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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죽음이라는 문제

... 알리스는 라이몬트에게 물었다. 나보다 먼저 죽고 싶어, 아니면 내가 죽은 뒤에 죽고 싶어? 당신이 죽은 뒤에. 라이몬트가 대답했다. 그 대답을 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그는 대답에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 당신은? 이렇게 되묻는 걸 보면. 알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알리스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  p87

죽음이란 우리 삶에 있어 하나의 문제와 같다. 손쉽게 대답할 수 없는... 그런 이유로 죽음은 인간의 유한성에 결부되어 철학적 고찰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한 위대한 우리 시대의 독일 철학자가 말했던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우리의 필멸성에 대한 그 이름은 자연 앞에 혹은 도래할 '신들' 앞에 설 우리의 필멸성을 나타낸다. 그렇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죽음이란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불편하다. 살아있는 자에게 죽음에 대한 사고를 강요하는 것이기에. 특히 자신의 삶 속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자가 있을 때, 곧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을 때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일정 이상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너무나 더디게만 읽히는 책이었다. 가벼운 무게와 얇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몇일이 걸려서야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다. 그 무미건조한 그림이 전달하는 붓 터치 하나하나가 내가 곧 대면해야만 할 삶의 무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개인적인 여담이나 넑두리는 여기서 접고 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책 자체의 줄거리나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알리스'라는 인물이 실려 있는 그림과 그 그림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이념들'에 대해서...

살아 있는 자의 그림, 죽어 가는/죽은 자들을 배경으로 하는...

다소 건조한 문체로 시작되는 이 죽은 자들/산 자의 이야기는 다섯 남자(그리고 한 여자)의 죽음을 담고 있다.*,**  그 다섯 남자들이란 '이미 죽을 것을 알고 빨리 죽는 편이 그를 위해서도 좋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죽어가기만 할 뿐, 죽지 않았던, 그리고 마침내 죽어버린 한 때 사랑했던 남의 남자(미햐)', '너무나 갑작스럽게 죽어버린 마치 아저씨와 같은 사람(콘라트)', '친구의 남자(리하르트)', '오래 전에 자살한 동성애자 삼촌(말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남자(라이몬트)'다. 소설은 이들의 죽음 혹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일종의 알리스의 의식/시간의 흐름을 통해 다소 무미건조한 문체로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그 무미건조한 문체와 세세한 배경들에 대한 그리고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어떤 억누르고 있는 듯한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어져 버린 슬픔을 안고 있는 듯 한 느낌을 전달한다. 이러한 방식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무엇이 기억이고, 무엇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인지, 언제가 과거이고 언제가 현재인지, 혹은 진정한 시간의 진행을 알리게 될 미래인지가 불분명해진다. 그래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바로 '겹쳐짐'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모호함.

역자의 말을 빌자면 이 소설은 어떤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그림에서는 이상하게도 인물들의 상이 뚜렷하지 않다. 오직 뚜렷하게 그려지는 것은 인물이 아닌 배경이다. 

....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은 남자와 알리스의 관계 또는 게이 연인들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생에서 그처럼 큰 의미를 가졌던 사람의 죽음 이후 남은 이들의 삶과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하고 또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다. 마치 한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고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한 가운데 서 있는 주인공은 모호하고 흐릿하게 보인다. 인물이 아닌 배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독특한 사진인 셈이다.  - p166

그러나 과연 인물의 상이 흐려지는 사진이 배경에 초점을 맞춘 사진 뿐일까. 우리는 가끔 이상하게 찍힌 사진들을 보기도 한다. 인물의 상이 어그러지고 마치 누군가가 옆에 서있는 듯 겹쳐진 사진. 바로 소위 우리가 심령사진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진이다. 이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유령'이라는 것이다. 죽었으되 충분히 죽지 못한 자의 모습으로 이승을 떠돌고 있는 유령. 알리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여기저기에서 출몰하는 그 유령들의 모습들(/기억들)은 분명 이 소설 전체에 일종의 섬뜩한 느낌(unheimlichkeit/uncanny)을 주기도 한다.*** 분명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녀의 기억들은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죽은 자들의 유령을 소환해 내고 있다(예를 들어, 소설의 말미에서 등장하는 라이몬트의 모습). 그리고 소설 말미에 뜬금 없이 등장하는 '목사'라는 이름의 '무당'이야말로 바로 이 유령들에 대한(/을 위한) 푸닥거리에 필요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죽음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모호하게 드러나는 죽은/죽어가는/죽을(심지어 삼촌인 말테와의 관계에서 마저도)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소설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애초에 알리스는 누구인가. 즉,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관계 가운데 있는 인간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인간, 그리고 장소와 시간의 문제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장소를 통해서다. 그리고 그 장소란 어떤 관계를 통해 정해진다. 어떤 장소 안에서 자리를 차지할 때 비로소 그 인간은 실존하는 것이다. 알리스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관계들의 집합, 그 장소 역시 이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정하는 장소 내에서 타자에 대한 알리스의 관계는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 그 자체다. 이러한 관계는 있었던 것이나 있지는 않은 일종의 비실존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그녀는 빛도 그늘도 아닌 경계의 영역에 거하게 된다.

역자의 변에 따르면, 이 소설이 묘사해내고 있는 사진의 초점은 흐릿하지만

.... 그러나 결코 무의미한 사진이 아니다. 사진 속 선명한 배경은 "이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곳."이라고 남은 사람들에게 속삭인다.   - p166

선명한 배경에 비해 모호한 알리스 주위 인물들의 윤곽. 그리고 그 보다 더 모호하고 비어있는 알리스라는 인물. 그러나 그 질적인 규정이 혹은 말할 수 있는 술어가 결여된 알리스는 여전히 그 그림 속에 혹은 장소 가운데 일차적으로는 모호한 주변의 인물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그림의 선명한 배경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비록 역자는 관찰자로서의 인간이 그림의 바깥에 있으며, 우리가 사는 곳은 '선명한' 색상의 실재라고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이 '사진'이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이러한 선명한 색상의 실재(삶)가 모호한, 그리고 죽음과 관계된 것과 떨어져 있지 않으며, (소설의) 외부에 있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의 겹쳐짐 속에서 살고 있음에 대한 깨닳음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과연 이 삶과 죽음의 겹침의 공간 속에서 시간은 흐르는가? 이 작품이 제시하는 알리스의 삶, 죽은 이들과의 관계는 마치 멈추어 있는 그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죽음으로 인한 비탄은 없으나, 너무나 차분하고, 무미 건조한 그림 내에서 시간은 장소 속에 정체되어 마치 장소와 동일한 것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작품 속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 있는 사건의 일어남도 없이 멈추어 버린 듯 보이는 기억을 통한 시간의 정체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죽음의 기억 가운데 정체된 장소, 시간이 장소로서 정체되어 버린 곳에서 가능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저 있는 그대로 살아있는 삶. 어떠한 생명력도 없이 장소와 동일시 되어버린, 기억 속에 굳게 자리잡고, 정체되어 버린 삶. 그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을까?




*그런데 왜 하필 죽은 자들은 모두 남자들이었을까? 책을 덮고 나서 먼저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왜... 정확한 답은 알 수가 없다. 그저 추측 하자면 알리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을 맺었던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죽은 네 여자들에 대한 애도를 다룬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생각나기도 한다. 물론 두 소설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노르웨이의 숲>이 일본의 60년대 말의 전공투 시대에 대한 기억의 시효만료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알리스>는 왠지 여전히 죽은 이들을 그대로 붙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농후하다. 그래서 <알리스>의 죽은 자들은 유령 혹은 죽었으되 충분히 죽지 못하고 소설 속에서 때때로 나타나며 언제나 이미 알리스의 존재에 기억으로 내재(/선재)한다.

**오직 하나 뿐인 죽은 여자 알리스의 할머니 '알리스'의 죽음은 그리 중요치 않게 다루어진다. 그녀의 죽음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면 '삼촌' 말테의 어머니이며, 그런 이유로 프리드리히에 의해 언급된다는 정도? 프리드리히와의 대화에서 정작 알리스 자신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별다른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동성애자였던 삼촌 말테의 자살이었다.)

***섬뜩하다(unheimlichkeit/uncanny)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낯선 것에 대한 느낌이다. 너무나 낯설고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두려운 것.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만 할 것은 그 낯섬의 대상이 너무나 친숙한 것일 때 바로 진정한 섬뜩한 느낌이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직도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

****그리스어로는 시간에 대한 용어가 둘이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자연적인 시간을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공간의 연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중요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소 내에서 시간은 그저 같은 장소의 가능적 확장만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은 다르다. 이 시간은 일어남, 사건과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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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민음사 모던 클래식 47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변주곡(variations)이라는 말을 접하게 될 때 쉽게 떠올리게 되는 여러 작곡가들의 다양한 곡들이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헨델의 블랙스미스(대장장이), 모짜르트의 작은 별 테마 변주곡, 그리고 어떤 것 보다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플레이어에 걸어본다. 이 곡은 그 기원에 대해 꽤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후대에 바흐의 전기 작가 포르켈(Forkel)의  근거 없는 조작일 것이라는 강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사이에는 이 곡이 일종의 불면증 치료제였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마치 기원과 같이 따라다닌다.*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이라는 소설이 전달하는 토니-토머스, 하워드-클로디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브래드쇼 집안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어떤 기원과 파생된 것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변주곡이란, 특히 지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경우, 언제나 원래의 상대적으로 단순한 테마에서 시작해 여러 복잡한 변주들로 산개하다가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는 형태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곡들을 계속 '반복해서' 듣다 보면 어떤 것이 원래의 주제이고 어떤 것이 변주된 주제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같이 완전하게 정립되어 있는 완결성을 지닌 변주곡들에 경우, 원래의 주제가 되는 동기와 변주들은 확연하게 나뉘어지며 청자가 이를 착각하여 듣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변주곡의 각 테마가 연주될 때 변주되는 각각의 동기들 사이에 있는 그 분명한 불연속이야말로 지금 듣고 있는 모음곡에 변주곡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닐까. 기실 이러한 불연속 또는 비일관성은 <브래드쇼 가족 변주곡> 역시 각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 사이에, 아니 더 나아가 각 커플들의 삶에 내재해 작품을 이루는 어떤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그러면 이 작품을 통해,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체 서사의 중심축이 되는 토머스와 하워드 두 브래드쇼 형제들의 가족을 통해 '가족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해 드러나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토니-토머스: 젠더적 불일치

토머스. 그는 아내의 학과장 승진을 계기로 직장을 떼려치우고 집안에 들어앉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그가 주로 하는 일은 피아노 연주. 보다 완벽한 음악의 세계로 들어갈수록, 보다 영혼이 담긴 연주를 해낼수록  집안은 어질러져가고, 싱크에는 씻지 않은 그릇들이 쌓여간다. 그를 둘러싼 세계 역시 바뀌어간다. 토머스의 피아노 선생은 게이 커플. 왠지 그들이 꺼려지는 그였지만, 같은 음악을 공유하고 그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그들도 동일한 인간임을, 보다 완전한 연주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동료들임을 깨달아간다.

토니. 그녀는 갑작스럽게 자신이 시간강사직으로 근무하던 대학의 영문학과장을 맡을 기회를 얻게 된다. 남편과의 상의 끝에 서로의 역할을 바꾸어 살기로 결정. 토니는 자신의 생활에 대체로 만족스럽다.(물론 딸이 자신 보다 남편과 더 친해지고 있는 듯한 모습에 어딘가 서운하기도 하지만...) 자신이 얻고 싶었던 남성의 특성, 지위, 역할, 말하자면 힘을 얻게 된 토니는 나름 자신의 지위를 쌓아간다.

그러나 사회적 통념은 그들의 역할 전환에 대해 반기지 않는다. 젠더적 불일치, 그 원인이 현실의 문제로 인한 혹은 선택에 의한 것이던 이것은 전체적인 선율 가운데 어떤 불협화음 또는 강렬한 소음을 낼 수 밖에 없는 문제다. 토니의 친정집, 그러니까 안토니아**의 친정집에서 토머스의 장인, 장모는 이 두 사람의 역할 전환에 대해 상당히 불편한 심경을 보인다. 물론 그것은 토머스의 본가에서도 마찬가지.

게다가... 안토니아에게는 자신이 얻기 바랬던 남성적 측면 이외에도 여전히 여성으로서 채워야만 할 욕망이 있다. 남편에게서 더 이상 그런 부분이 채워지지 않는 안토니아는 결국 남편이 아닌 외간 남자에게서 남편에게는 없는 권위와 안정을 찾는다. 토머스 역시 아무리 자신이 여성의 젠더적 역할을 하고 있더라도 스스로 남성이라는 것을 속일 수는 없다. 그들의 딸아이가 갑작스럽게 아팠던 날 그는 딸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여느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읽고 있던 책에 푹빠져 있다가 아이의 병세가 어떤 것인지 감지하지 못하고 병을 악화시키고 만다. 아이는 목숨을 건졌는지 모르나 뇌수막역 증세로 청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렇게 토머스-토니의 1년간의 실험은 끝을 맺게 된다.

하워드-클로디아: 욕망, 섹슈얼리티

하워드. 그는 남다른 사업 수완으로 나름 젊은 시절부터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클로디아는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하워드를 만나 과정을 다 끝내지도 않고 그와 결혼한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집안을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세 아이들과 이 아이들 보다 더 집안을 복잡하게 만드는 스키틀이라는 개 한마리가 있다. 그녀는 항상 아이들, 그리고 마치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심한 하워드 - 물론 그녀는 매우 사랑하기는 하지만 - 의 삶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며 살고 있다.

클로디아. 그녀의 꿈은 결혼하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자신의 작업에 매진할 시간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완성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 그러나 그녀는 언제나 아이들과 남편의 필요에 의해 희생되며, 그녀의 욕망/꿈은 가족이라는 제도의 유지를 위해 금지된다.

물론 클로디아와 하워드는 서로 사랑한다. 그리고 서로를 욕망한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 자체가 애초에, 그리고 이 가족이라는 제도 가운데 더더욱이, 어떤 접점을 가지지 못함을 의미한다. 라깡의 유명한 아포리즘과 같이 "성관계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지속된다. 비록 하워드의 사랑은 클로디아의 욕망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하고, 클로디아는 언제나 이루어지지 않는/도래하는 꿈을 꾸며, 가족의 필요를 위해 살아가지만, 그들의 '여행'은 이어진다. 언제나 '돈이 부족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튀어나오는 알 수 없는 변수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여행은 위태위태하게 지속된다.

가족: 되돌이표, 반복 그러나 처음과 똑같지 않은...

토니-토머스는 딸아이의 뇌수막염 판정과 청각 장애를 계기로 다시 토머스-안토니아로 돌아가며 이 변주곡은 막을 내린다. 그리고 하워드-클로디아의 가족 역시 위태위태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여정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들의 반복은 최초와 같은 주제의 단순한 반복이라 할 수 있을까.

커스크가 상당히 행하는 상당히 단속적인 서술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토니-토머스/토머스-안토니아의  실험과 하워드-클로디아의 여정은 가장(혹은 사회적 통념에 의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를 하나의 빗금쳐진 전체, 즉 비전체로 확인해낸다.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하는 가족제도란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펼쳐지는 원래 테마의 반복 또는 되돌이표의 연주에서 결코 하나로서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가부장이라는 이름하에 '하나로 셈해지는'**** 가족이라는 제도는 결코 온전한 것일 수 없다. 결국, 커스크의 서사를 통해 이르게 되는 지점에는 가족이라는 제도에 대한, 그리고 사회적인 성역할로서의 젠더 그리고 성적 욕망과 연관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 나라: 남자가 여자와 같이 되고 여자가 남자와 같이 될 때...


잠시 얼마 전 내가 번역하여 출간된 <예수가 사랑한 남자>라는 책의 논의를 잠시 덧붙이고자 한다.*****  이 책의 저자 테드 제닝스는 이 책을 통해 교회의 동성애 혐오에 어떠한 성서적 근거도 없음을 논한다. 그러나 그 논의는 결코 동성애를 위한 권리 주장에서 그치지 않으며 오히려 성애 전반에 대해,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가 일종의 굳어져 버린 제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결혼 제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물론 그에 대한 성서적인 또는 성서에 가까운 자료들을 바탕으로).


제닝스가 소개하는 예수는 분명 사회적 통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성서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가능성의 차원'에서의 증거들은 정상적인 성애에서 벗어난 것으로 '읽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능적 차원의 논의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는 단순히 사회적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관용을 베푼 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경계를 허물고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과 동등한 자들 위치에 처하려 했던 인물이다.

 

제닝스가 소개하는 예수는 분명 사회적 통념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성서 본문을 통해 드러나는 '가능성의 차원'에서의 증거들은 정상적인 성애에서 벗어난 것으로 '읽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능적 차원의 논의들을 통해 드러나는 예수는 단순히 사회적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관용을 베푼 자가 아니라, 그 자신이 경계를 허물고 주변으로 밀려난 자들과 동등한 자들 위치에 처하려 했던 인물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성애적/젠더적 정상성의 범주를 벗어난 윤곽이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어떤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의 보존 혹은 출산을 담보하는, 그리고 후손의 생산을 통한 자기 재산의 보존과 자기 안정을 지지하는 그런 형식의 가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결코 온전할 수 없는 비전체로서), 예수의 공동체는 신 안에서의, 즉 하나님 안에서의 가족으로서의 공동체로서 새로운 가족 형태를 제시한다.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말하자면 일종의 가족의 재구성이다. 예수가 파송하는 둘씩 짝지은 제자는 마치 노아의 홍수 설화가 말하는 각각의 동물 종들이 둘씩 짝지어져 방주에 태워졌던 것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신의 숨결에 의해(혹은 성령으로) 제자를 만들고 세례를 준다. 이 신의 숨결에 의해 다시 태어난 자들은 새롭게 구성되는 가족 가운데 새롭게 받아들여진 아이들이 되고, 형제/자매가 되며, 어머니들이 된다.******  가족은 해체되고 신 안에서 - 무신론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있지만 있지 않은 아버지의 이름 하에 - 새롭게 재구성된다.*******

하나님 나라 혹은 인간이 원하는 행복(또는 전적인 향유, 욕망의 완전한 충족)은 바로 이러한 능동적으로 새롭게 구성된 가족 가운데 가능하다. 제닝스의 책은 또한 이러한 공동체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 예수가 제시한 말을 전하기를 잊지 않는다.

담화22:“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그리고 너희가 남자와 여자를하나이며 같은 것으로 만들 때, 그래서 남자가 남자가 아니고 여자가 여자가 아니게 될 때 … 그때 너희는 (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나그 함마디 문헌집>, 도마의 복음서)********

물론 이와 같이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벽이 허물어진 급진적 평등의 공동체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것은 가능성으로, 하나의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 가능적 차원에 대한 논의만으로도, 가족은 그리고 커스크가 반복하고 있는 브래드쇼 일가의 테마는 이전에 있던 것과는 언제나 이미 다른 것이다. 



*포르켈은 이 곡이 러시아에서 작센 주 선제후에게 파견된 대사 카이저링 백작의 불면증을 치료하기 위해 작곡되었다는 매우 근거 없는 이야기를 자신의 바흐 전기에 실었다. 그 후로 이 전기작가의 권위로 인해 이 설은 널리 유포되었고 아직까지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이 30곡의 모음곡은 곡이 작곡될 당시의 전도 유망한 키보드 연주자 골드베르크에 의해 초연되었고, 곡의 악보는 그의 이름을 따 출간되었다고 한다.
 
**Tony라는 이름은 Antonia의 애칭이다. 기실 이 Tony라는 이름은 Antonio라는 이름의 애칭이기도 하며, 대부분의 경우 남자들이 취하는 이름이다. 여성인 토니에게 이 '토니'라는 남자를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이름을 붙인 것도 젠더 역할의 전복을 나타내는 일종의 소설적 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포리즘의 근거가 되는 것은 라깡의 성구분 도식. 이 도식에 따르면(수학적 형식화는 생략) 남성과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남성
모든 x는 팔루스의 지배에 종속된다. (전칭 양화사 긍정. 그러므로 전체)
어떤 x는 팔루스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다. (특칭 양화사 긍정. 그러므로 예외 있음)
(예외 있는 전체)

여성
팔루스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 모든 x는 없다.(전칭 양화사 부정. 그러므로 비-전체)
팔루스의 지배에 종속되지 않는 어떤 x는 없다.(특칭 양화사 부정. 그러므로 예외 없음)
(예외 없는 비-전체)

이 때 남성의 향유(빗금친 S)는 대타자(A)의 부분을 투사하는 작은 타자 또는 대상 a(petit objet a)에 대한 것이다. 한편 여성의 향유(빗금친 La)는 두 가지 형태를 띄게 되는데, 1. 팔루스에 대한 향유(남성 측), 2. 빗금친 S(A)에 대한 향유 (S(A)는 여성 측에 있으며 신비한 대상. 알 수 없는 것. 프로이트의 질문을 기억할 것.)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남성과 여성의 향유는 서로 다른 것을 향하고 있으며 결코 접속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라깡은 '섹스는 없다'는 말을 하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상황(세계)를 하나의 집합으로 상정한다. 이 집합에 속하는 원소들은 언제나 어떤 이름 하에 하나의 집합 내에 넣어지거나 또는 '하나로 셈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언제나 이런 방식의 셈하기의 형식을 띄게 되는데, 하나 혹은 일자로 드러나는 현실은 비일관적인(또는 불연속적인) 원소들에 대한 셈의 효과로서만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일자의 이름으로 행해진 셈에서 집합의 이름은 선재하는 것이 아니라 셈하기의 이후에야 있게 되는 것이다. 가족에 대해서 예를 들자면, 가부장의 이름 하에 셈해지는 가족이라는 제도 이전에 가족 구성원들, 즉 있는 그대로의 인간인 이들이 먼저 있다. 가족은 결국 하나로 셈하는의 효과일 뿐이다.

*****여기에 아버지는 없다. 오직 신 이외에는. 교회가 지지하는 인간 아버지의 형상은 교회의 역사를 통해 끼워진 어울리지 않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예수의 자신의 가족에 대한 적대는 유명하다. 그에 대해 기록한 복음서의 일화에 의하면 육친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앞에 두고도 

예수께서그들에게대답하셨다.“ 누가내어머니이며, 내형제들이냐?”그리고주위에둘러앉은사람들을둘러보시며말씀하셨다.“ 여기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가복음 3:31-35)

라는 말을 내뱉기를 서슴치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육친의 가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만은 아니다. 가족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 이들을 인간으로서 바라볼 때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가족' 속에 편입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언제나 '존재로서의 존재'인 인간, 약한 인간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유지한다.

*******생각컨대, 성서가 말하는 성애와 젠더 그리고 가족제도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짧은 서술에는 역자의 책 광고라는 다분 사적인 목적이 있음을 부인하지 않겠다.(좋은 책임에도 잘 나가지 않는 것 같아서...ㅎㅎ)

********도마의 복음서는 정경에 속하지 못한 경전 밖의 문서다. 그러나 그 저작 추정 시기와 초기적인 예수 담화집의 형태로 인해 신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는 뱀발.

이건 제대로된 주라기 보다, 개인적 취향에 의한 사족성의 지적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변명하자면 번역으로 밥먹고 사는 찌질한 인간의 찌질한 지적질. 영어에서 이름에 대한 발음을 우리말로 표기하는 방식은 확실하게 정립된 것이 없어 자기 발음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클로디어라는 표기에 어느정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Claudia라는 단어를 굳이 클라우디아라는 마치 라틴어 발음하는 방식으로 읽는 것도 문제겠지만 단어의 마지막에 오는 '-a'는 거의 '-아'라는 음가를 갖게된다. 토니의 원래 이름인 안토니'아'(Antonia)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안토니어'라는 발음은 왠지 마지막 한 음절이 '-er'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 하자면 책 중간중간 토니라는 이름이 주는 남성적 이미지로 인해 토니와 토머스를 착각하고 번역한 부분도 한두 군데 보였다. 굳이 어디가 틀렸다는 말은 아낀다. 왠지 안 그래도 찌질한 지적질을 더 찌질한 것으로 만드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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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르한 파묵의 글을 처음 대했던게 아마 3년쯤 전이었던 듯 하다. 당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제목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영역판을 구입해서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가격 문제였던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면 행간을 운동장처럼 비워두고 글씨도 장판처럼 키워서 나오는데 이 덕분에 약 400페이지면 충분히 들어갈 내용을 두 권으로 나눠서 약 800페이지 이상의 분량으로 조정하여 영역본 페이퍼 백으로 잘 해봐야 만원이면 될 책을 3만원은 되는 가격에 판매를 하니 당연히 주머니 사정이 야박한 나 같은 한량들이야 싼 쪽을 택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정말 읽기가 이렇게 어렵게 읽게 된 책이 내 인생에 또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괴로운 마음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꾸역꾸역 읽어나갔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어학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4,5백 페이지 정도 분량의 책은 하루면 읽어치울 수 있다. 단지 그 분위기와 일반적인 소설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구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각 장 마다 인물의 시점이 달라지고, 심지어 소설의 전개 상황과 연결된 세밀화 소재들의 서사까지...

그 때 받은 인상으로 개인적으로는 그의 팬이 되었고, 그의 소설 <My Name is Red>로부터 시작해 <Snow>, 수필집 <Istanbul>, 그리고 마지막으로(물론 절대로 그가 삶을 마감할 때까지는 마지막이 아니겠지만) 이 <순수 박물관>이라는 작품을 읽게 되었다. 지금 읽은 후에 느낌은 역시 파묵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소재는 매우 진부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새로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고정된 것 혹은 하늘의 이상으로 우리에게 제시될 수 없는 것이면서도(다시 말해, 매우 구체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작품 속에서 작가가 주인공 케말의 입을 빌어 말하듯이 그것은 무시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케말의 퓌순에 대한 집착적 사랑이, 혹은 일방적인 사랑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일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의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케말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정상적인 생활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다. 분명 사랑은 일종의 사건과 같은 것이다. 구지 자동차 사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랑은 한 사람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상성의 삶 또는 일상의 모든 것을 깨부수게 된다. 문제는 이 사건과 같은 만남의 이후가 문제인 것이다.

어느 사랑에 관련된 비극적 소설에서나 그렇듯이, 이 소설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은 분명히 한 번의 어그러짐을 맞게 된다. 이 둘의 만남과 짧은 사랑의 지속 이후, 두 사람은 서로가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격차(일종의 계급) 그리고 가족적 가치(약혼한 남자의 문제)와 마주하여 파국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이 한 사람, 케말의 집착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무능한 남자와 결혼관계에 들어간 다른 한 사람(퓌순)은 이를 핑계로 다른 한 사람(케말)의 사랑을 거부한다. 8년간이나 이 거부당한 한 사람은 자신이 영위하던 모든 상류사회의 삶을 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 관계마저도 내팽겨치다시피 하면서 그 거부당한 사랑의 주위를 맴돈다. 물론 그가 퓌순의 가정에 끼쳤던 회복할 수 없는 아픔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벌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타르크씨)와 어머니(니시베 고모)의 그 능수능란한 연기에 파묻혀 일종의 위장된 평안을 얻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안이 과연 사랑과 같은 것 혹은 동등한 무게를 지닌 등가물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케말은 8년간을 그녀의 집에서 그녀의 남편(페리둔)을 포함한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보낸다. 오직 그녀가 다시 그와 함께 하리라는 희망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의 무능한 남편과 그녀가 갈라서게 되고 다시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퓌순은 더 이상 과거의 그녀가 아니다. 8년 전의 18세 소녀의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퓌순 역시 케말을 사랑하고 있다. 이혼 이후에 다시 사랑하게 된 것이지만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없으며 그들의 사랑은 지속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배우가 되고자 하는 야망이 남아있다. 그리고 배우가 여기에서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야망은 케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우선인지 아니면 배우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우선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가 배우가 될 기회를 막았던 그녀의 전 남편 페이둔과 케말에 대한 원망이 우선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결국 도로 위에 있던 검은 개를 피하고자 하던 퓌순이 운전대를 잡은 차는 케말을 조수석에 태우고 그대로 포플러 나무로 돌진한다. 시속 105킬로미터의 속도로 105살이 된 나무를 향해서 말이다.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What women want?라는 후기 프로이트의 오래 된 질문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여자들 조차도 그 답을 알지 못한다면... 아니 적어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면...)

내 생각에 정말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일 것이다. 케말은 이 아름답지만 혼란스러운 사랑으로 이끌려가던 자신의 삶이 그대로 아름다운 애인과 함께 끝나게 된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사고에서 살아남았고, 회복 된 이후, 더 이상 순수하지 않은(또는 순수할 수 없는) 그녀에 대한 순수의 열정(또는 순수에 대한 집착)으로 케말은 5723 곳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고착시키기 위한 순수 박물관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이 삶이 행복하고 만족할 만한 것이라는 마지막 고백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교통사고가 나고 그녀가 그를 향해 살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 그가 그녀에게 그저 약간은 이해하기 힘들만한 웃음을 보낼 때, 그의 삶은 그 사고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끝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의 삶은 그저 케말이라는 이름의 자동기계(automaton)가 그 죽음의 순간 또는 자신의 대상의 행복한 기억으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사랑일까. 이런 어떠한 가능성의 차원도 없이 그저 과거의 시간을 고착화시키는 무시간적 시간이... 물론 사랑은 무시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시간적인 이유는 두 사람의 사랑이 마치 소설에서(그리고 다른 소설들에서도) 언급되는 레일라와 마즈눈의 사랑과 같이 시간을 뛰어넘어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일 뿐, 이런 과거의 수집품, 보다 정확히 말해서, 기억의 대용물을 모으는 것과는 별 관계가 없는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순수 박물관>은 오히려 파묵의 집요한 과거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소설은 그가 글쓰기 또는 자신의 집필에 대해 얼마나 집요하며 집착적인가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들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코드는(적어도 내가 읽은 작품들에서는) 언제나 서양과 동양, 현대와 전통의 대립이다. <My Name is Red>에서의 베니스에서 건너온 원근법적 형식과 터키의 전통적인 세밀화가 보여주는 평면구도의 대립, <Snow>의 현대 또는 세속적 국가관과 전통적 가치 및 교육의 대립(여자들의 자살 이유, 교육감의 살해...) 등이 나타나며, 동시에 모든 시간을 통해 문제가 되는 과거의 연인에 대한 사랑과 제회 이후의 다시 시작되는 뜨거운 사랑이 그려진다. 과거의 가치에 대한 기억과 집착. 이 소설 <순수 박물관>에서도 그러한 기억의 수집과 보존은 진행되고 있다.

소설가는 남들에게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약간은 노출증적 성향을 가지는 사람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작가는 인물들의 입을 빌어 이런 투의 말을 한다. 수집가(아니 보다 정확히는 수집광)에게 있어 수집물들은 일종의 부끄러운 치부가 되지만, 그 수집물들을 보여주게 되면 자랑스러운 것이 된다고. 마치 유럽사람들이 그러듯이 자부심을 가지고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파묵의 글쓰기에 대한 집착은 마치 이런 수집광들의 집착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가 말로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그는 자신의 말로 이루어진 과거의 기억이라는 수집물들을 모으고 구성하여 소설을 쓴다. 마치 케말이 퓌순의 기억으로 <순수 박물관>을 만들어 내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말과 파묵은 동일인이다. 파묵의 자전적 수필집 <Istanbul>에 그려진 그의 젊은 시절 이스탄불의 아름다운 기억들에 속해서, 누군가에게 보여지면 부끄러울 수집물들을 자랑스럽게 펼쳐놓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파묵의 책들은 분명 이런 수집물들을 갖추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작품들과 같은 전시관이기 보다는 박물관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만들어 놓고 내게 보여주는 그의 <순수 박물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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