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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그리스인 조르바
(자유인 조르바의 삶)
그리스인 조르바를 몇년여 만에 다시 펼쳐든 이유는 니코스 카잔차키스 때문이었다.
전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 말았을 때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존재를 모를 때였고, 이번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궁금하여 그의 대표작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보았다.
혹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톨스토이나 토스토에프스키와 비교하기도 하였는데, 톨스토이와 토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접해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비교가 어려웠다.
그러나 카잔차스키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며 묵직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이 책이 왜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고, 카잔차스키가 왜 당대의 작가들과 어깨를 견주고 있는지 납득을 시켜주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어린시절보다 많은 책임과 짐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일까?
전에 읽었을 때 미처 각인되지 못했던 이런저런 문구들이 머릿속을 여운을 남기는 것을 경험하였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젊은 화자와 나이는 들었지만 원기왕성한 조르바의 여행과 모험 스토리이다.
젊은 지식인인 작가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 조르바가 우정을 쌓아가지만, 둘 사이의 묘한 대칭을 이루는 소설이다. 조르바와 화자는 상반된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가슴과 머리, 감성과 지성, 욕망과 절제간의 대립이 조르바와 화자를 통해 펼쳐진다.
조르바의 당당함, 자유로움, 열정은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무언가를 불러 일으키는 묘한 힘이 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 였다. 그것은 열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나에게 없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르바의 삶과 생각은 내가 평소에 생각해왔던 이상향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르바의 삶의 방식에 매력을 느끼고, 그의 말을 유심히 듣게 되는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의 열정인가? 아니면 그의 자유인가? 어쩌면 내가 소유하지 못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조르바의 자유분방함이 부러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틀을 벗어난다는 것, 기존의 기득권을 놓는다는 것, 사고를 깬다는 것이 그래서 쉽지 않은 것이다.
본문에는 주옥같은 표현들이 많다. 본문의 내용을 일부 인용하면,
"산투르를 다룰줄 알게 되면서 나는 전혀 딴 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떄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르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 해도 대답을 못해요. 해봐야 소용없어요. 안되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조르바?"
"이런, 모르시는군.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게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조르바는 역정을 내곤 했다.
"두목 인부들 신상을 자꾸 캐묻지 말아요. 곱상하게 굴다가 오히려 발목을 잡혀요. 두목이 그렇게 다독거리면 인부들 자신이나 우리 일에 해가 됩니다.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을 핑계를 만들어 주는 꼴이에요. 그렇게 되면, 하느님 맙소사, 인부들은 일을 제멋대로 하다 결국은 망쳐 버려요. 하느님은 인부들도 굽어 살피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두목이 세게 나오면 인부들도 두목을 존경하고 일도 잘합니다. 두목이 물렁하게 나오면 인부들은 일을 몽땅 두목에게 밀어 버리고 나 몰라라 한단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안 믿지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낸 것만 믿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나는 어느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레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디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래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 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 이 이야기면 설명이 되겠군. 어렸을 때 말입니다. 나는 버찌에 미쳐 있었어요. 하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돈이 없어서 한꺼번에 많이는 살 수 없고, 조금 사서 먹으면 점점 더 먹고 싶어지고 그러는 거예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버찌 생각만 했지요. 입에 군침이 도는게, 아, 미치겠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화가 났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버찌가 날 데리고 논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한 줄 아시오? 나는 밤중에 일어나 아버지 주머니를 뒤졌지요. 은화가 한 닢 있습디다. 꼬불쳤지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 한 소쿠리를 샀지요. 도랑에 숨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올 때까지 쳐 넣었어요. 배가 아파오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렇습니다. 두목, 나는 몽땅 토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보기만 해도 견딜수 없었어요. 나는 구원을 받은 겁니다.
"악덕이란 악덕은 두루 갖춘 이 양반도 자를 때는 칼로 베듯이 잘라 버립니다. 한 가지 예를 들지요. 이 양반은 담배를 굴뚝같이 피워 댔습니다. 어느날 아침 자리에거 일어나 밭을 갈러 들로 나갔어요. 나가서 밭둑에 기대고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한 대 피울 요량으로 담배를 찾는답시고 쌈지를 찾으러 혁대 밑으로 손을 집어 넣었는데, 어렵쇼, 쌈지를 꺼내고 보니 비어 있더란 말입니다. 집에서 나오면서 담배를 집어넣는 걸 깜빡 잊어버린 거지요.
이 양반은 불같이 화를 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마을로 내달았지요. 아시겠지만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이성이고 나발이고 없는거지. 그러데 갑자기(이래서 나는 늘 사람이란 참 묘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 양반은 걸음을 멈추었대요. 부끄러워진 거예요. 쌈지를 꺼내어 이로 갈가리 물어 찢고 땅바닥에 팽개친 다음 침을 팍 뱉었다나, <더럽다, 더러워! 이 더러운 놈의 화냥것!> 이랬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지는 담배를 입술에 대지 않았어요. 두목 진짜 사내란 건 이런게 아닐까요, 잘사시오!"