘이 과연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우선 한 집단 내에서 강간이 자손을 남기기 위한 적응행위였나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시작해서어떤 형질을 자연선택으로 만들어진 적응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언어의 진화에 대한 논쟁을 보여줍니다다시 정리하면 자연선택으로 산출된 형질즉 적응과 그렇지 않은 것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자연계에 얼마나 많은 적응들이 존재하는지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어떤 부분들이 적응인지에 관한’ (p42) 문제들에 대해 개괄합니다.

 

2장 이기적 유전자로 테레사 수녀를 설명할 수 있나?’ 에서는 협동의 진화에 대해다시 말해 도킨스가 말하는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는 인간이 또는 집합적 군집 사회를 유지하는 개체가 어떻게 이타성을 보일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을 보여줍니다여기서 꽤 재밌는 이야기들이 나오는군요물에 빠져죽는 레밍들(책에서는 나그네 쥐들)이 사실은 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멍청해서 그렇다는 것일벌의 생식능력 상실은 알고 보면 자신과 75%의 유전자 상동성을 갖는 동료 개체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또 호혜성에 대한 논의에서는 게임이론까지… 그리고 이 장에서 진화론의 계통도에서 유전자 선택론과 구분되는 다수준 선택론이 소개 됩니다.

 

3 '유전자에 관한 진실을 찾아서’ 에서는 2장의 유전자에 관한 논쟁을 이어 받아서 유전자가 과연 유전체의 전체인가에 대한 논쟁을 벌입니다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 다소 기술적인 문제들(유전자의 세부적인 구성물들에 대한 설명특히 호메오 박스)까지 건드려 전제를 깔아놓은 후 실질적으로 유전자는 그 자체로는 한계가 있다는 주장(세포 구성물들 수준의 한계발생학적 수준의 한계한걸음 더 나아가 환경의 영향)과 그럼에도 유전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는 주장까지 역시 중요한 논쟁들을 다룹니다.

 

4장 진화는 1경주인가넒이 뛰기인가?’ 에서는 진화가 점진적인 방식을 따라 이루어졌는가 (점진론아니면 갑작스레 한번에 뛰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 (단속 평행론에 대한 논쟁을 보여줍니다이 장에서 흥미 있었던 것은 다수준 선택론 및 단속평행론적 계통에 있는 학자들이 진화의 불완전성에 대해 주장하고근대적 종합 이후 불완전 했던 발생학을 몰아내고 진화론의 진행방향에서 우위를 차지했던 유전자 선택론 계열의 학자들이 이를 방어하는 형식으로 논쟁이 진행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사실 도킨스도 지적하고 있지만 굴드의 단속평행론의 주창으로 창조론 진영의 진화론 공격의 빌미가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5장 박테리아에서 아인슈타인까지’ 에서는 진화를 과연 진보로 볼 수 있을 것인가그리고 그 정점에 과연 인간을 놓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을 보여줍니다그리고 이 장에서는 도킨스의 진화가 진보라는 입장을 지지하는 다윈주의의 입장에 반하는 굴드 진영이 우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6장은 간단히 진화의 계통도를 보여주고 7장으로 넘어가 도킨스와 굴드가 각각 종교는 왜 정신적 바이러스인가?’ 라는 제목과 다윈의 진화론은 왜 불완전한가?’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는 내용입니다왠지 제목만 놓고 볼 때 도킨스가 약간 돌았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여하튼 도킨스의 종교가 기생적인 밈(meme)이라는 이야기를 받아 굴드는 사회역사적 맥락에 대해 이야기를 하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굴드는 근대적 종합이라는 시기를 거쳐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의 수혜를 받으면서 불완전했던 발생학을 떼어놓고 앞으로 나갔던 다윈의 적자들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니까요도킨스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다윈주의 진화론 자체에 매달려 이를 방어하려 한다면 굴드는 그 진행방식에 폭을 넓혀 이전에 무시되었던 발생학 등 다윈주의 진화론 외의 것들을 고려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화론 자체에 대한 반론이냐 그것은 아니겠죠일단 굴드도 진화론자입니다단지 도킨스와 같은 유전자 선택론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것은 무슨 이야기가 되는가… 바로 진화론이 진화론 연구를 수행하는 폭 넓은 과학자 사회를 구성했고그 안에서 건전한 논쟁이 진행된다는 것입니다창조론 또는 그 이후에 나온 유사 창조론지적 설계는 이런 논쟁을 할 수 있는 건전한 과학자 사회를 생략하고 있습니다이들이 논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지적 설계 주창자들 내부의 과학자 사회에서 제기되는 지적 설계 자체에 대한 이상상태에 대한 문제들이 아니라이들이 적으로 삼고 있는 진화론 진영이기 때문입니다앞으로 지적 설계 진영 내에서 어떤 과학자 사회가 구성되고 그 안에서 논쟁들이 생겨 발전해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적어도 현재와 같이 정치적교육적 공작과 다른 과학자 집단에 대한 공격만을 일삼는 모습이 유지되어서는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사실 이 장대익 교수는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이 진화론-지적 설계 문제로 올 해 초에 상당히 방대한 분량의 글들을 종교학자신학자 각각 한 분과 논의를 진행한 일이 있습니다또 장대익 교수는 원래 집안이 기독교인 집안으로 대학원에서 진화론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신앙에 회의가 들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한 전력이 있습니다말하자면 진화론에 의해 자신의 신념을 형성하고 어릴 적부터의 신앙을 버린 셈인데그런 의미에서 우리 나라 사회에서특히 우리 나라 교회 사회 내에서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여하튼 그 때부터 상당히 주목을 하고 있었는데 이런 재미있지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책을 내신 것을 보니 반갑습니다.

 

물론 이 책은 지면과 수준을 고려해서 논쟁들을 단순히 요점만 정리하고 질문들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썼으며각 장의 논쟁은 딱 거기까지만 갑니다그 이상은 없다는 이야기죠하지만 그런 것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왜냐이 책은 다윈 이후 논쟁의 맥락을 짚어주는 책이고 그러기 위해 과학에서 질문들을 정확히 드러내 주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이에서 더 나아가 보다 자세한 논쟁을 보고 싶다면 에피타이저에 있는 서지 목록들을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학자의 꼼꼼함이 묻어나는 부분입니다.) 책의 나름 재미있는 상황을 설정하여 현실에서 있기 어려운 상황을 구상하고 논쟁을 잘 전달하는 소설과 같은 문체로 진화의 중요한 문제들을 한번 둘러볼 수 있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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