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플라톤의 국가 강의La Republique de Platon par Alain Bdiou(1989-1990)
2강
국가에서 제시되는 철학의, 그러나 그 보다는 철학자의, 정의에 대한 검토는 우리가 동시대적 철학의 운명에 관한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플라톤이 제시하는 정의들은 간접적인(oblique) 정의들이며, 사유의 전략 내에 포함된다. 플라톤의 철학적 결정의 세 가지 강력한 동작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 분리의 작용: 진리의 결정에 대해 가능한 장소로서의 시의 추방.
- 결합의 작용: 철학적 담론 내로의 수학의 포함. 첫 번째 몸짓은 진리에 대한 접근을 여는 교육법 내에서 또한 장려된 수학에 의존해야 할 필연성을 수반한다. 따라서 우리는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수학과 철학 사이의 복합적인 뒤얽힘을 찾아낸다.
-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 위치한, 즉 철학의 지점에 대해 검토된, 관계. 플라톤은 좋은 정치의 실현의 가능성과 그 실천적인 불가능성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힘든 길을 조사한다. 실제로 만일 정치가 그 개념 내에서 가능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어떠한 논리적 논변도 이상적인 정치에 대한 사유를 배제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는 실행이라는 그것의 현실적 조건들의 불가능성에 봉착한다.
이 세 가지 플라톤적 몸짓은 고유하게 그리스적인 사유의 발명으로서의, 즉 절대적인 새로움으로서의 철학의 공간을 명시하는 삼각형으로부터 세 가지 계기를 구성한다.
수학
(설득력 있는 증명)
정치
(민주주의적 논쟁)
시, 신화
(연극과 무대의 갈등에 상반되는)
삼각형의 세 꼭지점은 대화에 의한, 즉 평등주의적인, 토론으로 열린다. 달리 말해서, 고유한 규범들을 생산하는 토론의 공간 내에서 교환되는 논변들에 따라서 말이다. 그러므로,
- 수학은 그 논증으로부터 논리의 증명을 인도함으로 인해 받아들여진다.
- 도시의 민주주의적인 구성은 사유와 또한 실천을 위한 문제로서의 정치를 현시한다. 그러한 구성은 종교적인 또는 신성한 현현으로부터 정치를 분리하는 아고라에서의 토론을 열어낸다. 우리는 정치의 구조를 구성하는 분열을 목격한다.
- 마지막으로, 연극은 갈등 상황 내에 놓인 두 인물로 시작하며, 그 분쟁적이고 적대적인 구조에 적용되는 가치 판단을 향해 열리는 이상, 그것은 본질적인 방식의 대화적 명제다.
그리스 철학을 구성하는 이 삼각형의 세 항들은 자기-규정된 담론의 분할에 의해 지지된다. 변증법(문답법, la dialectique), 즉 logos dia, 다시 말해 가로질러진, 그리고 분리의 지나감을 앞세우는, 논리(logos)는 타자 – 실재하는 또는 잠재적인 – 에게, 여러분의 논증을 검토하는 타자에게 전달된 논증들로 짜여진다. 우리는 언표(enonce)의 의미와 언술(enonciation)의 입장 사이의 분리를 목도하다. 언술의 입장은 언표의 정당화로서 이상의 기능을 말하지 않는다. 플라톤적 변증법은 논증적 세속성의 공간 내에, 다시 말해 철학의 외부에서 철학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 – 수학적 증명, 연극적 갈등, 민주주의적 토론 – 내에 언표를 집어넣도록 함을 통해 그것(플라톤적 변증법)이 탈신성화하는 언표의 정당성에 관하여 언표와 언술을 떼어놓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변증법적 진리는 담론들의 분할을 통해 진행되는데, 그러한 분할은 그것을 추론할 수 있는 동일한 가능성의 골격을 조건 짓는다. 언표들의 논증적 정당성과 오리지 사제의 말에만 의지했던 언표들의 오랜 종교적 지위 사이에 어떤 분리가 발생한다. 그러나 철학이 이 분리를 생산한다기 보다는, 이 분리가 철학적 담론을 가능하게 한다. 위의 삼각형의 세 꼭지점들은 최소적인 철학의 지위를 위한 가능성의 공간을 구성하는 그러한 분리를 실행한다. 이 기원적인 삼각형으로부터, 우리는 플라톤이 철학이라는 이름 하에 이해하는 것을 도식화할 수 있다.
도식 페이지 7
1. 유일하게 철학만이 수학을 정치에 관계 지을 수 있다.
철학은, 최우선적으로, 어떠한 관계도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우리가 다루는 개념들이 수학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관계에 놓일 때 우리는 철학 안에 있다.
2. 철학에는 대립하는 것이 있다: 소피스트적 사유.
[* 바디우는 la sophistique를 폄하하기 보다는 일종의 철학에 대한 상대자/동반자로 인식한다. 따라서 일반적인 번역에 따라 궤변론으로 옮기기 보다는 소피스트적 사유나 변설로 옮긴다.]
철학은 지식의 정점에 위치하지 않지만, 언제나 철학/소피스트적 사유라는 쌍 내에서 포착되는 것으로 판명된다. 현실적인 역사적 구속의 너머, 플라톤에게 있어, 그것은 언제나 그 원칙 상 소피스트적 철학에 상반되는 것으로 실존한다. 철학자는 언제나 누가 그의 시대의 소피스트들인지를 스스로 물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 따라서, 모든 철학은 논쟁적인 것으로 드러나는데, 그 이유는 철학이 담론들의 분열 내에 곧바로 배치된 변증(une dialectique)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언제나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나는데,근대적인 용어로 달리 말하자면, 철학은 합의적인 존재의 상태의 외부에 있으며, 언제나, 본질적으로,그 시대의 의견들에 이질적이다.
3. 궁극적으로, 철학은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을 표명한다.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non-etre)의 문제에 마주치는 순간으로부터 철학적 텍스트를 식별한다. 철학의 아버지로서의 자격(paternite)은 존재를 제시하고 존재가 아닌 것(le non etre)을 배제하는 파르메니데스에게 돌려진다. 파르메니데스는 따라서 존재에 비-존재를 도입하여 그에 대한 부친살해를 실행하게 될 플라톤의 아버지다. 그 자체로, 이 문제는 철학의 정의를 규명하지는 않지만, 철학은 이 문제에 마주하게 될 때 진정으로 실존한다. 이 문제의 경로, 즉 철학이 존재론 또는 메타-존재론으로 주어지는 계기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4. 철학은 시에 관한 언표들, 즉 예술에 관한 언표들을 내포하거나 또는 가로지른다.
플라톤은 시인들을 판단한다. 따라서 우리는 철학에서 피할 수 없는 원소를, 즉 예술에 관한 판단의 프로토콜을 발견한다.
5. 이 네 가지 기준들에, 플라톤에 관련하여 절충의 논리, 즉 언제나 주어진 계기로 소환되는 매개의, 간격의, 둘-사이의 논리를 부가해야만 한다. 모든 벌어짐(ecart)은 플라톤에게 metaxu의 문제, 즉 사이에 있는 것의 문제인 작동자(실행자, 연산자[수학], operateur)를 요구한다.
그 기획의 각 지점은 극단에 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둘-사이로 사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제기되는 문제: 위치를 정할 수 없는 항은 간격으로 실존하는가? 플라톤에게, 그것은 초월의 문제를, 즉 본질의 너머에 가로질러-있음(trans-etre)으로 사유되는 선의 이념(l’idee de Bien)의 문제를 제기한다. 게다가 그리스에서는 선의 이념이라는 잘 알려진 기질이 유통되었는데, 우리는 이따금 그 이념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가운데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철학적으로 명료한 것은 그것의 경계로부터 밝혀지는 것이다. 모든 철학적 명확성은 틀에 맞추어 넣는 명확성, 즉 틀에 맞춰진 국지화인 것이다. 항들을 사이에 배치하는 것은 그것들을 국지화하고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명료한 것은 그것의 경계의 틀 안에서 나타난다. 어떤 테두리가 없는 항은 모호하며, 실제로 장소를 갖지 않는다(발생하지 않는다, il n’a pas de lieu). 즉 그것은 장소 바깥에 있는 것이다. 모호한 것은 언제나 장소 외부에 있다. 플라톤에게 있어,선의 이념, 즉 본질(ousia)의 너머는 경계가 없는 것의 모호함을 그 이념에 할당한다. 우리는 따라서 결코 실제로 선의 이념을 알 수 없을 것이며, 오로지 그것에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것을 얼버무릴 수 있도록, 모호한 것의 임의로 더해진 이미지는 절대적으로 밝은 것, 즉 태양의 빛이 될 것이다.
언제나 철학에는 어떤 것이 그 가장자리로부터 밝혀지지 않아서 사유를 위해 은유를 통한 표현으로 이끌리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인, 또는 은유에 의해 신성화된, 힘으로의 접근은 그 자체의 벗어남의 경계에서 한층 더 논증되고 세속화된 이 뚜렷한 순간으로부터 철학적 사유를 상황 짓는다. 그것은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적 담론이 muthos(신화) 내에서 동요하는 그것의 고유한 법칙을 검증하는 순간이다. 철학은 수학에서 시작하지만, 연역적 논증을 느슨하게 팽창시킴으로써 종결되는 담론이다. 말하자면 연역적 논증이 시 안에서 완성될 정도로, 즉 은유 안에 갇히게 될 정도로 말이다. 그런 사실에서, 그것은 불가피하게 그 추론적 성격에 이질적인 지식의 등재 항목들을 차용하는 잡종적인 담론이다.전반적인 지식들에 대해 그런 것이므로 철학은 담론적 법칙들 아래 통합될 수 없다. 명확한 목표들을 겨냥하는 전략, 그것에 대한 모든 수단들은, 소피스트들에게 있어서나 또는 시를 몰아내고 신화에 준거함으로써 종결하는 플라톤에게 있어서나, 좋은 것들이다. 소피스트들과의 싸움은 하나의 담론을 다른 하나의 담론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잡종적인 것의 분쟁을 목도한다.그 대립은 담론의 형성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다른 목표들을 겨냥하는 전략적 대립을 통해 이루어진다. 철학이 주체성에서 정의될 수 밖에 없도록, 그리고 담론적 기준들에 따라서 정의되지 않도록 말이다. 우리가 제시하게 될 최초의 네 가지 기준들은 따라서 상대화되며, 실제로 우리가 그 전략적 목적에 따라 일자를 타자에 연결 짓지 않는다면 그 기준들은 철학을 성격규정 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또한 우리는 플라톤이 철학 보다는 철학적인 것을 정의하는데 더 전념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소피스트와 철학자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동일한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의 욕망은 다를 뿐만 아니라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대화편에서 고르기아스와 프로타고라스를 그리고 국가 1권의 트라시마코스를 보라. 철학 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이상한 상황, 실제로 그것은 타자의 욕망의 전략적 파기를 함축한다. 그 논점은 이어지는 이념을 수반한다. 주어진 계기에 대해, 철학은 넒은 의미에서 더 이상 민주주의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철학자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소피스트의 욕망이 권리 없는 것임을, 즉 그의 욕망이 소피스트의 동일한 욕망에 충돌한다는 것을 표명한다. 소피스트적 담론은 단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체적 정체(헌법, constitution)로서의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소피스트의 욕망을 전략적으로 분쇄하기 위해, 플라톤은 소피스트가 어떤 의미에서 진정으로 그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욕망이 아닌가를 보여주는 책략을 동원한다. 달리 말해, 그가 전적으로 자임하는 욕망을 좌절시키는 연출 안에 소피스트를 밀어 넣는다. 그 욕망은 존재할 권리가 아니어야만 한다. 즉, 플라톤은 그의 주체성과 동일한 중심을 지닌 소피스트의 욕망을 무화 해야만 한다. 철학은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이 아니며, 실제로 철학은 상징계 내에서 개념적 폭력의 영향력을 통해 소피스트에게 그의 고유한 욕망의 부인을 고백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이를 무화한다. 이는 플라톤의 사유는 전체주의적이거나 또는 절대적이다라는 실증주의자 칼 포퍼가 말하게 될 그런 것이다.(열린 사회와 그 적들)
그러나 거기에서 철학을 지탱하는 전략적 욕망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 소피스트적 욕망은 철학적 욕망의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본질적인 적인가? 분명한 것은 그 기원으로부터 철학은 비판적이고, 논쟁적이며, 폭력적인 형상, 다원론(pluralisme)에 관심을 두지 않는 주인이라는 형상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 즉 그의 고유한 욕망 내에 다른 욕망을 연루시킴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 판명된다. 본질적으로, 철학자는 그 욕망이 어떤 부정적인 양상 내에 다른 욕망을 연루시키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고독하지 않다. 이러한 비-고독(non solitude), 즉 다른 욕망과 함께 드러나며, 절대적인 것을 욕망하는 경쟁의 구조(체제, constitution) 내에 사로잡혀 있는 철학적 욕망의 이러한 본질적인 표명은 철학에 있어 본질적이다. 철학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사라져야만 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소피스트적인 것(le sophistique)은 철학의 존재를 위해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관용적인 철학은,단적으로 소피스트적인 것이라는 이름 아래, 즉 사라져야만 하는 이름 아래 놓이는 것에 대한 가변성은 없다. 예를 들어, 18세기 기독교. 그 당시 어떤 척도 내에서 철학이 그 존재를 위해 사라져야만 할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드러나는가라는 문제는 제기되는가? 우리는 프로이트와 라깡 이후로 그것을 알고 있으며, 거기에서 우리는 철학적 욕망이 완성되기 위해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 부분적으로 그 욕망의 원인이자 악한 목적, 어떤 경우에도 그것의 목적이라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피스트적 변설(la sophistique)은 따라서 플라톤주의의 원인이자 그 욕망의 악한 목적인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에게 있어, 소피스트적 변설과 소크라테스의 처형, 즉 폭력적인 결정의 지점을 구축하는 것, 사이의 관계는 실존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칭적인가? 소피스트적 변설은 철학이 사라지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한 쟁투라는 도식 내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며 – 그리고 그것은 극적이다 – 소피스트는 철학의 소멸이나 철학의 비-소멸에 무관심한 채로 남는다. 소피스트는 그가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철학자들의 어떠한 관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철학 하고자 하는(philosopher, 지혜를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은 철학자의 전략적 투쟁에 무관심한 채로 남아있는 소피스트의 욕망 – 그 욕망은 철학자의 욕망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사라져야만 한다 – 에 구성적이지 않으며, 따라서 철학자는 무고한 자의 소멸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건은 진정시킬 수 없는 두 적대자 사이에 벌어지는 죽음의 투쟁이 아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당신에게 무관한 채로 있는데도, 당신이 어찌되었건 소피스트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 그것은 결국 전 세계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과 거의 – 참으로 모든 것이 이 ‘거의’에 달려있다 – 같은 것이다. 말하자면 의견들,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모든 세계가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철학적 욕망이 세계의 절멸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 플라톤은 게다가 철학이 이 세계로부터 방향을 돌려야만 한다고, 그것의 상징적 절멸을 실행해야만 한다고 말할 것이다. <<지혜(Sophia)에 대한 욕망이 토막 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인 그 사람>>(V, 475b). 소멸에 의해 지탱되는 전적인 지혜의 욕망은 전 세계의 소멸을, 어쨌든 철학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세계의 소멸을 장려하는 지혜로 이해될 수 있다. 철학이 결백하지 않으므로, 철학은 어떤 파멸을 요구하지만, 그 파멸은 전 세계의 소멸과 구별할 수 없는 경계에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렇지만 그리고 동시에, 철학은 그 파멸을 제한할 것이다.즉 그것을 국지화하고, 유일한 지점의 파멸에 그치기를 시도할 것이다. 세계에 불을 지르리 않고자 하는 모든 철학들의 본질적인 과제는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세계가 집중되는 한 지점을 찾는 것, 즉 사라져야만 하는 것으로서의 세계와 등가인 한 지점을 결정하여 철학적 욕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 그가 희생해야만 하는 것, 그리스 세계의 오랜 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지점은 호메로스다. 호메로스에게 그어진 횡선은 가장 가능한 체계를 사용한 철학적 체계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며,그것이 바로 국가 10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라져야만 할 것을 국지적인 지점에서, 즉 존재하는 세계에 등가인 그 지점에서 단독화시키는 poiesis(생성, 창조, 만들기)와 시인들의 추방에 의해 실행된 변증(법)적(dialectique) 작업에 대한 그의 만족을 나타낸 이유다. 우리는 그 지점을 선별 이후에 사라져야만 할 것으로서의 세계를 재현하는 철학적 환유(metonymie)로, 즉 소피스트적 변설의 아버지로서의 호메로스로 명명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철학은 환유를 가로지른다. 즉 철학적 욕망이 시작되었을 때,철학자가 다시 그의 적대자를 추방할 수 있기 위해 세계를 사라지게 하는 종류의 지점들 중 하나에서 세계를 단독화한다. 그러나 그 지점들 중 오직 하나로부터 세계의 비전을 구축하기 위해, 그것은 노력과 지적인 희생을 대가로 하며, 이어지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 지점들 중 하나에서 재현가능하기 위해 이 세계는 도대체 어떤 것일 수 있는가? 여하튼, 그리고 오늘의 강의를 결론짓기 위해, 나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철학의 정의를 제시할 것이다. 철학은 언제나 논증적인 양식으로 시작되며, 다음으로 본질적인 환유(metonymie)를, 즉 세계의 환유를 가로질러, 은유(metaphore)에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