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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죽음이라는 문제
... 알리스는 라이몬트에게 물었다. 나보다 먼저 죽고 싶어, 아니면 내가 죽은 뒤에 죽고 싶어? 당신이 죽은 뒤에. 라이몬트가 대답했다. 그 대답을 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말도 안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그는 대답에 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 당신은? 이렇게 되묻는 걸 보면. 알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 알리스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 p87
죽음이란 우리 삶에 있어 하나의 문제와 같다. 손쉽게 대답할 수 없는... 그런 이유로 죽음은 인간의 유한성에 결부되어 철학적 고찰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한 위대한 우리 시대의 독일 철학자가 말했던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우리의 필멸성에 대한 그 이름은 자연 앞에 혹은 도래할 '신들' 앞에 설 우리의 필멸성을 나타낸다. 그렇다.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죽음이란 하나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전달하는 이야기는 불편하다. 살아있는 자에게 죽음에 대한 사고를 강요하는 것이기에. 특히 자신의 삶 속에서 누군가 죽어가는 자가 있을 때, 곧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이 있을 때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은 일정 이상의 고통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너무나 더디게만 읽히는 책이었다. 가벼운 무게와 얇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몇일이 걸려서야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다. 그 무미건조한 그림이 전달하는 붓 터치 하나하나가 내가 곧 대면해야만 할 삶의 무게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개인적인 여담이나 넑두리는 여기서 접고 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책 자체의 줄거리나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 '알리스'라는 인물이 실려 있는 그림과 그 그림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이념들'에 대해서...
살아 있는 자의 그림, 죽어 가는/죽은 자들을 배경으로 하는...
다소 건조한 문체로 시작되는 이 죽은 자들/산 자의 이야기는 다섯 남자(그리고 한 여자)의 죽음을 담고 있다.*,** 그 다섯 남자들이란 '이미 죽을 것을 알고 빨리 죽는 편이 그를 위해서도 좋을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죽어가기만 할 뿐, 죽지 않았던, 그리고 마침내 죽어버린 한 때 사랑했던 남의 남자(미햐)', '너무나 갑작스럽게 죽어버린 마치 아저씨와 같은 사람(콘라트)', '친구의 남자(리하르트)', '오래 전에 자살한 동성애자 삼촌(말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남자(라이몬트)'다. 소설은 이들의 죽음 혹은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을 일종의 알리스의 의식/시간의 흐름을 통해 다소 무미건조한 문체로 담담히 그려내고 있다.
그 무미건조한 문체와 세세한 배경들에 대한 그리고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는 어떤 억누르고 있는 듯한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어져 버린 슬픔을 안고 있는 듯 한 느낌을 전달한다. 이러한 방식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무엇이 기억이고, 무엇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인지, 언제가 과거이고 언제가 현재인지, 혹은 진정한 시간의 진행을 알리게 될 미래인지가 불분명해진다. 그래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바로 '겹쳐짐'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모호함.
역자의 말을 빌자면 이 소설은 어떤 그림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그림에서는 이상하게도 인물들의 상이 뚜렷하지 않다. 오직 뚜렷하게 그려지는 것은 인물이 아닌 배경이다.
....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죽은 남자와 알리스의 관계 또는 게이 연인들의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생에서 그처럼 큰 의미를 가졌던 사람의 죽음 이후 남은 이들의 삶과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하고 또 보여주려고 했을 뿐이다. 마치 한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주변의 모든 것들이 손에 잡힐 듯 또렷하고 묘사된다. 그러나 정작 한 가운데 서 있는 주인공은 모호하고 흐릿하게 보인다. 인물이 아닌 배경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독특한 사진인 셈이다. - p166
그러나 과연 인물의 상이 흐려지는 사진이 배경에 초점을 맞춘 사진 뿐일까. 우리는 가끔 이상하게 찍힌 사진들을 보기도 한다. 인물의 상이 어그러지고 마치 누군가가 옆에 서있는 듯 겹쳐진 사진. 바로 소위 우리가 심령사진이라고 부르는 그런 사진이다. 이 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유령'이라는 것이다. 죽었으되 충분히 죽지 못한 자의 모습으로 이승을 떠돌고 있는 유령. 알리스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여기저기에서 출몰하는 그 유령들의 모습들(/기억들)은 분명 이 소설 전체에 일종의 섬뜩한 느낌(unheimlichkeit/uncanny)을 주기도 한다.*** 분명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그녀의 기억들은 소설의 여기저기에서 죽은 자들의 유령을 소환해 내고 있다(예를 들어, 소설의 말미에서 등장하는 라이몬트의 모습). 그리고 소설 말미에 뜬금 없이 등장하는 '목사'라는 이름의 '무당'이야말로 바로 이 유령들에 대한(/을 위한) 푸닥거리에 필요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죽음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모호하게 드러나는 죽은/죽어가는/죽을(심지어 삼촌인 말테와의 관계에서 마저도)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소설이 나타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애초에 알리스는 누구인가. 즉,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관계 가운데 있는 인간 자신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인간, 그리고 장소와 시간의 문제
인간을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장소를 통해서다. 그리고 그 장소란 어떤 관계를 통해 정해진다. 어떤 장소 안에서 자리를 차지할 때 비로소 그 인간은 실존하는 것이다. 알리스라는 인간을 규정하는 관계들의 집합, 그 장소 역시 이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정하는 장소 내에서 타자에 대한 알리스의 관계는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 그 자체다. 이러한 관계는 있었던 것이나 있지는 않은 일종의 비실존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그녀는 빛도 그늘도 아닌 경계의 영역에 거하게 된다.
역자의 변에 따르면, 이 소설이 묘사해내고 있는 사진의 초점은 흐릿하지만
.... 그러나 결코 무의미한 사진이 아니다. 사진 속 선명한 배경은 "이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곳."이라고 남은 사람들에게 속삭인다. - p166
선명한 배경에 비해 모호한 알리스 주위 인물들의 윤곽. 그리고 그 보다 더 모호하고 비어있는 알리스라는 인물. 그러나 그 질적인 규정이 혹은 말할 수 있는 술어가 결여된 알리스는 여전히 그 그림 속에 혹은 장소 가운데 일차적으로는 모호한 주변의 인물들과,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그림의 선명한 배경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비록 역자는 관찰자로서의 인간이 그림의 바깥에 있으며, 우리가 사는 곳은 '선명한' 색상의 실재라고 말하고 있으나, 오히려 이 '사진'이 무의미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이러한 선명한 색상의 실재(삶)가 모호한, 그리고 죽음과 관계된 것과 떨어져 있지 않으며, (소설의) 외부에 있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의 겹쳐짐 속에서 살고 있음에 대한 깨닳음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과연 이 삶과 죽음의 겹침의 공간 속에서 시간은 흐르는가? 이 작품이 제시하는 알리스의 삶, 죽은 이들과의 관계는 마치 멈추어 있는 그림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죽음으로 인한 비탄은 없으나, 너무나 차분하고, 무미 건조한 그림 내에서 시간은 장소 속에 정체되어 마치 장소와 동일한 것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작품 속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시간은 흐른다. 그러나 어떠한 의미 있는 사건의 일어남도 없이 멈추어 버린 듯 보이는 기억을 통한 시간의 정체만이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과연 죽음의 기억 가운데 정체된 장소, 시간이 장소로서 정체되어 버린 곳에서 가능한 삶이란 어떤 것일까. 그저 있는 그대로 살아있는 삶. 어떠한 생명력도 없이 장소와 동일시 되어버린, 기억 속에 굳게 자리잡고, 정체되어 버린 삶. 그러한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주
*그런데 왜 하필 죽은 자들은 모두 남자들이었을까? 책을 덮고 나서 먼저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왜... 정확한 답은 알 수가 없다. 그저 추측 하자면 알리스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든 관련을 맺었던 남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그녀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죽은 네 여자들에 대한 애도를 다룬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생각나기도 한다. 물론 두 소설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 <노르웨이의 숲>이 일본의 60년대 말의 전공투 시대에 대한 기억의 시효만료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알리스>는 왠지 여전히 죽은 이들을 그대로 붙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농후하다. 그래서 <알리스>의 죽은 자들은 유령 혹은 죽었으되 충분히 죽지 못하고 소설 속에서 때때로 나타나며 언제나 이미 알리스의 존재에 기억으로 내재(/선재)한다.
**오직 하나 뿐인 죽은 여자 알리스의 할머니 '알리스'의 죽음은 그리 중요치 않게 다루어진다. 그녀의 죽음에서 중요한 점이 있다면 '삼촌' 말테의 어머니이며, 그런 이유로 프리드리히에 의해 언급된다는 정도? 프리드리히와의 대화에서 정작 알리스 자신은 그녀의 죽음에 대해 별다른 중요성을 두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동성애자였던 삼촌 말테의 자살이었다.)
***섬뜩하다(unheimlichkeit/uncanny)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낯선 것에 대한 느낌이다. 너무나 낯설고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두려운 것.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만 할 것은 그 낯섬의 대상이 너무나 친숙한 것일 때 바로 진정한 섬뜩한 느낌이 나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아직도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
****그리스어로는 시간에 대한 용어가 둘이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크로노스는 자연적인 시간을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공간의 연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중요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장소 내에서 시간은 그저 같은 장소의 가능적 확장만을 의미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간은 다르다. 이 시간은 일어남, 사건과 관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