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르한 파묵의 글을 처음 대했던게 아마 3년쯤 전이었던 듯 하다. 당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라는 제목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영역판을 구입해서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가격 문제였던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말 번역본이 나오면 행간을 운동장처럼 비워두고 글씨도 장판처럼 키워서 나오는데 이 덕분에 약 400페이지면 충분히 들어갈 내용을 두 권으로 나눠서 약 800페이지 이상의 분량으로 조정하여 영역본 페이퍼 백으로 잘 해봐야 만원이면 될 책을 3만원은 되는 가격에 판매를 하니 당연히 주머니 사정이 야박한 나 같은 한량들이야 싼 쪽을 택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정말 읽기가 이렇게 어렵게 읽게 된 책이 내 인생에 또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괴로운 마음으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꾸역꾸역 읽어나갔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물론 어학의 문제는 아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4,5백 페이지 정도 분량의 책은 하루면 읽어치울 수 있다. 단지 그 분위기와 일반적인 소설과는 너무나도 판이한 구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각 장 마다 인물의 시점이 달라지고, 심지어 소설의 전개 상황과 연결된 세밀화 소재들의 서사까지...

그 때 받은 인상으로 개인적으로는 그의 팬이 되었고, 그의 소설 <My Name is Red>로부터 시작해 <Snow>, 수필집 <Istanbul>, 그리고 마지막으로(물론 절대로 그가 삶을 마감할 때까지는 마지막이 아니겠지만) 이 <순수 박물관>이라는 작품을 읽게 되었다. 지금 읽은 후에 느낌은 역시 파묵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소재는 매우 진부한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새로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고정된 것 혹은 하늘의 이상으로 우리에게 제시될 수 없는 것이면서도(다시 말해, 매우 구체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작품 속에서 작가가 주인공 케말의 입을 빌어 말하듯이 그것은 무시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케말의 퓌순에 대한 집착적 사랑이, 혹은 일방적인 사랑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일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 사랑을 하게 된다. 한 사람의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케말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정상적인 생활의 가능성을 포기해 버린다. 분명 사랑은 일종의 사건과 같은 것이다. 구지 자동차 사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랑은 한 사람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상성의 삶 또는 일상의 모든 것을 깨부수게 된다. 문제는 이 사건과 같은 만남의 이후가 문제인 것이다.

어느 사랑에 관련된 비극적 소설에서나 그렇듯이, 이 소설에서도 두 사람의 사랑은 분명히 한 번의 어그러짐을 맞게 된다. 이 둘의 만남과 짧은 사랑의 지속 이후, 두 사람은 서로가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격차(일종의 계급) 그리고 가족적 가치(약혼한 남자의 문제)와 마주하여 파국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후에 이 한 사람, 케말의 집착적이고 일방적인 사랑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미 무능한 남자와 결혼관계에 들어간 다른 한 사람(퓌순)은 이를 핑계로 다른 한 사람(케말)의 사랑을 거부한다. 8년간이나 이 거부당한 한 사람은 자신이 영위하던 모든 상류사회의 삶을 버리고, 심지어 자신의 가족 관계마저도 내팽겨치다시피 하면서 그 거부당한 사랑의 주위를 맴돈다. 물론 그가 퓌순의 가정에 끼쳤던 회복할 수 없는 아픔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벌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타르크씨)와 어머니(니시베 고모)의 그 능수능란한 연기에 파묻혀 일종의 위장된 평안을 얻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안이 과연 사랑과 같은 것 혹은 동등한 무게를 지닌 등가물이 될 수 있을까. 어쨌든 케말은 8년간을 그녀의 집에서 그녀의 남편(페리둔)을 포함한 가족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보낸다. 오직 그녀가 다시 그와 함께 하리라는 희망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의 무능한 남편과 그녀가 갈라서게 되고 다시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퓌순은 더 이상 과거의 그녀가 아니다. 8년 전의 18세 소녀의 사랑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를 품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퓌순 역시 케말을 사랑하고 있다. 이혼 이후에 다시 사랑하게 된 것이지만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없으며 그들의 사랑은 지속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배우가 되고자 하는 야망이 남아있다. 그리고 배우가 여기에서 그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야망은 케말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우선인지 아니면 배우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우선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가 배우가 될 기회를 막았던 그녀의 전 남편 페이둔과 케말에 대한 원망이 우선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결국 도로 위에 있던 검은 개를 피하고자 하던 퓌순이 운전대를 잡은 차는 케말을 조수석에 태우고 그대로 포플러 나무로 돌진한다. 시속 105킬로미터의 속도로 105살이 된 나무를 향해서 말이다.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다시 What women want?라는 후기 프로이트의 오래 된 질문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여자들 조차도 그 답을 알지 못한다면... 아니 적어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면...)

내 생각에 정말로 이야기가 시작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서부터일 것이다. 케말은 이 아름답지만 혼란스러운 사랑으로 이끌려가던 자신의 삶이 그대로 아름다운 애인과 함께 끝나게 된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러나 사고에서 살아남았고, 회복 된 이후, 더 이상 순수하지 않은(또는 순수할 수 없는) 그녀에 대한 순수의 열정(또는 순수에 대한 집착)으로 케말은 5723 곳의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그녀에 대한 기억을 고착시키기 위한 순수 박물관을 만들기 위한 아이디어를 얻는다. 어쩌면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이 삶이 행복하고 만족할 만한 것이라는 마지막 고백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교통사고가 나고 그녀가 그를 향해 살고 싶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 그가 그녀에게 그저 약간은 이해하기 힘들만한 웃음을 보낼 때, 그의 삶은 그 사고의 자리에서 '행복하게' 끝을 맺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의 삶은 그저 케말이라는 이름의 자동기계(automaton)가 그 죽음의 순간 또는 자신의 대상의 행복한 기억으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사랑일까. 이런 어떠한 가능성의 차원도 없이 그저 과거의 시간을 고착화시키는 무시간적 시간이... 물론 사랑은 무시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무시간적인 이유는 두 사람의 사랑이 마치 소설에서(그리고 다른 소설들에서도) 언급되는 레일라와 마즈눈의 사랑과 같이 시간을 뛰어넘어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일 뿐, 이런 과거의 수집품, 보다 정확히 말해서, 기억의 대용물을 모으는 것과는 별 관계가 없는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순수 박물관>은 오히려 파묵의 집요한 과거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소설은 그가 글쓰기 또는 자신의 집필에 대해 얼마나 집요하며 집착적인가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들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코드는(적어도 내가 읽은 작품들에서는) 언제나 서양과 동양, 현대와 전통의 대립이다. <My Name is Red>에서의 베니스에서 건너온 원근법적 형식과 터키의 전통적인 세밀화가 보여주는 평면구도의 대립, <Snow>의 현대 또는 세속적 국가관과 전통적 가치 및 교육의 대립(여자들의 자살 이유, 교육감의 살해...) 등이 나타나며, 동시에 모든 시간을 통해 문제가 되는 과거의 연인에 대한 사랑과 제회 이후의 다시 시작되는 뜨거운 사랑이 그려진다. 과거의 가치에 대한 기억과 집착. 이 소설 <순수 박물관>에서도 그러한 기억의 수집과 보존은 진행되고 있다.

소설가는 남들에게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약간은 노출증적 성향을 가지는 사람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작가는 인물들의 입을 빌어 이런 투의 말을 한다. 수집가(아니 보다 정확히는 수집광)에게 있어 수집물들은 일종의 부끄러운 치부가 되지만, 그 수집물들을 보여주게 되면 자랑스러운 것이 된다고. 마치 유럽사람들이 그러듯이 자부심을 가지고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파묵의 글쓰기에 대한 집착은 마치 이런 수집광들의 집착을 보여주는 듯 하다.

그가 말로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그는 자신의 말로 이루어진 과거의 기억이라는 수집물들을 모으고 구성하여 소설을 쓴다. 마치 케말이 퓌순의 기억으로 <순수 박물관>을 만들어 내듯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케말과 파묵은 동일인이다. 파묵의 자전적 수필집 <Istanbul>에 그려진 그의 젊은 시절 이스탄불의 아름다운 기억들에 속해서, 누군가에게 보여지면 부끄러울 수집물들을 자랑스럽게 펼쳐놓고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파묵의 책들은 분명 이런 수집물들을 갖추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하루키의 작품들과 같은 전시관이기 보다는 박물관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는 그가 만들어 놓고 내게 보여주는 그의 <순수 박물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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