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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씨의 최후
스칼렛 토마스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생각, 물질, 사랑의 사건, 무한
일전에 누군가와의 술자리에서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다. 그 때 내가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글이라면 일단 생각만 분명하게 머리속에 들어서 있다면 언제든지 뽑아낼 수 있는 것 아니겠냐는 것이 개략적인 내 이야기의 골자였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상당히 오만한 발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게 이 책에 관해 무언가를 쓰고 있는 지금, 왠지 이 책에 대해 무언가를 쓴다는 것이 어렵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은지도 꽤 지났고 이미 이 책에 관해 무엇을 써야겠다는 생각도 충분히 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도 말이다. 확실히 생각과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단적으로 연결되기는 어려울 듯 하다. 무엇인가를 써야겠다는 결정, 그리고 그에 이은 실행이 없다면 생각은 생각만으로 남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책이 무엇보다 생각하기에 관한 - 그러나 동시에 물질에 관한 - 책이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과 물질의 동일성을 나름의 환타지 문학의 기법으로 그려낸 이야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Y씨의 최후>라는 책이 펼쳐내고 있는 이야기는 일종의 사고 실험에서 시작된다. 재미있지 않은가. 어떤 글이 생각의 결과물로, 즉 일종의 사고 실험의 결과물로 나오는 것이라면, 사고 실험의 결과물로 나온 사고 실험에 관한 이야기. 마치 유체이탈이라도 한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있는 듯한 그런 약간은 괴기스러운 심령물 같기도 한.
아주 간단히 줄거리를 훑어보자. 에어리얼 만토는 사고 실험에 관한 글을 써서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취재하고 있던 토머스 A. 류머스라는 소설가로 인해 대학원 생활을 하게 된다. 한 학회에서 만난 숄 벌렘이라는 영문학 교수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이 때 류머스의 중요한 책으로 소개되는 것이 바로 <Y씨의 최후>다. 이 책에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쩌면 존재했을지도 모를 이 책 속의 책에는, 매우 괴기스러운 어떤 것이 있다. 류머스를 비롯한 이 책과 관련된 사람들 모두가 책이 나온 이후로 하나씩 죽어갔다는 것.
왠지 갑작스러운 방식으로 무너져버린 건물, 그리고 한 겨울의 을씨년스러운 배경과 사라져버린 지도 교수, 한 고서점에서 아주 헐값에 구하게 된 <Y씨의 최후>. 지도 교수를 찾아다니는 그리고 다시 그녀를 뒤쫗는 남자들. 이야기는 빠르게 어떤 추리 소설과 같은 전개로 흘러간다. 그리고 교수의 소지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된 찢겨져 나가버린 그 책의 한 페이지. 동종 요법homeotherapy이라는 약간은 엉터리 같은 처방전으로 쓰여진 <Y씨의 최후>의 잃어버린 페이지의 발견으로 이 이야기는 중요한 그러나 매우 황당한 전기를 맞게 된다.
바로 트로포스피어라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으로 이루어진 또 다른 세계의 발견. 이 트로포스피어의 세계에서는 다른 사람들 혹은 생물들의 의식으로 뛰어들어가 옮겨다닐 수 있으며 그 의식이 보고 느끼는 바를 관찰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페데시스와 텔레만시), 그 의식을 조작하는 것 까지도 가능하다. 그녀와 벌렘을 뒤쫓는 두 남자들도 알고 보면 바로 이 트로포스피어를 사적인 목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Y씨의 최후>를 찾고 있던 전직 CIA 요원들이다.
이 전직 CIA 요원들은 트로포스피어를 이용하여 별빛 프로젝트라는 이름의 실험적인 감시 및 기억 조작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 프로젝트에 이용되었던 자폐아들의 죽음(트로포스피어 내에 갇혀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함)으로 인해 프로젝트가 문을 닫게 되면서 실직한 자들이다. 이들은 트로포스피어를 사적인 목적으로, 특히 경제적인 목적으로 사용할 경우 얼마나 강력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에게는 트로포스피어로 들어가기 위한 약물을 한동안 쓸 정도 밖에는 가지고 있지 않고, 조제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그 조제법을 구하는 일은 이들에게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달성해야 할 일인 것이다.
어쨌든 에어리얼에게 트로포스피어 속에서 벌렘의 딸의 의식 속에서 벌렘의 기억을 찾아낸 에어리얼은 그 기억으로부터 벌렘의 의식으로 뛰어들어가고, 마침내 <Y씨의 최후>의 원주인 루라와 함께 있던 벌렘을 찾아내게 된다. 그들은 함께 머물며 트로포스피어에 대해 의논한다. 그 특성이나 작동 방식, 그리고 트로포스피어가 가진 의미 등에 대해. 그리고 마침내 트로포스피어를 닫아버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바로 류머스에게 트로포스피어를 타고 <Y씨의 최후>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줄거리에는 소설 내에서 꽤 중요하게 취급되는 요소가 몇가지 빠져 있다. 예를 들면, 아폴로 스민테우스(쥐들의 신, 쥐 머리의 거인의 형상으로 폭주족과 같은 차림새로 할리 데이비슨 같은 바이크를 타고 활을 가지고 다닌다)나 애덤(소설이 시작될 때 등장하는 무너진 건물 때문에 만나게 되어 에어리얼과 사랑에 빠지게 된 신학생), 그리고 함께 방을 쓰게 되었던 진화생물학자 헤더가 보여준 LUCA(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 최종적인 공통 조상) 모델이 가지게 되는 무한과 생명의 나무의 이미지 등은 그냥 단순한 줄거리만 가지고는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 책을 쓴 스칼릿 토머스가 가지는 프랑스 철학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간단히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하면서 다루어 보기로 하자. 말하자면 소설적 허구 속에서 드러나는 어떤 이념들에 대해 돌아보자는 말이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이야기는 순환적 구조에 관한 것이다. 사실 그 구조의 문제 때문에 이 소설을 읽은 후 약 한달간 지하철 속에서 이동할 때 마다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읽어야 했다. 적어도 구조의 측면에서 두 소설은 분명한 접점을 가진다. 바로 그 시간과 의식의 순환적 구조에서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소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 두 책을 묶어서 평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고, <진자>에 대해서는 그냥 따로 시간을 내서 쓰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에코의 책은 읽기 뿐 아니라 그 이후에 생각하기 역시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Y씨의 최후>로 돌아가서 이야기 해 보자.
시간, 공간, 그리고 차연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순환적 구조는 시간 및 공간(혹은 트로포스피어와 관련된 의식)의 지연 및 연장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서사는 주인공 에어리얼 만토가 다니는 대학의 이학관이 무너지면서 시작된다. 실제로 소설을 시작하는 이 사건은 이 소설의 후반부에서 벌렘이 이학관 지하를 지나는 터널을 무너뜨린 것으로 드러나게 될 때 소설 자체의 순환적 구조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한다.(사실 알고 보면 훨씬 큰 순환의 구조가 있다. 좀 황당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묘한 시간적 순환의 구조 그리고 미묘한 시공간적 차이에 의해 중첩되는 서사의 구조는 시간과 공간의 등가화 그리고 시간적 지연과 공간 내기 혹은 이 둘의 동시성에 기초한 데리다의 differance 개념과 겹치고 있다. 이 말은 difference에서 e를 a로 바꾸는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인데, 프랑스어의 고유한 특징과 맞물려 있다. 영어에서는 defer(지연, 연기)와 differ(다르다, 차이있다)라는 두 단어로 구분된 의미들이, 프랑스어에서는 differer라는 하나의 단어 내에 묶여 있는데, 데리다는 이에 근거하여 이 differance라는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말은 이 책에서 차연이라는 번역어로 옮겨졌다.(개인적으로는 말의 발음을 바꾸지 않고 한자만 다를 이에서 옮길 이로 바꾸어 쓴 차이差移라는 번역어를 선호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책을 따라서 차연이라는 용어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
시니피에(기의)와 시니피앙(기표)의 의미 연쇄에서 기표(기호)는 기의(의미)를 완전하게 전달하지 못하고 다른 추가적인 단어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에 따르는 단어는 지속적으로 원래의 뜻과는 다르고, 그래서 다시 새로운 단어를 요구하게 되는 연쇄가 반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작용의 연쇄에서도 여전히 진정한 의미의 도래를 연기될 뿐이다. 이러한 시간적 지연과 함께 차연은 강제적인 공간 내기, 다시 말해 틈새를 내어 어떤 구조의 완결성을 붕괴시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벌렘이 일으킨 사건은 직접적으로 이 소설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는 데리다의 오랜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벌렘이 트로포스피어를 이용하여 일으켰던 이 사건은 <Y씨의 최후>라는 소설에 수록된 트로포스피어로 들어가게 해주는 동종요법 물약의 조제법을 전직 CIA 요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해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시간적 지연과 공간 내기의 강제력은 에어리얼 만토를 이 소설의 서사 내로 편입시키는 일종의 무대 장치coup de theatre라 할 수 있다.
생각은 물질과 같은 것이다.
이를 위해 성립되어야 할 것은 바로 생각은 물질과 같다는 것이다. 트로포스피어는 일종의 의식의 공간이다.(이 세계 내에서 시간은 없다. 시간은 공간적 거리로 환산된다.) 그리고 이 안에서의 벌어진 일들은 트로포스피어가 아닌 현실의 공간에서도 어떤 효과를 보이고 있다. 트로포스피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 또는 생물의 정신 속에서 단순히 그 생물의 시각으로 보고 감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 발 더 나아가 생각을 바꾸어 버릴 수도 있다.
소설 내에서 저자는 이에 대해 상당히 급진적인 방식으로 생각을 확장해 나간다. 말하자면 어떤 위대한 생각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바꾸었다는 것이다. 지동설이 나오기 전에 우리는 천동설의 세계에 살고 있었고(단순한 인지적 차원이 아닌), 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전에 우리는 뉴턴 역학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 가운데 한 등장 인물인 루라가 하고 있는 생각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너무 많이 나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존재론적 차원과 인식론적 차원의 동화, 다시 말하자면 인지부조화의 결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저자인 스칼렛 토머스의 전공이 데리다 및 프랑스 현대철학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자. 만일 소쉬르 이후의 구조주의적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세계는 담론으로, 즉 말로 구성된다. 바슐라르나 푸코와 같은 방식으로 볼 때, 인식의 체계인 에피스테메의 단속적 전환에 의해 세계를 보는 방식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사유와 물질의 동일성이라는 문제는 단순히 소설에 국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과거에는 없는 것들이었고 생각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두들기고 있는 자판이나, 누군가가 보고 있는 이 모니터, 그리고 이 글쓰기와 읽기를 가능하게 해 주는 컴퓨터와 인터넷 모두가 과거에는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면 이런 것들은 영원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이런 상상력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제나 정의라는 화두에 적용시켜 볼 때 미래는 어떤 것이 될까? 소설은 이런 문제의 가능성을 단순히 시간의 순방향에서만 보지 않고 역방향에서도 찾고 있다.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아폴로 스민테우스(이 인물, 아니 신적인 형상은 온란인 게임의 시각으로 보자면 일종의 NPC, 즉 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non-player character다)라는 무대 장치를 사용하여 제기하고 있는 실험쥐의 사용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위험을 내포하고있는 트로포스피어의 폐쇄라는 소설 내의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그 결과는 현재가 더 이상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사랑의 사건, 무한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 외에도 어떤 사랑의 가능성, 아니 정확히 말해서 사건이다. 소설을 시작하는 그 구조의 붕괴라는 사건 - 차연적인 의미를 가지는 - 은 또 다시 에어리얼과 애덤이라는 한 신학생의 만남을 촉발한다. 애덤과 그녀는 만남과 동시에 어떤 아련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이후 애덤이 그녀를 전직 CIA 요원들로부터 숨겨주기도 하는 등 상당히 복잡하게 꼬이는 이 둘의 관계. 결국 이 둘의 관계는 트로포스피어 내에서의 무한을 향한 여정 위에 새겨진다.
모든 어머니의 어머니를 찾고자 하는 컴퓨터 모델 LUCA는 일종의 무한을 위한 모티프가 된다. 트로포스피어의 선택지를 타고 페데시스 하는 과정에서 에어리얼과 애덤이 보게 되는 의식의 선택지들의 무한하게 뻗어나간 마치 생명의 나무와 같은 형상. 그리고 애덤과 함께 하는 그녀는 바로 새로운 인류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인류의 어머니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훨씬 큰 순환이다.)
물론 이 사건은 어찌 보면 두 사람의 사랑이 현실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사라져 버린 트로포스피어의 세계 내로 사라져 버린 것이기에, 어떤 가능적인 차원으로만 남는다.(어찌 보면 이런 측면은 매우 데리다적이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동시적 역설을 여기에서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정: 아무런 근거 없음, 허구
어쨌든 무한에 대한 선택은 그녀와 그가 현실의 삶과의 유대를 끊게 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죽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한의 가능성을 선택한다. 물론 거기에는 사랑의 가능성이 포함되기도 하며, 생명의 나무와 같은 무한의 형상이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에어리얼의 결정에서 어떤 근거를 찾을 수 있는가. 사랑 이외에는 모든 유대에 대한 단절. 그 모든 객관적인 혹은 합리적인 근거의 상실. 다시 말해 그 근거 없음 만이 현실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포기하고 무한으로 향하게 했던 선택의 근거가 된다. 애초에 이 모든 이야기의 토대가 되는 토로포스피어, 그리고 그 속으로 들어가는 동종요법적인 약물. 소설 속의 소설, 허구 속의 허구가 여기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이 소설은 그런 허구의 허구, 무엇보다 더 한 허구를 펼쳐내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 허구를 혹은 어떤 우화를 단순한 근거 없음으로, 그저 단적인 허구로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사유의 실험으로서의 사고 실험 그리고 그 실험의 결과로서의 무한의 가능성, 즉 현재 우리가 처한 정황적 상태라는 한계를 벗어나 무한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곳에서 우리는 어떤 실재를 대할 수 있다. 모든 근원적 이야기는 결국 허구 또는 신화일 뿐이다. 마치 성서가 말하는 창세기의 신화와 같이 말이다.(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정치체의 시작 역시 어떤 허구적인 또는 근거 없는 선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애시당초 그 허구 또는 신화를 받아들일 것인지는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의 몫이다. 그것이 정치가 되었든(보수적 태도는 가능성을 한정하는 유한성 또는 필멸성을 의미한다), 예술이 되었든(눈을 즐겁게 할 뿐인 문화적 변형은 예술적 진리의 제한이다), 과학이 되었든(기술은 과학적 발견의 가능성에 대한 자본에 의한 제한이다), 또는 사랑이 되었든(결혼정보 회사가 창궐하는 오늘날은 어느 때보다 사랑의 진리가 자본에 의해 통제 되고 있는 시대일 것이다), 유한하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선택을 뒤로하고 무한을 선택하는 일, 그것은 앞을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선택이기에 두려운 것일 수 밖에 없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시대는 이런 선택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이 굳어져 버린 듯 보이는 이 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