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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1 - 미천왕, 도망자 을불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김진명씨의 글 오랜만에 접하게 되어 단숨에 읽어나갔다.

초반 1권을 읽을때부터 약간의 이전의 '무궁화꽃...'일때와 사뭇 다른 느낌을 들었고 2권을 넘어갈때에도 점점 처음의 생각이 확연히 들어나기 시작했다.

그건 '무협지' 무협지가 역사 소설을 따라한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무협지를 읽을때 흥미 진지하게 읽다보니 역사 소설의 방향이 무협지 스타일의 글이 되는건지 몰라도 이번 고구려에서는 3권을 놓을때까지 그 느낌을 지울수가 없었다.

원래 나는 역사 소설을 좋아하고 약간의 민족주의적인 심성이있는지 TV에서도 사극을 좋아한다.

그러나 과거 광개토태왕에 대한 드라마나 이번에 KBS에서 하는 광개토태왕에서도 마찬가지로 핵심이 없고 무협지같은 느낌이 많이들어서 아예 보지를 않는다.

그래도 이번 책은 우리민족의 자존심인 고구려에 대한 내용을 민족주의적 색깔이 깊은 김진명씨가 썼다길래 단숨에 읽어본 결과 많은 실망을 금할길이 없엇다.

본인의 생각으로 일반적으로 무협지와 역사 소설이 다른점은 무협지에서는 중심이되는 주인공이 초기에는 엄청나게 비하되었다가 무술의 달인 또는 기인을 만나서 모든일을 다 처리하고 앞일을 모두 알고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씸히 그에 대한 당위성에 대하여 사설을 늘어놓는다.

물론 그런 드라마틱한 인생 경로를 격은 사람을 조명해야 사람들이 책을 읽고 드라마를 본ㄴ다지만 이번의 글은 너무나 역사 드라마 또는 무협지 같은 이야기 전개방식이라서 아쉬움이 많았다.

우선 주된 내용을 보았을때 안국군의 죽음을 당했을때 창조리의 계략에 의해서 을불을 살리기 위한 어쩔수없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안국군의 역적모의를 토하는 바람에 그와 그의 주변 안국군을 따르던 사람들과 그의 식솔들이 모두 죽었다. 과연 을불이 나중에 어떠한 사람이 되고 왕을 축출할 수있는지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이 없이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간신히 창조리만 살아남았겠는가 하는 생각과 만약에 그렇다하면 너무도 그 어린 을불이 태왕의 기개를 타고난것에 대한  부연 설명없이 넘어간것이 아닌가? 그리고 왕의 비밀세작 조직 또한 뭔가 꺼림직하다. 왕이 그렇게 나쁜 정치를 부리기 위해서는 막강한 군대와 조직을 가지고 있는데 을불이 그조직을 와해하는데 국상인 창조리도 어쩔수없는 왕의 직속 세작조직과 군부와 왕을 따르는 신하들을 아무리 국상인 창조리가 버티고 청패를 든 많은 신하들이 있다지만 혈혈단신정도의 을불이 단숨에 제압한다는것도 무협지에서나 나올만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창조리는 어떠한가?

그가 국상까지 가기 위해서는 과거 안국군의 모든 수족을 죽임으로 몰아야하고 왕이 벌하고자하는 사람들을 알아서 척결을 했기에 믿을 수 있는 국상으로 둔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면 안국군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국정에 나서서 신하로 들어와 있겠는가. 그 신하로 들어와 있다는것은 그만큼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것이 아니고 자신의 영달과 왕의 신임을 얻고자 노력했고 백성들을 그만큼 쥐어짰을 텐데 그런사람들이 과연 애국정신에 투철한 안국군의 사람이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단순히 언제 올지모르는 을불을 기다리며?

이건 무협지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모용외는 어떠한가 무섭도록 무술을 잘한다.

그의 부하들도 불사신같은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느순간 맥없이 진다.

그리고 그의 수하로 들어간다. 그리고 검신과 같은 활동을 보인다.

그러다 갑자기 나타난 별로 무술에 설명없는 사람에의해 죽임을 당하고 능력에 의하면 낙랑 정도는단칼에 넘어가는데 모용외는 그 비옥한 정치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요지를 치지않고 그냥 둔것은 너무 모용외를 치켜세운것은 그런 사람을 을불이 낭랑을 처당하기위한 수순이 아닌가하는 흥미위주의 이야기도 좀 꺼림직하다.

김진명씨의 작품을 읽는것은 민족주의적이며 읽고나면 매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을 갖게되고 역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얻기 때문에 읽는데 고구려는 너무 흥미위주의 작품이라 한편의 무협지 읽은느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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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실직자라는 라벨이 붙은 이후로 그리 책을 읽기가 어렵다. 

뭔가 마음이 정해지지 않은 길을 가는것 같고, 집의 책꽂이도 어수선하게 늘어져있고, 읽던 책들도 이책 저책 너저분히 널려지게 되고, 한권의 책을 끝가지 읽지 못하고 들었다 놨다를 반복 하다보니 정신이 사납다.  

이상의 날개가 떠오른다. 

'날자 날다, 다시한번 날자꾸나.'  

좁고 너저분한 골방으로 스미어 뭔가를 꺼내고자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는 무었을 봤는가? 서울역앞의 커다란 시계소리를 들으며 다시한번 날고자 하는것은 어디로 날자고 한것인가? 

몇번을 읽고 또 읽은 이상의 글 속에서 그는 무었을 이야기 하고자 한것인가? 

세상을 탓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한 존재로써 세상에 나서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두려움에 골방으로 스며든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두려움을 떨어내고 다시한번 세상과 부딧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더이상 치졸한 세상과는 접하기 싫은 자신의 새로운 세상으로의 비행을 꿈꾸었는가? 

중학교때 한번, 고등학교때, 그리고 대학때 한번 읽었고 지금50대의 시작에서 또한번 이상의 날개를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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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양장) -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혼마 야스코 지음, 이훈 옮김 / 역사공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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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리뷰상품'의 사진이 다른것이 들어갔군요, 그책을 읽고 싶었었는데 그 마음에 그냥 잘못 눌렀나봅니다.========= 

얼마전 법정스님이 타개하신 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무소유에 관한 책을 이야기 했다...

한번 읽어 봐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절판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주변을 열씸히 탐문했지만 선뜻보이는 책이 아니었다.

4월 중순 쌍계사 벗꽃놀이를 동네 사람들과 가던 중 앞에 앉은이가 졸다가 책을 떨어 뜨리는데 바로 그리 오메불망 찾던 '무소유'였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두눈 부릅뜨로 읽기 시작 했다.

뭔가 잔잔한 느낌이 들기 시작 하는 때, 도착지에 다달아 돌려 줄 수 밖에 없는 그 아쉬움 ...

5월 초 전철 환승역을 가다 어느 서점을 지날때 조그마한 문고판책이지만 눈에 가득차게 들어오는 책 바로 '무소유'였다. 아무 생각 하지 않고 바로 샀다.

그리고 바로 읽기 시작 했다.

그 책에는 35가지의 짧은 글들이 1970년대의 젊었던 법정을 보는듯 했다.

본인의 생각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겨 놓은 글들, 그중에는 한자와 친숙한 스님이 아닌, 어린 왕자와도 가까운, 게오르규의 25시 영화를 보고 나와서 요한모리츠를 외치며 영화를 본 모르는 사람의 손을 덥석 잡고 싶은 감성적인 비해탈의 스님, 1973년의 당시 부자들 만이 다닐 수 있는 골프장에 대한 잔잔한 반대 글.

이 중에 '무소유' 보다 더 좋은 글들이 있지만 '무소유'를 책 표지에 내세운것이 아마 불교적이면서 시대를 아우러 읽더라도 독자들이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요.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이는 마하트마 간디가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처 보이며 말한 내용이라 한다.  그 당시의 그는 승려로써 일반인들의 소유 보다 훨씬 적은 소유물들을 갖음에도 불구 하고 법정은 이 글을 보고 많이 부끄러워 했다.

그리고 그는 난초 화분을 가지므로서 어떤 소유물에 대한 책임과 그의 마음 씀 때문에 중으로의 본분과 세속인의 경계를 허물어 진다고 생각 하여 친구에 소유권을 넘기고 다시 본연의 위치로 돌아 올 수 있었다고 한다.

과연 소유란 무었인가를 생각 하게 하는 글이기는 한데, 세속인으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것과 내가 소유 하고자 하는것의 본질은 무었인가? 나를 위한것인가? 아니면 내 주변을, 내 가족을 위한일인가?

나와 나를 믿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소유라면 그 한계와 정도는 어디 까지인가?

물론 스님들 정도의 무소유가 무소유인가? 내가 쓰고 내 주변사람들이 쓸 수있을 정도가 적절한가?

그 쓸 수 있을 정도는 어느정도인가?

그져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쑥맥과 같은 양보의 천사가 되면 되는가? (결국 내 주변 사람들이 쑥맥인 나로 하여금 어려워 질 수 도있는데)

결국 적절히라는 인생 철학을 배우는 것이 무소유보다 속세인으로서 세상살이에 더 현명한것이 아닌가?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것' 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고심하는 커다란 화두일것이다.

여기서 법정 스님도 난초화분을 자신의 소유에서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홀가분해 졌다는 것이 법정스스로 이기적인 마음이 표출된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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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따라하는 MTB 정비 매뉴얼
가부라기 유타카 지음, 최종호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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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히 잘 쓰여진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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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따라하는 MTB 정비 매뉴얼
가부라기 유타카 지음, 최종호 옮김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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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전거를 내가 알기까지 참으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운동삼아 자전거를 많이 타기에 나도 덜렁 사서(싸이클용은 넘 위험한것 같아서) 타기 시작 했지만 사타구니 아프고, 궁둥이 아프고, 어깨가 저리고 우와~~~ 뭐가 이리 어려운가... 

한 30분만 타도 사타구니(?)가 아파서 가면서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하다가 한시간 정도 가다가는 도져히 않되서 쉬었다가 가고... 

"형, 페드있는 바지를 입으면 괜찮은데..."라는 후배의 말에 덜렁 반바지 패드 달린것을 구입해 입었다. 음~~~ 조금은 괜찮은데 역시 장시간(한시간) 은 않되더군... 

결국 일요일 자전거는 공포의 시간이 되고 울마누님은 매주 자전거 타자고 성화고... 도데체 난 뭐가 문제인건가? 남들은 안양천을 씽씽 잘도 다니고 있는데... 

결국 책을 사서 봤다. 

그리고 요즘은 사타구니 아픈것은 거의 없어졌다. 바로 그러한 것을 알려 주고 자전거의 구조를 알고 나니 내가 자전거를 어떻게 타고 관리를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어 참으로 유용하였다.  

물론 사진과 함께 세심한 부분까지 설명해 놓은 이 책쓴이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그러나 기계치인 사람들은 글쎄.... 조금은 주변의 설명이 필요할지도..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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