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아 거울아
그레고리 머과이어 지음, 한은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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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기억, 욕망, 그리고 그 너머의 '현재의 시간'

 

 

읽은지는 좀 됐는데 글을 계속 쓰기는 써야겠다는 생각은 하면서도 참 뭐라 말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이 책도 그런 경우라 해야겠군요. 책을 처음 손에 쥐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거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힘든 일이 있은 뒤라 무언가 이것저것 미쳐서 할 일이 필요했는데 마침 이 책을 보게 된 것도 그 중에 한가지였거든요. 그리고 빨리 서평 하나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아이디어 정리까지 했는데... 이후로 이것저것 할일이 더 있기도 했고 무언가 착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했구요.

 

애초에 이 책의 독서는 착각으로 시작했답니다. 애초에 보르지아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으니까요. 책을 시작하면서 나오는 시라고 할지... 아니면 뭐라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왠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이야기들인 듯 하기도 했구요. 물론 그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나오는 인물들과 여자아이가 자라가는 과정에서 있게될 일들에 대한 것이더군요. 한마디로 착각의 연속이었던 거죠.

 

그건 그렇고...

 

오늘 넘기면 또 한주 동안 글쓰기가 어려울 듯한 느낌이 들어 후딱 써버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곤 이런 생각을 해 보는거죠. 이 책이 백설공주라는 동화를 재구성한 형태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테니까 별달리 줄거리를 이야기 한다던가 하는 것은 멍청한 일일테니 그냥 약간은 다른 이야기를 해 본다면 어떨까. 다시 고백합니다만 이 책을 반 이상 읽기 전까지도 이게 백설공주 이야기라는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답니다. 당연히 '머과이어'라는 작가가 어떤 소설가인지도 알지 못했구요. 별 관심이 없었다는게 정답이겠죠. 어쨌든 책을 읽다보면 하얗다는 뜻의 비앙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백설공주, 계모 역을 맡은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멍청한 거위소년이었지만 동시에 왕자가 되기도 하는 미첼로토, 사냥꾼, 일곱인지 아니면 여덟인지 알기 어려운 (돌)난장이들 등등 아주 정겨울 정도로 친숙한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소설의 줄거리를 다시 이야기 한다던가 하면서 남들과 똑같은 이야기로 그냥 시간을 보낸다는 건 재미없는 일이겠죠. 그래서 거울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마침 소설 제목이 '거울아 거울아'이기도 하군요. 그만큼이나 이 거울이란 물건이 이야기 전체에서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반증이겠죠.

 

참 그 전에 'Se non e vero, e ben trovato' 라고 쓰는게 맞다는군요. 어떤 말인지 알아보려고 구글에 찾아봤더니 이탈리아 속담이라는군요. '사실은 아니지만, 좋은 이야기' 정도로 번역이 된다구 하구요. 참 위키피디아가 좋기는 좋군요. 이런 속담도 들어있고... 하여간 이 이야기를 보고도 왜 이런 이야기를 해 놨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거든요.

 

그럼 제대로 거울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이 거울이 발견된 것은 베르데 호수에서였죠. 비첸테 나바로(비앙카의 아버지) 이 거울을 호수 바닥에서 찾아서 자신의 성으로 가져다 둡니다. 이 거울은 원래 이야기에 나오는 돌난장이들이 만든 물건이었는데 이들이 분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계모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누군지를 물어보는 용도로 쓰였다가, 이후에 비앙카가 죽고 돌난장이들이 거울을 다시 가져왔을 때 거울에서 생기(또는 수은, quickness와 quicksilver는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죠)가 빠져버린 후에는 비앙카의 관뚜껑이 되기도 하구요. (사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잘 기억도 못하고 그냥 거울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블로그 이웃 중에 한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 주시더군요. 그래서 찾아보기도 했답니다. 여하튼...)

 

우리가 거울이란 것을 떠올릴 때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요? 우리는 거울을 볼 때 스스로를 보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자신의 모습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일종의 왜곡된 형상이죠. 생각해 보자면 거울에 비친 상은 언제나 거꾸로 뒤집어지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매일 아침 화장실에 가서 이빨 딱으며 보게되는, 혹은 화장대 앞에서 보게 되는 거울, 아니면 지하철 유리에 비치는 자신의 상은 일종의 타인의 형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게 되는거죠. 그리고 그 타인에게 어쩌면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게 된다는 것이죠.

 

루크레치아가 거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지도 모르겠군요. 결국 그녀의 환상은 자신의 미모를 영원히 유지하고자 하는, 언제까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로 남고 싶은 그런 것이니까요. 자신의 오빠이자, 정인이었고, 가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체사레가 매독으로 죽어버린 이후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몬테피오레라는 작은 영지였습니다 (적어도 소설에서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미모는 그래도 손에 남아있는 마지막 욕망의 대상이었던 것이겠죠. 하지만 시간이 감에 따라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봄눈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에 있던 거울에 바로 그 욕망에 대상을 반영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 이야기의 세계는 현실이 아니라 허구입니다. 재구성을 했지만 결국 동화속의 세상이기도 하고, 또 'Se non e vero, e ben trovato'라는 속담이 말해주는 것 만큼이나 허구적인 세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과거의 현재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생각해 볼 숟 있겠죠. 그러나 여전히 그 허구 속에도 과거와 현재의 구분은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거울을 만들었던 존재가 인간이 아니라, 돌난장이들이라는 것입니다. 돌난장이들은 현재가 아니라 영원의 시간에, 다시 말해 과거의 기억 속에 속한 존재들이죠. 돌난장이들은 무언가를 훔치지 못합니다. 단지 인간만이 그럴 수 있을 뿐이죠. 하지만 이들의 훔치지 못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잠시 되새겨 보면, 그것은 단순히 무엇을 훔치는 '행위'가 아니라 '행위' 자체에 대한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행위는 바로 현재에 속합니다. 그리고 돌난장이들의 무능력은 바로 이들이 과거에 속한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가 무언가를 비추어 본다면 무엇에 비추어 보게 될까요? 당연히 과거입니다. 현재나 미래에 비추어볼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기억만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죠.  돌난장이들의 생기quickness나 거울에 발라져 있던 수은quicksilver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거울이 '이들 과거에 속한 자들'에 의해 만들어 졌으며, 그것도 그들의 생기를 머금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재밌는 것은 계모(루크레치아)의 욕망이 바로 그렇다는 것이죠. 과거에 자신이 누렸던 것들은 이미 다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루크레치아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자신의 미모라는 것은 미래 보다는 현재에, 또 현재 보다는 과거에 오히려 더 높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죠. 당연히 그녀의 욕망은 과거를 향합니다. 그리고 '과거에 속한 자들'의 생기로 만들어진 거울에 비추어진 것이죠. 바로 거기서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반영하기 위한 대상, 이제 덜자란 '새끼 오리'의 모습을 벗어나 백조와 같은 아름다움의 정점에 들어서고 있는 비앙카(백설공주)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욕망의 투영이란 파괴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었죠. 욕망의 대상이 죽어야 자신의 욕망(미모의 보존)이 달성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비앙카(백설공주)의 죽음으로 이야기가 끝나버리지는 않습니다. 세월은 무심결에 몇년이 흘렀을지도 모르지만 비앙카는 돌난장이들이 비앙카의 권유로 가져왔던 거울에, 돌난장이들의 생기, 과거의 시간이 응축되어 반짝이던 수은이 빠져버려 투명한 관뚜껑으로 덮인 상태에서, 그대로 자는 것과 같이 보존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왕자님 또는 거위소년 미첼로토가 아니라 사냥꾼 라누치오에게서 키스를 받고 깨어난 것이죠. 수은이 빠져버린 거울은 더 이상 비추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단지 투명하게 반대편에 있는 것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죠. 이 편에서 보고싶어 하는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거울 아니 유리판의 반대편에 있는 진정한 형상을 말이죠.

 

그 때 시간은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됩니다. 마지막 장인 '몬테피오레'에 나오는 비앙카의 시각은 바로 이런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죠. 모든 것이 마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더 이상 계모의 욕망과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지 않은 현재의 시간에 서서, 거울 아니 유리판의 저편에 있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은 과거와 같을지 모르지만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습니다. 인간은 과거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지만 과거의 기억을 넘어서 미래에서 오고 있는, 가능성과 잠재성으로 가득한 현재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꽤 재미있는 소설을 보고나서도 약간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글을 맺게 되는군요. 일단 여기까지가 이 책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쨌든 꽤 즐거운 독서였고 마침 뭔가 할일이 필요한 판에 그런 일을 만들어준 소설이라는 의미에서는 고맙기까지 하군요. 무엇보다 백설공주라는 고전적인 동화에서 이런 여러가지 표상들을 끄집어 낸 머과이어의 능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좋은 이야기를 읽게되어서 참 다행이군요.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읽어보고 싶군요. 이런 형태의 재구성들. 시간이 되려나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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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 / 현대경제연구원BOOKS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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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서평 -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부제에 대한 번역 진보주의자의 양심이라는 문구가 내내 거슬리더군요. The Conscience of a Liberal에서 liberal이라는 말은 진보주의자 보다는 자유주의자에 가까운 말이라는 것은 책에서 역자들도 인정하고 있는 바입니다확실히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고려할 때 폴 크루그먼의 입장은 진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책 말미에서 크루그먼 교수는 자신의 입장그러니까 의료보장을 비롯한 사회보장과 공공지출의 확대를 옹호하는 입장이 오히려 과거의 제대로 된 미국 사회의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제대로 된 보수이고,부시가 대표하고 있는 네오콘(Neocon 또는 Neo-conservative. 여기서는 새로운 보수주의 운동이니 하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만 그냥 네오콘이라는 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집단입니다)이 오히려 급진주의자들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상당히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이겠죠우리는 공화당이 보수당으로 알고 있는데 크루그먼 교수는 이들을 보수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려면 미국의 현대 정치사를 살펴보아야 이야기가 됩니다그래서 이 책에서 크루그먼 교수가 하는 작업은 미국의 현대사를특히 정치사를 살펴보고 그와 함께 어떻게 미국인들의 경제적 평등이 그리고 사회보장 및 노동권이 유린당했는가를 살펴보는데 있습니다.

 

아 그런데 여기서 참 이상한 점이 있군요크루그먼 교수는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입니다그것도 국제무역과 관련된 오랜 경제학적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노벨상을 탄 사람이죠그런데 그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정치사에 열을 올린 것일까요어쩌면 답은 간단히 나옵니다한 사회를 놓고 볼 때 정치와 경제를 놓고 볼 때 어느 쪽이 우선이 될까요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대선에서그러니까 현 대통령을 뽑는 대선에서 경제라는 문제가 다른 어떤 문제에도 우선했던 것 같군요그러니까 경제가 우선일까요사실은 그 반대가 답입니다.

 

정치와 경제 양자는 언제나 상호 영향을 주죠물론 어느 한쪽에 더 관심이 많이 쏠리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시대에 따라 다른 변화라고 할까요그러나 알고 보면 경제는 언제나 정치에 더 큰 영향을 받고무엇보다 실질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은 언제나 정치가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지난 대선에서 기업가 출신의 대통령을 뽑았던 이유를 생각해 보죠당연히 현 대통령이 경제정책을 잘 펼쳐서 경제가 살아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물론 경제에 대한 기대라는 영향 때문에 대통령이 뽑힌 것이기는 합니다만 만일 이전 대통령이 경제정책을 잘해서 다들 불만이 없었다면 경제적인 문제가 그렇게 커질 수나 있었을까요언제나 정치가 경제를 결정하게 됩니다.(사실 원래 경제학이 처음 생길 때의 이름은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ics이었죠.) 다시 말해 경제를 생각하면서 정치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말이겠죠.

 

크루그먼 교수도 책의 서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자신이 자라던 시대에는 미국은 중산층이 두터운 경제적으로 평등한 나라였으나 미국사에서 그 이전에 또는 현재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크루그먼 교수는 책의 22 페이지에서 정말 정치적 환경이 경제적 불평등을 결정하는데 그처럼 결정적일 수도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한 후첫번째로 미국의 중산층이 대압착(The Great Compression)기 이후 루스벨트 정부의 소득분배 정책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것두번째로 1980년대의 경제적 불평등의 시작이 우선적으로 정치의 보수화 및 양극화에 뒤따른 결과였다는 것세번째로 기술 발전이나 학력에 의한 영향보다는 소득세 문제와 같은 소득 재분배 효과를 낮추는 보수적 정책으로의 회귀에 기인한다는 점네번째로 1980년대 이후 미국 정치 보수화는 미국에서만 일어난 일이었다는 점 등을 들어 경제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지대하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질문은 당연해지겠죠바로 왜 이런 정치적 보수화 및 양극화가 있었는지에 대한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이것이 바로 크루그먼 교수가 미국의 현대 정치사를 살피게 된 연유입니다.

 

아주 간략히 미국의 현대 정치사에 대해 언급하자면 우선 19세기 산업화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던 진보의 시대(Progressive age), 산업화 면에서 유럽을 제치고 미국 자본주의의 전성기를 누렸던 도금시대(The Gilded age),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에 의해 파탄이 난 경제를 살리기 위한 노력과 경제적 분배가 우선이 되었던 뉴딜(New deal) 및 대압착기(The Great Compression), 냉전기를 거쳐 70-80년대 미국 경제가 흔들리기까지 경제적 평등이 지속되는 시기가 있었고, 80년대 이후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90년대 잠시 클린턴 시대를 거쳐(클린턴은 미국의 무역적자 해결에만 성공했을 뿐사회보장과 의료 부문에서는 걔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현재는 다시 과거의 도금시대와 같은 수준의 불평등으로 돌아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리고 미국 정치사의 흐름에서 우리는 어떤 경향성을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그것은 경제적 평등의 정도가 높은 시기에는 정치적으로 공화당(Republicans), 민주당(Democrats) 양당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고이들의 성향이 멀어질수록 경제적 불평등의 정도가 높아져 갔던 것입니다사실 정확히 말하면 70년대 네오콘의 씨앗이 자라면서 서서히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가 진행된 이후, 80년대에 들어 드디어 그 결과가 경제적 평등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경제학 역시 70년대의 케인즈 학파를 따른 관리경제의 문제에 대한 반동으로 밀턴 프리드만을 위시한 시카고 학파가 주동하는 미국 경제학의 주류가 되었고 지금까지 그 명맥이 유지되어 왔으나 최근의 위기로 인해 다시 케인즈 학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형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의 정치적 양극화그리고 그에 이은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는 사실상 네오콘이라 부르는 새로운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된 공화당의 성격에 기인합니다과거 뉴딜과 대압착기를 거쳐 중산층이 두터웠던 미국의 공화당은 절대 지금과 같은 극우적이고 극도로 종교적인 색채를 띈 광신도들에 의해 지배되는 국가가 아니었습니다이런 상황은 사실 미국의 지식인층이 좋은 일자리를 얻는 문제와도 직결이 됩니다무엇보다 미국의 보수 측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나간 사람들은 정치 혹은 정부 및 주요기관의 현직에서 부정부패의 문제로 자리를 일어도 얼마든지 관련 연구단체 같은 곳들에서 일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이들 연구단체들은 미국의 수퍼리치(super-rich) 라고 부르는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돈을 버는 사람들에 의해 기금이 조성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그에 반해 진보진영 혹은 민주당 계열의 연구소는 찾기도 어렵고 펀딩 역시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어왔습니다.

 

미국의 보수특히 새로운 보수라 불리우는 네오콘들이 미국의 유권자들을 장악했던 논리는 어디까지 부정적인 것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어쩌면 보수의 특징이라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기존가치의 수호와 국방 문제는 이들에게 언제나 강점이었습니다이들은 가족적 가치와 개인의 자유(작은 정부낮은 세율),외부의 적에서의 국민 및 국토 수호(냉전기에는 소련 또는 러시아냉전기 이후에특히 9.11 사태 이후에는 테러와의 전쟁)를 내세우며 대부분의 유권자들을(중산층사로잡았는데사실 이 논리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논리의 기반은 언제나 유권자 또는 미국민들의 공포였습니다쉽게 말해서 미국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공포에 경도되어 자신들이 누려오던 사회보장과 경제적 평등이라는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현재의 미국에는 의료 보험이나 또는 퇴직 후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일에서 완전히 은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물론 90년대 초에 민주당의 클린턴 정권이 있었습니다그러나 클린턴 정권 역시 예산 적자를 흑자로 전환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었지 의료보험도 사회보장 및 노동권 등 여러 현안에서의 개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특히 의료보장에 대한 힐러리 클린턴의 실책의 문제는 큰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후 아들 부시(현 대통령)의 정권이 들어서고 테러와의 전쟁 및 이라크전이 터지면서 미국의 보수화는 더더욱 심해져 갔으며 미국 네오콘 출신 정치인들의 부정부패 및 미국 기업가들의 보수는 더욱 더 늘어갔습니다

 

이런 미국 사회내의 갈등 관계가 형성된 현재의 시점에서 미국의특히 금융권의 탐욕이 그 바탕이 되는 금융위기가 찾아왔고 이제 이 위기는 실물경기로 번져 세계적인 경지침체의 길로 접어들고 있습니다이를 보며 역시 역사는 반복하는 것이고 경기순환이 단기적 형태에서만 맞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형태에서도 맞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거기에다 다음 대통령 후보로 새롭게 민주당 후보인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되었고이 사람이 할 역할도 분명해 보입니다그렇다면 질문은 과연 오랜 도금시대 이후에 찾아왔던 대압착의 시대가 다시 찾아올 것인가에 대한 것이 될 수 밖에는 없습니다그런 의미에서 문제는 정치야,이 바보야!(Its Politics, stupid!)라는 문구가 더더욱 절실해 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 사회내의 경제적 불평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요인들을 분석하여 다음과 같은 항목들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1. 의료보장

2. 소득불균형 줄이기

1) 시장영역 밖에서  시장 소득은 그대로 두고 가처분 소득에 대한 세금 및 세금 공제 등을 통한 소득불균형 해소부유층 세금감면 철폐

2) 시장영역 안에서  최저임금노조 노동에 대한 정책

 

물론 이런 항목들을 보고 그럼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냐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그러나 이런 정도의 경제적 불평등 해소책은 어느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다들 하는 일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교육의 평등 문제도 짚고 넘어가야 했다고 봅니다고등학교까지는 공립으로 해결이 된다고 하지만 현대 사회는 대학 교육이 거의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이에 대해서는 미국적 상황이 따로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생각에는 그렇군요). 그러나 이 책에서는 대학 교육의 문제는 미국 주립대의 등록금이 비싸기는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등록금 대출제도 같은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정하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런 부분에까지 평등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는군요(물론 가능한 개혁의 현안의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이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란 기회의 평등을 지지한다고 말합니다그러나 기회의 평등이란 결과적 평등에 의해 평가될 수 밖에 없습니다애초에 대학 교육을 책임질 수 있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와 고등학교 보내주기도 힘든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에게 기회의 평등이란 없다는 말입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교육 문제에만 한정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회의 평등은 결과의 평등이 어느 정도 담보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단순히 바다건너 어느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불과 11개월 전의 대선에서 우리는 정치를 무시하고 먹고 살기 힘든 형편을 말하며 속칭 경제통이라는 대통령을 뽑았습니다그래서 그 결과가 무엇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11개월이라면 그 행적을 돌아보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물론 위기의 탓을 돌릴 수도 있고소고기 파동 탓을 할 수도 있고여러 가지 문제를 들먹일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최근의 한국경제 위기상황을 통해 시장은 이미 위기상황 타개책에 대한 대통령과 지식경제부 장관의 비일관성과 횡설수설을 목격했습니다분명히 이런 상황은 일정 정도 이상의 수준을 보일 것이고기간도 앞으로 레임덕 기간 빼고도 3년 이상이 남았습니다이 기간 중 제발 국민들이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는 것을정치가 항상 경제에 우선한다는 것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현재로서는 미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나온 것에 대해 미국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 벌써 햇수로 4년전에 썼던 서평. 지금 다시 대선이 가까운 시점에서 의미가 있을 듯 해서 포스팅해둠. 특히 복지가 키워드가 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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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race (Paperback)
존 쿳시 지음 / Penguin U.S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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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he first moment picking up this book, I found it contained something inexplicable between the lines. You know the complexity of this book is disparaged with the simplicity of the synopsis at the back cover. Simply put, as a guy at my book club meeting said this book seemed to elongate a story short enough for 10 minute talk to huge and painstakingly long story of some 220 pages. I agree to that person in a way but it doesn't mean this book doesn't have anything to buy. Nevertheless, I still believe the profound meaning and complexity have this book worth reading once or twice.

 

Perhaps it is really simple to judge David Lurie as a middle-aged, secular westerner who found Sex as a problem of his life and suffered severely from his womanizing instinct, who've been raised naturally by the women of his personal history. However, it is hard to sum up the geopolitical and religious meanings of his suffering, humility and disgrace leading him to a start-over.

 

Maybe youre going to query what I mean with this word religious, because Lurie seemed not to have to do with any kind of religion in his life. Far from the geopolitical apparition of Afrikaaners in South Africa in Luries vivid life story, his life didnt seem to have any crossline with anything religious. Perhaps, he couldve attended a church in youth, but his latest life didnt make any kind of junction with religious course. Actually the reason why this religious idea popped up in my brain while I was in my book club meeting was that, foolishly, the names like Lurie and Isaacs mislead me to remind of some Jewish origin of those names. As a matter of fact, Lurie is a quite popular family name among Jews. I was not prejudiced enough to consider the author's name Coetzee had any sort of Jewish stuff when I went through lots of chapters of Disgrace’, but still had an idea that this book may have some similarity in its plotting with the stories of the Bilble.

 

Actually I found a stereotypical plot easily found in any stories of The Bible - sin, perdition, disgrace or punishment, any form of changes in life (Actually we call it repentance, but Im not sure it goes the same way in the plot of this book, Disgrace, but anyway it contains somewhat similar meaning) and salvation.

 

Lurie was full of secret pride which couldnt be thrown away. He didnt care other peoples judgment on his affair with young and attracting student named Melanie. His intention was only on nourishing his own desire of flesh. Simple is that. The hearing at the disciplinary committee was, therefore, nothing to a stubborn man with secret pridewho simply ignored his folks demand to take what he was told to do at the disciplinary committee. However, this incident was nothing but a direct way to his own perdition which led him to the small holding of Lucy, his daughter, in the rural area. There was the real disgrace of his life awaiting him. 


Attack and rape of his daughter  And he was assaulted and burned partially by natives around the area. His daughter accepted what seemed outrageous enough that did't cease to irritate readers' mind, not biding for the help from the police power of the city but accepting so called protection which had the real meaning of which her own right on the small holdings was to be a mistress to and taken over by the powerful tribal figure, Petrus, who had been considered as one of inferiors in the good old days. However, Lurie's life changed after that incident, which could be called disgrace or punishment as whatever you like, and eventually the story reached the start-over of his life, even though it was not like his former one.

 

Maybe you see the point here. Considering Lurie is a kind of apparition of Afrikaaners, we can see the stereotypical plot of The Bible - sin, disgrace, regret or repentance and salvation (new start).  And one thing more : The irritating nature of this book has abundant precedences in the books of prophets like Isaiah, Jeremiah, Micah, etc. Summing up these two points, in my opinion, this book could be interprete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prophetic writings of The Bible.

 

I know it would sound funny. But I suppose you may not find it weird anymore when we consider that prophets were people who should tell the inconvenient truth - inconvenient enough to provoke the others to hate them and to the extent that the others want to take their lives. From The Bible, you can find lots of examples like this book's story. If you cant find them irritating you, its because you are alienating yourself from the audiences of the prophets in respect of time disparagement and ethnic differences. Normal folks in the biblical age were vexed and bugged by the prophets constantly. Maybe Socreates could be considered as one of the people who acted like prophets even though he was a Greek and not bearing even a drop of Jewish blood in his vein. You remember Socrates mentioned himself as a fly of Athens to wake up people who fell asleep into ignorance. Disgrace provokes people who read it, when we think of the plot, no matter what Coetzee really intended to do with this book.

 

On the new start or salvation of South Africa, I need to explain one thing I remember from the last book club meeting. We need to focus on the point that Lurie was working on an opera on Byrons life in Italy, even though it was not obvious whether he could finish it up. I guess this means the desire and aspiration,  for fame, of Afrikaaners and of South Africa as a ethnically mingled state. Recently, South Africa is getting more light from its economical and political improvements achieved in the last decade, after South Africaturned down the old transgressions, like apartheid, as Lurie killed the crippled dog. Maybe that was the moment of humility when his secretive pride faded away but also the moment of salvation for Lurie to have a chance to start all over again.

 

One thing more to think about... Maybe somebody may ask on what quality Melanie was so different from other women in his former life, even she made it possible to ruin his life with a mere fling.

 

I think she was not that different from the other women. Maybe it was just timing or  natural course to undo his reputation like an implementation by the author to make story flow. As we know Lurie was nothing but the avartar of desire for flesh. This desire can be substituted by instinct to conquer and dominate when Lurie is a representative of Afrikaaners or westerners of the good old days. His desire and life were already combined as a sequel of iniquities and simply he didnt understand and care for the ethical meaning of his life. From this view point, the incident with Melanie was just the continuation of his desire-driven life and some kind of passage to Lurie's disgrace. Anyway, as you well know, South Africa was condemned by the international society for apartheid and Lurie, a secretly proud representative of Afikaaners, was standing at the hearing and didn't care much about whatsoever other people concerned, just like South Africa didnt care for its own reputation of the world. On that account, the same were they. Thus I suppose disgrace is not always something about humiliation. Someone, who goes through disgrace and have a trouble big-time, could have a chance to grasp a hope in his hand, even just a little bit of it, which means that a fresh new start and the chance for redemption exist always on the flipside like Janus has angry face on the one side but smily face on the other 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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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플라톤의 국가 강의La Republique de Platon par Alain Bdiou(1989-1990)


2

 

국가에서 제시되는 철학의그러나 그 보다는 철학자의정의에 대한 검토는 우리가 동시대적 철학의 운명에 관한 입장을 취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플라톤이 제시하는 정의들은 간접적인(oblique) 정의들이며사유의 전략 내에 포함된다플라톤의 철학적 결정의 세 가지 강력한 동작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분리의 작용진리의 결정에 대해 가능한 장소로서의 시의 추방.

결합의 작용철학적 담론 내로의 수학의 포함첫 번째 몸짓은 진리에 대한 접근을 여는 교육법 내에서 또한 장려된 수학에 의존해야 할 필연성을 수반한다따라서 우리는 플라톤의 텍스트에서 수학과 철학 사이의 복합적인 뒤얽힘을 찾아낸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에 위치한즉 철학의 지점에 대해 검토된관계플라톤은 좋은 정치의 실현의 가능성과 그 실천적인 불가능성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힘든 길을 조사한다실제로 만일 정치가 그 개념 내에서 가능한 것으로 밝혀진다면어떠한 논리적 논변도 이상적인 정치에 대한 사유를 배제하지 않는다반면 우리는 실행이라는 그것의 현실적 조건들의 불가능성에 봉착한다.

 

이 세 가지 플라톤적 몸짓은 고유하게 그리스적인 사유의 발명으로서의즉 절대적인 새로움으로서의 철학의 공간을 명시하는 삼각형으로부터 세 가지 계기를 구성한다.

 

                                                          수학

(설득력 있는 증명)

 

 

                     정치

(민주주의적 논쟁)

 

                                                                             신화

(연극과 무대의 갈등에 상반되는)

 

삼각형의 세 꼭지점은 대화에 의한즉 평등주의적인토론으로 열린다달리 말해서고유한 규범들을 생산하는 토론의 공간 내에서 교환되는 논변들에 따라서 말이다그러므로,

수학은 그 논증으로부터 논리의 증명을 인도함으로 인해 받아들여진다.

도시의 민주주의적인 구성은 사유와 또한 실천을 위한 문제로서의 정치를 현시한다그러한 구성은 종교적인 또는 신성한 현현으로부터 정치를 분리하는 아고라에서의 토론을 열어낸다우리는 정치의 구조를 구성하는 분열을 목격한다.

마지막으로연극은 갈등 상황 내에 놓인 두 인물로 시작하며그 분쟁적이고 적대적인 구조에 적용되는 가치 판단을 향해 열리는 이상그것은 본질적인 방식의 대화적 명제다

그리스 철학을 구성하는 이 삼각형의 세 항들은 자기-규정된 담론의 분할에 의해 지지된다변증법(문답법, la dialectique), 즉 logos dia다시 말해 가로질러진그리고 분리의 지나감을 앞세우는논리(logos)는 타자 – 실재하는 또는 잠재적인 – 에게여러분의 논증을 검토하는 타자에게 전달된 논증들로 짜여진다우리는 언표(enonce)의 의미와 언술(enonciation)의 입장 사이의 분리를 목도하다언술의 입장은 언표의 정당화로서 이상의 기능을 말하지 않는다플라톤적 변증법은 논증적 세속성의 공간 내에다시 말해 철학의 외부에서 철학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 – 수학적 증명연극적 갈등민주주의적 토론 – 내에 언표를 집어넣도록 함을 통해 그것(플라톤적 변증법)이 탈신성화하는 언표의 정당성에 관하여 언표와 언술을 떼어놓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따라서 변증법적 진리는 담론들의 분할을 통해 진행되는데그러한 분할은 그것을 추론할 수 있는 동일한 가능성의 골격을 조건 짓는다언표들의 논증적 정당성과 오리지 사제의 말에만 의지했던 언표들의 오랜 종교적 지위 사이에 어떤 분리가 발생한다그러나 철학이 이 분리를 생산한다기 보다는이 분리가 철학적 담론을 가능하게 한다위의 삼각형의 세 꼭지점들은 최소적인 철학의 지위를 위한 가능성의 공간을 구성하는 그러한 분리를 실행한다이 기원적인 삼각형으로부터우리는 플라톤이 철학이라는 이름 하에 이해하는 것을 도식화할 수 있다.

 

도식 페이지 7

 

1. 유일하게 철학만이 수학을 정치에 관계 지을 수 있다.  

 

철학은최우선적으로어떠한 관계도 가지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한다우리가 다루는 개념들이 수학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관계에 놓일 때 우리는 철학 안에 있다.

 

2. 철학에는 대립하는 것이 있다소피스트적 사유.

[* 바디우는 la sophistique를 폄하하기 보다는 일종의 철학에 대한 상대자/동반자로 인식한다따라서 일반적인 번역에 따라 궤변론으로 옮기기 보다는 소피스트적 사유나 변설로 옮긴다.]

 

철학은 지식의 정점에 위치하지 않지만언제나 철학/소피스트적 사유라는 쌍 내에서 포착되는 것으로 판명된다현실적인 역사적 구속의 너머플라톤에게 있어그것은 언제나 그 원칙 상 소피스트적 철학에 상반되는 것으로 실존한다철학자는 언제나 누가 그의 시대의 소피스트들인지를 스스로 물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따라서모든 철학은 논쟁적인 것으로 드러나는데그 이유는 철학이 담론들의 분열 내에 곧바로 배치된 변증(une dialectique)이기 때문이다철학은 언제나 반대하는 것으로 드러나는데,근대적인 용어로 달리 말하자면철학은 합의적인 존재의 상태의 외부에 있으며언제나본질적으로,그 시대의 의견들에 이질적이다.

 

3. 궁극적으로철학은 존재와 비-존재의 대립을 표명한다.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non-etre)의 문제에 마주치는 순간으로부터 철학적 텍스트를 식별한다철학의 아버지로서의 자격(paternite)은 존재를 제시하고 존재가 아닌 것(le non etre)을 배제하는 파르메니데스에게 돌려진다파르메니데스는 따라서 존재에 비-존재를 도입하여 그에 대한 부친살해를 실행하게 될 플라톤의 아버지다그 자체로이 문제는 철학의 정의를 규명하지는 않지만철학은 이 문제에 마주하게 될 때 진정으로 실존한다이 문제의 경로즉 철학이 존재론 또는 메타-존재론으로 주어지는 계기가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4. 철학은 시에 관한 언표들즉 예술에 관한 언표들을 내포하거나 또는 가로지른다.

 

플라톤은 시인들을 판단한다따라서 우리는 철학에서 피할 수 없는 원소를즉 예술에 관한 판단의 프로토콜을 발견한다.

 

5. 이 네 가지 기준들에플라톤에 관련하여 절충의 논리즉 언제나 주어진 계기로 소환되는 매개의간격의-사이의 논리를 부가해야만 한다모든 벌어짐(ecart)은 플라톤에게 metaxu의 문제즉 사이에 있는 것의 문제인 작동자(실행자연산자[수학], operateur)를 요구한다.

 

그 기획의 각 지점은 극단에 달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둘-사이로 사유될 수 있다그러므로 제기되는 문제위치를 정할 수 없는 항은 간격으로 실존하는가플라톤에게그것은 초월의 문제를즉 본질의 너머에 가로질러-있음(trans-etre)으로 사유되는 의 이념(l’idee de Bien)의 문제를 제기한다게다가 그리스에서는 의 이념이라는 잘 알려진 기질이 유통되었는데우리는 이따금 그 이념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가운데 있었다고 말했다또한 철학적으로 명료한 것은 그것의 경계로부터 밝혀지는 것이다모든 철학적 명확성은 틀에 맞추어 넣는 명확성즉 틀에 맞춰진 국지화인 것이다항들을 사이에 배치하는 것은 그것들을 국지화하고 명확히 밝히는 것이다말하자면 명료한 것은 그것의 경계의 틀 안에서 나타난다어떤 테두리가 없는 항은 모호하며실제로 장소를 갖지 않는다(발생하지 않는다, il n’a pas de lieu). 즉 그것은 장소 바깥에 있는 것이다모호한 것은 언제나 장소 외부에 있다플라톤에게 있어,의 이념즉 본질(ousia)의 너머는 경계가 없는 것의 모호함을 그 이념에 할당한다우리는 따라서 결코 실제로 선의 이념을 알 수 없을 것이며오로지 그것에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그 알 수 없는 것을 얼버무릴 수 있도록모호한 것의 임의로 더해진 이미지는 절대적으로 밝은 것즉 태양의 빛이 될 것이다.

언제나 철학에는 어떤 것이 그 가장자리로부터 밝혀지지 않아서 사유를 위해 은유를 통한 표현으로 이끌리는 순간이 있다그러나 이러한 시적인또는 은유에 의해 신성화된힘으로의 접근은 그 자체의 벗어남의 경계에서 한층 더 논증되고 세속화된 이 뚜렷한 순간으로부터 철학적 사유를 상황 짓는다그것은 플라톤에게 있어 철학적 담론이 muthos(신화내에서 동요하는 그것의 고유한 법칙을 검증하는 순간이다철학은 수학에서 시작하지만연역적 논증을 느슨하게 팽창시킴으로써 종결되는 담론이다말하자면 연역적 논증이 시 안에서 완성될 정도로즉 은유 안에 갇히게 될 정도로 말이다그런 사실에서그것은 불가피하게 그 추론적 성격에 이질적인 지식의 등재 항목들을 차용하는 잡종적인 담론이다.전반적인 지식들에 대해 그런 것이므로 철학은 담론적 법칙들 아래 통합될 수 없다명확한 목표들을 겨냥하는 전략그것에 대한 모든 수단들은소피스트들에게 있어서나 또는 시를 몰아내고 신화에 준거함으로써 종결하는 플라톤에게 있어서나좋은 것들이다소피스트들과의 싸움은 하나의 담론을 다른 하나의 담론에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사례에서우리는 잡종적인 것의 분쟁을 목도한다.그 대립은 담론의 형성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철저하게 다른 목표들을 겨냥하는 전략적 대립을 통해 이루어진다철학이 주체성에서 정의될 수 밖에 없도록그리고 담론적 기준들에 따라서 정의되지 않도록 말이다우리가 제시하게 될 최초의 네 가지 기준들은 따라서 상대화되며실제로 우리가 그 전략적 목적에 따라 일자를 타자에 연결 짓지 않는다면 그 기준들은 철학을 성격규정 하기에는 불충분하다.      

또한 우리는 플라톤이 철학 보다는 철학적인 것을 정의하는데 더 전념한다는 점에 주목한다소피스트와 철학자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동일한 욕망을 가지지 않는다그들의 욕망은 다를 뿐만 아니라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그들의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대화편에서 고르기아스와 프로타고라스를 그리고 국가 1권의 트라시마코스를 보라철학 하고자 하는 욕망이라는 이상한 상황실제로 그것은 타자의 욕망의 전략적 파기를 함축한다그 논점은 이어지는 이념을 수반한다주어진 계기에 대해철학은 넒은 의미에서 더 이상 민주주의적일 수 없는데왜냐하면 철학자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소피스트의 욕망이 권리 없는 것임을즉 그의 욕망이 소피스트의 동일한 욕망에 충돌한다는 것을 표명한다소피스트적 담론은 단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주체적 정체(헌법, constitution)로서의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소피스트의 욕망을 전략적으로 분쇄하기 위해플라톤은 소피스트가 어떤 의미에서 진정으로 그가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욕망이 아닌가를 보여주는 책략을 동원한다달리 말해그가 전적으로 자임하는 욕망을 좌절시키는 연출 안에 소피스트를 밀어 넣는다그 욕망은 존재할 권리가 아니어야만 한다플라톤은 그의 주체성과 동일한 중심을 지닌 소피스트의 욕망을 무화 해야만 한다철학은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민주주의적이 아니며실제로 철학은 상징계 내에서 개념적 폭력의 영향력을 통해 소피스트에게 그의 고유한 욕망의 부인을 고백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이를 무화한다이는 플라톤의 사유는 전체주의적이거나 또는 절대적이다라는 실증주의자 칼 포퍼가 말하게 될 그런 것이다.(열린 사회와 그 적들)

그러나 거기에서 철학을 지탱하는 전략적 욕망은 정확히 어떤 것인가소피스트적 욕망은 철학적 욕망의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라 진정으로 본질적인 적인가분명한 것은 그 기원으로부터 철학은 비판적이고논쟁적이며폭력적인 형상다원론(pluralisme)에 관심을 두지 않는 주인이라는 형상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즉 그의 고유한 욕망 내에 다른 욕망을 연루시킴에 의해 드러나는 것으로 판명된다본질적으로철학자는 그 욕망이 어떤 부정적인 양상 내에 다른 욕망을 연루시키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고독하지 않다이러한 비-고독(non solitude), 즉 다른 욕망과 함께 드러나며절대적인 것을 욕망하는 경쟁의 구조(체제, constitution) 내에 사로잡혀 있는 철학적 욕망의 이러한 본질적인 표명은 철학에 있어 본질적이다철학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사라져야만 한다플라톤에게 있어소피스트적인 것(le sophistique)은 철학의 존재를 위해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그러한 관점에서관용적인 철학은,단적으로 소피스트적인 것이라는 이름 아래즉 사라져야만 하는 이름 아래 놓이는 것에 대한 가변성은 없다예를 들어, 18세기 기독교그 당시 어떤 척도 내에서 철학이 그 존재를 위해 사라져야만 할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드러나는가라는 문제는 제기되는가우리는 프로이트와 라깡 이후로 그것을 알고 있으며거기에서 우리는 철학적 욕망이 완성되기 위해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 부분적으로 그 욕망의 원인이자 악한 목적어떤 경우에도 그것의 목적이라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소피스트적 변설(la sophistique)은 따라서 플라톤주의의 원인이자 그 욕망의 악한 목적인 것이다게다가플라톤에게 있어소피스트적 변설과 소크라테스의 처형즉 폭력적인 결정의 지점을 구축하는 것사이의 관계는 실존한다그러나 그것은 대칭적인가소피스트적 변설은 철학이 사라지기를 바라는가그렇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한 쟁투라는 도식 내에 빠지게 된다그렇지 않으며 – 그리고 그것은 극적이다 – 소피스트는 철학의 소멸이나 철학의 비-소멸에 무관심한 채로 남는다소피스트는 그가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철학자들의 어떠한 관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철학 하고자 하는(philosopher, 지혜를 사랑하고자 하는욕망은 철학자의 전략적 투쟁에 무관심한 채로 남아있는 소피스트의 욕망 – 그 욕망은 철학자의 욕망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사라져야만 한다 – 에 구성적이지 않으며따라서 철학자는 무고한 자의 소멸을 원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관건은 진정시킬 수 없는 두 적대자 사이에 벌어지는 죽음의 투쟁이 아니다그러나그 욕망이 당신에게 무관한 채로 있는데도당신이 어찌되었건 소피스트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그것은 결국 전 세계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과 거의 – 참으로 모든 것이 이 거의에 달려있다 – 같은 것이다말하자면 의견들중요하지 않은 사람들모든 세계가 말이다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철학적 욕망이 세계의 절멸을 바라는 것은 아닌가 의심할 수 있다플라톤은 게다가 철학이 이 세계로부터 방향을 돌려야만 한다고그것의 상징적 절멸을 실행해야만 한다고 말할 것이다. <<지혜(Sophia)에 대한 욕망이 토막 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것인 그 사람>>(V, 475b). 소멸에 의해 지탱되는 전적인 지혜의 욕망은 전 세계의 소멸을어쨌든 철학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세계의 소멸을 장려하는 지혜로 이해될 수 있다철학이 결백하지 않으므로철학은 어떤 파멸을 요구하지만그 파멸은 전 세계의 소멸과 구별할 수 없는 경계에 있는 것으로 밝혀진다그렇지만 그리고 동시에철학은 그 파멸을 제한할 것이다.즉 그것을 국지화하고유일한 지점의 파멸에 그치기를 시도할 것이다세계에 불을 지르리 않고자 하는 모든 철학들의 본질적인 과제는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세계가 집중되는 한 지점을 찾는 것즉 사라져야만 하는 것으로서의 세계와 등가인 한 지점을 결정하여 철학적 욕망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플라톤에게 있어그가 희생해야만 하는 것그리스 세계의 오랜 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지점은 호메로스다호메로스에게 그어진 횡선은 가장 가능한 체계를 사용한 철학적 체계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며,그것이 바로 국가 10권에서 소크라테스가 사라져야만 할 것을 국지적인 지점에서즉 존재하는 세계에 등가인 그 지점에서 단독화시키는 poiesis(생성창조만들기)와 시인들의 추방에 의해 실행된 변증()(dialectique) 작업에 대한 그의 만족을 나타낸 이유다우리는 그 지점을 선별 이후에 사라져야만 할 것으로서의 세계를 재현하는 철학적 환유(metonymie)즉 소피스트적 변설의 아버지로서의 호메로스로 명명할 수 있다따라서모든 철학은 환유를 가로지른다즉 철학적 욕망이 시작되었을 때,철학자가 다시 그의 적대자를 추방할 수 있기 위해 세계를 사라지게 하는 종류의 지점들 중 하나에서 세계를 단독화한다그러나 그 지점들 중 오직 하나로부터 세계의 비전을 구축하기 위해그것은 노력과 지적인 희생을 대가로 하며이어지는 질문을 제기한다그 지점들 중 하나에서 재현가능하기 위해 이 세계는 도대체 어떤 것일 수 있는가여하튼그리고 오늘의 강의를 결론짓기 위해나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철학의 정의를 제시할 것이다철학은 언제나 논증적인 양식으로 시작되며다음으로 본질적인 환유(metonymie)즉 세계의 환유를 가로질러은유(metaphore)에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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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씨의 최후
스칼렛 토마스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생각, 물질, 사랑의 사건, 무한


일전에 누군가와의 술자리에서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다. 그 때 내가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글이라면 일단 생각만 분명하게 머리속에 들어서 있다면 언제든지 뽑아낼 수 있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 개략적인 내 이야기의 골자였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상당히 오만한 발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 책에 관해 무언가를 쓰고 있는 지금, 왠지 이 책에 대해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지도 꽤 지났고 이미 이 책에 관해 무엇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충분히 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도 말이다. 확실히 생각과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단적으로 연결되기는 어려울 듯 하다. 무엇인가를 써야겠다는 결정, 그리고 그에 이은 실행이 없다면 생각은 생각만으로 남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이 무엇보다 생각하기에 관한 - 그러나 동시에 물질에 관한 - 책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과 물질의 동일성을 나름의 환타지 문학의 기법으로 그려낸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Y씨의 최후>라는 책이 펼쳐내고 있는 이야기는 일종의 사고 실험에서 시작된다. 재미있지 않은가. 어떤 글이 생각의 결과물로, 즉 일종의 사고 실험의 결과물로 나오는 것이라면, 사고 실험의 결과물로 나온 사고 실험에 관한 이야기.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듯한 그런 약간은 괴기스러운 심령물 같기도 한.


아주 간단히 줄거리를 훑어보자. 에어리얼 만토는  사고 실험에 관한 글을 써서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취재하고 있던 토머스 A. 류머스라는 소설가로 인해 대학원 생활을 하게 된다. 한 학회에서 만난 숄 벌렘이라는 영문학 교수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이 때 류머스의 중요한 책으로 소개되는 것이 바로 <Y씨의 최후>다. 이 책에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쩌면 존재했을지도 모를 이 책 속의 책에는, 매우 괴기스러운 어떤 것이 있다. 류머스를 비롯한 이 책과 관련된 사람들 모두가 책이 나온 이후로 하나씩 죽어갔다는 것. 


왠지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무너져버린 건물, 그리고 한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배경과 사라져버린 지도 교수, 한 고서점에서 아주 헐값에 구하게 된 <Y씨의 최후>. 지도 교수를 찾아다니는 그리고 다시 그녀를 뒤쫗는 남자들. 이야기는 빠르게 어떤 추리 소설과 같은 전개로 흘러간다. 그리고 교수의 소지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찢겨져 나가버린 그 책의 한 페이지. 동종 요법homeotherapy이라는 약간은 엉터리 같은 처방전으로 쓰여진 <Y씨의 최후>의 잃어버린 페이지의 발견으로 이 이야기는 중요한 그러나 매우 황당한 전기를 맞게 된다. 


바로 트로포스피어라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의 발견.  이 트로포스피어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들 혹은 생물들의 의식으로 뛰어들어가 옮겨다닐 수 있으며 그 의식이 보고 느끼는 바를 관찰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페데시스와 텔레만시), 그 의식을 조작하는 것 까지도 가능하다. 그녀와 벌렘을 뒤쫓는 두 남자들도 알고 보면 바로 이 트로포스피어를 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Y씨의 최후>를 찾고 있던 전직 CIA 요원들이다.


이 전직 CIA 요원들은 트로포스피어를 이용하여 별빛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실험적인 감시 및 기억 조작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젝트에 이용되었던 자폐아들의 죽음(트로포스피어 내에 갇혀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함)으로 인해 프로젝트가 문을 닫게 되면서 실직한 자들이다. 이들은 트로포스피어를 사적인 목적으로, 특히 경제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얼마나 강력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에게는 트로포스피어로 들어가기 위한 약물을 한동안 쓸 정도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고, 조제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그 조제법을 구하는 일은 이들에게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달성해야 할 일인 것이다.


어쨌든 에어리얼에게 트로포스피어 속에서 벌렘의 딸의 의식 속에서 벌렘의 기억을 찾아낸 에어리얼은 그 기억으로부터 벌렘의 의식으로 뛰어들어가고, 마침내 <Y씨의 최후>의 원주인 루라와 함께 있던 벌렘을 찾아내게 된다. 그들은 함께 머물며 트로포스피어에 대해 의논한다. 그 특성이나 작동 방식, 그리고 트로포스피어가 가진 의미 등에 대해. 그리고 마침내 트로포스피어를 닫아버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바로 류머스에게 트로포스피어를 타고 <Y씨의 최후>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줄거리에는 소설 내에서 꽤 중요하게 취급되는 요소가 몇가지 빠져 있다. 예를 들면, 아폴로 스민테우스(쥐들의 신, 쥐 머리의 거인의 형상으로 폭주족과 같은 차림새로 할리 데이비슨 같은 바이크를 타고 활을 가지고 다닌다)나 애덤(소설이 시작될 때 등장하는 무너진 건물 때문에 만나게 되어 에어리얼과 사랑에 빠지게 된 신학생), 그리고 함께 방을 쓰게 되었던 진화생물학자 헤더가 보여준 LUCA(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 최종적인 공통 조상) 모델이 가지게 되는 무한과 생명의 나무의 이미지 등은 그냥 단순한 줄거리만 가지고는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 책을 쓴 스칼릿 토머스가 가지는 프랑스 철학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간단히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면서 다루어 보기로 하자. 말하자면 소설적 허구 속에서 드러나는 어떤 이념들에 대해 돌아보자는 말이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이야기는 순환적 구조에 관한 것이다. 사실 그 구조의 문제 때문에 이 소설을 읽은 후 약 한달간 지하철 속에서 이동할 때 마다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읽어야 했다. 적어도 구조의 측면에서 두 소설은 분명한 접점을 가진다. 바로 그 시간과 의식의 순환적 구조에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소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두 책을 묶어서 평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고, <진자>에 대해서는 그냥 따로 시간을 내서 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에코의 책은 읽기 뿐 아니라 그 이후에 생각하기 역시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Y씨의 최후>로 돌아가서 이야기 해 보자.


시간, 공간, 그리고 차연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순환적 구조는 시간 및 공간(혹은 트로포스피어와 관련된 의식)의 지연 및 연장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서사는 주인공 에어리얼 만토가 다니는 대학의 이학관이 무너지면서 시작된다. 실제로 소설을 시작하는 이 사건은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벌렘이 이학관 지하를 지나는 터널을 무너뜨린 것으로 드러나게 될 때 소설 자체의 순환적 구조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한다.(사실 알고 보면 훨씬 큰 순환의 구조가 있다. 좀 황당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묘한 시간적 순환의 구조 그리고 미묘한 시공간적 차이에 의해 중첩되는 서사의 구조는 시간과 공간의 등가화 그리고 시간적 지연과 공간 내기 혹은 이 둘의 동시성에 기초한 데리다의 differance 개념과 겹치고 있다. 이 말은 difference에서 e를 a로 바꾸는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인데, 프랑스어의 고유한 특징과 맞물려 있다. 영어에서는 defer(지연, 연기)와 differ(다르다, 차이있다)라는 두 단어로 구분된 의미들이, 프랑스어에서는 differer라는 하나의 단어 내에 묶여 있는데, 데리다는 이에 근거하여 이 differance라는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말은 이 책에서 차연이라는 번역어로 옮겨졌다.(개인적으로는 말의 발음을 바꾸지 않고 한자만 다를 이에서 옮길 이로 바꾸어 쓴 차이差移라는 번역어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책을 따라서 차연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의 의미 연쇄에서 기표(기호)는 기의(의미)를 완전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다른 추가적인 단어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에 따르는 단어는 지속적으로 원래의 뜻과는 다르고, 그래서 다시 새로운 단어를 요구하게 되는 연쇄가 반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작용의 연쇄에서도 여전히 진정한 의미의 도래를 연기될 뿐이다. 이러한 시간적 지연과 함께 차연은 강제적인 공간 내기, 다시 말해 틈새를 내어 어떤 구조의 완결성을 붕괴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벌렘이 일으킨 사건은 직접적으로 이 소설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는 데리다의 오랜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벌렘이 트로포스피어를 이용하여 일으켰던 이 사건은 <Y씨의 최후>라는 소설에 수록된 트로포스피어로 들어가게 해주는 동종요법 물약의 조제법을 전직 CIA 요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해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시간적 지연과 공간 내기의 강제력은 에어리얼 만토를 이 소설의 서사 내로 편입시키는 일종의 무대 장치coup de theatre라 할 수 있다.


생각은 물질과 같은 것이다.


이를 위해 성립되어야 할 것은 바로 생각은 물질과 같다는 것이다. 트로포스피어는 일종의 의식의 공간이다.(이 세계 내에서 시간은 없다. 시간은 공간적 거리로 환산된다.) 그리고 이 안에서의 벌어진 일들은 트로포스피어가 아닌 현실의 공간에서도 어떤 효과를 보이고 있다. 트로포스피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 또는 생물의 정신 속에서 단순히 그 생물의 시각으로 보고 감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생각을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 


소설 내에서 저자는 이에 대해 상당히 급진적인 방식으로 생각을 확장해 나간다. 말하자면 어떤 위대한 생각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지동설이 나오기 전에 우리는 천동설의 세계에 살고 있었고(단순한 인지적 차원이 아닌), 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전에 우리는 뉴턴 역학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 가운데 한 등장 인물인 루라가 하고 있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너무 많이 나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존재론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의 동화, 다시 말하자면 인지부조화의 결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저자인 스칼렛 토머스의 전공이 데리다 및 프랑스 현대철학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만일 소쉬르 이후의 구조주의적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세계는 담론으로, 즉 말로 구성된다. 바슐라르나 푸코와 같은 방식으로 볼 때, 인식의 체계인 에피스테메의 단속적 전환에 의해 세계를 보는 방식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사유와 물질의 동일성이라는 문제는 단순히 소설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과거에는 없는 것들이었고 생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두들기고 있는 자판이나, 누군가가 보고 있는 이 모니터, 그리고 이 글쓰기와 읽기를 가능하게 해 주는 컴퓨터와 인터넷 모두가 과거에는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면 이런 것들은 영원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상상력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제나 정의라는 화두에 적용시켜 볼 때 미래는 어떤 것이 될까? 소설은 이런 문제의 가능성을 단순히 시간의 순방향에서만 보지 않고 역방향에서도 찾고 있다.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아폴로 스민테우스(이 인물, 아니 신적인 형상은 온란인 게임의 시각으로 보자면 일종의 NPC, 즉 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non-player character다)라는 무대 장치를 사용하여 제기하고 있는 실험쥐의 사용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위험을 내포하고있는 트로포스피어의 폐쇄라는 소설 내의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그 결과는 현재가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사랑의 사건, 무한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 외에도 어떤 사랑의 가능성, 아니 정확히 말해서 사건이다. 소설을 시작하는 그 구조의 붕괴라는 사건 - 차연적인 의미를 가지는 - 은 또 다시 에어리얼과 애덤이라는 한 신학생의 만남을 촉발한다. 애덤과 그녀는 만남과 동시에 어떤 아련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이후 애덤이 그녀를 전직 CIA 요원들로부터 숨겨주기도 하는 등 상당히 복잡하게 꼬이는 이 둘의 관계. 결국 이 둘의 관계는 트로포스피어 내에서의 무한을 향한 여정 위에 새겨진다. 


모든 어머니의 어머니를 찾고자 하는 컴퓨터 모델 LUCA는 일종의 무한을 위한 모티프가 된다. 트로포스피어의 선택지를 타고 페데시스 하는 과정에서 에어리얼과 애덤이 보게 되는 의식의 선택지들의 무한하게 뻗어나간 마치 생명의 나무와 같은 형상. 그리고 애덤과 함께 하는 그녀는 바로 새로운 인류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인류의 어머니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훨씬 큰 순환이다.) 


물론 이 사건은 어찌 보면 두 사람의 사랑이 현실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사라져 버린 트로포스피어의 세계 내로 사라져 버린 것이기에, 어떤 가능적인 차원으로만 남는다.(어찌 보면 이런 측면은 매우 데리다적이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동시적 역설을 여기에서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정: 아무런 근거 없음, 허구


어쨌든 무한에 대한 선택은 그녀와 그가 현실의 삶과의 유대를 끊게 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한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물론 거기에는 사랑의 가능성이 포함되기도 하며, 생명의 나무와 같은 무한의 형상이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에어리얼의 결정에서 어떤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사랑 이외에는 모든 유대에 대한 단절. 그 모든 객관적인 혹은 합리적인 근거의 상실. 다시 말해 그 근거 없음 만이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하고 무한으로 향하게 했던 선택의 근거가 된다. 애초에 이 모든 이야기의 토대가 되는 토로포스피어, 그리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동종요법적인 약물. 소설 속의 소설, 허구 속의 허구가 여기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이 소설은 그런 허구의 허구, 무엇보다 더 한 허구를 펼쳐내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 허구를 혹은 어떤 우화를 단순한 근거 없음으로, 그저 단적인 허구로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사유의 실험으로서의 사고 실험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로서의 무한의 가능성, 즉 현재 우리가 처한 정황적 상태라는 한계를 벗어나 무한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곳에서 우리는 어떤 실재를 대할 수 있다. 모든 근원적 이야기는 결국 허구 또는 신화일 뿐이다. 마치 성서가 말하는 창세기의 신화와 같이 말이다.(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정치체의 시작 역시 어떤 허구적인 또는 근거 없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애시당초 그 허구 또는 신화를 받아들일 것인지는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그것이 정치가 되었든(보수적 태도는 가능성을 한정하는 유한성 또는 필멸성을 의미한다), 예술이 되었든(눈을 즐겁게 할 뿐인 문화적 변형은 예술적 진리의 제한이다), 과학이 되었든(기술은 과학적 발견의 가능성에 대한 자본에 의한 제한이다), 또는 사랑이 되었든(결혼정보 회사가 창궐하는 오늘날은 어느 때보다 사랑의 진리가 자본에 의해 통제 되고 있는 시대일 것이다), 유한하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선택을 뒤로하고 무한을 선택하는 일, 그것은 앞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선택이기에 두려운 것일 수 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시대는 이런 선택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이 굳어져 버린 듯 보이는 이 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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