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플라톤의 국가 강의La Republique de Platon par Alain Bdiou(1989-1990)
1강
철학의 종말이라는 동시대의 테제, 몰락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내재적 종말이라는, 말하자면, 라꾸-라바르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철학의 역사에 내재하는 >을, 즉 그것의 종말이라는 주제를 생산했던 순간을 목전에 두고 있다는 테제와는 반대로, 철학은 그 종말의 형상 내에 실존한다. 우리는 철학이 계속된다는 테제를, 즉 철학이 실존하는가 하지 않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그 종말의 형상이 아닌 이행의 형상 가운데 오늘날 철학이 실존하는 양식을 제시하기 위한 테제를 주장할 것이다. 우리는 철학의 종말에 관한 모든 이론은 또한 그 시작의 이론임이 드러난다는 것을 – 그러나 그것이 아마도 철학의 역사적 단독성일 것임을 – 말한다.
그런 이론은 그리스에 관한 논쟁을 초래하는데, 그 논쟁은 다음과 같은 것들에 반대한다.
- 기원 또는 그리스적 기원의 지지자들에 대해
- 근대적 인류학의 지식, 특히 장-피에르 베르낭(Jean-Pierre Vernant)과 비달 나께(Vidal Naquet)의 학파의 지식에 종속된 철학의 이해를 제시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또한, 레비나스와 같이, 철학의 그리스적 시작을 중심에서 어긋나게 하며, 철학에 유대적 시작을 복구할 수 있지만, 그 탈중심화에는 그리스적 시작에 관한 판단이 필연적으로 포함된다. 사실상, 철학의 종말에 내려진 모든 판단은 언제나 철학의 현실적 상황에 관해 언표를 가로지르는 정세의 판단을, 그리고 그것의 기원 또는 시작에 내려진 판단을 포함한다.
철학의 재개라는 테제를 지지하기 위한 우리의 방법은 무엇이 될 것인가? 우리는 국가로부터 플라톤에 대한 재검토에 착수할 것이다. 즉, 우리는 두 가지 테제에 의지하여 플라톤으로부터 출발한다.
- 시작에 관한 테제: 철학은 플라톤과 함께 시작한다.
- 상황에 관한 테제: 플라톤과 같이, 우리는 오늘날 소피스트들에, 즉 철학이 끝났다고 하는 것을 바로 그 언표들 중 하나로 하는 근대적인 소피스트적 변설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만일 고대의 소피스적 변설이 불가능성의 테제를, 다시 말해 철학은 가능하지 않다는 테제를 주장했다면, 이번에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철학의 완성이라는 테제를 주장하는 근대적인 소피스트적 변설은 그 동일한 불가능성의 테제와 연관된다. 그에 반해, 우리에게 그것은 가능하다고 말했던 플라톤의 가이드를 통해, 우리에게 그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따라서 플라톤에 대한 의지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진다. 즉, 철학의 시작에 대한 조건들을, 그리고 오늘날 그것의 속행에 호의적인 가능성의 논증을 검토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서 동시대성을 발견하도록 부추겼던 한 논거는 철학적인 우리의 세기가 매우 반-플라톤적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니체에게 있어, 플라톤은 사유의 질병에 속한 고유한 이름이다. 따라서 철학이 지속한다는 것에 따라 거기에서 지탱되는 반-플라톤주의와 종말의 테제 사이의 유대, 그리고 플라톤주의에 대한 의존과 그 테제 사이의 유대가 있었다. 우리는 국가에서 철학에 관한 그리고 철학자 – 플라톤이 철학을 통해 의미하는 것을 결정하는 – 에 관한 다양한 정의와 언표를 추출해낼 것이다. 그 시작이라는 주제 아래 연결되어, 우리는 명명의 체계가 실행되는 것을 가로질러 철학적 담론의 배치를 검토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검토는 우리를 인도하여 철학과 그것이 아닌 것 사이의 이중적 관계를 고찰하게 한다.
- 소피스트들이라는 철학의 상대자들에 대한 논쟁적 관계
- 에로스, 시 그리고 정치에 대한 지식들과 철학의 관계. 동일성의 관계에 속하는 것이 아닌 이상, 다른 것들과의 관계는 철학을 위해 필연적이며 긍정적이다. 정치에 대한 관계는 그 두 번째 지도적 맥락의 난점에, 즉 플라톤에게서 철학과 정치의 관계 가운데 실행되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논점에 집중될 것이다. 플라톤에 의한 철학의 시작이라는 개념에 관한 결정으로의 회귀로부터 철학의 종말에 관한 테제 가운데 관건이 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는, 첫 번째 혜택으로서, 철학의 조건들에 관해 공격할 수 있는 각도를 그리고 따라서 현실적인 정세 분석을 위한 도구들을 얻게 되며, 두 번째 혜택으로서, 그리스적 기원과 철학의 문제에 관한 테제들을 얻게 된다.
그 목적들에 이르기 위해 플라톤의 책 국가 5, 6, 7, 8권 내에 놓인 문서적 매개들은 무엇이며, 그 목적들은 무엇인가?
그 우선적인 목적은 살아있는 로고스(logos), 즉 대화에 대한 발단으로 기능하는 1권이 나타내는 것 의해 생명력을 가지게 된 프쉬케(psuche)를 위한 정의(Justice)의 문제인가? 아니면 그것은 시에 대한 셈의 규칙인가? (10권에서 어쨌든 소크라테스가 시에 관해, 즉 그것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매우 심한 조건들 아래서가 아니라면 도시국가(폴리스)의 일부가 될 수 없을 시인들에 대한 준엄한 법을 부과해야 하는 시에 관해, 좋은 기능을 인정하는 이상.) 그리고 그로 인해, 국가는 영혼의 불멸성과 인간의 운명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에르 신화(le mythe d’Er)로 종결된다.
대화편들은 사실상 상당히 정확한, 그리고 또한 우리가 보기에 역설적인, 척도들을 포함하는 도시국가의 조직에 대해 상당히 상세하게 설명된 분석에 의해 구성되는데, 왜냐하면 지도해야 할 의무가 그 투쟁들에 매우 가까이에서 아이들을 돕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République)라는 말에 의한 politeia>>의 프랑스어 번역은 라틴어의 res pulblica에 따른, 즉 공적인 것이라는 말에 따른 것인데, 이 제목은 이 책에서 관건이 되는 것이 정확하게 헌정적인 개론이라는 사실을 해명하지 않는다. 그 제목은 헌법(Constituition, 또는 정체)이라는 말을 통해 번역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헌법이 아니라 –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단독적인 도시의 헌법이 아니기에 – 살아있는 영혼 안에 있는 정의의 본질로 볼 수 있는 것에 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하여, 그 질문을 결정하지 않는 헌정적 개론은 전체 도시의 차원으로 확장된 영혼의 층위에서 공적인 것을 재검토하여 시민들의 정의로운 영혼과 그들의 도시 사이의 동일성을 발견한다. 일단 미메시스(mimesis)로서의 시가 지닌 심대한 해악을 말하는 이 헌정적 개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적인 신화에서 종결된다는 사실에 서도록 하자. 말하자면, 죽음 이후 그리고 그의 전생(윤회, métempsychose) 이전의 영혼들의 방황을 이야기하는 팜필리아인 에르의 신화(le mythe d’Er le Pamphilien)로 말이다. politeia>>라는 제목 하에, 이 대화의 진정한 관건은 철학의 정의일 것인데, 왜냐하면 철학의 중심에는 철학의 정치에 대한 관계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상적인 도시는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그 조건 하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왕, 즉 정치적 지도자를 서술한다. 따라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누가 철학자들인가?
실제로, 국가는 철학과 정치 사이에 일종의 단독적인 매듭을 제시하는 것을 진정한 목표로 삼는다. 정치는 이상적인, 그러나 또한 실재적인, 헌법의 등재부 내에서 다루어진다. 철학은 철학의 정의 보다는 철학자의 정의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관점을 통해 다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이중적 난점이 제시된다.
- 한편으로, 그 누구도 철학자들이 지배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가 대화상대자들에게 철학자에 대한 올바른 정의를 제시하려고 의도하는 입장을, 즉 그의 신념을 내포하고 있음에 틀림없는 논증을 말이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철학자는 정치를 경멸하며, 지배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리고 당연히, 도시를 통치할 능력을 갖추게 된 훌륭한 철학자에 대한 설명은 50년에서 60년 사이에 그가 지배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유에 대한 설명 – 그가 정치를 혐오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 – 을 통해 사라진다.
따라서, 정의를 통해 파악된 철학과 헌법(정체, 조직, 구조, constitution)을 통해 파악된 철학 사이의 매듭은 결국 두 형식 아래 제시된다.
- 마키아벨리가 의미하는 군주와 같이 철학자가 지배해야만 한다는 (철학자가 왕과 같은 이상) 이상적인 매듭의 형식 하에서.
- 철학이 정치의 불가능성이라는, 즉 >의 실재적인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되돌리는, 달리 말해서, 철학이 정치의 불가능성이라는 척도를 부여하는 실재적인 매듭의 형식 하에서.
철학은 따라서 정치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의 접합부에서 결정되는 것이 드러난다 – 그것은 정확하게 그 지점에 실존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있다.
- 파르메니데스 편에서, 일자(l’Un)의 문제에 관한 아포리아적 대화
- 테아테투스 편에서, 그 자체로 전적인 인식을 배제하는 지속적인 생성 가운데 있는 존재에 관한 헤라클레이토스적 테제 반박
- 소피스테스 편에서, 엘레아적 테제에 대한 반박. 플라톤이 비-존재로부터 존재의 실존을 제시 – 정치 지도자의 본질에 대한 정치적 논고, 그러나 소피스테스 편에서 소크라테스에 의해 고지된 철학자라는 제목의 대화는 결여하고 있음. <<테오도로스: 그래서 누구에 관해 말하기 원하십니까? 소크라테스: 소피스트, 정치적 인간, 철학적 인간에 관해서>>(217 a). 소피스트들은 따라서 정치를 하지만, 철학적 결정에 의해 제거된 현실에 대한 그리스적 원리에 따를 때, 대중선동적 정치를 실행하는 것이다. 또한 플라톤은 국가에서 정치와 철학 사이의 비-소피스트적 관계를 정립하고자 한다. 그는 철학과 정치적인 것의 교차에서 철학자를 결정하기에 이르지만, 이러한 철학자에 대한 결정은 정치의 중지에, 즉 가능과 불가능의 혼합의 중지에 의지하는데, 실제로 만일 철학자가 군주라면, 정치는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치는 불가능하며, 철학자는 정치적인 것의 형상에 대해 중심을 잃은 자로 판명된다. 철학과 정치의 밀접한 연관에 대한 그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철학과 정치가 분리된 정의를 내놓는다. 그것은 그의 바램이 아니었지만, 그 결과는 두 가지에 의해 분리된 지성을 제공한다. 정치와 철학 사이의 밀접한 연관을 위한 프로토콜에 따라, 결합의 의지로 인해 생산된 것은 실제로는 분리를 발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